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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걸 칼럼] 삼전 사태의 진정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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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걸 (재)문화영토연구원 이사장·국민대 명예교수

홍성걸 (재)문화영토연구원 이사장·국민대 명예교수
홍성걸 (재)문화영토연구원 이사장·국민대 명예교수

1989년 여름, 박사과정 1년 차를 마친 필자는 종합시험과 학위논문 제안을 2년 차에 마치라는 지도교수의 엄명(?)에 따라 논문 주제를 고심하고 있었다. 미시간호 바로 옆에 있어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노스웨스턴대학의 도서관을 매일 출근하던 어느 날, 늘 보던 신문대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이 특히 눈에 띄었다. 대문짝만하게 인쇄된 1면 머릿기사의 제목이 "Here Comes Koreans!"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현대 엑셀, 삼성 반도체, 대우 리딩엣지 PC 등이 맹렬히 진출하던 현상을 보도하면서 한국의 가파른 경제성장 신화를 소개한 기사였다. 그 기사가 내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반도체! 가진 건 사람밖에 없는 우리가 앞으로 먹고살 길은 첨단산업의 경쟁력 확보다. 1992년, 난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산업정책을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을 바탕으로 1974년 재미교포 강기동 박사가 설립한 ㈜한국반도체가 1년도 안돼 경영난에 빠졌다. 정부는 재벌들에게 이를 인수해 반도체산업을 이어갈 것을 권고했지만 선뜻 나서는 기업이 없었다. 그때 고 이건희 회장이 이를 매입해 삼성의 반도체 신화가 시작됐다. 1982년 12월, 이병철 회장은 '그룹 전체의 명운을 걸고 (메모리) 반도체산업에 진출하겠다'는 비장한 선언을 했다. 그것이 비장했던 이유는 사전에 정부 지원을 요청했지만 70년대와는 달라진 자율화와 시장화 정책 기조에 의해 거절당했기 때문이었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는 그렇게 전사적 운명을 건 모험으로 시작됐다.

1984년 각고의 노력 끝에 당시 세계시장의 주력 제품이었던 64K DRAM 양산 체제를 갖추고 판매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발주자인 일본 반도체 9사는 즉시 삼성의 생산 단가 밑으로 덤핑을 시작했고 삼성은 아예 팔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에 과감히 64K DRAM을 포기하고 256K DRAM 개발에 들어갔다. 공들여 개발했던 제품을 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보다 4배의 집적도를 가진 고부가제품의 연구개발에 들어갔으니 그 재무적 부담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삼성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마불사의 논리에 빠진 낙후된 금융과 그룹 내 다른 기업의 수익을 반도체에 몰아줄 수 있었던 느슨한 법률 체계 때문이었다.

256K DRAM 양산 체제를 갖출 무렵, 과거와 같은 일본의 횡포가 반복될 것이 염려됐다. 그때 예상치 못한 큰 기회가 생겼다. 막대한 메모리를 미국 시장에 수출하던 일본이 1986년 레이건 행정부의 강력한 수입 규제에 가로막힌 것이다. 일본은 과거 3년간 평균 수출량을 넘지 않겠다는 '자율수출규제(Voluntary Export Restraints)에 억지로 동의했다. '미일 반도체 전쟁'의 시작이었다. 메모리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미국 전자업체들이 대체 공급자를 찾느라 정신이 없을 때, 삼성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이처럼 오늘날의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과감한 결단과 밤낮 없이 연구개발에 몰두한 연구자들의 피나는 노력, 높은 불확실성 속에서 막대한 연구개발과 시설 투자를 조기에 결정하고 실행한 경영인들, 거기에 천운이 더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지난 2023~2024년간 법인세조차 한 푼 내지 못했던 삼성이 4분기에 급격히 살아나 올해 300조 원 대의 영업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AI 반도체 수요 폭발'이라는 천운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노사의 합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세전 영업이익의 10.5%를 성과급 재원으로 신설하고 이를 10년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현금 대신 자사주로 지급하는 점에서 충격이 줄어들지만 본질적으로 기여한 만큼 받는다는 성과주의보다 평등주의를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그 기준이 세전 영업이익이라는 점에서 국가와 주주의 이익도 침해한다. 2~3년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반도체산업의 특징을 무시해 장기적 투자 여력 확보에 부정적이다. 영업손실 발생 시 노조는 그 어떤 불이익도 부담하지 않으면서 이익만 챙기는 것도 결코 정의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미일 반도체 전쟁이 삼성에게 천운이었던 것처럼 이번 노사 합의가 중국 반도체산업이 굴기할 다시없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주52시간제로 연구 시간마저 불충분한 삼성이 과다한 성과급에 발목 잡히면 미래 세대의 좋은 일자리마저 빼앗을 것이다. 1인당 6억의 인센티브를 받는 노조원들만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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