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담론은 언제나 '정의'를 내세우지만, 그 정의는 많은 경우 '민생'을 짓누른다. 여권이 최대 담론으로 삼고 강경 드라이브로 일관하는 '검찰·사법 개혁'이 그렇다. 야당 뿐 아니라 법조·학계의 '위헌 논란'에도 요지부동이다. 모든 국정 어젠다를 뛰어넘어 사활을 거는 모습이 위태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여권 지도자들이 '시대적 요구'라 강변하는 소위 '권력기관의 개혁'은 일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수많은 민생 사건이 미제로 남고 억울한 국민이 늘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혁이 아니다.
문제의 실상은 이미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보도된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검찰청에서 3개월 이상 처리되지 못한 '장기 미제 사건'이 올해 2만 2천 건을 넘었단다. 이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 시행된 2021년 이후 4년 만에 약 5배 증가한 수치다.
올해 들어서는 100명 이상의 검사들이 사직했고, 여권이 추진 중인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신설과 검찰청 폐지 논의로 조직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수사는 지연되고 공소 유지 인력은 줄었으며, 보이스피싱·서민 사기·중소기업 횡령 등 민생 사건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현 여권은 '장기 미제'나 '민원 처리 지연'에 대한 문제의식이 지나치게 부족하다. 하지만 관련 당사자들은 하루하루 마음에 천근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업에 전념치도 못한다. 극단적인 경우 자살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민원에 처리 시한이 있는 것이다.
'지연'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사 주체의 공백이 더 큰 문제다. 검찰을 대신한다는 중수청과 공소청 등 새 기관의 역할과 권한이 명확하지 않아 민생현장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현재로서 유일한 대안인 경찰의 행태는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다. 그 사이 국민은 수사 주체의 공백을 체감하고 있다. 사건을 맡을 기관은 정해지지 않았고, 검찰의 손을 떠난 서류는 다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권력 분산'이라는 이상은 실종되고, '책임 분산과 실종'만 남았다.
'지연'과 '책임 실종'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인권문제'다. '검찰 개혁'의 주요 명분이 인권이었다. 그러나 그 명분은 공허해졌다. 최근 김건희 특검 수사를 받던 양평군 공무원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 추석 연휴 끝자락에 지면을 달궜다. 고인은 메모에 "심야 조사와 진술 강요가 있었다"고 남겼다. 명패는 바뀌었으나 '강압적 수사'라는 망령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기관을 없애고 주체를 바꿔도 수사관행은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낙담한다. 결국 체감되는 변화 없이 '누가 수사하느냐'보다 '어떻게 수사하느냐'가 더 근본적인 문제였음이 드러났을 뿐이다. 양평군 공무원에 대한 수사는 경찰 파견 수사관이 담당했다고 한다. 경찰도 자체적으로 엽기적인 뉴스를 생산해 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지 하루 만에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수갑을 채워 체포했다. 추석연휴 직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민들을 의아하게 했다. 이게 검찰과 구별되는 '인권' 경찰의 행태라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특검이 칼춤을 추고, 경찰은 맞장구를 치는 것인가? 그런데 국회 법사위를 보면서 이해가 갔다. 지난 월요일 대법원장이 국회 법사위에 출석해 수모를 당했다. 관례대로 인사말만 하고 자리를 뜨려 했지만, 법사위원장과 여권 의원들에게 저지되고 결국 1시간 반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를 두고 진보 논객이었던 진중권 교수는 "21세기 인민재판의 현장을 생중계로 지켜봤다"며 "여기가 캄보디아냐. 참담하다"고 했다. 방금 옷 벗은 장관과 현직 대법원장에게 이런 식이니 일반 공무원이겠는가. 대한민국 공권력이 딴전을 피는 동안 캄보디아에서 우리 젊은이가 중국인의 고문 끝에 숨을 거뒀다.
여권은 이런 행태들을 모두 '시대적 요구'로 포장한다. 하지만 진정한 개혁은 국민의 안정과 인권 위에 있어야 하고, 헌법 시스템을 굳건히 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모든 개혁의 근본에는 반드시 국민의 구체적 삶이, 민생과 안전 그리고 '밥 한 끼의 무게'가 있어야 한다. 조변석개하는 법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과 국민의 밥이 하늘이기 때문이다.
댓글 많은 뉴스
李대통령 "국감서 뻔뻔한 거짓말 안돼…위증 왜 수사 안하나"
대구시장 후보 지지도, 이진숙 21.2% VS 김부겸 15.6%
AI 시대 에너지 중요한데…'탈원전 2막' 가동, 에너지 대란 오나
"조용히해! 너한텐 해도 돼!" 박지원 반말에 법사위 '아수라장'
배현진, 조국 겨냥해 "강남 집값 올린건 문재인·박원순 커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