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나 기자 dun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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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재직의 삶] '버티는' 재난 대응에서 벗어나야… 체계 바꿔야 안전 지킨다

    [방재직의 삶] '버티는' 재난 대응에서 벗어나야… 체계 바꿔야 안전 지킨다

    방재직 공무원들은 "재난은 앞으로 더 복잡해질 텐데, 대응 체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입을 모았다. 단순히 인력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조직을 재정비하고, 현장의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며, 숙련된 인력이 오래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예방·대응·복구 분담 가장 먼저 꼽은 과제는 인원 충원을 바탕으로 한 조직 개편이다. 현재 기초자치단체의 방재 업무는 소수의 인력이 재난 예방부터 대응, 복구까지 모두 담당하는 구조다. 업무 범위가 넓다 보니 재난이 장기화할수록 피로가 누적되고, 교대 근무도 쉽지 않다. A씨는 "구청 재난 부서를 '자연재난과' 등으로 격상하고 산하에 예방팀·대응팀·복구팀을 두는 방식이 필요하다"며 "업무가 세분되면 자연스럽게 전담 인력도 늘어나고, 여러 명이 같은 업무를 맡아 장기 재난 상황에서도 교대 근무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현장 목소리를 반영해야 당장 인력 확충이 쉽지 않다면, 현장의 의견을 제도에 반영할 통로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D씨는 "현재는 상급 기관이 지침과 계획을 만들어 일방적으로 내려보내고, 기초 지자체는 이를 그대로 수행하는 역피라미드 구조"라며 "현장에서 실행할 수 있는 것과 물리적으로 수행이 어려운 부분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고 조율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사람이 남아야 재난도 막는다 숙련된 인력을 붙잡기 위해서는 꾸준한 신규 인력 유입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D씨는 "몇 년 동안 채용이 없다가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방식은 수험생들이 채용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어 응시 의지를 떨어뜨리고, 우수 인재 확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매년 일정 규모를 꾸준히 채용해야 인력 공백을 줄이고, 기존 직원들의 업무 부담과 이탈도 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기간 재난 업무를 맡은 직원들을 위해 순환근무 제도도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재난 업무를 담당한 실무자는 일정 기간 행정복지센터 안전 담당직 등 상대적으로 긴장도가 낮은 부서에서 근무할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C씨는 "방재 기획과 총괄 업무는 늘 긴장의 연속이다"며 "잠시라도 일상 행정을 맡으며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도 오래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 붙잡지 못하는 처우 수당 현실화와 인사 제도 개편도 공통된 요구였다. 방재직은 직렬 자체의 인원이 적다 보니 승진할 수 있는 자리도 제한적이다. 승진 여부 역시 각 구·군의 인력 운영 상황에 달려 있어, 무작정 개선을 요구하기도 어렵다. 함께 재난 현장을 뛰는 다른 전문 직렬들이 승진할 때, 방재직 공무원들은 상대적으로 더딘 속도로 승진한다. 자연스럽게 임금 상승과 처우 개선도 늦어진다. 이들은 입을 모아 "월 20만 원 수준의 위험수당으로는 업무 강도와 책임을 반영하기 어렵다"고 했다. 소방·경찰과 마찬가지로 재난 현장에서 주민 안전을 지키지만, 위험에 대한 보상 체계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열악한 처우는 결국 인력 이탈로 이어진다. 사람이 빠져나가면 남은 직원들의 업무 부담은 더 커지고, 다시 새로운 인력이 들어오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A씨는 "승진이 더디다 보니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4~5년 차에 그만두는 직원들도 있다"며 "방재 기사 등 전문 자격을 가진 인력은 처우가 더 좋은 민간 안전관리 분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난은 앞으로 더 자주, 더 복합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며 "현장을 지킬 사람이 남아 있어야 결국 주민의 안전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2026-08-14 13:32:00

  • [방재직의 삶] 늘어나는 재난, 부족한 방재 인력… 방재직 공무원의 현실

    [방재직의 삶] 늘어나는 재난, 부족한 방재 인력… 방재직 공무원의 현실

    ◆"30시간째 근무 중" 방재직 공무원의 하루 오전 7시 30분, 하늘이 심상치 않다. 일주일 전부터 예보된 비가 현실이 되려는 듯했다. 김영훈(가명) 씨는 단기 기상예보를 다시 확인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한동안 휴식은 없다. 별 효과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제발 우리 지역에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를."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기상청 자료를 토대로 예상 피해 보고서를 작성한다. 대응 매뉴얼을 회의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가공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구청 실무회의에 이어 행정안전부 영상회의까지 잇따라 열린다. 혹시라도 실수가 있을까 자료를 몇 번이고 검토하다 보면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전에 기운이 빠진다. 오후 2시, 비가 쏟아지자 상황실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된다. 방재직 공무원은 단 두 명. 현장에서는 일반 행정직 공무원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장 인력을 배치하고 CCTV로 하천 수위를 확인하는 동시에 재난문자와 대피 상황을 점검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고 전화가 빗발친다. 강물이 가게 앞까지 차올랐다는 신고, 도로가 침수됐다는 신고가 잇따른다.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상황실을 비울 수는 없다. 현장에 나간 직원들과 연락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쏟아지는 신고 전화에도 응답해야 한다. 숨 돌릴 틈 없는 와중에도 영훈 씨는 속으로 되뇐다. "제발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다음 날 오전 6시, 드디어 비가 그쳤다. 대구는 큰 피해 없이 밤을 넘겼다. 출근길 시민들은 밤새 상황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재난 업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성과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설움도 덮치지만,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만약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면 죄책감은 물론, 사고 경위를 설명하는 조사에 짓눌려야 한다. 창밖에는 평온한 출근길이 이어진다. 그는 밤새 끝내지 못한 업무를 다시 펼쳐 들고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신다. "원래 일은 다 힘든 거니까." 재난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태풍과 홍수, 지진과 대형 화재, 붕괴, 대설은 물론 환경 오염과 가스 누출 등의 위험이 일상을 위협한다. 방재직 공무원은 위협에 맞서 한발 앞서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재난 대응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날 때만 주목받을 뿐, 평소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재난 현장의 최전선에서 열악한 근무환경과 처우를 견디고 있다. 평상시에는 예방 활동과 시설 점검을 이어가고, 재난이 발생하면 밤을 지새우며 현장을 지킨다. 인력 부족 속에서 기후변화로 더욱 잦고 복합적인 재난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구 구·군에서 근무하는 방재직 공무원 4명에게 그 현실을 들어봤다. ◆ 큰 책임, 작은 힘 풍수해로 인한 피해를 막는 방재직 A씨는 "과중한 책임에 비해 권한이 크지 않다"고 꼬집었다. A씨는 여름철마다 불법 고무 덮개로 골머리를 앓는다. 상인들이 가게 앞 하수구에서 벌레나 악취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고무 덮개를 임의로 덮어두는데, 이는 엄연한 불법 행위이며 폭우 시 도심 침수를 유발한다. 다만 이 덮개들은 사유물이다. 공무원들이 비가 오기 전에 임시로 '걷어 놓는 것' 외에 아예 강제로 압수하거나 폐기·철거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다. 할 수 있는 건 계도, 눈에 보이는 덮개는 열어두는 일뿐이다. A씨는 "비 예보가 뜨면 공무원과 민간 방재단 인력들이 넓은 달서구 전역을 돌며 무거운 고무 덮개들을 일일이 손으로 걷어내야 한다"며 "비가 그치면 상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하수구를 덮어버려 이 씁쓸한 사투가 매번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재난이 발생하지 않는 평시에도 바쁠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 ◆ 모호한 재난의 경계 방재직 공무원 B씨는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절, 어디까지가 방재 업무인지조차 모호해진 현실을 실감했다. 당시 경찰로부터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 청소년 20여 명이 한곳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신고였다. 원래라면 경찰이 담당할 사안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경찰은 각종 사건·사고 현장을 오가며 시민들과 접촉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감염 위험을 최소화해야 했다. 자칫 감염되면 다른 현장에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이 때문에 현장에 적극 개입하기 어려웠고, 집합금지 여부를 확인하고 과태료를 부과할 권한을 가진 구청이 대신 나서야 했다. 결국 B씨는 별다른 호신 장비도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 수십 명의 청소년을 강제로 해산시킬 방법이 없어 "여기서 모이면 안 된다"며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재난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방재직 공무원도 예상하지 못했던 업무가 계속 생겨난다"고 말했다. ◆ 불어나는 업무 이처럼 업무는 갈수록 불어난다. 여기에 현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지침까지 더해지면서 부담은 고스란히 일선 공무원들에게 돌아간다. 방재직 공무원 C씨는 현재의 인력 구조를 '역피라미드'라고 표현했다. 행정안전부 등 상급 기관은 재난 업무가 여러 부서로 세분돼 담당자별로 업무가 나뉘어 있다. 반면 일선 구청으로 내려올수록 한 사람이 담당해야 하는 업무는 점점 많아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태원 참사 이후다. 참사를 계기로 상급 기관에는 다중 인파 밀집 사고를 전담하는 조직이 신설되고 관련 지침도 잇따라 마련됐다. 하지만 일선 구청의 인력은 그대로였다. 기존 업무를 수행하면서 다중 인파 관리 업무까지 추가로 맡게 된 것이다. C씨는 "상급 기관에서는 여러 담당자가 분야별로 지침을 만들지만, 구청에서는 그 수많은 지침을 한 사람이 모두 숙지하고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상급 기관의 지침은 업무 부담을 더 키운다. 행정안전부는 침수 시 지하차도를 신속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지자체 ▷행정복지센터 ▷경찰 ▷민간 관계자 등 4명의 담당자를 지정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또 비상 상황에 즉시 연락할 수 있도록 모든 담당자의 개인 연락처도 제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경찰의 경우 교대근무를 하므로 담당자가 수시로 바뀐다. 휴무로 자리를 비우는 특정 경찰관의 개인 연락처로 연락하는 것보다, 24시간 운영되는 상황실 연락처를 활용하는 것이 현장에서는 훨씬 현실적이다. 대구 한 구·군에서 자연재난 업무를 담당하는 D씨는 "상급 기관을 설득해 겨우 개인 연락처 대신 상황실 연락처를 기재할 수 있었다"며 "안전을 위해 담당자를 지정하는 제도는 필요하지만, 제도 운영도 현장 여건에 맞게 유연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 메울 수 없는 빈자리 인터뷰에 응한 방재직 공무원들은 한목소리로 '인력 부족' 문제를 지적했다. 재난 업무는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몰리는 특성이 있지만, 평소 인력은 이를 감당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결국 일반 행정직 공무원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지난달 대구시와 9개 구·군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상시 재난 상황실을 운영하는 곳은 모두 7곳이다. 이 가운데 행정안전부가 권고한 '2인 1조 4교대' 기준을 충족하는 곳은 대구시와 중구뿐이다. 나머지 구·군은 권고 인원을 지키지 못했다. 대부분의 구·군은 당직실의 지원을 받아 재난에 대응하고 있다. 대구 서구의 인사 담당자는 "행안부 권고 기준에 미달하는 대신 도시안전망 CCTV나 오픈채팅방 등을 적극 활용해 신속한 상황 접수와 보고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향후 조직 부서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인력 확대를 추진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방재직 공무원은 자리를 비우는 것조차 쉽지 않다. 재난은 상황마다 양상이 달라 현장의 경험과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재난 상황에서는 팀장 역시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실무자의 판단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숙련된 인력의 공백을 메우기 어렵다. 실제로 숙련 인력의 공백은 대체 인력 채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구시와 9개 구·군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육아휴직 등으로 공석이 된 방재직 자리는 모두 2석이었다. 하지만 두 자리 모두 휴직 기간 동안 대체 인력을 채용하지 않은 채 공석으로 운영됐다. ◆ 쉬어도 쉬는 게 아니야 쉬지도 못한 채, 끊이지 않는 긴장감에 시달린다. 오랫동안 방재 업무를 맡아온 C씨는 쉬는 날에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내가 관리하는 구역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지자체에 안전관리 책임을 묻고, 담당 공무원 역시 경찰 수사와 각종 감사 대상이 돼서다. 설령 형사처벌을 받지 않거나 최종적으로 면책 결정을 받더라도 부담은 끝나지 않는다. 사고 이후 이어지는 감사와 감찰, 그리고 자신의 업무에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방대한 해명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까지 모두 담당자의 몫이다. 처벌 여부와 관계없이 이 같은 절차 자체가 극심한 피로감과 심리적 압박으로 이어진다. 방재직 공무원의 업무는 '끝'이 분명하지 않다. 근무시간에는 재난을 대비하고, 퇴근 후에도 혹시 모를 사고에 마음을 졸인다. 실제 재난이 발생하면 잠을 줄여가며 현장을 지키고, 사고가 지나간 뒤에는 책임을 떠안는다. 방재직 공무원들은 재난의 처음부터 끝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2026-08-14 13:30:00

  • [MZ 연구소] 샤워의 재발견… 몸·마음 힐링 위한 특별한 샤워

    [MZ 연구소] 샤워의 재발견… 몸·마음 힐링 위한 특별한 샤워

    끝이 보이지 않는 취업 준비와 미래에 대한 고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 지친 MZ세대는 어떻게 쉴까. 이들은 그 답을 '물'에서 찾고 있다. MZ 세대에게 사우나는 목욕과 힐링, 먹거리까지 즐길 수 있는 복합 놀이공간이다. 주말을 이용해, 친구와 함께 온종일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몸을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쉬고 놀기 위해 사우나를 방문하는 셈이다. 사우나 속에서는 복잡한 일상에서 잠시 떨어진 채 온전히 휴식을 누릴 수 있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휴대전화를 들고갈 수 없고, 땀을 흘리고 물을 마시는 것 외에는 할 일도 없다. 1~2만원이면 이용할 수 있는 데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매력으로 꼽힌다. MZ세대에게 사우나는 특별한 공간이다. 일상적으로 목욕탕과 찜질방을 드나들며 자란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절 때만 가끔 찾던 곳이었고, 코로나19 유행 이후 많은 사우나가 문을 닫으면서 더욱 낯선 공간이 됐다. 오히려 이 같은 낯섦이 새로운 휴식 공간으로서의 매력을 키웠다. 개인적 시간을 중요시하는 MZ 세대의 특성에 맞춘 신세대 사우나도 등장했다. 이른바 나 홀로 사우나다. 1시간~1시간 30분 동안 개인 탕과 찜질방을 이용할 수 있는 구조다. 일반 사우나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먹을거리와 세신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일반 사우나보다 비싼 이용료를 내야 하지만, 벗은 몸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어 젊은 층의 수요가 늘고 있다. 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친밀한 가족과 함께 이용하기도 한다. 최소한의 비용과 노력으로 할 수 있는 '다크샤워'도 떠오른다. 불을 모두 끈 채로 몸을 씻는 방식이다. 혹은 부드러운 주황색 조명을 켠 채로 라벤더향을 피우거나,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몸을 씻는다. 자기 전 시각적 자극을 최소화하면 심신의 안정을 얻을 수 있고, 수면의 질이 높아진다고 알려져서다. 실제로 어두운 환경에서 달빛에 가까운 조명을 보면 멜라토닌이 분비된다. 수면 조절 호르몬인 멜라토닌이 규칙적으로 분비될수록 건강한 수면이 가능하다. 실제로 다크샤워를 해봤다는 SNS 'X' 이용자들은 "불을 끄니 세면도구가 어디 있는지 헷갈려 고생했지만, 새로운 경험이라 즐거웠다"며 "은은한 조명 밑에서 샤워하며 명상을 하기도 한다"고 후기를 나눴다. 다만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지거나 가구에 부딪힐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의 조명을 켜둬야 한다. 향초를 사용할 때는 화재 위험이 없는지 확인하고, 환기도 충분히 하는 것이 좋다. 너무 익숙해 특별할 것 없던 '샤워'가 이제는 MZ 세대에게 가장 새로운 휴식이 되고 있다. 끊임없이 연결되고, 쉼 없이 자극받는 시대에 MZ들은 지쳤다. 이들은 화려한 여행이나 비싼 취미보다 잠시 세상과 거리를 두는 시간을 통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고 있다.

    2026-08-14 11:50:00

  • [두나의 두발 산책] 시를 품고, 독립을 외치다… 앞산 '시인·애국의 길'

    [두나의 두발 산책] 시를 품고, 독립을 외치다… 앞산 '시인·애국의 길'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쉼터인 앞산. 가벼운 마실을 나서듯 오를 수 있는 '시인, 애국의 길'이 있다. 천천히 숲길을 걷다 보면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대구경북에서 태어난 위인들의 인생을 엿볼 수 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산 이들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엮어낸 산책길을 걸어봤다. ◆ 앞산에서 만난 시인 낙동강 승전기념관부터 앞산 케이블카까지 이르는 짧은 길에 대구경북의 역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기념관에서 출발하면 가장 먼저 두 시인을 만나볼 수 있다. 다만 지금은 앞산 일대에 무장애길을 조성하는 중이라, 두 기념비는 가까이서 관람하기가 어렵다. 먼발치에서 '이윤수 시비'를 둘러봤다. 울퉁불퉁한 돌에 선명한 검은 글자로 그의 삶과 시 '파도'가 새겨져 있다. 시비에 적힌 구절 "헤아려도 헤아려도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삶의 사랑과 슬픔과 고뇌의 씨앗들, 파도 되어 밀려온다"는 구절을 되뇌며 주변을 맴돌았다. 호가 석우인 이윤수 선생은 대구 출신 시인이다. 1938년 일본 시단을 통해 등단한 그는 평생 시 창작에 몰두했다. 멋스러운 옷차림과 건장한 체구, 나이가 든 이후에도 잃지 않은 열정으로 잘 알려졌지만 무엇보다 시를 향한 열정이 남다른 이였다. 그 열정으로 국내 최초의 순수 시 전문지 '죽순'을 대구에서 창간했다. 시를 널리 알리고 오래 기억되도록 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달성공원에 대구 출신 민족시인 이상화를 기리는 시비를 세웠는데, 이는 전국 최초의 시비였다. 이전까지는 시인을 기리는 시비를 세운 사례가 없었던 만큼, 우리나라 시비 문화의 시작을 연 셈이다. 이윤수 시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호우 시비가 자리 잡고 있다. 여름철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 속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은 시비다. 이곳에는 이호우 시인의 대표 시 '개화'가 새겨져 있다. 시인은 1912년 청도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 예술 대학에 유학을 다녀왔다. 1940년 시조 '달밤'으로 등단하고, 매일신문에 근무하며 수많은 칼럼을 썼다. 영남 시조 문학회의 초대 회장을 맡거나, 전국 예술 단체 총연맹을 만들어 민족 문학을 부흥시키는 데도 관심을 가졌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56년 제1회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새겨진 항일의 역사 작고 짧은 다리를 건너 낙동강승전기념관을 지나면 애국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념관 바로 위에는 수풀에 가린 붉은 벽돌 탑이 언뜻 보인다. 편의점 뒤로 돌아서서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우재 이시영 선생의 항일 투쟁을 기리는 기념비가 고고하게 서 있다. 이시영 선생은 대구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다. 대한광복회를 조직한 후 전국 각지와 베이징, 만주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항일 운동의 동력을 만들어냈다. 그의 모습을 본 안창호 선생은 "마치 날개가 달린 호랑이 같다"며 극찬했다. 비와 바람에도 끄덕없을 듯한 기념비의 모습에서 호랑이 같은 기개가 느껴지는 듯했다. 졸졸 흐르는 개울 소리를 따라 다음 코스로 발을 옮겼다. 탁탁 발을 구를 때마다 도망치는 벌레들의 뒤를 쫓아 산을 올랐다. 개울에서 흐르는 차가운 바람과,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밑으로 걷다 보니 더위도 조금 가셨다. ◆ 흉상이 전하는 굳은 의지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송두환, 임용상 선생의 흉상이 있었다. 송두환 선생은 1892년 당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는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귀향한 후 항일 비밀 결사단을 꾸렸다. 신배달회라 불리는 조직은 대구를 거점으로 항일 운동을 펼쳤다. 국산품을 장려해 독립심을 키우는 동시에,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무기를 모았다. 임용상 선생은 경북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그는 주로 무장 항일 투쟁의 선봉장을 밭았다. 일본군이 주재한 곳을 직접 덮쳐 독립을 부르짖거나, 직접 의병을 꾸려 움직였다. 그 혐의로 10개월 동안 감옥에서 옥살이한 뒤에도, 청송과 의성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며 독립심을 다졌다. 끝내 그는 징역 10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이들의 꿋꿋한 삶을 보여주듯 흉상 속 두 선생은 굳건한 표정으로 방문객을 맞이했다. 특히 임용상 선생의 흉상에는 거미줄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지만, 형형한 눈빛만큼은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에도 꺾이지 않았던 독립 의지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 앞을 쉽게 지나칠 수 없어 한동안 흉상 앞을 서성였다.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짧은 마실이었다. 하지만 다섯 사람의 삶을 돌아보고 대구경북의 역사를 되새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여름철 계곡을 찾아 앞산에 올랐다면, 시원한 물길을 따라 '시인, 애국의 길'도 천천히 걸어보길 권한다. 짧은 산책이 예상보다 오래 마음에 남을지도 모른다.

    2026-08-14 11:30:00

  • [데이터로 보는 세상] 늘어나는 온열질환자… 폭염은 재난이 됐다

    [데이터로 보는 세상] 늘어나는 온열질환자… 폭염은 재난이 됐다

    두세 걸음만 내딛어도 땀은 줄줄, 기력은 쭉쭉 빠진다. 에어컨을 끄기가 무서운 더위가 찾아왔다. '살인적인 더위'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단순 비유가 아니다. 작열하는 태양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무더위는 얼마나 더 심각해졌을까. 최근 3년 동안의 데이터로 살펴봤다. ◆ 늘어나는 폭염 피해 질병관리청이 매년 발표하는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신고현황 연보'에 따르면, 온열질환자 수는 증가 추세다. 2023년 2천818명이던 온열질환자는 2024년 3천704명, 2025년 4천460명으로 치솟았다. 매년 20~30%씩 늘어난 셈이다. 추정 사망자 수는 2024년에 소폭 증가했다. 2023년 사망자는 32명, 2024년 사망자는 34명이었다. 작년 추정 사망자는 29명으로 소폭 줄었다. 가장 최근인 2025년 통계를 보면, 온열질환 피해는 특정 계층과 환경에 집중됐다. 4천460명의 79.7%가 남성이었고, 50대가 19.4%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60대가 18.7%, 30대가 13.6%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오 이후에 환자가 집중됐다. 한낮의 복사열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간대로, 야외 작업이나 외부 활동이 많은 사람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시간대다. 오후 3~4시에 481명으로 가장 많았고, 오후 2~3시가 438명이었다. 오후 4~5시와 정오부터 오후 1시 사이에도 각각 400명가량 피해를 봤다. 온열질환자는 주로 야외 환경에서 근무하는 이들이었다. 실외 작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1천431명이었다. 또 논과 밭이 542명, 길가가 522명, 기타 실외가 445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직업군별로 살펴봤을 때, 단순 노무 종사자는 1천160명으로 전체 온열질환자의 26%였다. 무직자는 589명(13.2%)으로 그 뒤를 이었다. 외부 활동이 많은 농림어업 숙련 종사자도 348명으로 상당수를 차지했다. ◆ 증가세 가파른 대구경북 지역별로는 경기도의 피해자가 가장 많았다. 경기도의 온열질환자는 978명으로, 전체 21.9%나 차지했다. 그 뒤를 경북(436명), 경남(382명)이 이었다. 특광역시의 경우 서울이 378명으로 가장 많았고, 인천이 280명, 울산이 188명 순이었다. 전국적으로 온열질환자가 늘어난 가운데 대구·경북의 증가세는 더욱 가팔랐다. 특히 지난해에는 두 지역 모두 환자가 큰 폭으로 늘며 폭염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두 지역을 합친 경북권 전체 환자 수는 2024년 357명에서 2025년 576명으로 약 61.3% 증가했다. 전국 평균 증가율인 20.4%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특히 대구광역시의 환자 증가가 눈에 띈다. 2024년 67명이던 환자는 작년에 2배 이상 늘어, 총 140명으로 집계됐다. 이중 열탈진을 호소한 이가 82명으로 가장 많았다. 뒤이어 열사병 22명, 열경련 22명, 열실신 10명, 기타 4명 순이며 사망자는 없었다. ◆ 경북, 작년 사망자 4명 경북은 단순 환자 수로 전국 2위를 차지한 가운데, 인구 대비 피해자 수도 많았다. 2025년 기준 경북의 인구 10만 명당 온열질환자 수는 16.9명으로, 전남(21.4명)에 이어 울산과 함께 전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발생 빈도였다. 경북에서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는 작년에 4명이었다. 논과 밭에서 2명, 산에서 1명이 사망했고 나머지 한 명은 주거지 주변 실외에서 사망했다. 여름은 해마다 찾아오지만 폭염의 강도는 예년과 같지 않다. 숫자는 더위가 얼마나 위험해졌는지, 또 누가 가장 먼저 그 피해를 떠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대구·경북은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도는 증가세를 보였다. 이제 폭염은 견디는 문제가 아니라 예방하고 대비해야 할 재난이 됐다. 야외 작업자와 농업 종사자 등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폭염 특보에 맞춘 작업시간 조정과 충분한 휴식 등 실질적인 대응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2026-08-14 11:30:00

  • [MZ 연구소] 스마트폰에 '피처폰' 감성 더하는 MZ… 히퍼와 줄이어폰

    [MZ 연구소] 스마트폰에 '피처폰' 감성 더하는 MZ… 히퍼와 줄이어폰

    지금보다 훨씬 더 작은 화면에, 꾹꾹 눌러볼 수 있는 물리 버튼까지. 지금의 스마트폰과는 사뭇 다른 '피처폰'만의 감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건 폰꾸였다. 귀여운 핸드폰 케이스를 끼우는 것뿐만 아니라, 휴대폰 모양에 꼭 맞는 스티커를 붙이고 스트랩을 달았다. 이어폰을 꽂을 수 있는 구멍에 먼지가 들어가는 걸 막는 '먼지마개'에 피규어를 달아 꾸미기도 했다. 폰꾸 유행은 스마트폰이 등장하며 조금 사그라들었다. 스마트폰은 화면이 크고 버튼이 간소화된 만큼 꾸밀 수 있는 면적도 좁다. 휴대폰에 뚫린 구멍도 모두 사라졌다. 꾸밈의 영역이 케이스로 한정되면서, 폰꾸 시장은 케이스 제작과 판매로 한정됐다. 올해 상반기에 과거 유행이 되살아났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모니터 뒤에서 빼꼼 바라보는 듯한 피규어 '히퍼'가 등장해서다. 뒤에서 보면 핸드폰에 귀여운 캐릭터가 대롱대롱 매달린 듯한 모양이라 귀여움을 자아낸다. 히퍼는 납작한 배 부분에 접착제를 발라 둬 어디든 찰싹 붙는다. 화장품 뚜껑이나 책상 모서리에 붙이는 경우도 있다. 캐릭터 브랜드는 유행을 놓치지 않았다. 헬로키티, 소니엔젤을 비롯한 유명 캐릭터의 히퍼가 잇따라 등장했다. 여기에 프로야구 구단인 한화이글스까지 구단 대표 캐릭터를 활용한 히퍼를 출시하며 20대 소비자를 겨냥한 제품 출시가 이어지고 있다. 무선 이어폰의 등장 이후 모습을 감췄던 줄이어폰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충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고, 음질도 훨씬 깨끗해서다. 무선 이어폰만큼 무겁지도 않아 들고다니기도 편하고, Y2K 감성을 불러모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줄이어폰을 이용하는 이들은 SNS를 통해 "이어폰을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해 바지와 가방에 묶는 식으로 꾸밀 수 있어 좋다"거나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자면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줄이어폰은 그럴 걱정이 없어서 좋다"고 후기를 남기고 있다. 줄이어폰도 꾸밈의 대상이 된다. 개성있는 네일 스티커와 큐빅을 붙이거나, 줄을 화려한 장식으로 도배해 자신만의 이어폰을 만들곤 한다. 또 실타래에 실 대신 줄이어폰을 감아 키링으로 활용하거나 귀여운 주머니에 엉키지 않게 담아 보관하고 있다. 수요에 발맞춰 줄이어폰도 다양한 모양으로 출시됐다. 무대 위 가수가 끼는 '인이어'와 비슷하게 생긴 인이어 이어폰이 그 중 하나다. 다른 이어폰보다 귀에 꽂는 부분이 커 스티커를 붙여 꾸미기가 수월하다. 스마트폰은 모두 비슷한 모양이지만, 꾸미는 방식이 다양해지고 있다. 한때 먼지마개와 스트랩이 그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히퍼와 줄이어폰, 작은 장식들이 자신만의 취향을 드러내는 도구가 됐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처럼, 과거의 폰꾸는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2026-08-07 13:13:00

  • [두나의 두발 산책] 도주 중 달콤한 휴식터… 왕건과 지명 산책

    [두나의 두발 산책] 도주 중 달콤한 휴식터… 왕건과 지명 산책

    급박한 대피길이었지만 숨을 돌릴 순간도 있었다. 왕건은 견훤의 추격을 피해 산자락 곳곳에 몸을 숨기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대구 곳곳의 사찰과 지명에 전설처럼 남아 있다. ◆ 은적사 왕건은 걷고 또 걸어 지금의 남구 봉덕동 일대까지 이르렀다. 패전의 충격에 며칠째 이어진 도주로 몸과 마음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 주위를 살피던 왕건의 눈에 대나무숲 너머 작은 굴 하나가 들어왔다. 큰 바위 두 개가 비스듬히 겹친 틈에 만들어진 좁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축축하고 비좁았지만 처지를 가릴 형편은 아니었다. 왕건은 몸을 웅크린 채 견훤의 군대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마침 굴 앞에 거미가 실을 늘어뜨리며 내려왔다. 이후 자신의 집을 짓고자 열심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건은 거미의 집 짓기를 방해하지 않고 계속 숨을 죽였다. 때마침 안개도 짙게 끼기 시작했다. 잠시 뒤 굴 앞을 지나던 견훤의 군사들은 거미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사람이 들어갔을 리 없다고 판단했다. 굴 안을 확인하지 않은 채 발길을 돌렸고, 왕건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굴 안의 물을 마시며 사흘 동안 숨어 지냈다고 한다. ◆ 안일사 굴에서 벗어난 왕건은 도중에 만난 작은 샘에서 갈증을 달랬는데, 이 샘이 오늘날 '왕정'으로 전해진다. 왕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작은 사찰이 있었다. 사찰 주변을 절벽이 두르고 있고, 숨을 만한 굴도 있어 안전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비로소 몸을 누이고 쉬었다고 해 절 이름도 '안일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안일사에서 조금 더 가면 '임휴사'가 나온다. 왕건이 대구를 거의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마음 놓고 쉬어 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팔공산 일대가 까마득히 멀어진 뒤여서다. 잠시 숨을 고른 왕건은 이후 성서와 달성군 일대를 거쳐 성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알쏭달쏭 안지랑에 얽힌 이야기 왕건의 도주와 관련해 안지랑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왕건이 안일사 인근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견훤이 바로 코앞까지 추격해 왔다. 견훤을 '지렁이의 아들'이라 부르던 설화와 연결해, '왕지렁이'가 '안지랑이'로 변했다는 해석이다. 또 왕건이 이곳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머물다 떠났기 때문에 '안지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이 같은 설화가 정설은 아니다. 안지랑의 맑은 계곡물을 마시면 기운을 되찾아 걷지 못하는 사람도 일어설 정도였다고 해, '앉은뱅이'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도 함께 전해진다. ◆ 지금의 은적사 고려로 돌아간 왕건은 거미가 줄을 치던 굴로 돌아왔다. 고승 영조대사에게 굴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고 명령했다. 왕건은 자신이 숨었다는 의미를 담아 '은적(隱蹟)'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은적사는 앞산공원 깊숙한 곳에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산공원 입구에서 20~30분은 걸어야 한다. 그 전까지 비교적 매끄럽게 닦여 있던 땅은 앞산 케이블카 인근부터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이전보다 훨씬 우거진 풀을 구경하며 깎아지듯 높게 솟은 언덕을 올라야 한다. 돌로 된 옹벽 위에 은적사가 고고하게 서 있다. 그다지 큰 절은 아니지만, 깊은 역사를 지닌 절이다. 입구 근처를 맴돌자 은은한 향냄새가 풍겨왔다. 오래된 절에서 풍겨오는 엄숙한 분위기에 절로 숨을 죽이게 됐다. 대웅전 왼쪽에는 왕건이 몸을 숨겼다는 굴이 남아 있다. 여름철이라 우거진 나무와 달려드는 벌레를 피해 잠시 구경해볼 수 있다. 굴 안에는 작은 불상이 왕건이 머물렀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왕건의 도주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도시의 일부로 남아 이어져왔다. 역사는 책 속에서만 남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지명과 매일 걷는 길 위에도 천 년 전 한 왕의 발자취가 스며 있다.

    2026-08-07 12:45:00

  • [데이터로 보는 세상] 탈시설 장애인, 기초수급자 ↑ 만나는 사람 ↓…

    [데이터로 보는 세상] 탈시설 장애인, 기초수급자 ↑ 만나는 사람 ↓… "지속 가능한 탈시설 필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길 바란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도 그 꿈을 안고, 시설 바깥으로 한 발짝을 내딛었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바깥 삶에 정착했을까. 정착을 위해 더 필요한 건 없을까. 물음에 답하기 위해 대구시 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에서 대구시 관할 거주 시설을 퇴소한 장애인들을 조사했다. 작년 9월과 10월에 조사를 진행했으며, 퇴소 후 지역 사회에 정착한 장애인 135명이 그 대상이다. ◆ 오랜 시설생활 끝에 자립 조사 결과 응답자 중 56.3%가 지적 장애인이었다. 뇌병변장애 22.2%, 정신장애 9.6% 순이었다. 특히 타지역과 달리 '노숙인 시설'에 있다가 퇴소한 이들이 32.6%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시설에서 머무르다가 퇴소를 결심했다. 응답자의 51.1%가 20세 미만에 시설에 입소했다고 응답했다. 당시 입소의 주된 원인은 돌봄의 부재로, '가족 및 주변에 돌볼 사람이 없어서'가 38.5%를 차지했다. 이후 시설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이들의 시설 평균 거주기간은 24.9년에 달했다. 그렇다 보니 자립의 이유도 독립적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들은 자립의 이유로 '단체생활이 아닌 혼자 살고 싶어서'(68.9%)라고 응답했다. 자립 이후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다. 일상생활에서의 '삶에 대한 선택과 결정'에 대한 만족도가 특히 높게 나타났다. 또 외출 빈도도 잦았다. 거의 매일 외출한다는 응답이 74.8%에 달했다. ◆ 고립 우려 심화 다만 도움 없이는 생활하기 어렵다는 응답이 주를 이뤘다. 응답자의 83.0%가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또 일상생활 지원의 79.3%, 여가활동 동행의 62.2%를 활동지원사에게 의탁하는 상황이었다. 서비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활동지원서비스 이용자 중 50.4%가 '서비스 시간이 부족하다'고 응답했다. 또 평균 152.2시간의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다. 주변 지인들과의 사회적 교류도 잦지 않은 편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지인은 평균 2.3명이지만, 21.5%는 지인이 '한 명도 없다'고 답했다. 특히 정신장애인은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1.77명으로 가장 적었다. 또 응답자의 40.0%는 '중요한 물건을 맡길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응답했다. 친밀하게 교류하는 이가 없는 만큼, 자립 지원 인력에게 심하게 의존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 경제와 건강, 현실의 벽 응답자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였다. 94.1%가 기초생활수급자이며, 평균 월 소득은 122.4만 원, 월 생활비는 72.4만 원이었다. 응답자의 93.3%가 생활비 지출 항목 중 '식료품비'를 가장 지출이 많은 항목으로 꼽아, 저축 등 자산 형성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재산 관리를 스스로 하는 비율은 42.2%에 불과하며, 스스로 관리하지 못하는 이들 중 75.6%가 활동지원사나 코디네이터 등 전담인력의 도움을 받고 있다. 만성 질환의 유병률도 높았다. 응답자의 74.8%가 만성질환이 있으며 그 가운데, 79.3%가 관련 약을 먹고 있었다. 또한 한 달간 의료기관 이용률은 72.6%에 달했다. ◆ 현장 "퇴소 후 관리체계 필요" 현장 종사자들은 이러한 자립 장애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자립 장애인의 고립을 막고, 체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에 따라 장애인 지역사회통합지원센터의 기능 강화를 주문했다. 퇴거 이후에도 복지관 등 인근 기관과 연계해 안부를 확인하고, 낮활동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 이들은 의료 정보 접근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봤다. 시설 퇴소 과정에서 당사자의 과거 병력, 약물 복용 기록 등 필수 의료 정보가 현장에 제대로 인수인계되지 않아 초기 자립 시 시행착오를 겪어서다. 시설을 떠난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활동 지원과 의료, 사회적 관계망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단순히 퇴소자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갖추는 게 필요한 때다.

    2026-07-31 13:13:00

  • [MZ 연구소] 주파수와 사주·타로… 샤머니즘에 푹 빠진 MZ

    [MZ 연구소] 주파수와 사주·타로… 샤머니즘에 푹 빠진 MZ

    "2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쭉 이것만 들었어요. 2주 차에 연락 왔네요. 기 받아가세요". 알쏭달쏭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대체 어떻게 재회에 성공했다는 걸까. 그 비결은 주파수다. 주파수 영상은 염원하는 것을 이뤄진다는 일종의 미신이다. 특정 주파수의 소리와 함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벌레 소리, 물 흐르는 소리나 클래식이 함께 흘러나온다. 이 소리를 들으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믿음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를 성공시켜 준다거나, 헤어진 연인과 재회할 수 있다는 내용의 주파수가 먼저 인기를 끌었다. 이 영상을 본 뒤 원하는 걸 이뤘다는 '간증' 댓글까지 이어졌다. 영상들의 조회수가 높아지니 비슷한 영상이 쏟아졌다. '부자가 되는 금전운 주파수', '기분 좋은 소식이 붙는 주파수'가 뒤이어 제작됐다. 그중에서도 최근 인기를 끈 건 '아이돌처럼 예뻐지는 주파수'다. 장원영, 카리나 등 여자 아이돌 중에서도 MZ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돌처럼 될 수 있다는 홍보 문구를 달았다. 영상 제작자는 '잘 때 들어야 효과가 있고, 계속 틀어 놓아야 성공 확률이 높다'는 사용법으로 MZ들을 유혹하고 있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번진 샤머니즘 열풍은 타로 콘텐츠로도 이어졌다. 이제는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타로점을 볼 수 있는 시대다. 방식은 간단하다. 영상을 재생하면 여러 장의 카드가 화면에 펼쳐지고, 마음이 끌리는 카드 한 장을 선택한다. 이후 제작자는 각 카드의 의미를 차례대로 설명하고, 시청자는 자신이 고른 카드의 해석만 들으면 된다. 주제도 다양하다. 연애운과 재물운, 건강운은 물론 인간관계와 진로, 올해의 운세까지 원하는 분야의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자신의 미래가 궁금해 영상을 찾는 이들도 있지만, 차분한 목소리와 잔잔한 분위기를 수면 콘텐츠나 힐링 콘텐츠처럼 소비하는 시청자도 적지 않다. MZ들의 샤머니즘 사랑은 점차 확장되고 있다. 최근 SNS인 X에서는 무료로 사주를 볼 수 있는 사이트가 화제됐다. 일부 사이트는 10대의 가장 큰 궁금증인 진학 대학을 맞춘다고 입소문이 났고, 홈페이지 방문자의 수가 대폭 늘어나 한동안 접속할 수 없기도 했다. 사주를 간단히 분석한 뒤 그 결과를 AI에 입력해 맞춤형 상담을 받는 사례도 늘고 있다. 무료 사주 사이트에서는 건강운이나 대운 등 기본적인 해석만 제공하는 경우가 많지만, AI는 이용자의 질문에 맞춰 추가 설명을 이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올해 운이 좋다는데, 로또에 당첨될 가능성도 있는 건가?", "이동수가 있다는데 집을 옮기는 건지, 회사를 옮기는 건지 알려달라"와 같은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면 이에 맞는 해석을 제시하는 식이다. 이런 콘텐츠가 실제 미래를 예측한다는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MZ세대는 알고리즘이 추천한 주파수를 듣고, AI에게 사주를 묻고, 온라인 타로를 뒤적인다. 점술은 더 이상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켜면 언제든 소비할 수 있는 일상의 콘텐츠가 됐다.

    2026-07-31 12:20:00

  • [두나의 두발 산책] 패전의 아픔 달래기도 잠시… 왕건의 계속되는 도주

    [두나의 두발 산책] 패전의 아픔 달래기도 잠시… 왕건의 계속되는 도주

    아끼는 부하들을 잃었다. 남은 건 패전의 상처를 깊게 입은 소수의 군사뿐이었다. 왕건은 부하들을 잃은 곳에서 멀지 않은 산에 올랐다. 패전했지만 왕을 살린 산이라 해, 훗날 이 산은 '왕산'이라 불리게 됐다. 머릿속에는 후회와 미안함, 두려움이 어지럽게 얽혔다. 시끄러운 속을 잠재우고자 왕건은 평평한 돌 위에 홀로 앉았다. 이 일화에서 '독좌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독좌암 아래 마을도 자연스레 '독암마을'이라 불리게 됐다. 부하들의 기지로 잠시 적을 따돌렸지만, 왕건에게 시간은 많지 않았다. 남은 이들의 목숨이라도 지켜야 했다. 바위에서 몸을 일으킨 왕건은 남은 부하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휴식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 부지런히 걸어야 견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아이들만 남은 마을 산을 벗어나 마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언제 적군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고, 주민들 역시 낯선 군사를 반길 처지가 아니었다. 왕건 일행은 눈에 띄지 않게 길을 골라 이동했을 것이다. 한참을 달리던 이들은 산 아래 마을의 풍경과 마주했다. 흔히 생각하는 마을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어른은 보이지 않고 어린아이들만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쟁은 군대끼리만 싸우는 일이 아니다. 민간인도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수 있었고, 적에게 식량이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마을을 불태우기도 했다.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은 마을을 버리고 도망쳤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아이들만 남았다고 한다. 그렇게 '늙은이가 없는 동네'라는 이름의 불로동 지명을 얻었다. ◆ 괴목나무 아래 닭 괴전동은 공예품 재료로 쓰이는 괴목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이후 송전동과 합쳐지면서 지금의 괴전동이 됐다. 영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곳도 왕건과 인연이 있다는 설이 있다. 괴전동은 과거 '괴은골', '괴동' 등 유사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중 눈길을 끄는 건 '계명동'이라는 별명이다. 닭 계(鷄)자를 써 괴목나무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은 팔공산을 빠져나와 이곳을 지나다가 새벽닭 울음소리를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온다는 신호였다. 왕건은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다시 길을 재촉했고,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해 이곳을 계명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 새벽 반달 아래서 안심 적군이 언제 들어 닥칠지 모르니 쉴 수가 없었다. 오랜 도주로 몸이 축축 늘어져도 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결국 밤을 새워 남동쪽으로 도망쳤다. 겨우 왕건은 숨을 고르고 하늘을 바라봤다. 새벽녘 하늘에는 반달이 걸려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도망쳤으니, 이제야 안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반야월과 안심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 홀로 남은 독좌암 도주로의 시작이던 독좌암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봉무정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위치는 지금과 달랐다. 과거에는 봉무정 아래 개천 남쪽에 있었지만, 도로가 들어서면서 북쪽으로 옮겨졌다. 사람 네댓 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평평한 바위였다. 표면에는 오랜 세월이 남긴 퇴적층의 줄무늬가 선명했다. 홀로 앉아 부하들을 생각했을 왕건 대신, 산을 뛰노는 고양이가 바위 위에 올라타 여유를 즐겼다. 긴박했을 피난의 이미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바위 주변으로는 봉무정 아래 개천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길을 따라 걸으면 농구장, 분수대가 있는 위남공원과 파크골프장 등 주민들을 위한 공간이 이어진다. 천 년 전 왕건이 목숨을 걸고 지나간 길은 이제 시민들의 평범한 산책길이 됐다. 전쟁의 함성은 사라졌지만, 그날의 흔적은 독좌암과 왕산, 불로동, 괴전동, 반야월, 안심이라는 이름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2026-07-31 12:02:00

  • [취재현장-정두나] 선거에 필요한 레시피 노트

    [취재현장-정두나] 선거에 필요한 레시피 노트

    퇴근 후 유일한 낙은 직접 만든 요리를 먹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대접할 만큼의 솜씨는 아니지만 내 입에만 맛있으면 될 일 아닌가. 먹고 싶은 요리의 레시피를 수집해 공부하고, 나만의 개성을 더해 완성한다. 먹기 전 자랑을 위한 사진 촬영도 빼놓을 수 없다. 설거지와 뒤처리까지 할 일이 산더미지만, 유일한 취미를 놓치긴 싫다. 멋들어진 음식 뒤편에는 누덕누덕한 '레시피 노트'가 있다. 천원짜리 공책에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괴발개발 글씨체로 요리법을 수정한다. '유튜브, 블로그에서는 당근을 채소와 함께 넣으라고 함. 직접 해보니 당근을 가장 먼저 넣는 게 나을 듯' '다음 번에는 물 대신 우유를 넣어보기 도전'. 종이를 찢어버리고 새롭게 쓰는 게 더 깔끔하겠지만, 수정을 고집한다. 예전에 어떤 실수를 했는지를 알아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서다. 여러 개의 요리법을 합쳐 보고, 수차례의 시도와 기록이 쌓인 뒤 비로소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아쉽게도 이 당연한 법칙이 선거에는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선거는 오지선다 중 단 1개의 답만 고르고, 나머지 선지는 모두 빨간 펜으로 '틀림' 표시를 한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 낙선인은 소리 소문 없이 지워진다. 선거 기간 내내 거리마다 걸려 있던 공약은 철거되고, 온라인에 넘쳐 나던 게시물도 금세 뒤로 밀린다. 다음 선거에 다시 출마하더라도, 사람들은 처음 보는 후보인 양 그를 마주한다. 공약을 후보자의 '버킷리스트'로 보고 미련 없이 지우면 곤란하다. 우리 지역의 출퇴근길이 왜 막히는지, 아이를 맡길 곳이 왜 부족한지, 청년이 왜 떠나는지, 노인이 왜 불편한지에 대한 진단이다. 후보들은 저마다 지역의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해법을 제시해 뒀다. 같은 문제에도 해법은 여러 가지다. 교통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도로를 넓히거나 지하철역을 짓는 것만이 아니다. 마을버스를 늘릴 수도 있고, 대중교통 노선을 손보는 방법도 있다. 낙선인의 공약을 살펴보면, 다양한 선택지를 공부할 수 있다. 그 기록은 시간이 쌓일수록 더 큰 의미가 있다. 오래된 공약을 보면 4년 전 지역의 핵심 현안이 무엇인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는지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연대기를 참고해 더 나은 공약을 내놓을 수도 있고, 어떤 후보의 공약이 더 좋은지 판단하기도 쉽다. 지역의 문제를 담아낸 기록을 쉽게 버리지 말자. 좋은 레시피가 수많은 메모 끝에 완성되듯 좋은 정책도 축적된 기록 위에서 더 단단해진다. 낙선인과 당선인, 둘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지역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서로 다른 기록이다. 취재하며 씁쓸한 이야기를 들었다. "낙선인의 공약을 살펴보는 일, 정말 중요합니다. 잘 정리해 공개하면 당연히 좋죠. 그런데 솔직히 당선인의 공약조차 제대로 보지 않는 사람이 많잖아요." 기사를 다 쓴 후에도 계속 곱씹게 되는 말이다. 공약보다 사람을, 정책보다 정당을 먼저 보는 문화가 여전히 강하다. 당선인의 공약조차 제대로 검증되지 않는데, 낙선인의 공약에 시선을 돌리자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을까. 어쩌면 한발 앞선 주문일지도 모른다. 먼저 선거의 무게 추를 공약으로 옮겨와야 한다. 사람을 선택할 때 무엇보다 공약을 먼저 살피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면, 낙선인의 공약을 지역의 기록으로 남기자는 제안도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더 나은 선택으로 나아가는 선거가 되길 바란다.

    2026-07-27 05:30:00

  • [MZ 연구소] MZ 놀이터 된 냉동실… '얼먹' 열풍

    [MZ 연구소] MZ 놀이터 된 냉동실… '얼먹' 열풍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먹어온 젤리와 과자가 질렸다면? MZ세대는 냉장고에서 새로운 답을 찾고 있다. 익숙한 간식에 음료나 과일을 더해 얼리거나, 조합을 바꿔 새로운 식감과 맛을 만드는 '얼먹(얼려 먹기)' 레시피가 SNS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다. 사실 얼려 먹는 문화 자체는 낯설지 않다. 아이스크림은 물론, 작은 요구르트나 음료를 냉동실에 넣어 먹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잘 벗겨지지 않는 플라스틱 용기를 이로 뜯다가 입안을 다치기도 하고, 손에 녹지 않게 급하게 먹던 기억도 익숙하다. 원하는 모양대로 초콜릿을 짜서 얼려 먹는 제품처럼 '얼려 먹는 재미'를 앞세운 간식도 오래전부터 판매돼 왔다. 달라진 점은 기성품을 그대로 얼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얼먹' 메뉴는 젤리다. 가까운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서 젤리와 사이다만 사 오면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다. 넓은 밀폐용기에 젤리를 펼쳐 담은 뒤 바닥이 살짝 잠길 정도로 사이다를 부어 냉동하면 완성된다. 다만 사이다를 너무 많이 넣으면 젤리 본연의 단맛이 옅어질 수 있어 적당한 양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젤리를 그대로 얼리지 않고 사이다를 넣는 걸까. 사이다의 단맛이 더해질 뿐 아니라, 기존의 쫄깃한 식감 대신 바삭하게 부서지는 색다른 식감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수분이 더해지면서 잇몸이 아플 정도로 딱딱하게 얼어붙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테이프처럼 길게 이어진 젤리를 여러 겹으로 접어 얼리거나, 레몬즙이나 사과즙을 넣어 신맛을 더하는 등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드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맛과 식감이 달라지는 만큼, 젤리가 얼기를 기다리며 기대감을 키우는 것도 하나의 놀이다. 유행은 젤리를 넘어 다른 음식으로도 번졌다. 그릭요거트와 요거트는 물론 샤인머스캣, 수박 같은 과일, 초콜릿이나 초코 과자까지 냉동실로 향한다. 평범했던 간식도 얼리는 순간 색다른 식감과 맛을 내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맛있거나 독특한 조합을 발견하면 SNS에 영상을 올린다. '이 안아픈 젤리 얼먹.zip(모음집을 의미하는 말)', '얼먹하기 좋은 과자 TOP 4', '얼먹 젤리 100% 성공법'이라는 이름으로 레시피가 공유되고 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다시 따라 하며 후기를 남기는 방식으로 특정 레시피가 입소문을 탄다. '얼먹' 열풍은 올해 상반기부터 시작돼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나의 레시피가 입소문을 타면 비슷한 조합이 잇따라 등장하고, 또 다른 재료를 더한 새로운 얼먹이 탄생한다. 익숙한 간식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즐기려는 호기심과 직접 만들어 공유하는 재미가 만나, 냉동실이 새로운 간식 실험실로 변하고 있다.

    2026-07-24 13:27:00

  • [두나의 두발 산책] 도망쳐라, 뒤에 견훤이 온다… 왕건과 지명 산책

    [두나의 두발 산책] 도망쳐라, 뒤에 견훤이 온다… 왕건과 지명 산책

    공산 전투는 오래전에 막을 내렸지만, 그 흔적은 아직 대구 곳곳에 남아 있다. 왕건의 패주와 견훤의 추격, 병사들의 함성과 비명이 스며든 지명들은 천년의 세월을 건너 오늘도 당시의 치열했던 전장을 증언하고 있다. 살내천 일대에서는 견훤과 왕건의 군사들이 사활을 걸고 칼을 맞댔다. 둘 중 하나가 무너져야 끝나는 전쟁이었다. 팔공산 자락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전선은 이리저리 출렁이며 엎치락뒤치락했다. ◆ 패배는 고개 이름을 남기고 이 과정에서 '나팔고개'가 이름을 얻었다. 고려군이 고개 너머에 진을 친 후백제군을 향해 나팔을 불었다는 설, 반대로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포위하며 진격의 나팔을 울렸다는 설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 쪽이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수많은 병사가 갑옷을 부딪치며 고개를 내달렸을 것이다. 전선은 이제 동화사와 파계사로 올라가는 갈림길로 옮겨졌다. 고려군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와 후백제군에게 맞섰으나 참담히 패배한다. 장수들은 후백제 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며 도망쳤다. 이들 고려군이 파했다고 해 고갯길은 '파군재'라고 불리게 됐다. 그때 고려군의 잔당을 해치우던 후백제군의 눈이 번뜩였다. 고려군의 수장인 왕건이 보이지 않아서다. 그를 비롯해 충직한 신하 신숭겸과 김락도 자취를 감췄다. 그들의 목을 베어내지 않으면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터였다. 후백제군들은 이미 피로 얼룩진 칼을 쥐고 수장들을 찾아 나섰다. ◆ 대신 죽는 충신들 도망치던 왕건을 충직한 신하들이 붙들어 세웠다. 자신들이 짜낸 마지막 묘책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군사를 통솔하는 왕의 상징인 겉옷을 벗긴 뒤, 신숭겸 장군이 자신의 옷과 바꿔 입혔다. 자신이 왕건의 행색을 하고 적을 유인할 테니 그사이 몸을 피하라는 뜻이었다. 김락 등 충직한 장수 몇 명도 뜻을 함께했다. 몇 번의 손짓 끝에 영락없는 왕의 무리가 완성됐다. 신숭겸 일행은 달음박질치며 후백제군을 유인했다. 눈이 벌게진 후백제군은 계책에 속아 넘어갔고, 왕건과는 점점 멀어졌다. 결국 신숭겸과 김락 등은 추격해 온 적들에게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의 왕은 살아남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 지혜로운 계책이 나온 곳이라 해 지금의 '지묘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왕을 살리고 대신 죽음을 택한 이는 모두 여덟 명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충절을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그래서 공산은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여덟 공신의 넋을 기린다는 뜻에서, 대구와 경북 지역을 두루 껴안은 산이 오늘날 '팔공산'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 산책길 된 도주로 팔공산 자락에는 왕건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왕건길'이 있다. 왕건의 행적을 담아 조성한 길로, 총 8개 테마 코스로 구성돼 있다. 이 기나긴 숲길의 시작점은 '신숭겸장군 유적지'다.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신숭겸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으로, 장군의 영정과 순절비가 자리하고 있다. 유적지에서 산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대곡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길목에서는 등산을 즐기는 주민들뿐 아니라 완만한 오솔길을 가볍게 달리는 자전거 이용객들도 마주칠 수 있다. 길이 어렵지 않다보니, 사람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부채질을 하며 산을 오른다. 오랜 세월 동네 사람들의 산책로이자 쉼터 역할을 해온 친숙한 길이다. 숲길을 지나 마침내 전망대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인다. 눈앞에는 팔공산 능선과 함께 왕건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자락이 한눈에 펼쳐진다. 지금은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이지만, 천여 년 전 이곳에서는 왕건과 견훤의 군대가 험준한 산세를 타고 넘으며 목숨을 건 격전을 벌였을 것이다.

    2026-07-24 13:22:00

  • [창간 80년, 격동 80년] 말 한마디가 죄, 긴급조치의 시대

    [창간 80년, 격동 80년] 말 한마디가 죄, 긴급조치의 시대

    1975년 대한민국은 '긴급'이라는 이름 아래 숨을 죽여야 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가 잇따라 발동되면서 국민의 기본권은 뒤로 밀려났다. 긴급조치는 유신체제를 지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 유신이 낳은 권한 긴급조치의 출발점은 유신헌법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위한 발판으로 유신헌법을 만든다. 정부는 안보 위협과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가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장기 집권을 위한 제도 개편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당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지지 세력이 뭉치면서, 연임을 낙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방법은 단 하나였다. 편법을 벌여야 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기로 했다. 대통령의 연임 제한도 없앴다. 반면 국회의 국정감사권은 폐지됐고, 연간 회기 역시 150일 이내로 제한됐다. 거꾸로 대통령의 권한은 대폭 확대됐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긴급권'인 긴급조치였다. 대통령이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 유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국민의 기본권과 사법 절차까지 제한할 수 있었다. 대통령을 견제하던 장치들도 긴급조치 앞에서는 속수무책 힘을 잃었다. ◆ 긴급조치의 칼날 첫 번째 긴급조치는 1974년 내려졌다. 전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이 확산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강하게 억제하기 시작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개정·폐지를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이어 발표된 2호는 위반자를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정부는 북한의 위협과 불안한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조치는 실제 처벌로 이어졌다.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장준하와 백기완 등이 구속됐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각계 인사와 대학생들이 잇따라 체포돼 법정에 섰다. 같은 해 발표된 긴급조치 4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관련 단체 가입, 집회 참여 등을 금지하고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야당은 곧바로 맞섰다. 긴급조치 1호와 4호의 해제를 요구하는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며 정권을 압박했다. 결국 같은 해 8월과 12월에는 긴급조치 5호와 6호가 발표되면서, 기존 긴급조치가 해제됐다. ◆ 이어지는 일상 통제 사태는 종식되지 않고 1975년까지 이어졌다. 대통령이 긴급조치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한,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4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 7호는 고려대학교를 겨냥했다. 당시 고려대 학생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전방위적으로 정권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꺼내 들며 그들에게 철퇴를 내린다. 7호는 고려대학교를 정조준했다. 휴교를 명하고, 학교 내 집회와 시위를 전부 금지했다. 조치를 위반할 때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영장 없이 체포와 구금이 가능했다. 조치가 시작되자 고려대학교 앞은 을씨년스러워졌다. 철모와 총을 든 군인들이 교문을 에워싸고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 달여 뒤인 5월 13일 긴급조치 8호로 7호는 해제됐지만, 곧바로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9호는 가장 광범위한 긴급조치였다. 정부는 국가 안전과 공공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헌법을 부정하거나 개정을 주장하는 행위,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 등을 모두 금지했다. 영장 없는 체포와 구금, 압수수색도 허용됐다. 술에 취해 "유신헌법은 독재를 위한 헌법"이라고 말하거나, 가족의 죽음에 격분해 대통령을 욕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었다. 이 때문에 "막걸리만 마시고 말실수를 해도 잡혀간다"며 긴급조치 9호를 '막걸리 보안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9호 조치는 4년 7개월간 이어진다. 긴급조치의 피해자만 1천140명이고, 이 중 970여 명은 9호 조치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 뒤늦은 위헌 결정 긴급조치에 대한 법적 평가는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뒤집혔다. 2013년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1호와 2호, 9호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긴급조치는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봤다. 또 긴급조치는 국민의 신체와 인신의 자유, 행복 추구권과 적법 절차에 따른 형사처벌 원칙 등을 위배하거나 과도하게 제한한 불법행위라고 해석했다. 이로써 긴급조치로 인해 전과자가 됐던 이들은 기록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 2022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후 유신 철폐를 요구하다 불법 체포·구금된 이철우 목사 역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긴급조치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수많은 시민을 범죄자로 만들었고, 일상의 말과 행동까지 통제했다. 국가의 잘못은 뒤늦게 인정됐지만, 그 상처와 흔적은 오랫동안 남았다.

    2026-07-24 13:21:00

  • [데이터로 보는 세상] 나이 따라 달라지는 대구 관광지도… 20대 수성못·60대 수목원

    [데이터로 보는 세상] 나이 따라 달라지는 대구 관광지도… 20대 수성못·60대 수목원

    같은 대구를 둘러봐도 세대마다 마음을 빼앗기는 장소는 제각각이다. 도심 속에서 활기찬 활동을 찾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연과 역사 속 여유를 좇는 이들도 있었다. 세대별로 선호하는 관광지와 최근 떠오른 '핫플레이스'에는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한국관광 데이터랩의 세대별 관광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 차이를 알아봤다. 데이터랩은 티맵 등 내비게이션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기 있는 대구 관광지의 순위를 매겨 공개하고 있다. ◆ 남녀노소 찾은 인기 명소 전체 연령대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관광지는 EXCO 서관이었다. EXCO는 각종 박람회와 전시, 콘서트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전체 검색량의 9.6%를 차지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콘텐츠를 갖춘 점이 높은 순위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2위는 이월드(8.1%)였다. 놀이기구와 야간 경관 등 다양한 즐길 거리를 갖춘 대표 레저시설로, EXCO와 비슷한 수준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그 뒤로는 수성못(7.1%)과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6.7%)가 이름을 올렸다. 도심 속 휴식 공간과 스포츠 관람 시설은 꾸준히 사랑받으며 대구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꼽혔다. ◆ 연령 따라 달라진 관심사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관광지 선호도는 뚜렷하게 갈렸다. 20대가 가장 많이 검색한 관광지는 수성못이었다. 이어 2·28기념중앙공원,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이월드 순으로 나타났다. 2·28기념중앙공원의 높은 순위는 동성로와 가까운 주차시설 이용 수요가 반영된 결과로 추정된다. 20대는 전반적으로 도심 속 휴식 공간과 활기찬 놀거리, 데이트 명소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다른 연령대와 비교해 롯데시네마와 CGV, 메가박스 등 영화관이 상위 30위 안에 다수 포함된 점도 특징적이다. 접근성이 좋고 즉각적인 문화·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에 관심이 집중된 셈이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활동성이 높은 관광지에 대한 선호는 점차 낮아졌다. 30대는 각종 박람회와 전시가 열리는 EXCO 서관(10.3%)을 가장 많이 찾았다. 문화생활을 즐기면서도 실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에 대한 수요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40대는 자녀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장소로 관심이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국립대구과학관이 4위(5.0%)로 급부상한 것이 대표적이다. 대구간송미술관과 삼국유사테마파크 등 교육과 체험을 겸할 수 있는 관광지도 상위권에 올랐다. 가족 단위의 나들이 수요가 큰 영향으로 추정됐다. 50대와 60대 이상에서는 자연 친화적인 휴식 공간이 강세를 보였다. 50대부터 옥연지송해공원과 대구수목원이 최상위권으로 올라섰고, 60대 이상에서는 대구수목원(9.8%)과 옥연지송해공원(9.5%)이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이전 연령대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동화사와 파계사 등 사찰도 상위권에 포함됐다. 60대 기준으로 동화사는 4위, 파계사는 10위에 올랐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종교시설과 역사 공간에서 여유를 찾으려는 수요가 커진 것으로 해석된다. 또 순위표에는 다수의 골프장이 등장했다. 도심 한복판의 문화·여가 공간보다 외곽에서 자연을 즐기며 머무를 수 있는 관광지로 관심이 옮겨가는 모습이다. ◆ '뜨는 곳'도 세대차 그렇다면 최근 들어 관광객이 가장 빠르게 늘어난 곳은 어디일까. 올해 5월 기준 최근 3개월과 비교한 결과, 20~40대에서는 영화관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CGV대구', 'CGV대구스타디움', 'CGV대구죽전' 등이 핫플레이스 상위권에 오르며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문화생활을 일상 가까이에서 즐기려는 젊은 세대의 수요가 집중된 결과로 보인다. 반면 60대 이상 핫플레이스 순위에는 영화관이 단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남평문씨본리세거지(1위·127.3% 성장), 사유원(3위), 대구간송미술관(6위), 도동서원(8위) 등 역사·문화·자연 자원을 갖춘 관광지의 검색량이 증가했다. 데이터는 단순히 어느 관광지가 인기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세대마다 도시를 소비하는 방식과 관광에 기대하는 가치가 얼마나 다른지도 함께 드러낸다. 이는 특정 관광지 몇 곳의 흥행만으로는 도시 전체의 관광 경쟁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화·여가 시설과 체험형 콘텐츠, 자연·역사 자원이 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관광자원을 균형 있게 육성하는 것이 앞으로 대구 관광이 풀어야 할 과제로 보인다.

    2026-07-17 14:30:00

  • [두나의 두발 산책] 대구 지명의 뿌리를 찾아서… 왕건과 지명 산책

    [두나의 두발 산책] 대구 지명의 뿌리를 찾아서… 왕건과 지명 산책

    매일 지나치는 익숙한 지명 속에는 1천 년 전 태조 왕건의 '절체절명의 탈출로' 역사가 담겨 있다. 왕건과 견훤의 군대가 팔공산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며, 대구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 지금은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과거 이곳은 치열한 전쟁터였다. 전쟁의 서막부터 그 사연을 좇아보자. ◆ 경주를 삼킨 견훤 시계를 927년 후삼국 시대로 돌려보자. 당시 고려와 신라는 손을 잡고 후백제를 압박하려 했다. 이에 맞선 후백제의 견훤은 거세게 반격하며 판을 뒤집으려 했다. 견훤은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그는 신라를 정조준했다. 문경과 영천을 차례로 휩쓴 뒤 마침내 경주로 진격했다. 다급해진 신라는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경북으로 향했다. 그러나 견훤이 한발 빨랐다. 경주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군대에 짓밟힌 백성들은 피할 틈도 없이 쓰러졌다. 견훤은 경애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몰아붙였고, 경순왕을 강제로 왕위에 앉혔다. 이어 경순왕의 친족들을 포로로 끌고 가며 성대한 귀향길에 올랐다. 왕건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목표는 단 하나, 돌아가는 견훤 군대의 뒤통수를 치는 것. 지금의 팔공산 동화사 인근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고, 그가 방심하는 순간 단숨에 끝장을 낼 생각이었다. 신라의 왕은 이미 죽었다. 견훤이 여기서 더 덩치를 키운다면, 다음 차례는 고려일지 모른다. 왕건의 눈에는 살기마저 서려 있었다. 바야흐로 '공산 전투'의 시작이었다. ◆ 무태, 왕의 한마디 돌아가는 후백제군을 덮치려면 무엇보다 속도가 중요했다. 왕건은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들을 중심으로 군을 꾸렸다. 그리고 고려의 왕인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섰다.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 한순간에 적을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왕건은 진군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적진이 멀지 않다. 한눈팔지 말고 서둘러 나아가자.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견훤의 군대를 끝장내자". 왕의 외침에 병사들은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들이 '게으르지 말라(무태)'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행군했고, 그 군사들의 발길이 닿은 곳이 훗날 '무태'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는 설이 전해진다. ◆ 전장에 스민 독서, 연경동 '경전을 연구한다'는 뜻의 '연경동' 지명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왕건의 군대가 이 일대를 지나던 때였다. 그의 귀에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비들이 경전을 읽으며 학문을 닦는 소리였다. 견훤의 군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장한 채 진군하던 왕건에게 그 낭랑한 독서 소리는 깊은 인상을 남긴 듯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 기억이 오늘날 '연경동'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 살내가 된 동화천 전쟁은 왕건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견훤과 왕건은 지금의 태조지로 불리는 산자락에서 크게 맞붙었지만, 승기는 견훤에게 기울었다. 신라를 짓눌렀던 그 기세 그대로 후백제군은 고려군을 거세게 밀어붙였고, 예상 밖의 공세에 왕건은 결국 후퇴를 결심한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했다면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건은 지금의 동화천 일대에서 군열을 가다듬으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강 건너편에는 견훤의 군대가 눈에 살기를 품은 채 진을 치고 있었다. 두 군대는 천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맞섰다. 화살과 창이 빗발치고, 누가 쫓고 누가 쫓기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천을 따라 떠내려온 화살이 강물을 뒤덮을 만큼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천을 '살내'라 불렀다. ◆ 과거 전장, 이제는 쉼터 지금의 동화천은 격전의 기억이 무색할 만큼 평화롭고 고요하다. 한때 피 냄새가 짙게 배었을 물가에는 은은한 물비린내만 맴돌고, 팔공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에는 화살 대신 작은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친다. 낮은 물결이 흐르는 천변에는 소금쟁이와 왜가리가 노닌다. 강변에 자라는 억새 상에는 조잘조잘 떠드는 듯 새들이 풀을 간지럽히는 소리가 난다. 주민들은 가볍게 달리거나 천변에 마련된 운동 기구에 앉아 몸을 푼다. 장미가 피어나는 계절이면 산책로는 붉은빛으로 물들고, 밤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져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한때 왕건이 목숨을 걸고 달아나야 했던 동화천은 이제 사람들의 산책길과 쉼터로 쓰이고 있다. 공간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동화천처럼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또 다른 지명들에도, 아직 들춰보지 못한 왕건의 흔적과 이야기가 남아 있다. (다음 주 계속)

    2026-07-17 13:13:00

  • [MZ 연구소]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또 등장한 젤리슈즈

    [MZ 연구소]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또 등장한 젤리슈즈

    20여년 전 유행을 휩쓸었던 젤리슈즈가 재등장했다. 젤리슈즈는 2000년대 초에 잠시 유행하다가 '추억의 신발'로 취급받게 된 지 오래였다. 반짝거리는 외형에 쭉쭉 늘어나는 폴리염화비닐(PVC) 재질이 특징이다. 추억의 신발이 이번 여름을 기점으로 재유행하기 시작했다. 젤리슈즈는 땀이 덜 차는 데다가, 비가 오는 날에도 끄떡없어 여름철 신발로는 제격이어서다. 게다가 귀여운 외형으로 MZ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과거 유행과 다른 점은 '자체 제작'이다. 마음에 드는 장식을 구매해 젤리슈즈에 달고 나만의 신발을 만든다. 장식은 다양하다. 주렁주렁 큐빅이 박힌 화려한 장식뿐만 아니라, 작은 크기의 큐빅도 인기다. 이 같은 행위는 '젤꾸'로 불린다.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도 인기 요인 중 하나다. 장식에 이용되는 '파츠'들의 개별 가격이 1천원~5천원 사이인 데다가, 일부 슈즈는 만원 이하에 구매할 수 있다. 디자인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지만, '젤꾸'를 하는 데 대략 3만원 정도의 예산만 준비하면 된다. 기본 10만원이 넘어가는 브랜드 신발과 비교했을 때 매우 저렴한 셈이다. '자체 제작' 유행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신발을 꾸미는 행위는 '크록스'가 유행하면서 시작됐다. 푹신한 재질로 만들어진 데다가, 구멍이 송송 뚫린 부분에 장식을 달 수 있다. 구멍에 끼우는 장식은 '지비츠'라고 불리는데, 좋아하는 캐릭터나 자신의 이름 이니셜 등 모양이 다양하다. 신발뿐만 아니라 PVC 재질의 가방도 선호되고 있다. 반질반질한 재질에 눈길을 확 끄는 원색이 매력적이어서다. 가방에도 눈에 띄는 열쇠고리나 보석을 달아 더욱 화려하게 꾸미곤 한다. 꾸미는 행위는 과거 볼펜에서 신발로 확장되는 모양새다. 일명 '볼꾸'로 불리는 행위였다. 기본 볼펜에 장식을 덕지덕지 붙여 마치 요술봉처럼 만드는 놀이다. 만들어낸 볼펜을 SNS에 올려 자랑하거나, 친구의 취향에 맞는 볼펜을 직접 만들어 선물하는 식으로 유행이 이어졌다. 말랑이와 같은 완구 유행의 중심이 칠성시장이었다면, 젤리 유행은 서문시장에서 맛날 수 있다. 서문시장에는 슈즈부터 장식품까지 한 번에 팔아 손쉽게 젤꾸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들 매장은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해, MZ세대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완제품을 구매하는 시대를 넘어, 이제 MZ들은 물건에 자신의 취향을 덧입히는 데 즐거움을 느낀다. 신발과 볼펜에 장식을 붙이며 평범한 물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꾸는 과정이 하나의 취미이자 놀이가 됐다. 발끝까지 취향을 덧입히고, 공유하는 문화에 한 번 동참해보는 건 어떨까.

    2026-07-17 12:24:00

  • 대구소년원, 자립 꿈꾸는 청소년에게 장학금 전달

    대구소년원, 자립 꿈꾸는 청소년에게 장학금 전달

    법무부(장관 정성호) 대구소년원(읍내중고등학교)은 장학금 수여식을 열었다고 10일 밝혔다. 지난 9일 열린 장학금 수여식에서 재학생 2명과 졸업생 1명은 각각 150만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가정의 보호 없이 생활하거나, 성실하고 모범적인 태도를 보여준 학생들이다. 이번 장학금은 ㈜아트앤허그(대표 이재경)의 후원으로 마련됐다. ㈜아트앤허그는 위기 청소년의 건강한 자립을 지원하고, 친환경 재활용 콘텐츠를 개발하는 대구의 사회적기업이다. 장학금을 받은 A군은 "응원해 주는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되었다"며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박우근 대구소년원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청소년을 꾸준히 지원하는 업체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며 "이번 장학금이 단순한 경제적 지원을 넘어, 미래를 준비하는 계기가 됐길 바란다"고 했다.

    2026-07-10 14:32:13

  • [낙선공약집] 패자 부활 없는 공약?… 다시 살펴볼 방법 '0'

    [낙선공약집] 패자 부활 없는 공약?… 다시 살펴볼 방법 '0'

    표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책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낙선 후보의 공약이 행정에 반영돼 사업으로 이어졌고, 낙선자 스스로 공약을 실현한 사례도 등장했다. ◆ 패배한 공약의 귀환 지난 2020년 국회의원 선거가 마무리되고, 경주시는 낙선한 국회의원 후보들의 낙선 공약을 재검토했다. 낙선 후보들의 공약 37개를 모두 시정에 반영할 수 있는지 검토한 끝에 17개 사업을 장·단기로 나눠 추진하기로 했다. 지역 발전에 여야가 따로 있지 않고, 낙선자 공약 가운데도 좋은 정책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이 중 하나가 학교급식 지원센터였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종복 후보의 아이디어다. 센터는 지난 2023년 준공을 마친 뒤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역에서 나온 먹거리를 학교 급식소로 보내 아이들의 건강을 챙기는 동시에, 지역 농가는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정책이다. 이 사업으로 학생 2만1천632명과 학교 84곳이 혜택을 보고 있다. 남해군, 광명시 등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 통합과 협치를 내세우며 낙선 후보의 공약을 수용하는 사례는 적잖다. 선거에서 패한 후보의 공약도 지역에 필요한 정책이라면 행정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낙선 후에도 지역을 위해 공약을 지키려는 움직임도 있다. 김보미 전 전남 강진군의회 의장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강진군수로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고배를 마셨다. 그는 "군민이 낸 혈세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핸드폰으로 곧장 확인하고, 정책 살피기와 민원제기가 가능한 'AI 대전환 행정'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지난 21일 '군민 소통·참여 AI 플랫폼'이 공개됐다. 김 전 의장이 낙선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약을 지킨 셈이다. 재정자립도는 물론이고, 타시군과 비교했을 때 고령화 정도는 어떠한지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일감 몰아주기' 우려를 살피기 위해 나라장터를 통해 군과 계약을 맺은 업체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 낙선자의 정책은 어디로? 이처럼 낙선 공약의 '다시보기'는 결코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니다. 다만 낙선 공약의 패자부활전은 쉽지 않다. 낙선 공약은 선거가 끝나는 즉시 삭제돼서다. 선거 운동 기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에 모든 공약이 공개되지만, 선거가 마무리된 후에는 당선자의 공약만 누리집에 남는다. 그나마 각 시당이 발표한 공약의 밑그림은 볼 수 있지만, 세세한 공약 내용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 일반 주민들이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향후 선거에 나설 정치인도 낙선 공약을 참고하기가 곤란한 셈이다. 대구시 선관위 관계자는 "혹여 집으로 배송 오는 실물 선거공보를 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선거 운동 기간에만 누리집에 정보를 공개한다"며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기에, 향후에도 낙선자 공약을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술계 차원에서 자료를 정리해 공개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공약다나와'는 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이민정치연구단, 한국정당학회에서 제작한 공약 비교 누리집이다. 2006년 이후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공약을 수집해 AI 기반 비교 서비스를 제공한다. 다만 후보 공약을 요약해 보여주는 방식인 만큼, 공약 원문을 그대로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 "낙선 공약도 지역 자산" 전문가들은 당선자뿐 아니라 낙선자의 공약까지 체계적으로 정리·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강금수 대구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아직 대구에서는 낙선 공약을 정리하자는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시민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약인 만큼, 좋은 정책이라면 누가 제안했는지와 관계없이 현장에 반영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공약이 정리돼 있어야 당선자들이 이를 검토하고 시정에 반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조광현 대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도 공약 정보에 대한 접근성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당선자의 공약조차 일반 시민이 찾아보기 쉽지 않고, 시의원이나 구의원 공약은 더욱 그렇다. 정보공개청구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선거를 계기로 드러났던 지역의 문제를 다시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관위 차원에서 어렵다면 지방자치단체가 공약을 정리해 제공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지역에 사는 시민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서비스다"고 조언했다.

    2026-07-10 13:46:00

  • [낙선공약집] 선거는 끝났지만, 문제는 남았다

    [낙선공약집] 선거는 끝났지만, 문제는 남았다

    선거는 도시의 고민과 주민들의 불편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간이다. 평소 주목받지 못했던 문제들까지 정책의 언어로 번역돼 시민들 앞에 제시된다. 지역이 어디에서 불편을 겪고 있고, 무엇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문제 목록'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후보들은 표를 얻기 위해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했고, 그 과정에서 돌봄과 민생, 교통, 생활환경 등 크고 작은 의제들이 공론장 위로 떠올랐다. 지방선거의 승부가 끝난 지 한 달. 누군가는 당선증을 받아 들고 시정과 구정을 이끌게 됐고, 누군가는 유권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정치 무대 뒤편으로 물러났다. 선거가 끝나면 당선자의 공약은 현실이 되지만, 낙선자의 공약은 기억 속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낙선 공약에도 지역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유아 진료비 본인부담금 면제와 조부모 돌봄수당 등 양육 부담을 덜기 위한 해법이 나왔고, 골목 마을버스와 의료 셔틀, 독거노인 집수리 서비스처럼 생활밀착형 제안도 쏟아졌다. 기존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장애인과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보듬으려는 시도도 잇따랐다. 매일신문은 2026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후보들의 공약을 한 달여만에 다시 꺼내 들었다. 개표 결과와 함께 묻혀버린 제안들 속에 대구가 놓치고 있는 의제는 무엇인지, 세 편의 기사에 걸쳐 살펴봤다. 지방선거는 끝났고, 승자와 패자도 가려졌다. 당선자는 취임과 함께 공약을 시정에 옮기기 시작했고, 낙선자는 정치 무대 뒤편으로 물러났다. 선거가 끝나면 낙선자의 공약도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후보들은 표를 얻기 위해 서로 다른 해법을 내놓았지만, 때로는 당선자가 언급하지 않은 문제를 낙선자가 먼저 끄집어내기도 했다. 비록 선택받지 못한 공약일지라도 그 안에는 도시가 풀어야 할 과제가 담겨 있다.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들의 공약집을 다시 펼쳐봤다. 개표 결과와 함께 묻혀버린 제안들 가운데, 여전히 유효한 문제 제기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이번 기사는 낙선 후보들의 공약을 후보별로 나누지 않았다. 대신 공약이 던진 문제의식에 주목해 주제별로 묶었다. 누가 제안했는가보다 어떤 과제를 제기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다. 선거는 끝났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은 여전히 대구에 남아 있다. ◆ 양육비와 돌봄 공백 해법 대구의 출생아 수가 조금씩 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5 인구동향조사 잠정 결과를 살펴보면, 모든 시도에서 출생아 수가 전년보다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구 역시 합계 출산율은 전년도보다 7% 증가했다. 그러나 경기 침체로 맞벌이가 일상화되면서 돌봄 부담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가족 내 손자녀 돌봄 현황과 정책 방안을 연구한 결과,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의 평균 돌봄 시간이 주당 26시간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자체의 돌봄 공백 해소 정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담을 느끼는 이들이 줄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영향으로 2026 지방선거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다. 6세 미만 영유아의 병원 진료비 중 본인부담금을 모두 면제해, 부모의 의료비 걱정을 덜어주겠다는 약속이 제시됐다. 자녀 돌봄에 참여하는 조부모와 친인척에게도 최대 30만원을 지급하고, 아동수당에 대구로페이 2만원을 추가 지급하는 '대구아이행복수당'도 논의됐다. 또 공공산후조리원을 건립해 신생아 돌봄 부담을 덜겠다는 계획이 나왔다. 또 아이가 성인이 되면 정부와 보호자, 대구시가 공동으로 모은 돈을 건네는 '우리아이자립펀드'도 제안됐다. 장성한 청년이 스스로 돈을 모을 수 있도록, 최대 5년간 3천만원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청년단디채움공제'도 논의됐다. ◆ 무너진 경제, 소시민 보호로 경제 분야에서는 시민의 생활비 부담을 줄이고 소상공인을 지원하는 정책들이 제시됐다. 먼저 자영업자에게 7일의 병가와 2일의 회복 기간을 부여하고, 하루 약 8만 2천560원의 병가비를 직접 지원하는 공약이 제안됐다. 1인 사업자나 5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 종사자들은 아파도 생계 때문에 일을 멈추기 어렵다. 가게 문을 닫는 순간 수입이 끊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24년 49개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으로 구성된 '아프면 쉴 권리 공동행동 준비위원회'가 시민 1천 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응답자의 59.8%는 "병가를 신청한 적이 없거나 병가 제도가 없다"고 했다. 병가가 있어도 사용하기 어려운 노동 현실이 드러난 셈이다. 또 소상공인의 부담 중 하나인 전기료 인하 방법도 모색했다. 동해안의 원전 에너지와 연계한 차등 요금제를 도입해, 대구 시민들의 전기 요금을 15~20%가량 인하하겠다는 계획이다. ◆ 도시의 승부수… 대형 프로젝트 국가 기관과 대규모 문화·관광 시설을 유치하겠다는 공약도 제시됐다. 대법원과 국제기구 산하 AI 관련 기관을 대구로 이전하고, 대형 테마파크와 복합리조트를 건립해 도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내용이다. 외국인을 포함한 관광객들의 발길을 모을 수 있는 '랜드마크'가 없다는 비판에서 나온 구상이다. 도심 속 혐오시설 이전 문제도 거론됐다. 수성구 만촌동 명복공원을 외곽으로 이전하고, 기존 부지에는 공원과 문화시설 기능을 결합한 복합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제안됐다. 명복공원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러 확장이 필요한 데다가, 주변 주민들이 이전을 바라는 혐오시설로 꼽혀 20년 넘게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해 지속가능성과 농업인 지원에 초점을 맞춘 정책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정부 정책에 발맞춘 대구식 대책이 주를 이뤘다. 생활폐기물을 매립지에 바로 묻지 못하고 소각, 재활용 등 1차 가공 과정을 거친 뒤 남은 물질만 매립할 수 있는 '직매립 금지'가 오는 2030년부터 시행예정인 가운데, 발 빠르게 준비를 마치겠다는 구상도 나왔다. 탄소 흡수 기능이 뛰어난 친환경 소재를 식재하는 공약도 덧붙였다. 또 농식품부 시범사업으로 예정된 농업재해공제에서 농민이 부담해야 하는 자부담 비율을 크게 낮추는 계획도 나왔다. 농업인들의 자금 부담을 줄여 민생을 안정화하겠다는 의도다. 당선되지 못한 공약이라고 해서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제안은 현실성이 부족할 수 있고, 어떤 정책은 이미 다른 형태로 추진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공약들이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는 시민들이 체감하는 불편과 지역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선거는 끝났지만, 돌봄과 민생, 도시 경쟁력, 환경을 둘러싼 질문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26-07-10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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