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양진오의 대구경북의 '집' ] <6>군위 리틀 포레스트 혜원의 집

고개를 들어 밖을 보라,
당신의 작은 세계, 리틀 포레스트를 찾으라.

영화 에 나오는 혜원의 고향 집이다. 황토 돌담과 조롱박이 나그네를 반긴다. 겨울 볕이 돌담 사이에서 졸고 있다.
영화 에 나오는 혜원의 고향 집이다. 황토 돌담과 조롱박이 나그네를 반긴다. 겨울 볕이 돌담 사이에서 졸고 있다.

영화 에 나오는 혜원의 고향 집이다. 이 집은 혜원을 살린 작은 숲이다.
영화 에 나오는 혜원의 고향 집이다. 이 집은 혜원을 살린 작은 숲이다.

◆들판에 겨울이 온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적막하다. 사람의 자취는 사라지고 찬 바람만 가득한 을씨년스러운 들판이다. 모든 게 저물기 위해 제 자리에 눕는다. 다만 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들판을 응시한다. 이른 봄, 새벽부터 저 들판에 엎드려 온몸으로 농사를 지은 이들이 있었으리라.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어머니 일 게다. 아니면 그들의 자식 일 게다.

묵묵히 들판을 오간 발걸음 덕분에 한 집안이 올겨울을 거뜬히 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 들판은 더 이상 을씨년스러운 들판이 아니다. 들판 건너 몇 채 집이 보인다. 열 가구도 안 되는 마을이다. 작은 마을일수록 발걸음을 신중히 해야 한다. 가구 수가 어떻든 존중받아 마땅한 마을이다. 나는 외지인이다. 그러니 더욱 겸손히 마을로 들어서야 한다.

◆작은 숲, 리틀 포레스트

집이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의 집이다. 이 집은 혜원에게 단순한 거처가 아니다. 서울에서 주눅 들고 길을 잃은 혜원을 치유한 작은 숲이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여유롭게 살아갈 용기를 북돋게 한 집이다.

청춘들이 길을 잃은 듯하다. 어디 혜원만 그럴까. 안타깝다. 언제부터인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속도를 잃어버린 채 어른의 속도를 쫓고 있다. '빨리, 잘, 완벽히'를 요구받는 청춘들이다. 요구가 지나치면 탈이 난다. 혜원도 그렇다. 서울살이에 지쳐 패잔병처럼 시골로 온다. 냉기 서린 겨울이다. 도시에서 생존 경쟁에 내몰리던 혜원이 빈집에 발을 들인다. 이미 마음도 꽁꽁 얼어붙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집이다. 냉장고와 찬장은 텅 빈 지 오래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빠, 배고픈 혜원에게 따뜻한 밥상을 내밀 엄마도 없다.

서글프다. 벽과 지붕 아래 채워져야 할 것들이 사라졌다. 영화 속 혜원도, 영화를 보는 청춘도 모두 서글프고 아프다. 때론 상처가 되는 집이 있다. 집에서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 아늑하고 즐거운 집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집이 문제인 걸까? 솔직히 말하기로 하자. 집은 '무죄'다. 집다운 집을 만드는 요체는 유형의 집이 아니다. 자기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의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이 집다운 집을 만든다.

전형적인 시골 한옥인 혜원의 집은 미성 1리 마을에서 외따로이 떨어져 있다. 그렇다고 소외되거나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잔잔한 천과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자연을 이웃한 혜원의 집이 외롭지 않은 이유다. 영화가 그려낸 인물 혜원이든, 실제 거주한 사람이던, 누구든 이 집에 산다면 자연스레 산, 들, 천을 오가며 몸을 부리게 되어 있다.

혜원의 집으로 간다.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걸음을 단정히 한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인생길을 걸어온 나그네가 귀환하듯 삽짝을 들어선다. 계절을 살다 온 헐벗은 감나무가 반기고, 황토 돌담이 반기고, 돌담 위 서리맞은 조롱박이 반긴다. 주인 없는 자전거가 반긴다. 어느새 객은 주인공이 된다.

집 지척에는 천이 흐르고 들판이 누워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자연의 속도를 배운다.
집 지척에는 천이 흐르고 들판이 누워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자연의 속도를 배운다.

◆집의 속도를 배우라

걸음을 멈추어 주위를 살핀다. 돌담 틈새에 스며든 볕이 졸고 있다. 오가던 바람이 낙엽을 깨워 허공에 띄운다. 다만 재촉하지 않는다. 집에 이르는 속도는 '천천히'다. 집에 이르면 집의 속도를 배워야 한다. 집은 나를 살리는 속도를 먼저 가르친다.

대문은 없다. 누구나 들고 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나 발길을 들이지 않는다. 집을 대하는 예의다. 삽짝에서 집을 일별한다. 두 채로 이루어진 아담한 집이다. 한 채는 혜원이 머문 안채고, 한 채는 농기구와 디딜방아, 창고가 딸린 바깥채다. 두 채 모두 손을 보아 외관이 미끈하다. 문가에는 우물과 장독, 재래식 화장실이 딸린 측간이 있다. 집은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흔한 농촌 가옥이다.

마당으로 들어선다. 볕이 따습다. 우물과 장독 곁에 텃밭이 있고, 뒤란에는 세월을 먹은 감나무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뒤란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그늘이 나그네의 발길에 놀란 표정을 짓는다. 뒤란에는 집의 또 다른 풍경이 쌓여 있다. 뒷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웅웅' 거리며 저들의 말을 한다. 객을 반기는 언어다. 이렇게 집은 또 다른 계절을 완성 해간다.

집 안은 밖과 연결되어 있다. 집 안에서 밖을 응시해야 길과 들판의 풍경이 보인다.
집 안은 밖과 연결되어 있다. 집 안에서 밖을 응시해야 길과 들판의 풍경이 보인다.

◆내면을 가진 집

집은 나이를 머금은 전형적인 시골집이다. 낯설지 않다. 어떤 이들에게는 적막한 시골집에 불과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추수마저 끝나지 않았는가. 외면적인 이미지가 먼저 도드라진다. 작은 마을이 더 작아 보일 법하다. 집의 본질은 외면적인 이미지에 있지 않다. 집의 본질을 느끼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집 안에서 집 밖의 풍경을 차분히 응시해야 한다. 그래야 집의 본질인 작은 세계 '리틀 포레스트'를 알게 된다.

방과 작은 거실, 부엌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실내다. 들보와 도리가 먼저 눈에 든다. 집이 터에 세워진 증거다. 어떤 집이든 터에 집이 세워지기 위해서 들보와 도리가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집을 채우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야 온기가 깃든 집이 된다.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마련돼 있다. 가만히 몸을 얹는다. 밖이 훤히 내다보인다. 안은 밖과 연결되어 있다. 계절이 내려앉은 곳곳에 사람이 살아갈 길이 놓였다. 밖엔 겨울이 오고 있지만 더 멀리 나아가면 여리고 순한 봄이 묻혀 있다. 들판에는 도시의 속도가 아니라 들판의 속도가 흐른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는 들판의 속도에 잇대어 자랐다. 이 모든 게 작은 세계, 리틀 포레스트를 만드는 토대다.

이 집에 오면 자전거를 타야 한다. 자전거를 타면 리틀 포레스트를 찾을 수 있다.
이 집에 오면 자전거를 타야 한다. 자전거를 타면 리틀 포레스트를 찾을 수 있다.

◆청년, 혜원의 속도를 기다려 주는 들판이 되어 주세요

혜원이 배춧국을 끓이며 김 서린 창 너머 들판을 내다보던 부엌에 서본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미소 짓는 이 시대 수많은 청년, 혜원이 보인다. 혜원을 뒤따르는 바람의 결이 보이고 청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들판이 보인다. 비록 자동차처럼 빠르지는 않아도,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때로는 잠시 쉬기도,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는 청년들의 속도를 들판은 재촉하지 않는다.

혜원의 집은 빈집이 아니다. 키우는 집이다. 지친 우리를 살리는 집이다. 사람이 살아도 텅 빈 집이 있다. 갖은 세간으로 꽉 채우고도 허전한 집이다. 빈집에 살고 싶지 않다면 고개를 들어 밖을 응시하라. 시선이 다다르는 창밖 너머에 존재하는 풍경을 보라. 경쟁의 시선을 누그러뜨리고 유연하고 여유롭게 하라. 당신을 위한 풍경이 집 안으로 물밀듯 오리니.

삽짝을 나와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씽씽씽' 거리낌 없이 밟는다. 나도 한때는 청년이었다. 빠른 속도만 가득했다. 씁쓸한 기억이다. 도시를 살다 온 나를 바람이 씻어준다. 차지 않다. 온몸이 부푼다. '살아야지, 충만하게 살아야지. 어떤 답도 정해진 것 없는 여유로운 삶을 살아야지. 스스로 터득한 도시의 속도를 버리고 좀 더 천천히 살아보자.'

'귀환할 집이 있는가?' 누가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리. 있다고. 나의 세계, 리틀 포레스트가 일어서는 충만한 집이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시간과 계절이 일어서는 길과 들판이 보이는가. 겨울 들판에서 봄을 준비하는 저 작은 음성이 들리는가. 당신의 마음에 겨울을 딛고 건너올 봄을 키우라. 혜원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세계를 이루라. 리틀 포레스트처럼.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글 사진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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