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책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낙선 후보의 공약이 행정에 반영돼 사업으로 이어졌고, 낙선자 스스로 공약을 실현한 사례도 등장했다.
◆ 패배한 공약의 귀환
지난 2020년 국회의원 선거가 마무리되고, 경주시는 낙선한 국회의원 후보들의 낙선 공약을 재검토했다. 낙선 후보들의 공약 37개를 모두 시정에 반영할 수 있는지 검토한 끝에 17개 사업을 장·단기로 나눠 추진하기로 했다. 지역 발전에 여야가 따로 있지 않고, 낙선자 공약 가운데도 좋은 정책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이 중 하나가 학교급식 지원센터였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종복 후보의 아이디어다. 센터는 지난 2023년 준공을 마친 뒤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역에서 나온 먹거리를 학교 급식소로 보내 아이들의 건강을 챙기는 동시에, 지역 농가는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정책이다. 이 사업으로 학생 2만1천632명과 학교 84곳이 혜택을 보고 있다.
남해군, 광명시 등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 통합과 협치를 내세우며 낙선 후보의 공약을 수용하는 사례는 적잖다. 선거에서 패한 후보의 공약도 지역에 필요한 정책이라면 행정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낙선 후에도 지역을 위해 공약을 지키려는 움직임도 있다. 김보미 전 전남 강진군의회 의장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강진군수로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고배를 마셨다. 그는 "군민이 낸 혈세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핸드폰으로 곧장 확인하고, 정책 살피기와 민원제기가 가능한 'AI 대전환 행정'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지난 21일 '군민 소통·참여 AI 플랫폼'이 공개됐다. 김 전 의장이 낙선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약을 지킨 셈이다. 재정자립도는 물론이고, 타시군과 비교했을 때 고령화 정도는 어떠한지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일감 몰아주기' 우려를 살피기 위해 나라장터를 통해 군과 계약을 맺은 업체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 낙선자의 정책은 어디로?
이처럼 낙선 공약의 '다시보기'는 결코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니다. 다만 낙선 공약의 패자부활전은 쉽지 않다. 낙선 공약은 선거가 끝나는 즉시 삭제돼서다. 선거 운동 기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에 모든 공약이 공개되지만, 선거가 마무리된 후에는 당선자의 공약만 누리집에 남는다.
그나마 각 시당이 발표한 공약의 밑그림은 볼 수 있지만, 세세한 공약 내용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 일반 주민들이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향후 선거에 나설 정치인도 낙선 공약을 참고하기가 곤란한 셈이다.
대구시 선관위 관계자는 "혹여 집으로 배송 오는 실물 선거공보를 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선거 운동 기간에만 누리집에 정보를 공개한다"며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기에, 향후에도 낙선자 공약을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술계 차원에서 자료를 정리해 공개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공약다나와'는 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이민정치연구단, 한국정당학회에서 제작한 공약 비교 누리집이다. 2006년 이후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공약을 수집해 AI 기반 비교 서비스를 제공한다. 다만 후보 공약을 요약해 보여주는 방식인 만큼, 공약 원문을 그대로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 "낙선 공약도 지역 자산"
전문가들은 당선자뿐 아니라 낙선자의 공약까지 체계적으로 정리·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강금수 대구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아직 대구에서는 낙선 공약을 정리하자는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시민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약인 만큼, 좋은 정책이라면 누가 제안했는지와 관계없이 현장에 반영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공약이 정리돼 있어야 당선자들이 이를 검토하고 시정에 반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조광현 대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도 공약 정보에 대한 접근성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당선자의 공약조차 일반 시민이 찾아보기 쉽지 않고, 시의원이나 구의원 공약은 더욱 그렇다. 정보공개청구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선거를 계기로 드러났던 지역의 문제를 다시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관위 차원에서 어렵다면 지방자치단체가 공약을 정리해 제공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지역에 사는 시민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서비스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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