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용삼의 한국 반도체 비하인드] 반도체산업에 기업들 등 떠밀려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구미시에 위치하고 있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이 연구소는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반도체에 참여하기 전,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제조 공정 기술을 연구하고 인력을 양성하여 삼성, SK 하이닉스 등 대기업 반도체 신화의 밑거름을 제공했다. 구글이미지
구미시에 위치하고 있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이 연구소는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반도체에 참여하기 전,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제조 공정 기술을 연구하고 인력을 양성하여 삼성, SK 하이닉스 등 대기업 반도체 신화의 밑거름을 제공했다. 구글이미지

최순달이 소장을 맡고 있는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는 1982년부터 과학기술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으로 고집적회로의 설계공정 및 시험 등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하여 독자적인 반도체 제조기술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박승덕, '살며 생각하며', 좋은 땅, 2020, 272쪽).

정부는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 106억 원의 거금을 투입하여 반도체 설계, 제조공장 및 양산 기술 국산화를 추진한 것이다. 반도체 기술 국산화의 초석이 한국전자기술연구소였고, 이 연구소가 반도체산업에 필요한 수많은 인재 양성의 산실 역할을 했다. 국내 전자산업 발전은 이스칸더 박사의 도움을 받아 세계은행 차관으로 설립한 한국전지기술연구소의 선구적 노력 덕분이다. 이로써 한국 전자산업 분야의 연구는 한국과학기술원(KIST, 기초과학), 한국전자통신연구원(KTRI, 전자통신),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반도체·컴퓨터) 3두 체제를 형성했다. 1985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통합되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으로 확대 출범하게 된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초기에 VCR용 바이폴라 집적회로(전자 제품 안에서 전기 신호를 증폭하거나 스위치처럼 켜고 끄는 역할을 하는 고속·고출력 반도체 회로)를 자체 개발하여 한국이 VCR 수출국으로 발돋움하도록 했다. 또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하여 1982년 2월 4KD 램 개발에 이어 9월에는 국내 최초로 32K 롬(ROM)의 시제품 개발에 성공하여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200여 명의 전자산업 분야 기업인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연했다.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32K 롬의 제조공정 개발에 성공했으며, 1983년에는 64K 롬 개발에 성공했다(유상운,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시행과 전개-반도체 개발 컨소시엄을 중심으로, 1980-2010」,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9).

여기서 말하는 램(RAM, 랜덤 액세스 메모리)이란 현재 작업 중인 데이터를 저장하고, 필요에 따라 읽고 쓸 수 있는 휘발성 메모리이며, 컴퓨터의 주기억장치 역할을 한다. 반면에 롬(ROM, 읽기 전용 메모리)은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유지되는 비휘발성 메모리로, 컴퓨터 부팅 정보 등 고정된 데이터를 영구적으로 저장하는 데 사용된다.

◆반도체 사업 참여 엄두 못 낸 기업들

최순달 체신부 장관. 전두환 대통령은 반도체 개발개발의 야전사령관이었던 최순달을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시켰다. 그리고 최순달 장관을 통해 정부의 교환기 납품권을 무기로 대기업들의 등을 떠밀어 반도체 산업에 참여시켰다. 구글이미지
최순달 체신부 장관. 전두환 대통령은 반도체 개발개발의 야전사령관이었던 최순달을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시켰다. 그리고 최순달 장관을 통해 정부의 교환기 납품권을 무기로 대기업들의 등을 떠밀어 반도체 산업에 참여시켰다. 구글이미지

홍성원 당시 청와대 비서관의 회고에 의하면 정부는 반도체를 전략사업을 선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국가의 청사진과 달리, 민간 기업들은 반도체라는 미지의 심해에 뛰어들기를 두려워했다. 고도의 기술력과 천문학적인 자금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들어가는 리스크를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과 금성(LG) 등 대기업들은 당장 눈앞의 확실한 이익을 보장해 주는 국가 교환기 사업에만 안주하려 했다.

정부는 반도체 산업을 지원할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업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는데, 기업들은 반도체 사업 참여 엄두를 못 내자 전두환 대통령은 비상한 방법을 동원한다. 1982년 5월 21일, 반도체 기술개발의 야전사령관이었던 최순달 한국전자기술연구소장을 체신부 장관에 임명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각이 아닌, 역사적인 승부수였다.

당시 체신부 장관은 통신 대기업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교환기 회선 배정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다. 장관에 취임한 최순달은 교환기를 생산하는 기업 회장들 면담에 나섰다. 그리고 반도체 사업 참여를 정중히 '권고'했다. 즉, "교환기 사업을 계속하고 싶다면, 반도체라는 국가적 모험에 동참하라"는 묵직하고도 정교한 압박이었다. 이렇게 되자 "반도체 사업을 안 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 된 교환기 생산 회사들은 이병철 회장을 필두로 금성, 대우 등의 일본 및 미국 견학이 시작되었다(유상운, 앞의 논문, 68쪽). 정부가 교환기 사업권을 무기로 "반도체 사업에 참여하라"고 기업 회장들의 등을 떠민 셈이다.

국내 기업들이 반도체 사업 참여 여부를 망설이고 있던 차에 정부출연연구소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 32K 롬, 64K 롬 개발에 성공하자 대기업들이 자신감을 갖고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이병철·이건희 회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이병철 회장(왼쪽)이 1983년 반도체 진출을 선언한 도쿄 선언 후 이건희 등 임원들에게 관련 내용을 설명하는 장면. 구글이미지
이병철 회장(왼쪽)이 1983년 반도체 진출을 선언한 도쿄 선언 후 이건희 등 임원들에게 관련 내용을 설명하는 장면. 구글이미지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 공부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에는 그가 반도체 관련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80년 이른 봄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 무렵 이병철은 도쿄를 방문했는데 경제관료 출신 경제평론가 이나바 히데조(稻葉秀三) 박사가 찾아와 일본이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광통신, 유전공학 등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 회장은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원이 없고 무역입국의 길밖에 없으니 우리도 첨단산업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하지만 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병철이 반도체산업을 위해 고민한 내용을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과연 한국이 미·일의 기술 수준을 추적할 수 있을까. 막대한 투자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까. 혁신의 속도가 워낙 빨라 제품의 사이클이 기껏해야 2~3년인데, 그 리스크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미·일 양국이 점유하고 있는 세계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경쟁에 이길 수 있을까. 고도의 기술 두뇌와 기술 인력의 확보, 훈련은 가능할까. 입지 조건도 까다롭지만, 무엇보다 서울에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정상급 고도 기술 인력의 취업이 곤란한데, 서울은 인구집중 지역이므로 넓은 부지는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공장 구조도 아주 특수해야 될 터인데 소요시설과 전문 건설용역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도 문제였다.'(이병철, 『호암자전』, 중앙일보사, 1986, 237쪽)

이때부터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공부를 위해 수많은 미국, 일본의 전문가를 비롯하여 국내 전문가들 의견을 들었다. 삼성 비서실 요원을 일본과 미국 실리콘밸리에 파견하여 반도체산업의 특성, 원료, 입지조건, 글로벌 시장 동향, 기술적 요인, 투자 규모, 사업성 등을 보고받았다. 당시 삼성 비서실 비서팀장 정준명(후에 삼성전자 일본본사 사장)은 이 회장의 특명을 받고 일본 반도체 업체를 방문하여 반도체 관련 사항을 공부한 후 자세한 보고를 했다. 당시 이병철은 반도체 원리를 단순화하여 기억했다고 한다. 정준명의 회고 일부를 소개한다.

정준명 삼성전자 일본본사 사장. 그는 삼성 비서실 비서팀장 시절, 일본 반도체 기업에서 얻은 정보를 이병철 회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글이미지
정준명 삼성전자 일본본사 사장. 그는 삼성 비서실 비서팀장 시절, 일본 반도체 기업에서 얻은 정보를 이병철 회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글이미지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는 무엇으로 만드냐는 질문을 하셔서 게르마늄 또는 실리콘이 주원료인데 실리콘이 경제성이 높아 주로 쓰인다고 말씀드리니 "실리콘은 뭐꼬" 하셔서 모래에서 추출되는 규소(硅素)라고 말씀드렸다.

"모래는 흙 아이가? 그럼 반도체는 흙으로 만든다 케야지 무슨 실리콘이니 게르마늄이니
어렵게 말하노?"라며 단순화하셨다. 메모리(記憶素子)에 대해 설명 드렸을 때는 "흙이 무엇을 기억한다는 말이냐?"고 하셨다. "그럼 램(RAM)은 뭐고, 롬(ROM)은 뭐꼬?" 당시 누구도 만족스럽게 답변하지 못했는데, 회장께서 다시 알아오라고 해서 밤새 고민 끝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롬(ROM)은 바늘을 올려놓고 듣는 레코드 음반과 같아서 이미 녹음된 것만 들을 수 있는
기능을 갖춘 메모리 반도체(기억장치)로 읽기 전용이며, 램(RAM)은 카세트테이프 같이 자유로 이미 녹음된 것을 듣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새로 녹음도 할 수 있는 메모리 반도체입니다."

그제야 회장께서는 "옳아! 옳아!" 하더니 롬보다 램이 수요가 많고 좋은 거 아니냐고 했다.>(정준명, "한반도는 반도체", 월간중앙, 201년 1월호, 74쪽)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광주 여고생 살인범 장윤기 사건을 둘러싼 경찰 수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추미애 경기도지사는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경찰 수사 전담...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의 DMC래미안클라시스 아파트 전용면적 114㎡가 12억5000만원에 거래되며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는 2021년...
장윤기 사건에 대한 수사팀의 주장에 따르면, 광주 광산경찰서 서장이 강간 살인죄 적용을 막았고, 주요 증거인 리얼돌을 방치하도록 했다는 진술...
미국 코스트코의 직원 바자 씨는 40년 동안 현장 계산대를 지키며 14억 원 규모의 퇴직연금을 모았고, 그는 승진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대신..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