◆신화와 동화의 왕국
덴마크왕 게오프로이의 아들 오지에 르 다노아(홀거 단스케, Holger Danske)가 태어나자 매혹적인 여섯 여인이 홀연히 나타나 축복했다. 너를 우리 시대의 가장 용감한 무사로 만들어주겠다. 네가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많이 주겠다. 나는 이 아기가 결코 정복당하지 않게 할 거야. 너에게 사람들을 기쁘게 만드는 재능을 주겠다. 지금까지의 선물이 실현되도록 너에게 사랑으로 보답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겠다. 예쁘기도 해라. 너를 내 아이로 삼겠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올 때까지 결코 죽지 않게 하겠다.
오지에 르 다노아는 프랑크왕 샤를마뉴의 12기사 중 한 명으로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덴마크 영웅이다. 햄릿의 성 크론보르의 지하에 지금도 석상으로 웅크리고 앉아 덴마크에 위험이 닥치면 홀연히 되살아나 조국을 구할 것이라 한다.
용이 되어 우리나라를 지키겠다던 신라 문무왕 또는 이순신장군 같은 이다. 특이하게도 북유럽신화에는 등장하지 않고 서유럽 전설로 전해지는 그의 연대기는 시공을 뛰어넘어 아서왕과 십자군 전쟁까지 이어진다. 덴마크에 간다면 햄릿과 오지에 르 다노아의 이야기가 서린 그곳엘 가고 싶었다.
◆바이킹, 휘게(Hygge), 안데르센
오슬로 크루즈 전용부두에서 탄 코펜하겐행 DFDS는 거대했다. 흰 돛에는 노르웨이와 덴마크 국기 그리고 회사 깃발이 펄럭였다. 북해와 발틱해 사이 바람은 차가웠고 스웨덴 해안가 마을은 이발소 그림 같았다. 19시간 동안 넓은 크루즈에서 승객들은 흥겨웠고 모든 것은 과하지 않게 풍요로웠다. 이것이 덴마크의 휘게(Hygge)인가. 스칸디나비아 바이킹 중에서도 가장 살벌했던 자들의 후손이 누리는 안락함이라니 무언가 앞뒤는 맞지 않지만 역사는 그대로 읽고 통찰하면 될 일.
덴마크는 입헌군주제로 14세기 한자동맹에 대응해 칼마르동맹을 맺을 당시엔 종주국으로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를 지배했다. 치우친 십자기가 그려진 덴마크 국기(단네브로, 1219년 제정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기) 형태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공통으로 쓰는 이유가 거기 있다. 현재는 한 개의 반도(유틀란트), 한 개의 큰 섬(셸란), 여러 개의 작은 섬(450여 개)으로 이뤄진 나라다.
국민들에게 존경받던 여왕 마르그르테 2세가 올해 초 아들 프레데리크 10세에게 양위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실이 있고, 블록 장난감 회사 레고, 칼스버그맥주, 인슐린 제약회사 노보 노디스크, 해운기업 머스크 라인 등 알찬 기업과 인텔의 무선통신 블루투스의 어원이 된 기독교를 받아들인 '푸른 이빨' 하랄드 1세(Harald Blåtand)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쓴 실존주의 창시자 키에르 케고르가 덴마크 출신이다.
'덴마크' 하면 떼래야 뗄 수 없는 역사적인 사람이 또 있다. 아마도 온 세계 어린이들에게 글이, 문학이 슬플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려주었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다. '성냥팔이 소녀'를 처음 읽었을 때를 잊은 사람이 있을까.
'미운 오리새끼' '인어공주'는 또 어떻고. '벌거벗은 임금님' '빨간 구두' '눈의 여왕' '엄지공주' '백조왕자' '하늘을 나는 가방' … 떠오르는 대로 쓰는데도 한참 걸린다. 세계 동화의 아버지 안데르센은 동화 150여 편과 희곡, 기행문, 소설, 3편의 자서전까지 썼다.
덴마크 제3의 도시 오덴세에서 가난한 구두수선공 아버지와 세탁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코펜하겐으로 무작정 상경하여 갖은 고생 끝에 작가로 성공했다. 그래서 덴마크 곳곳에 동상이 서 있고 그의 생가, 하숙집, 기념관, 문학관, 공원 등이 즐비하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지만 동화와 다르게 인격은 좀 모호했던 듯하다. 전기 작가 재키 울슐라거에 의하면 성공한 '미운 오리새끼'이며, 고결한 '인어공주', '꿋꿋한 양철 병정'이자 왕의 사랑을 받는 '나이팅게일'이며 악마 같은 '그림자', 우울한 '전나무'이기도 하고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이기도 한' 안데르센이란 평이 있다.
◆작지만 매혹적인 곳, 코펜하겐
아말리엔보르 궁전은 퇴위한 여왕과 새로 즉위한 국왕 가족이 살고 있는 로코코 양식이다. 프레데리크 5세의 동상을 중심으로 네 채의 건물 정문엔 푸른 제복을 입은 근위병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다.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은 왕의 접견실과 총리 집무실, 의회가 함께 쓰고 있고, 로센보르 궁전은 왕실 보물을 전시하고 있다. 깨끗하고 정돈된 정원들과 광장, 거리가 역시 왕국의 품격을 보여준다.
파괴와 도난 등 몇 번의 수난을 겪었다는 인어공주 동상은 참 외로워 보인다. 몸을 바꾼 댓가로 말을 잃고 끝내 공기로 사라지는 운명… 차라리 랑겔리니공원을 휘돌자 나타난 씩씩한 청동 게피온 여신이 내겐 든든하게 느껴진다. 스웨덴왕과의 내기에서 황소로 변신시킨 네 아들과 함께 코펜하겐이 있는 셸란섬을 획득한 덴마크 풍요의 여신, 그 위풍당당함이 이 나라의 본질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참고로 코펜하겐과 교류협력도시인 서울 여의도공원엔 실제 80% 크기의 인어 공주 동상이 있다.
'새로운 항구'란 뜻의 뉘하운 운하로 걸어가면서 자전거 전용도로의 위용에 또 주눅이 드는데, 이 아름다운 인구 50만의 도시는 노란 트램과 이층 버스들만으로도 교통상황이 충분히 수용되지 않을까 싶어 다소 아쉽다. 하긴 사회보장비가 국가예산의 1/3을 차지하는 고도의 복지국가로 친환경 기술, 실용적인 디자인과 우수한 교육과 의료 지원이 고물가를 이기지 못해 자전거를 저렇게 많이 타는가 싶어 또 안타깝기도 하다.
뉘하운 운하 카페에서 맥주도 마시고 상점을 기웃거리다가 시간에 맞춰 보트를 탔다. 천천히 운행되는 보트에서 수많은 다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도시를 한 바퀴 돌았다. 올해 4월 아쉽게도 화재로 소실된 뵈르젠(400년 된 증권거래소)에 덮인 거대한 가림막을 지나가며 우리는 모두 탄식했다. 용 세 마리가 엉킨 높은 첨탑과 르네상스식 건물을 미리 책에서 찾아보고 온 터라 더욱 마음이 아렸다. 귀중한 자료들은 구했다고 하나 마치 숭례문이나 노트르담이 탔을 때의 느낌이었다.
운하 양쪽에는 거짓말처럼 크고 작은 요트들이 늘어서 있다. 그 호화가 참으로 신기해서 동영상으로 찍었는데 지금 다시 돌려봐도 즐겁다. 보트를 탈 때쯤 날이 흐려져 '맑아져라' 주문을 외었더니 반짝 다시 해가 나타난다. 여행 내내 한 이 장난으로 날씨 요정이란 안데르센식 별명도 얻었다. 아, 안데르센이 잠시 살았다는 뉘하운 항구 오른쪽 거처 아래층엔 움직이는 그의 인형을 시청사 앞 유명한 동상보단 작지만 실물 크기로 제작해 둔 포토 존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코펜하겐 중앙역 건너 티볼리 가든은 180년 된 놀이공원이다. 시간이 없어 스쳐 지났지만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 랜드의 영감을 얻은 곳이라고. 티볼리의 목조 롤러코스터는 100년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회전목마가 있다고 한다. 담 밖으로 보이는 자이로드롭 같은 놀이기구가 강렬하게 나를 잡아끌었지만 다른 일정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조명이 켜지는 밤이면 저 꽃들과 함께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여행지마다 놀이공원은 거의 빼놓지 않고 다녔던 나로선 그 유혹을 떨치기에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서 결심해본다. 코펜하겐, 꼭 다시 가야겠다.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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