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직장에서 '배리어 프리(Barrier-Free)' 관련 교육이 있어 참석한 적이 있었다. 교육장으로 들어가니 남색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나 마이크를 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아나운서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올 땐 먼저 이름을 밝혀달라고 했다.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 소통을 시작할지 방식을 정해줬다. 누군가 그에게 눈을 뜨고 싶지 않냐고 물었을 때도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40년 가까이 체득한 시각장애라는 정체성이 싫지 않은데 굳이 이걸 바꿀 필요가 있냐고 되물었다. 그에게 장애는 '극복해야 할 불행'이 아니었다.
교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생각했다. 만약 세상에 빛이 사라져 모든 사람이 앞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나 혼자 겪는 고통보다는 나을까? 모두가 볼 수 없는 세상과 나만 보지 못하는 세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남과 다르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공포를 준다. 그건 때때로 세상의 종말보다 더 큰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소설을 쓰다 보면 평범한 인물보다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인물을 찾게 된다. 그 인물이 갖고 있는 고유한 무언가에 매달려 이야기라는 공을 굴리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 닿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 인물을 이해했다고 착각할 때가 있는데 나는 자주 그랬다. 내가 설정한 인물인데 당연히 난 그에 대해서 다 아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와 대화하고 그의 정체성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100% 이해할 순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에는 시각장애인 로버트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화자가 나온다. TV에 대성당이 나오자 화자는 말로 그 웅장함을 설명하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딪힌다. 그때 로버트가 제안한다. 화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함께 대성당을 그려보자고. 함께 그림을 그리던 중 로버트는 화자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한다. 눈을 질끈 감고 도화지 위로 펜을 움직이던 화자는 자신이 집 안에 있지만 어디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독자들은 소설의 결말이 가리키는 어떤 곳을 향해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눈 뜨고 살아도 보지 못하는 게 너무 많다. 우린 그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어쩌면 진짜 장벽은 우리의 비좁은 마음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한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이 오해를 불러온다.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편견을 넘는다. 손을 잡는다. 함께 그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사람이 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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