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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정성태] 다시, 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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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태 꾸꿈아트센터 대표

정성태 꾸꿈아트센터 대표
정성태 꾸꿈아트센터 대표

옷장 한켠에 오래된 빨간 티셔츠가 놓여 있다. 이상하게도 그 옷엔 지나온 시간의 체온이 남아 있다. 젊은 날의 열정과 무모함, 거리의 함성 같은 기억들이다. 그런데 선입견일까. 어느 순간부터 그 셔츠를 입고 나가는 일이 망설여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정치적 신호로 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빨간색 하나가 어느새 취향과 감각을 넘어 기호가 돼버렸다.

생각해 보면 색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 어느 민족이 무지개를 옷에 달고 살았을까. 우리는 색동을 입었던 민족이다. 아이의 저고리 소매마다 다홍과 노랑, 초록과 파랑을 이어 붙이며 삶의 복과 기운을 빌었다. 오방색은 단순한 미감만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와 삶의 조화를 담아낸 철학이었다.

한때 우리는 '백의민족'이라고도 불렸다. 흰옷을 즐겨 입던 민족이라는 뜻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가난과 체념, 한 많은 민족이라는 미묘한 시선도 함께 스며 있었다. 하지만 흰색은 비어 있는 색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색을 품어내는 바탕에 가깝다. 우리는 색을 몰랐던 민족이 아니라, 하늘빛을 담고, 흙빛을 품고, 무지개를 옷깃에 새겨 넣었던 여백의 민족이다.

색의 의미는 시대마다 달라져 왔다. 빨간색은 어떤 시절 금기의 색이었고, 또 다른 시절에는 민주와 저항의 상징처럼 읽혔다. 2002년 월드컵 때 거리의 붉음은 이념이 아니라 열정의 색이었다. 낯선 사람끼리도 어깨를 걸고 "대한민국"을 외치게 만들던 공동체의 체온이었다.

하지만 지금 빨간색과 파란색은 다시 진영의 기호가 됐다. 사람들은 어느새 넥타이와 운동화의 색깔까지 해석한다. 색은 점점 취향보다 입장의 언어가 돼간다.

물론 상징은 정치의 중요한 언어다. 문제는 색 자체가 아니라 색을 향유할 자유가 줄어드는 데 있다. 빨간 옷을 입었다고 정치적 의심을 받고,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성향을 추정하는 사회는 조금은 숨이 막힌다. 색은 인간의 감정을 해방시키는 언어이지 서로를 검열하는 암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아무 뜻 없이 빨간 티셔츠를 꺼내 입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파란 셔츠를 입고, 또 누군가는 노란 스카프를 두르더라도 그것이 그저 한 사람의 취향과 기분으로 읽히는 사회였으면 한다. 정치가 색을 빌릴 수는 있어도 색의 자유까지 독점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은 본래 단색이 아니었다. 색동처럼, 무지개처럼 서로 다른 빛들이 겹쳐지며 오늘의 공동체를 이뤄왔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색을 다시 제 색깔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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