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피나무

숲속의 피나무에 미색의 꽃이 만발하자 벌들의 꿀 채집 활동이 왕성하다. 피나무는 전국에 걸쳐 자라지는 밀원식물이다. 한때 무문별한 벌채로 오래된 나무는 보기 힘든 실정이다.
숲속의 피나무에 미색의 꽃이 만발하자 벌들의 꿀 채집 활동이 왕성하다. 피나무는 전국에 걸쳐 자라지는 밀원식물이다. 한때 무문별한 벌채로 오래된 나무는 보기 힘든 실정이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다 사랑한단 말 새겨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Winterreise)의 5번째 곡 '보리수'의 가사다. 학창시절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어 많은 사람들의 귀에 친숙하다. 노랫말은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詩)이며 보리수(린덴바움·Lindenbaum)는 유럽의 피나무를 가리킨다. 이 나무를 왜 보리수라고 했을까?

피나무 꽃과 열매
피나무 꽃과 열매

◆보리수 이름이 헷갈리네

우리말에 '보리수'가 들어가는 나무 이름이 몇 가지나 된다. 토종인 보리수나무와 석가모니가 그늘에서 깨달음을 얻은 인도보리수(印度菩提樹), 사찰 뜰에 있는 염주나무 혹은 보리자나무를 포함한 보리수와 독일 가곡에 나오는 보리수(Lindenbaum) 등이 있다.

'토종' 보리수나무(Elaeagnus umbellata)는 보리수나뭇과의 낙엽관목으로 산비탈의 숲이나 계곡의 가장자리에 터를 잡고 자란다. 떨떠름하면서 들쩍지근한 맛이 나는 불그스름한 열매의 과육을 먹고 나면 부드러운 씨앗이 나오는데 생긴 게 영락없이 보리와 같다고 해서 '보리수나무'라고 한다. 보리에 나무를 뜻하는 한자 '樹(수)'를 붙이고 같은 이름의 다른 나무 '보리수'와 구별하기 위해 나무를 덧붙여 '보리수나무'라는 '곶감 겹말'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

숲속의 피나무에 미색의 꽃이 만발하자 벌들의 꿀 채집 활동이 왕성하다. 피나무는 전국에 걸쳐 자라지는 밀원식물이다. 한때 무문별한 벌채로 오래된 나무는 보기 힘든 실정이다.
숲속의 피나무에 미색의 꽃이 만발하자 벌들의 꿀 채집 활동이 왕성하다. 피나무는 전국에 걸쳐 자라지는 밀원식물이다. 한때 무문별한 벌채로 오래된 나무는 보기 힘든 실정이다.

보리수나뭇과에는 이름이 비슷한 보리밥나무도 있는데 울릉도나 동·남해안 지역에 분포하는 덩굴성 상록활엽관목이다. 일본에서 도입된 뜰보리수도 공원에 조경수로 많이 심는데 보리수나뭇과 일가다. 보리밥나무나 뜰보리수는 6월에 열매가 한창 붉게 익는다.

석가모니가 성불(成佛)한 곳의 그늘을 드리워준 보리수(菩堤樹)는 인도와 인도차이나에 자생하는 뽕나무과의 상록활엽수다. 불교에서는 '3대 성목(三代聖木)'으로 꼽는데 우리나라 국가표준식물명은 '인도보리수(Ficus religiosa L.)'다.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깨달음'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語)의 '보디(Bodhi)'를 중국말로 음차(音借)한 한자가 '菩提(보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菩提'라 적고 '보리'로 읽는다. 불교도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인도보리수는 추위에 매우 약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살지 못한다. 토종 보리수나무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경북 김천시 직지사 뜰에 있는 보리자나무. 중국에서 들여온 피나무의 한 종류이며 절에서는 보리수라고 부른다.
경북 김천시 직지사 뜰에 있는 보리자나무. 중국에서 들여온 피나무의 한 종류이며 절에서는 보리수라고 부른다.
석가모니가 나무 그늘에서 성불했다는 인도보리수.
석가모니가 나무 그늘에서 성불했다는 인도보리수.

◆유럽 피나무를 보리수로 번역

정작 국내 절에서 보리수라고 부르는 나무는 보리자나무(Tilia miqueliana Maxim.)다. 중국이 원산인 피나무의 한 종류다. 인도보리수와 비슷한 나무를 중국에서 들여와서 사찰에 심었는데 그게 바로 보리자나무다. 팔공산 부인사, 영천 은해사, 경주 기림사, 청도 운문사, 김천 직지사에 가면 '보리수'라는 이름표를 달고 뜰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옛날 열매 속의 단단한 씨를 꿰어서 염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다른 보리수는 유럽 피나무, 즉 린덴바움이다. 왜 보리수로 소개돼서 헷갈리게 됐는가? 독일에서 유럽 피나무는 오래 전부터 숭배의 대상이 되는 신성한 나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것처럼 피나무 아래서 가무를 즐기고 사랑과 우정을 나눴고 이별과 슬픔을 함께했다. 뮐러는 그런 정서를 시로 읊었다.

가곡 '보리수'가 우리나라에 소개 된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추측된다. 일본에서 서양 학문을 받아들일 때 불교에서 '보리수'로 여기는 보리자나무와 비슷한 유럽 피나무도 보리수로 소개했고 우리나라 번역가가 노랫말을 옮길 때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1925년에 나온 『일본식물도감』을 보면 '보리자나무'를 일본에서 보리수(菩提樹·ぼだいじゅ)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뒤에 정태현(鄭台鉉)이 1943년에 펴낸 『조선삼림식물도설』에도 달피나무(당시 학명:Tilia amurensis Rupr. 현재 피나무)와 염주나무(Tilia megaphylla Nakai)를 보리수(菩提樹)로 표기하고 웅기피나무(Tilia ovalis Nakai)는 고려보리수(高麗菩提樹)로 게재돼 있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에서 보리수를 피나무나 린덴바움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 슈베르트의 또 다른 가곡 '송어(Die Forelle)'도 1980년대까지 '숭어'라고 오역됐다가 바로잡아졌기에 하는 말이다.

보리자나무 잎은 하트 모양이고 열매는 긴 프로펠러 날개(포·苞)에 몇 개씩 매달려 있다. 열매가 익으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 이동할 수 있다.
보리자나무 잎은 하트 모양이고 열매는 긴 프로펠러 날개(포·苞)에 몇 개씩 매달려 있다. 열매가 익으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 이동할 수 있다.

◆피나무 목재 다양한 쓰임

나무타령에 나오는 "……대낮에도 밤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너랑 나랑 살구나무……" 구절은 해학적이지만 피나무 이름의 유래와는 거리가 멀다.

피나무의 '피'는 껍질의 쓰임이 많아서 껍질을 뜻하는 한자 '皮(피)'에서 나왔다. 플라스틱 제품에 밀려 오늘날엔 자취를 감췄지만 농경시대엔 피나무의 하얀색 속껍질을 섬유로 이용해 생활 도구를 만들었다. 명주나 삼베보다도 질기고 물에도 잘 썩지 않는 장점 때문에 노끈, 그물, 자루, 망태기 등에 안성맞춤이었다. 거친 겉껍질은 지붕을 이는 재료로도 쓰였다.

목재는 가벼우면서도 결이 치밀하고 무르지만 곧아서 가구를 만드는데 제격이다. 조선팔도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피나무의 대표적 쓰임새는 궤짝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궤짝의 재료도 대부분 피나무이고 소설 「배비장전」의 주인공 배비장이 기생의 꾐에 빠져 술집에서 숨은 곳도 피나무 궤짝이다.

목재를 통째로 파서 함지박, 나무절구, 바가지, 물통, 가축의 구유 등도 만들었다. 특히 떡을 칠 때 쓰이는 밑판인 안반으로도 많이 쓰였는데 '국수 못하는 여자가 피나무 안반만 나무란다'는 속담이 생길 만큼 생활과 아주 밀접했다. 밥주걱, 나무젓가락, 제기 등 피나무로 만든 생필 도구는 눈에 안 띌 때가 없을 정도였다.

보리자나무의 꽃
보리자나무의 꽃

◆아까시나무 능가하는 밀원수

옛날에는 아름드리 피나무가 조선팔도에 분포했으나 일제강점기에 많이 수탈당하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목재와 껍질이 쓸모가 많아 수난을 많이 당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방에서 근무하다 전역한 군인들은 기념품으로 피나무 바둑판을 챙겨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접경지역에 바둑판을 만들 아름드리 피나무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오늘날 몸피가 큰 피나무가 드물어진 상황이고 보니 환경부의 '국가적색목록(Redlist)' 기준 평가에 비교적 낮은 위협의 약관심(LC) 종으로 분류된다. 더구나 꽃피는 6, 7월이 장마와 겹치는 탓에 피나무 종자 결실이 적을 뿐만 아니라 발아율도 낮아 대량 증식이 쉽지 않다.

대구 경북에서는 피나무를 자연 상태의 숲에서 쉽게 볼 수 없다. 해발 900m 이상 높은 지역에 주로 분포된 나무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구수목원에 피나무 10여 그루가 있다. 줄기는 굵지 않지만 꽃 피는 6월엔 달콤한 향기가 멀리서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치는 게 매력적이다.

피나무 아래로 다가서면 조롱조롱 매달린 꽃 사이로 꿀을 찾아온 벌들이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꽃에 꿀이 많고 벌이 좋아하는 성분이 많아서 최고급 밀원수로 평가받고 있다. 산림과학원의 2023년 발표에 따르면 피나무에서 ㏊당 꿀 생산량은 95.1㎏으로 아까시나무의 38kg보다 월등히 많다. 한마디로 아까시나무보다 고효율 밀원수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승사 입구의 보호수 찰피나무. 두 그루의 수령은 400년 넘었고 줄기의 둘레가 2.4m나 되는 거목이다. 불교 신자들은 보리수라고 부른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승사 입구의 보호수 찰피나무. 두 그루의 수령은 400년 넘었고 줄기의 둘레가 2.4m나 되는 거목이다. 불교 신자들은 보리수라고 부른다.

◆『시경』에 나오는 찰피나무

피나뭇과 집안의 피나무는 대구경북에서 흔하지 않지만 찰피나무는 큰 산에 오르다보면 가끔 만난다. 찰피나무의 이름에서 접두사 '찰'은 품질이 좋다는 뜻이므로 '질 좋은 피나무'로 해석된다. 바람이 불면 찰랑찰랑한다는 데서 이름이 비롯됐다는 다른 견해도 있다.

대구 인근의 팔공산, 앞산, 군위군 방가산을 오르다보면 가끔 찰피나무를 만난다. 압권은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승사 입구의 도(道)보호수 찰피나무 두 그루다. 쌍둥이처럼 서서 은행나무, 전나무와 함께 천년고찰 입구를 400여 년 넘게 지키고 있다. 대구경북에서 나이가 가장 많지 않을까. 대승사 찰피나무는 사람 가슴높이 둘레가 2m를 훨씬 넘고 높이도 20m는 족히 될듯하다. 불국토의 나들목에서 가람과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와도 같은 역할을 수 세기 동안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목자불성(木子佛性)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보호수 앞에는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어 아쉽다.

근래 지인이 찰피나무와 보리자나무를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물었다. 찰피나무는 열매가 상대적으로 굵고 둥근형이며 보리자나무는 좀 작고 납작한 편으로 열매를 보기 전에는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장황하게 설명했더니 지인은 절에 있으면 보리자나무, 산에 있으면 찰피나무 아닌가 하며 웃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은둔 고수를 몰라봤다.

피나뭇과 집안의 찰피나무는 중국 고전 『시경』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나무다.

남산에는 털가죽나무 南山有栲 남산유고

북산에는 찰피나무 北山有杻 북산유뉴

즐거워라 군자여 樂只君子 낙지군자

어찌 오래 살지 않겠나 遐不眉壽 하불미수

즐거워라 군자여 樂只君子 낙지군자

훌륭한 명성이 무성하도다 德音是茂 덕음시무

<『시경』 「소아」(小雅)>

'남산에는 삿갓사초가 있고'[南山有臺·남산유대]의 제4장이다. 조선 후기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유(丁學游·1786~1855)가 저술한 시경에 나오는 생물 이름을 풀이한 책 『시명다식』(詩名多識)에서는 杻(뉴)를 감탕나무로 풀이했지만 대만(臺灣) 생물학자 반부준(潘富俊)이 쓴 『시경식물도감』(詩經植物圖鑑)에는 杻(뉴)를 현대 중국 이름인 요단(遼椴·Tilia mandshurica Rupr. & Maxim.) 즉 찰피나무로 설명하고 있다.

'남산유대'는 현인을 얻어서 벌이는 즐거운 잔치 때 부르는 노래다. 뽕나무, 버드나무, 구기자나무, 오얏나무 등을 소재로 5장으로 구성됐다. 『모서』(毛序)에 "남산유대는 현인을 얻은 것을 기뻐한 시다. 현인을 얻으면 국가를 잘 다스려서 태평의 기틀을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南山有臺 樂得賢也 得賢則能爲邦家 立太平之基矣]"라고 했다. 새 정부에 거는 기대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구 나무로 읽는 역사와 생태 인문학』 저자·전 언론인 chunghama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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