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루소, 소렌토만(灣)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소렌토만(灣) 낡은 테라스에서 한 남자가 어린 여인을 안고 우네. 지나고 보니 아메리카의 찬란했던 밤들도 배가 지나간 뒤 남긴 파도의 흰 거품처럼 부질없구려. 당신만을 사랑하오. 음악마저 고통스러워 피아노에서 일어서지만 구름 뒤에서 나타나는 달빛 같은 당신을 바라보는 순간 다가올 죽음마저 달콤하다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르는 카루소(Caruso)를 되풀이해 들으며 붉은 와인을 마신다. 밤이 깊을수록 음절 마디 마디가 애절해진다. '역사상 최고의 테너, 레코드를 통해 클래식을 보급한 최초의 가수'로 회자되는 엔리코 카루소가 말년을 보낸 소렌토만 비토리아호텔 객실에서 루치오 달라가 그를 추모하며 작곡한 곡이다.

'20세기 초반의 마이클 잭슨' 정도로 비견되는 엔리코 카루소는 나폴리 빈민가 술주정뱅이 창고지기의 20명의 아이 중 18번째 아들로 태어난 소년공으로 18세가 되어서야 정식 음악수업을 받았다. 27세에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라 스칼라 무대로 데뷔해 1902년 최초의 성악 음반 레코딩과 17년 간의 미국 공연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모든 영광의 정점에서 늑막염에 걸려 어린 아내와 딸을 데리고 고향 나폴리에 돌아와 죽었다. 향년 48세였다.
◆괴테, 마라도나 그리고 김민재
로마에서 1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나폴리 누오보성 성벽 옆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물때가 까맣게 낀 성벽과 해안가 남루한 건물들을 보니 영화 '자전거 도둑(1948년)'의 로마를 보는 것 같아서였다.
이곳이 전 세계가 칭송해 마지 않는 미항(美港) 나폴리라고? 13세기 나폴리를 지배했던 앙주왕조가 프랑스풍 고딕양식으로 처음 세운 성을 15세기 스페인 아라곤왕국이 개축하면서 두 탑 사이에 르네상스양식 개선문이 추가되었고,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 집무실로 사용했다는 성이다.
더군다나 여행 전 나름 꼼꼼하게 읽고 온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서는 '나폴리는 천국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도취된 듯 자기 망각 속에 살고 있다. 이곳에 온 지 며칠 된 나도 마찬가지다. … 오늘도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데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떤 말도, 어떤 그림도 이 경치의 아름다움에는 당하지 못한다. 나폴리에 오면 사람들이 들뜬다고 하더니 헛말이 아닌 것 같다. … 반드시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Vedi Napoli e poi muori)'라고 했던 곳 아닌가.

그러다가 문득 나폴리가 4천년 전 그리스인들이 정착했던 고대도시로 2천5백년 전 도시의 이름이 새롭게 지은 도시라는 뜻인 네아폴리스(Neapolice)임을 떠올린다. 중근세에 지은 저 까맣게 물때 낀 성의 이름이 뉴오보(Castel Nuovo)인 것도. 나폴리인들에게 몇백 년 역사쯤은 책장 하나 넘기는 정도의 의미에 불과하겠단 생각마저 든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날, 나폴리의 수호성인 성 야누아리오(Ianuarius)가 북풍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폼페이 대신 자신들의 도시가 멸망했을 거라 그들은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나폴리 중앙역 부근은 누오보성 근처보다 더 낡고, 더러우며 심지어 험악해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천년 나폴리를 보기 위해선 스파카 나폴리(Spacca Napoli)를 걸으며 화덕피자 한 판씩은 꼭 먹어봐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라 우리는 구도심을 가로질러 걷기로 했다.
거리 표지판은 죄다 가리발디, 포에리오, 카르보나라, 카보우르, 단테, 메디나, 무니치피오 등 한 번쯤 들어본 이탈리아 영웅들의 이름이다. 로마제국시대 주택지 도무스와 좁은 골목 건물과 건물 사이 공중에 널린 빨래들, 고딕양식의 교회, 상점과 나폴리식 피자 가게의 소음과 맛있는 냄새로 어느새 처음의 편견이 사라지고 무언가 정겹고 행복해지는 느낌이 든다. 낯선 곳에 스며든다는 게 이런 건가보다.

나폴리에선 여행자마저 느슨해지고 즐거워지는 마력이 있다는 통설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통찰은 참으로 놀랍다. '아침 일찍부터 이곳 사람들을 관찰했다. … 부둣가에 앉아 파이프를 피워 물고 있는 사공들, 내리쬐는 햇볕에 나와 드러누워 있는 어부들 … 그들이 일하는 이유가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향락을 위해서라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조차도 노동 그 자체에서 삶의 기쁨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 또한 감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북부 지방에 비해 이곳의 수공업자들이 훨씬 뒤떨어지고, 이곳에 공장이 서지 못한 이유이다.'
이탈리아 제3의 도시라 일컫지만 나폴리인들은 스스로를 '이탈리아 속 아프리칸'으로 비하할만큼 경제적으로 부유한 북이탈리아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온갖 과일을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노점상, 전통 상점, 곳곳에 걸린 SSC 나폴리팀 영구 결번 10번이 새겨진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마라도나의 동상과 사진, 우리의 김민재 모뉴망 등을 보면 '좀 못 살고 다른 도시보다 낙후되면 뭐 어때'란 생각을 여행자도 저절로 하게 된다.
2022-23 시즌, SSC나폴리가 마라도나 시대 이후 33년 만에 리그 1위를 한 것에 이어 2024-25 시즌에서 네 번째 스쿠데토를 들어올림으로 열광하는 나폴리인들을 보면 더욱더 그렇다. 괴테는 백 년 전에 이미 그들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나폴리에 변호사와 의사를 제외하고는 그 많은 인구에 비해 지식인 수가 많지 않은 이유, 그런 지식인들이 모두 개인주의적인 노력만 하려드는 이유, 나폴리파의 그 어떤 화가도 한때나마 철저했거나 위대하지 못한 이유, 성직자들은 무위 속에서 최상의 편안함을 누릴 수 있고 위인들까지도 주로 감각적인 쾌락과 화려함과 오락만 추구하며 돈을 탕진하려 드는 이유,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자명하게 밝혀준다.' 나폴리의 햇살 아래 서면 정말 누구라돈 괴테의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Vedi Napoli e poi muori)
폼페이의 유물을 모아놓은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나폴리중앙역 바로 옆에 있다. 환락의 도시였으나 멸망한 폼페이에 가기 전엔 꼭 들러봐야 한다는데, 19세기까지 '교양 있는 남성'만 관람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나폴리대성당엔 3세기에 순교한 나폴리의 수호성인 성 야누아리오의 응고된 피를 보관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 피는 한 해에 18번 액체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 5월과 9월에 두 번 외부에 공개된다고.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들이 묻힌 산타 키아라 성당과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 데린쿠유와 비슷한 로마 제국 때 만들어진 지하 저수지 소테라네아는 스파카 나폴리의 숨겨진 비밀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제2차 세계 대전때는 개조되어 지하 피난지로도 사용되었다.

사실 나폴리에서 조지 롬니가 그린 18세기 영국 최고의 미녀이자 영국의 구국영웅 넬슨제독의 그녀 엠마 해밀턴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다. 비천한 신분에서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 윌리엄 해밀턴의 부인이 된 그녀의 일생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TV주말극장 흑백영화로 본 비비안 리 주연의 '해밀턴 부인'은 그녀의 일생을 다룬 것인데 나폴리의 공기를 마신 것으로 만족했다.
우리는 언제 분화할지 모르는 활화산 베수비오를 바라보며 파바로티의 카루소를 들으며 소렌토를 거쳐 아말피 해안을 달린다. 창밖 햇살에 반짝이는 지중해 푸른 물결이 아름답다. '오 솔레미오', '돌아오라 소렌토로' '푸니쿨리 푸니쿨라', '산타루치아'는 점점 황홀해지고, 나폴리는 이제 수천 년 까멓게 낀 물때를 완전히 벗고 날아오른다. 안내자는 놀랍게도 이 모든 곡들이 1774년부터 시작된 나폴리민요제(Napoletana) 수상작들이라 얘기한다.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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