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연하장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생성형 AI를 활용하면 손쉽게 연하장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여러 방식 가운데서도 자신의 사진을 활용해 연하장을 제작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먼저 생성형 AI를 사용하기 위해 계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지 생성이 가능한 서비스로는 챗GPT, 나노바나나 등이 있다. 연하장에 활용할 본인의 얼굴 사진도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준비를 마쳤다면 AI 채팅 입력란에 원하는 내용을 명령어로 입력한다. 아래 예시 문구와 함께 준비한 사진을 첨부하면 이미지 생성이 가능하다. 한복의 색상이나 배경, 연하장에 들어갈 문구는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예시 명령어] 첨부한 사진이 들어간 신년 연하장 이미지를 만들어줘. 인물이 붉은색 한복을 입고 웃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비춰주는 극사실주의 스타일의 사진이다. 생동감 있는 표정으로 새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물은 화면 왼쪽에 배치하고, 오른쪽에는 신년 인사 문구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넣어줘. 글자 위에는 먹으로 그린 듯한 붉은 말 그림을 은은하게 배치한다. 배경은 따뜻한 노을이 지는 풍경으로 설정한다. 움직이는 연하장도 만들 수 있다. '인물이 사진 속에서 미소를 짓도록 해달라'거나 '배경의 해가 서서히 기우는 모습을 담아달라'는 식의 추가 명령을 입력하면 된다. 다만 영상이나 애니메이션 생성 기능은 일부 서비스에서 유료 구독이 필요할 수 있다. 원하는 연하장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할수록, 또 반복적으로 수정 요청을 할수록 결과물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원하는 이미지를 표현하기가 어려울 때는 참고할 만한 연하장 예시를 제시하며 비슷하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2026-02-12 12: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도시 성장의 기폭제… 경부철도 개통과 대구역의 성장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이 가운데 2부는 철도와 도로 같은 도시의 필수 시설이 어떻게 자리 잡아왔는지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대구의 힘줄이자 핏줄이었던 경부철도의 역사를 따라가 보자. 경부철도는 1904년 12월 27일 개통했다. 1905년 지도를 보면, 대구읍성 북문 바로 앞에 대구역이 들어서 있다. 성곽 안에 머물던 방어의 도시는 이때부터 바깥으로 길을 내기 시작했다. 대구는 성 안의 도시이자,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지금의 대구역을 떠올려보자. 각종 음식점과 카페, 일행을 기다릴 휴게실과 사무실까지 갖춘 복합 시설의 형태다. 하지만 처음의 대구역은 기차를 타고 내리는 기능만 수행하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노선도 촘촘하지 않았다. 부산 초량과 대구, 대전, 영등포에만 멈추는 정도였다. 역다운 모습을 갖춘 건 1913년이다. 2층 규모의 목조 르네상스풍 역사가 완공됐고, 2년 뒤에는 대구역과 경상감영을 잇는 중앙로가 열렸다. 인도 폭 4m, 차도 6m로 당시 대구에서 가장 넓은 길이었다. 중앙로가 생기자, 지도 속 대구역 일대는 눈에 띄게 빽빽해졌다. 부산과 수도권을 잇는 철도의 중간 지점. 대구역 앞은 자연스레 '만남의 광장'이 됐다. 숙소를 찾는 이들, 한 끼를 해결하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기차를 타지 않는 이들도 이곳을 약속 장소로 삼았고, 각종 시민 집회와 모임 역시 대구역 광장을 무대로 삼았다. 하지만 도시가 커지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대구역 북쪽으로 도시를 넓혀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고, 역사는 도시 확장의 장애물이 됐다. 남북을 이을 해법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1966년, 대구시는 대구역을 고층화하고 고가교로 오가게 하는 계획을 내놓는다. 철길을 걷어낸 자리에 107동의 상가를 지어, 역 주변을 더 번화롭게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대구역 앞 광장에 지하도로를 내 남북 소통을 실현했다. "대구역 광장에서 보자"는 말이 지금은 쏙 들어간 이유기도 하다. 대구역과 대구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 경상북도 상품진열소 등 주요 건물을 잇던 넓은 공간은 쪼개졌고, 사람들이 모여 설 만한 공간은 사라졌다. 1969년 동대구역이 문을 열며 승객이 분산되자, 광장의 역할은 다시 한 번 축소돼 지금의 형태가 됐다. (2부 2회에 계속)
2026-02-12 12:30:00
[두나의 두발 산책] 포성 속에서도 울린 노래와 문학… 향촌동이 품은 전쟁 속 문화사
전쟁은 예술을 멈추지 못했다. 6·25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진 예술인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대구 향촌동 골목에 모였다. 포성이 가까웠던 시기에도 이 좁은 골목에서는 시가 쓰였고, 음악이 울렸으며, 무대가 올랐다. 피란지 대구에서 예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향촌동 골목에 남은 흔적을 따라가 본다. ◆ 피란지 향촌동에 모인 문인들 경상감영공원 입구에서 쭉 뻗은 골목으로 발을 구르면, 2층 높이의 상가 건물이 늘어진 향촌동에 가닿는다. 6.25 전쟁 전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이 좁은 골목은 예술이 간신히 숨을 붙일 수 있던 공간이었다. 줄지어 있는 막걸리집, 다방을 오가며 작품을 구상했고, 술집과 여관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듯 작품 이야기를 나눴다. 시대 상황과 맞물려, 문인들은 종군활동과 창작을 병행했다. 시인 구상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원에서 대구로 피란해 육군종군작가단 부단장을 맡았다. 전쟁을 기록하는 임무와, 시를 쓰는 삶이 동시에 그의 어깨 위에 놓였다. 구상이 자주 찾던 곳은 골목 한가운데 자리한 '대지바'(북성로 104-11)였다. 바로 옆이었던 '화월여관'은 그가 머물던 숙소였다. 피란 예술인들은 이 일대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전쟁 속에서도 써낼 수 있는 언어를 고민했다. 대지바가 있던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내부는 당시 예술 활동의 흔적을 되짚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구상과 함께 종군 작가로 활동한 이들은 당대 문단의 중심인물들이었다. '나그네' 박목월 시인, 소설 '역마'의 김동리 등 유명 예술인들이 구상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전쟁 기록을 남기거나 애국심을 진작시킬 수 있는 작품, 혹은 전쟁이 벌어지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향을 담은 글들이 태어났다. ◆ 포성 사이로 흐른 음악 향촌동에서는 문학만큼이나 음악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녹향 음악감상실(서성로 14길 100)은 그 상징적인 공간이다. 녹향은 광복 직후인 1946년, 이창수 선생이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을 모아 만든 예육회에서 출발했다. 축음기 한 대와 레코드 500장.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음악을 향한 갈증은 그보다 컸다. 이곳은 이내 예술인들이 모여드는 사랑방이 됐고, 시인 양명문은 이곳에서 시 '명태'를 쓰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장소는 바뀌었지만, 녹향의 이름은 남아 있다. 향촌문화관 지하에 마련된 공간에는 스피커와 안락한 의자가 놓여 있다. 관람객들은 신청곡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음악을 듣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귀를 기울이는 방문객의 마음가짐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51년 문을 연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경상감영 1길 62-9)는 전쟁 속에서도 음악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전선이 현풍 앞까지 내려온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고전 음악을 듣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몸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작은 난로 하나뿐이었지만, 좁은 방 안에는 피아노 선율이 가득 찼다. 이 풍경을 본 외신은 르네상스를 "폐허 속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리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향촌문화관 인근 단층 주택건물의 벽에 붙은 터 표식만이 남아있다. 향촌동에는 음반 제작의 중심 역할을 한 오리엔트레코드사도 있었다. 악기점을 운영하던 이병주가 설립한 이 회사는, 전쟁으로 서울의 레코드사들이 무너진 사이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전쟁을 피해 내려온 작곡가와 작사가들이 이곳에 모였다.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90장의 음반과 170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전우야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노래는 전쟁으로 상처 입은 민중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 피란지에서 다시 오른 막 일제강점기 '키네마구락부'로 시작해, 국립 중앙극장의 칭호까지 얻게된 한일극장도 향촌동 인근에서 태동했다. 한일극장(당시 문화극장)은 연극인들의 보금자리로 활용됐다. 1.4 후퇴 당시 대구로 내려온 극단 '신협'이 대표적이다. 무대에는 우리 고유의 서사를 담은 창작극부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까지 올랐다. '자명고', '마의태자', '맹진사댁 경사'가 상연됐고, '햄릿'은 유독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전쟁 통에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에 대한 선호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앞다투어 한일극장을 찾았다. 특히 햄릿은 매번 관객들이 만석을 이룰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53년 서울의 국립극장이 한일극장으로 이전하며, 극장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흔히 대구는 전쟁의 피해를 비껴간 '무풍지대'로 기억된다. 그러나 전선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대구는 결코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예술인들이 모여든 향촌동 골목에서는 문학과 음악, 연극이 새로이 피어났다. 전쟁 속에서 탄생한 이 문화적 에너지는 피란지의 임시 산물이 아니라, 오늘날 대구 문화의 토대가 됐다.
2026-02-12 12:30:00
세뱃돈, 얼마가 적당할까… AI가 본 명절 세뱃돈 기준
명절은 일상에서 벗어나 가족과 시간을 나누는 소중한 순간이다. 그러나 반가움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른바 '명절 스트레스'다. 장시간 정체되는 도로, 차례 준비, 이어지는 잔소리까지. 그중에서도 해마다 고민을 키우는 건 단연 '용돈' 문제다. 물가가 올랐으니 용돈 액수도 달라져야 할까. AI에게 물어봤다. 주요 생성형 AI 무료 모델을 대상으로 동일한 조건에서 진행했다. 사용한 모델은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오픈AI의 챗GPT(GPT), 중국계 모델 딥시크(DeepSeek), xAI가 개발한 그록(Grok)이다. 질문에 설정한 '나'의 조건은 고등학생 자녀를 둔 50대 가장이다. 명절을 맞아 조카들과 부모님에게 용돈을 건네는 상황을 가정했다. 조카의 경우 영유아(0~6세)부터 중학생까지 각 연령대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금액을 물었다. 부모님은 70대로 설정했다. 부모에게 각각 용돈을 드리는 경우가 아니라, 한 번에 함께 드린다는 조건을 붙였다. ◆ AI가 본 명절 용돈의 공통분모 네 개 AI 모두 연령이 올라갈수록 용돈도 단계적으로 상승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영유아는 화폐 가치를 알지 못하다는 점에서 1만~5만 원 수준의 상징적 금액이 적당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초등학생부터는 차이가 벌어졌다. 또래와의 비교가 시작되는 만큼 3만~5만 원 선에서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중학생은 사실상 '어린이 용돈'의 마지노선으로, 5만~10만원이 기준선으로 제시됐다. ◆ 입학 앞두면 용돈 올려야 하나? 입학 시기에 웃돈을 얹어야 하는지를 두고는 AI 간 의견이 갈렸다. 챗GPT·제미나이·딥시크는 평소보다 2만~5만 원 정도 더 챙겨주는 게 자연스럽다고 봤다. 이들은 입을 모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조카에게는 5만원,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에게는 10만원 정도를 추천했다. 반면 그록은 입학 자체를 용돈 인상의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고 봤다. 대신 입학 이후 학교생활 전반에 걸쳐 일정한 수준의 용돈을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 금액보다 중요한 '기준'. AI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건 절대 금액보다 기준이었다. 자녀를 둔 50대 가장이라는 조건을 감안해, 무리한 지출은 피해야 한다는 점을 여러 모델이 짚었다. 특히 제미나이는 "자녀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지출해야 하는 교육비가 상당한 가운데, 체면을 차리기 위해 과도한 지출을 하는 건 위험하다"며 "내가 받은 만큼, 혹은 내 자녀가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상호주의 원칙을 지키는 것도 좋은 대책이다"고 했다. 딥시크는 한발 더 나아가, 조카가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인지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봤다. 고등학생 자녀와 상의해 또래 감각에 맞는 선을 정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책으로 꼽혔다. ◆ 부모님 용돈은 네 개 생성형 AI는 부모님께 드리는 명절 용돈으로 30만~50만 원을 공통된 적정선으로 제시했다. 물가 상승과 자녀 세대의 부담을 함께 고려했을 때, 이 범위가 도리와 현실 사이의 균형점이라는 판단이다. 부모님에게 명절 용돈은 단순한 생활비가 아니라 '자식 농사 성적표'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AI들은 공통적으로 현금에 선물을 더하는 방식을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다. 부담이 될 경우 금액을 낮추는 대신, 정성이 담긴 선물을 곁들이는 게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 실제 응답은… "조카 5만원, 부모님 30만원" 실제 사람들의 인식도 AI의 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은 지난해 설 명절을 한 주 앞두고 3일간 이용자를 대상으로 '설날 용돈 적정 금액'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카에게 주는 용돈으로 가장 적절하다고 꼽힌 금액은 5만 원이었다. 전체 응답자의 38%가 5만 원을 선택해 1위를 차지했다. 이어 10만 원(28%), 3만 원(14%) 순으로 나타났다. 부모님이나 웃어른께 드리는 용돈은 30만 원이 적당하다는 응답이 31%로 가장 많았고, 이어 50만 원(22%), 20만 원(20%) 순으로 집계됐다. AI들의 답변은 금액보다 기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얼마를 주느냐보다, 매년 감당할 수 있는 선을 정해두는 게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실제 조사에서도 명절 용돈은 일정 수준에 머무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명절마다 부담을 키우기보다는, 감당 가능한 범위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쪽이 현실적이다. 따라서 명절 용돈은 부담스럽지 않은 기준을 세워 두고, 그 선을 지키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 부담스러운 액수의 봉투보다, 평소의 연락과 방문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 더 중요하다는 점도 함께 짚을 필요가 있다.
2026-02-12 11:30:00
설과 추석을 일주일 앞두고 대구 쪽방상담소는 분주해진다. 쪽방 주민들을 위한 합동 차례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명절을 혼자 보내는 1인 가구도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상담소 직원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차례상을 차린다. 쪽방 주민 다수는 1인 가구다. 함께 시간을 보낼 가족이나 친지가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 명절일수록 외로움이 커진다. 이웃들마저 고향으로 떠나면 안부를 확인할 사람도 없다. 명절 전후로 고립이 심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담소는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합동 차례다. 행사는 어느덧 21년째를 맞았다. 장소는 해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행사를 거르지 않았다. 처음엔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50명 안팎의 주민이 모이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심리치료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된 건강 수업이 끝나면 본격적인 차례가 시작된다. 전과 나물, 탕국 등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은 빠짐없이 준비한다. 주민들은 여느 가정의 차례처럼 절을 올리고 술을 따른다. 의식이 끝나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며 근황을 전한다. 쪽방촌 주민들에게 합동 차례는 이제 없으면 섭섭한 존재가 됐다. 명절이 다가오면 상담소로 "언제 차례를 지내느냐"는 문의가 먼저 들어온다. 21년 동안 행사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명절의 형식과 분위기를 지키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노인복지시설과 노숙인 시설에 합동 차례 비용을 지원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차례상을 차리기 어려운 경우에는 명절 음식을 포장해 전달하기도 한다. 대구쪽방상담소 관계자는 "1인 가구가 늘면서 설 분위기를 느끼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명절에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를 혼자 사는 분들도 함께 나누길 바란다. 여력이 되는 한 행사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가정에서 즐기던 명절 오락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난 2018년부터 6년간 명절 연휴 기간 편의점 화투 매출을 조사한 결과, 국민 오락이던 화투 판매량은 2022년을 제외하고 매년 감소했다. 가족이 모여 놀이를 즐기기보다, 각자 게임이나 영화, 휴대전화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늘어난 영향이다. 대신 명절 오락은 집 밖에서 이어지고 있다. 공공기관은 명절 기간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국립대구박물관은 널뛰기와 활쏘기, 제기차기 등 민속놀이를 준비했고, 정월대보름을 맞아 달서구 본리노인종합사회복지관은 윷놀이 청백전을 연다.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해체됐지만, 명절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이는 장소와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함께 밥을 먹고 절을 올리며 시간을 나누는 순간 속에서, 명절은 형태를 바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2026-02-12 11:30:00
[커버스토리]설날 연하장 변천사… '축하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잘 구겨지지 않는 빳빳한 종이에 또박또박 덕담을 적는다.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는 염원을 담아. 새해가 되면 서로 주고받던 '연하장'의 풍경이었다. 그해를 상징하는 동물 그림이 인쇄된 카드에 사인을 남기거나, 손수 그림을 그려 보내기도 했다. 연하장은 처음부터 누구나 주고받는 대중적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왕에게 올리는 새해 인사의 수단으로 사용됐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도입부와 임금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 송축으로 마무리되는 엄격한 형식을 갖춘 일종의 의례 문서였다. 연하장이 대중화된 것은 근대식 우편 제도가 자리 잡으면서부터다. 1900년대 초 연하장은 우체국을 통해 각 가정으로 배달됐다. 그 인기가 대단해, 설날은 '우편배달부가 가장 바쁜 날'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지금은 널리 사용하는 '근하신년'은 근대 일제강점기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새해를 축하한다는 일본식 한자어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유입됐다. 한정된 연하장 지면에 네 글자만 적어도 새해의 안녕과 행복을 전할 수 있어, 간결하면서도 실용적인 축하 인사로 널리 쓰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연하장은 점점 자취를 감췄다. 새해가 되면 문구점마다 진열되던 각양각색의 연하장도 보기 힘들어졌다. 연하장은 형태를 바꿨을 뿐, 카카오톡과 문자 메시지, 이미지 파일로 새해 인사가 오간다. 가득 차던 우편함은 사라지고, 연신 울리는 메신저 알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붉은 말의 해를 맞아 붉게 칠한 말과 떠오르는 해를 담은 이미지가 공유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얼굴이나 부부 사진을 함께 넣기도 한다. 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이 결실을 보길 바랍니다',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와 같은 짧은 인사말을 덧붙인다. AI로 움직이는 연하장을 만드는 '꿀팁'도 공유되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자주 뵙지 못하는 친척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영상 연하장을 만들 수 있다. 한복을 입은 사진을 합성해 영상을 만들고, 목소리도 AI로 생성해 붙인다. 발음이 또렷하지 않은 영유아의 목소리나,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의 인사도 대신 전할 수 있어 호응을 얻고 있다. 새해의 복을 비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꾹꾹 눌러 적던 네 글자는 이제 화면 위에서 깜빡인다. 방식은 계속 바뀌겠지만, 새해를 맞아 안부를 묻고 복을 비는 행위만큼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26-02-12 11:30:00
민족 대명절인 '설날'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몸을 씻고 한복을 차려입는다. 막히는 도로를 뚫고 고향에 도착하면 반가운 가족들이 맞아준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덕담을 나누고 차례상 앞에서 절을 하고, 떡국을 나눠 먹는다. 윷놀이와 화투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설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몇십 년 사이 전통적인 설날 풍경은 보기 어려워졌다. 명절에 꼭 고향으로 향하지 않아도 되고, 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는 연휴에도 일터로 향하고, 누군가는 여행지에서 설을 보낸다. 젊은 층들은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며 웃고, 주부들은 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며 한시름을 놓았다. 전통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이를 보완하듯 합동 차례와 공동 행사가 이어지고, 공공기관은 집 밖에서 명절놀이의 장을 연다. 전통적 의미의 명절은 느슨해졌지만, 설이라는 시간 자체는 여전히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기술도 힘을 보탰다. 연하장은 종이를 떠나 메시지와 이미지로 바뀌었고, 덕담은 파일 형태로 오간다. AI로 복원된 얼굴과 목소리가 영정사진과 지방을 대신한다. 설은 사라지지 않았다. 각자의 삶의 방식에 맞춰 형태를 바꾼 채 명맥을 잇고 있다.
2026-02-12 11:30:00
[커버스토리] 달라진 설 명절 풍속도 … AI 복원한 조상들 새해 덕담
예전 명절 차례상에는 가족들이 모여 돌아가신 조상들의 이름과 신위를 적어 모시는 지방(紙榜)이나 영정사진 앞에서 절을 올렸다.최근에는 AI 복원 기술로 아이들은 AI가 생성한 이미지와 동영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생생한 목소리로 새해 덕담을 듣는 등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달라진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론 전통적인 차례를 지내진 않지만 가족들이 다함께 모여 외식을 하거나 긴 연휴동안 해외여행을 떠나고 있다. ◆ 흐릿한 사진 이제 그만… 활짝 웃는 모습 복원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어요. 이번 설에는 납골당에 사진을 넣어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차례상에 오르는 사진도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있다. SNS에 부모님 사진과 함께 사연을 올리면, 이를 본 누리꾼들이 사진 복원에 나서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마스크에 가려 턱선이 보이지 않고, 편안한 일상복 차림이던 아버지의 사진은 어느새 단정한 정장을 입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하는 모습, "딸이 보고 싶다"는 음성이 담긴 영상까지 만들어진다. 명절을 앞두고 SNS를 통한 사진 복원 요청은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AI를 활용한 사진 복원이 손쉬워지면서 나타난 새로운 모습이다. AI 활용이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도 SNS를 매개로, 기술에 능숙한 젊은 세대의 도움을 받아 부모님의 모습을 복원한다. 흐릿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얼굴은, 그렇게 다시 또렷해지고 있다. ◆ 줄 서는 간식 들고 귀성… '유행'된 설 선물 전통적인 의미의 설을 쇠지 않으면서, 귀성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스팸이나 샴푸 같은 전통적인 명절 선물세트는 MZ세대 귀성객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대신 부모가 평소 접하기 어려운 '요즘 유행' 제품을 들고 고향을 찾는 모습이 늘고 있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이른바 '두쫀쿠(두바이쫀득쿠키)'다. 줄을 서야 맛볼 수 있는 간식으로 알려지면서, 설을 맞아 이를 사 들고 귀성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선아(27) 씨는 "부모님은 우리가 사다 드리지 않으면 직접 사 드시지 않을 것 같다"며 "이럴 때라도 새로운 걸 경험해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날짜에 맞춰 미리 예약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주변에도 설 맞이해서 두쫀쿠를 사 가려는 친구들이 많아 예약은 필수"라고 덧붙였다. ◆명절 대세 된 '차례상 대행' 경산에 거주하는 한동호(40,가명)씨는 2년 전부터 명절 때마다 '차례상 대행 업체'를 이용한다. 한 씨는 "아내가 제사 음식 준비에 힘겨워해 처음 대행업체를 이용할 때는 집안 어르신들의 반대가 심했다"며 하지만 "음식 품질이 만족스럽고 가격도 합리적이라 이제 어르신들도 만족스러워하신다"고 했다. 명절 음식에 부담을 느껴온 MZ세대 젊은 부부들은 "빨리 차례 지내고 해외여행 가자" 며 대행 서비스를 찾고 있다. 최근들어 명절 연휴를 '휴가'로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그래도 차례를 안 지내는 것보단 대행 업체를 이용하더라도 지내는 게 낫다"며 이용하는 고객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strong〉◆ 명절 대신 일터로〈/strong〉 "차라리 일하고, 공부하는 게 낫죠. 설이라고 특별할 게 있나요". 이번 설에 박한별(가명·25) 씨는 설 당일에만 고향인 부산에 가기로 했다. 이번 설에만 특별히 '혼설족'을 택한 건 아니다. 대학에 진학하며 본가를 떠나온 뒤, 명절마다 반복된 일이었다. 설 명절에 집에 내려가지 않는 한별씨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즉답했다. "설이라고 특별한 건 없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마다 집 근처 화장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 연휴 때도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왜 대타를 구하지 않았을까. 그는 어렵게 잡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답했다. 〈strong〉◆ 모이지 않는 집, 가벼워진 설〈/strong〉 '자취생'이 아닌 청년들은 다를까. 본가에 머무르고 있는 '캥거루족' 청년들도 달라진 설 분위기를 체감했다. 황예은(26) 씨의 명절도 한별씨와 마찬가지다. 황씨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명절 당일에만 잠시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큰집에 가서 다 같이 식사하고, 안부 정도만 묻다가 돌아올 예정이다. 분위기가 크게 바뀐 것은 10년 전쯤부터다. "증조할머니가 계실 때는 몇십 명씩 모였다. 제사도 지냈다. 외가, 친가도 하루씩 방문하느라 명절이 모자랐다. 이제는 이모, 삼촌 정도만 모이니 명절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명절보다는 가족사, 개인적인 기념일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로 전환되는 모양새다. "차라리 다른 기념일에 더 많은 가족이 모인다. 조부모님 생신 때나, 칠순, 팔순. 조카들이 태어날 때가 더 많이 모이는 거 같다". 가족 간의 끈끈함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조금 반가운 점도 있다. 설 밥상의 단골 주제인 '정치' 논쟁에서 떨어질 수 있게 됐다. 〈strong〉◆ 차례 대신 외식〈/strong〉 신만숙(54) 씨는 올 명절에는 차례상을 차리지 않기로 했다. 제사를 지내지 않은 지 십 년이 넘었다. 세 명의 며느리들은 각각 튀김, 나물, 생선 등을 나눠 제사 음식을 준비해 왔는데, '번거롭다'는 큰 형님의 선언 이후 제사는 몽땅 사라졌다. 그래도 명절 분위기를 내고 싶어 매년 조금씩 제사 음식을 만들어왔다.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가족 모두 옹기종기 모여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쳐 나눠 먹었다. 이제는 그것도 '번거롭다'는 자녀들의 툴툴거림에 없애기로 했다. 대신 가족들이 모여 외식을 하기로 했다. 신씨 주변에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주부들이 많다. 허리를 굽혀 제사 음식을 차릴 바에야 일본, 중국 등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 신씨 가족들도 이번 연휴에 경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래도 명절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흩어져 지내는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어서다. "가족들이 다 모이기만 해도 명절 분위기가 나요. 굳이 장을 보고 요리를 하지 않더라도, 얼굴만 봐도 좋아요".
2026-02-12 11:3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고향 향한 사랑의 힘… 대구경북 어땠나
수도권으로 사람은 몰리고 지역은 점점 쇠락해진다. 조급해진 지자체는 묘수를 냈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기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고향의 향수를 담은 답례품도 준비했다. 그렇다면 대구·경북을 향한 출향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컸을까. 데이터를 통해 그 깊이를 들여다봤다. ◆ 지방 살림 도우미 '고향사랑기부제' 고향사랑기부제는 개인이 자신이 거주하지 않는 지자체에 기부하면, 해당 지자체가 이를 지역 살림에 활용하는 제도다. 기부자는 세액공제와 함께 지역 특산물로 구성된 답례품을 받는다. 지방재정 확충과 기부 문화 확산을 동시에 노린 제도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모인 기부금은 879억3천만원, 기부 건수는 77만4천 건이다. 시행 첫해인 2023년과 비교해 금액은 35%, 건수는 47% 늘었다. 특히 비수도권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비수도권 지자체 1곳당 평균 모금액은 4억5천만원으로, 수도권(1억4천만원)의 3.3배 수준이다. 재정 여건이 열악한 지역을 돕겠다는 제도 취지가 일정 부분 성과를 낸 셈이다. 기부금의 90% 이상은 세액공제 한도인 10만원에 집중됐다. 소액 기부를 중심으로 한 참여 구조가 정착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 대구 10개 기관 8억9천만원… 기부 지형 어땠나 대구시 본청과 9개 구·군이 2024년 한 해 동안 모은 기부금은 총 8억9천만원이다. 군위군이 2억100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대구시 본청(1억5천10만원), 달성군(1억1천100만원), 달서구(8천500만원)가 뒤를 이었다. 기부자의 주력 연령대는 30대였다. 전체 모금액의 61%는 11~12월에 집중돼 연말 쏠림 현상도 확인됐다. ◆ 내부 결속+외부 유입으로 만든 기부 구조 기부자 주소지를 분석한 결과, 대구 시민들의 '지역 내 상호 기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구에 거주하면서 다른 구·군에 기부한 금액은 1억7천294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경기(1억6천만원), 서울(1억5천747만원), 경북(1억5천444만원) 순이었다. 외부 기부금은 규모가 큰 자치구로 몰렸다. 달서구는 전체 기부의 48%가 서울·경기에서 유입됐고, 북구 역시 수도권 비중이 44%에 달했다. 대구 시민들의 '자기 도시 사랑'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남구였다. 전체 기부자의 42.4%가 대구 내 다른 구·군 거주자였다. 반면 수성구는 경북 거주 기부자 비중이 27.9%로 가장 높아, 대구보다 인접 지역의 기부자 비중이 더 컸다. 대구 시민들이 외부로 기부할 경우, 절반은 경상북도로 향했다. 이는 부산, 인천 등 다른 광역시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 먹거리 중심 답례품 전략 대구 본청과 9개 구·군이 답례품 구매에 쓴 비용은 총 2억512만원이다. 전체 모금액의 23% 수준이다. 가장 강세를 보인 품목은 가공식품과 밀키트였다. 동인동 찜갈비(동구), 신대장떡볶이(북구) 등 지역 유명 음식을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제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미식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영향을 준 셈이다. 전통적인 인기 품목은 한우와 쌀이었다. 군위군의 '현토미'와 한우, 서구 '풍국쌀' 등은 지역 대표 농산물로서 안정적인 수요를 유지했다. ◆ 집행은 제자리… 체감 효과는 미흡 모금 규모와 달리 기금 사용은 아직 소극적이다. 10개 기관 중 사용 내용이 있는 곳은 2곳뿐이다. 수성구와 군위군이 홍보비로 각각 850만원, 1천700만원을 사용한 것이 전부다. 나머지 기금은 전액 예치 중이다. 지정기부를 통한 집행 사례도 아직 없다. 지정기부는 기부자가 특정 사업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기부의 체감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다. 전남 곡성군의 '소아과 선물', 충남 청양군의 '초·중·고 탁구부 후원'처럼 목표액을 조기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는 것과 대조적이다. ◆ 대구형 전략 필요할 때 데이터는 고향사랑기부제가 '대규모 후원'보다 '일상적 참여'에 가까운 제도임을 보여준다. 고액 기부를 노리기보다, 소액 기부를 반복하게 만드는 구조 설계가 관건이다. 10만원 기부가 정착된 만큼, 참여 장벽을 낮추는 간편한 기부 동선과 직관적인 혜택 안내가 중요하다. 기부자의 상당수가 인접 지역에 분포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는 대구가 전국 단위 경쟁보다, 출향인을 중심으로 한 기부 전략에 집중해야 함을 시사한다. 단순한 특산물 나열을 넘어, 지역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답례품 기획이 요구된다. 기부자의 상당수가 인접 지역에 분포한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대구가 전국 단위 경쟁보다, 출향인을 중심으로 한 기부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단순한 특산물 나열이 아니라, 지역의 서사와 기억을 결합한 답례품 기획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부 이후가 중요하다. 현재 대다수 기금이 예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만큼, 기부금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체감할 수 있는 장치가 부족하다. 지정기부 사업을 통해 기부 목적과 사용처를 명확히 제시하면, 일회성 참여를 지속적인 기부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향사랑기부제가 출범한 지 4년째에 접어들었다. 이제 제도는 정착의 문턱에 서 있다. 고향사랑기부제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지, 지역 재정을 떠받치는 제도로 자리 잡을지는 지자체의 기획에 달려 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촘촘한 전략 설계가 필요한 때다.
2026-02-12 11:30:00
[창간 80년, 격동 80년] 산으로 번진 전쟁, 마을 울리는 총성… 양민학살의 기억
전쟁은 적과 적이 싸운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는, 국가가 지켜야 할 주민이 적으로 분류됐다. 6·25 전쟁은 전선을 넘어 일상의 마을로 번졌고, 그 끝에는 '학살'이라는 이름의 비극이 남았다. ◆ 퇴각 못 한 인민군… 지리산으로 1950년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 지지부진한 전쟁이 승리로 이어질 거란 믿음이 고무되던 때였다.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지리산 일대에 있던 인민군은 북으로 되돌아갈 방법을 잃었다. 이들은 좌익 성향의 무장단체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뭉친 이들은 산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을 수탈하면서 체제 전복을 노렸다. 시달리는 건 주민들이었다. 무장한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자유를 빼앗겼다. 결국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육군 제11사단이 창설됐다. 이들은 주민들이 인민군에게 협조하거나, 함께 폭도화한 자들도 적지 않다고 봤다. 공산주의자들의 교묘한 선전에 넘어가, 오히려 경찰과 군을 공격해 왔다고 해석했다. 11사단을 이끌던 최덕신은 결국 '견벽청야'라는 작전을 세운다.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은 확보하되, 부득하게 적에게 내주는 지역은 인력과 물자의 씨를 말려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다. 주민들을 전부 죽여 없애겠다는 끔찍한 계획이었다. ◆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몰살 1951년 2월 4일. 3대대와 청년 방위대, 경찰 등 총 700여명은 거창 신원면으로 진격했다. 분명히 이곳에 적은 없었다. 하지만 군홧발은 멈추지 않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총살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입을 모아 "인민군으로부터 주민을 지켜야 할 국군이 우릴 학살했다. 말이 되는 소리냐"며 답답한 가슴을 쳤다. 군은 사방에서 주민들을 포위해왔다. 산청, 함양과 유림, 마천 방면에서 포위 작전이 시작됐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2월 8일 아침 동이 틀 무렵에는 산청의 가현마을, 방곡마을에까지 진격했다.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여성들을 성폭행했다. 5세 아이에게 조준사격을 가하고, 구덩이를 파 사람들을 몰아놓고 총살했다. 이렇게 죽은 주민만 700명이 넘는다. 산청, 함양지역의 경우 희생자의 60% 이상이 부녀자와 노약자였다. 거창 박산골 희생자의 517명 중 225명은 어린이였고, 부녀자가 183명이었다.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단일 사건'이 아니라고 본다. 남원, 함평, 순창, 화순 등 1950년 1월과 12월 사이 11사단 예하부대가 일으킨 모든 민간인 학살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연구자들은 사건 배경에 주목했다. 이들 사건 모두 후방 게릴라전 상황에서 발생했는데, 군대가 주민을 가장한 게릴라에게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예상치 못한 게릴라전으로 동료를 잃은 군대는 이성을 상실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주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보고, 모두 소탕하자는 무리한 작전이 벌어졌다고 봤다. 전투의 이름을 빌려 보복 살인을 저지른 셈이다. ◆ 유족들 마음 언제쯤 보듬을까 하지만 진상을 밝히고 피해를 복구하는 일은 지지부진하다. 시신 수습은 3년이 흘러서야 가능했다. 신원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시신이 부패해, 남성과 여성, 어린아이로 뼈를 분리해 합동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거창 사건이 알려진 뒤 군 검찰은 책임자들을 기소했고, 이들은 유죄를 받았다. 하지만 다음 해에 이들은 특별사면됐다. 진상 조사는 없었다. 위령비가 세워진 것도 1960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지만, 그 역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무로 돌아간다. 유가족들이 517명의 사상자가 난 박살골에 세운 위령비는 군인들에 의해 뽑혀나간 뒤 땅에 묻혔다. 1996년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시행됐으나, 배상과 보상 규정은 빠졌다. 이후 배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특별법이 여러 차례 발의됐으나, 전부 자동 폐기됐다. 유가족들은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난 2025년 12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국가가 배상하는 내용의 특별법안이 국회에 재발의됐다. 이 사건으로 사망하거나 다친 사람과, 그 유족이 국가 배상금과 트라우마 치료 등을 받도록 하는 내용이다. '거창 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도 계류돼 있다. 유가족의 시린 마음을 달랠 특별법은 이번에야 말로 통과될 수 있을까. 지난해 12월 국회를 찾은 이성열 유족회장은 "거창사건은 다른 사건과 달리 순수한 양민이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다. 고령의 유족들이 새벽부터 상경해 호소하는 현실을 헤아려 이번 국회에서는 반드시 특별법을 통과시켜 달라"며 소원을 전달했다.
2026-02-05 12:0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개발 제한 vs 성장… 딜레마 속 고도화된 도시 계획
대구시가 기획, 제작한 책 〈지상대구〉를 통해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 자료를 통해 대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췄는지 추적한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의 조성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총 4부로 소개한다. 연재를 여는 1부에서는 도시의 뼈대에 해당하는 행정시설의 변천사와 함께, 확장되는 도시 구역을 다룬다. (편집자 주) 1970년대에 접어들며 대구는 명실상부 대도시가 됐다. 당시 인구는 103만을 넘겼으며, 경부고속도로까지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많아졌다. 염색산업 등 새로운 먹거리 사업이 대구에 둥지를 트면서 도시는 더욱 활기를 띄었다. 대구가 성장하는 동안, 정부는 도시를 다루는 새로운 법안을 하나 둘 꺼내들었다. 도시계획법을 전면 개편하고, 개발 제한 구역을 설정했다.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인해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식량 자급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농지 자원을 보존하는 움직임도 등장한다. 규제에 부딪혀, 무작정 도시를 성장시킬 수 없는 시대가 찾아왔다. 도시계획도 덩달아 몇 번씩이고 고쳐진다. 1974년 제3차 도시계획재정비가 고시된 후, 단 2년 여만에 고시가 재정비된다. 자료에 따르면, 도시 외곽지역을 녹색으로 칠해 녹지지역으로 보호하고 공업과 주거 지역 일부를 녹지로 전환했다. 도시 주요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개발을 금했다. 상업지역은 대구 북부와 동, 남부에 고루 배치했다. 가장 넓은 상업지역은 대구역 앞이었다. 변화는 끝나지 않았다. 1981년 도시계획이 전면 개편되면서 또 고쳐지고, 새로 덧씌워졌다. 변화를 거치면서 도시계획은 고도화돼 어느 정도의 틀을 갖게 됐다. 기본계획과 도시계획, 집행계획의 3단계 계획과정을 갖춰야 했다. 이에 따라 대구는 미래상을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안을 제시한다. 도시 성격과 도시기본 구상뿐만 아니라, 생활권과 인구를 어떻게 쪼갤 지에 대해서도 논했다. 또 교통통신계획과 산업개발에 대한 밑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인구 거주에 필수적인 상·하수도, 청소, 에너지, 공해에 대한 예상도도 그렸다. 도시 성장을 막는 규제를 피하면서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중간점'을 찾는 시도였다. (1부 끝)
2026-02-05 11:30:00
[두나의 두발 산책] 책 만들던 역사가 고스란히… 이제는 '읽는' 골목으로
계산오거리에서 남문시장으로 이어지는 대로. 형형색색 간판이 덧붙은 골목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기획, 인쇄, 제작소라는 이름을 단 오래된 가게들. 불을 켜고 하루를 버티듯 문을 연다. 한때 1천여 개 업체가 몰려들었던 대구 인쇄골목이다. 열기는 식은 듯 보이지만, 골목에는 여전히 시간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strong〉◆ 종이와 글자가 모이던 곳, 영남〈/strong〉 영남은 인쇄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추로지향(鄒魯之鄕)'. 유교적 예절과 문화가 융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족보와 문집, 효행록을 찍어내는 목판 인쇄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던 배경이다. 민간에서 다져진 인쇄술은 근대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인근 종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재전당서포'는 당시 대구 인쇄의 중심지였다. 목판과 납활자를 이용해 책을 찍어냈는데, 이곳에서 인쇄된 책 가운데 지금까지 실물이 남아 있는 것만 43종에 이른다. 유학서적은 물론 '대학언해' 같은 언해본, 점술 종합 해설서인 '진본 황극책수' 등 취미서적까지 직접 인쇄·판매했다. 이곳에서 일하던 서장환 선생은 대구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 중 한 명이다. 출판부에서 일하며 3·1 독립선언서와 구호를 몰래 찍어 시민들에게 나눴다. 그 죄로 고문을 당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임시정부 포고문과 경고문, 식민 통치를 고발한 '자유신보'를 인쇄하며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인쇄는 그렇게 저항의 수단이 됐다. 〈strong〉◆ 기계와 사람이 모인 자리〈/strong〉 인쇄업체들이 본격적으로 모이기 시작한 건 1950년대다. 6·25전쟁을 피해 내려온 서울의 인쇄시설과 인력이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경상감영이 있던 도시 중심, 많은 유동인구, 사통팔달 교통망은 인쇄업자들에게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북성로와 가까웠다는 점도 중요했다. 글자를 또렷하고 촘촘하게 찍어내기 위해서는 섬세한 세공 기술이 필요했는데, 북성로에는 그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는 기술자들이 모여 있었다. 한때 "탱크도 만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실력을 자랑하던 이들이다. 당시 대구에서는 인쇄기계도 직접 만들었다. 활판인쇄기부터 제단기, 호침기까지 대부분을 자체 제작했다. 그 흔적은 지금도 충남 공주의 보존관인 '책공방 북아트센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존된 기계 상당수에는 '대구 제작'이라는 표찰이 붙어 있다. 다만 인쇄업체들이 처음부터 남산동을 택한 것은 아니다. 유동인구가 많고 북성로와 더 가까운 중앙로에 먼저 모였지만, 지가와 임대료가 오르면서 하나 둘 남산동으로 이동했다. 지금과 같은 인쇄골목의 형태가 갖춰진 건 1970년대 이후다. 기술 변화에도 골목은 빠르게 적응했다. 또렷하게 인쇄가 가능하도록 고무판에 한 번 인쇄물을 찍어낸 뒤 다시 종이에 입히는 '옵셋' 인쇄를 거쳐 1990년대 디지털 인쇄 시대로 넘어왔다. 방식은 바뀌었지만, 골목의 원칙은 같았다. '지금 가장 잘 찍히는 방법'을 택하는 것. 〈strong〉◆ 인쇄기가 멈춘 뒤에도〈/strong〉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쇄업계는 불황을 피하지 못했다. 인쇄물을 찾는 사람은 줄었고, 다이어리나 달력, 현수막을 제작하던 기업들도 사라졌다. 인쇄기가 멈춘 가게가 하나둘 늘었다. 계산오거리에서 골목 끝자락까지 걷다 보면, 한때 골목을 채웠던 서점들도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간판을 달고 영업 중인 곳은 두 곳 남짓. 갓 인쇄한 책과 중고책이 도로까지 쌓여 있던 풍경은 이제 기억 속에만 남았다. 골목에는 재개발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그렇다고 모든 흔적이 사라진 건 아니다. 남산2동 행정복지센터 옆 작은 역사관에는 인쇄골목의 시간이 남아 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금속 활자들. 한글과 한자가 크기별로 정리돼 있다. 당시에도 강조가 필요하면 글자 크기를 키우거나 특수문자를 사용했다. 오늘날 디지털 인쇄로는 1초면 끝날 일이지만, 그땐 크기별 활자를 미리 제작해야 했다. 그 활자들 역시 기록관 한쪽 벽면에 차곡차곡 쌓여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인쇄물을 소비하는 문화도 희미하게나마 이어진다. 몇몇 중고서점이 여전히 손님을 맞고 있고, 인쇄골목 초입 '문우관' 옆에는 대형 중고서점도 자리 잡았다. 서점 사이사이로는 작은 카페들이 들어섰다. 젊은 방문객들 사이에서는 이곳을 '인쇄골목' 대신 '카페골목'이라 부를 정도다.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책장을 하나 둘 넘기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책을 찍어내던 골목은 이제 책을 읽는 골목으로 변하고 있다. 기계 소리가 줄어든 자리에는 커피 향과 이야기가 스며들었다. 찍어내는 일은 끝났지만, 인쇄 골목은 여전히 도시 한켠에서 제 몫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26-02-05 11: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도로로 뼈대를 세운 도시계획… 더 큰 도시 향한 한걸음
대구시가 기획, 제작한 책 〈지상대구〉를 통해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 자료를 통해 대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췄는지 추적한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의 조성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총 4부로 소개한다. 연재를 여는 1부에서는 도시의 뼈대에 해당하는 행정시설의 변천사와 함께, 확장되는 도시 구역을 다룬다.〈편집자 주〉 1922년. 대구부(현 대구)는 서문시장 이전 계획을 성공시켰다. 25년 뒤, 인구 15만 대도시로 성장할 대구(Great Daegu)를 만들기 위한 밑그림을 그릴 준비를 마쳤다고 봤다. 대구부청의 최고 책임자였던 일본인 마츠이 신스케는 그 해 대구도시계획을 야심차게 발표한다.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100년 전 계획임에도, 촘촘했다. 지역을 ▷주거 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혼합지역 ▷예비지역 5종으로 나눴다. 철도와 도로의 위치, 위생과 보안 시설, 공공과 사회적 시설, 경제, 재원 상황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대구의 심장부였던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25분 내외'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도시의 경계로 설정됐다. 계획이 발표됐던 당시보다 2배 넓은 면적이었다. 동쪽은 신천, 북쪽은 금호강을 접했다. 서쪽 경계는 달성공원, 남쪽 경계는 수도배수지 인근에 그려졌다. 대구역과 경상감영 등 주요 장소를 오갈 수 있는 전차의 선로는 12.8㎞였다. 선로 위에는 왕복 전차 24개 5분 단위로 운영하고, 운행을 쉬는 전차는 원대동에 두려 했다. 도심과 동촌유원지를 잇는 교외 전차도 계획했다. 단 14분 만에 두 지역을 오갈 수 있도록 하는 구상이었다. 1922년 발표된 계획안은 수많은 반대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했지만, 이후 제정된 도시 계획의 토대가 됐다. 시간이 흐른 뒤, 도로 계획은 1937년에 이르러 구체화된다. 도로는 폭이 24m인 대로의 배치를 중심으로 짜였다. 경부철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쪼개진 도시를 연결하는 점을 잊지 않았다. 또 대구 중심부를 둘러싸는 넓은 도로를 구획하고, 기존 도로를 연결해 '블록' 형태가 반복되도록 했다. 이때 만들어진 도시의 틀은 1960년대까지 유효했지만, 인구 성장과 도시화로 급격히 성장하게 되면서 새 국면을 맞게 된다. 토지구획정리사업법, 도시공원법 등 도시를 다루는 각종 법안이 나온 것도 영향을 끼쳤다. 1965년 도시계획재정비를 거치면서, 바야흐로 '현대 도시'로의 도약이 시작된다. (5회에 계속)
2026-01-29 11:30:00
[두나의 두발 산책] 모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숨겨진 독립운동 흔적 찾기
골목의 역사는 종종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 서문시장과 청라언덕, 북성로를 잇는 골목 사이사이 발걸음이 뜸한 곳을 돌아보자. 평범한 길목은 '대한민국 만세'가 울려 펴졌던 자리다. 표지석과 계단 몇 칸, 낮은 지붕의 마당은 지금도 그날의 흔적을 묵묵히 붙들고 있다. ◆ 시장 한복판에서 터진 만세 대구 제일교회를 지나 서문시장으로 걷다 보면, 재개발을 앞둔 서문시장 상가가 보인다. 헐릴 건물을 둘러싼 회색 바리케이드는 거리의 온기를 차단한 듯 을씨년스럽다. 그 앞, 바닥에 오목하게 자리한 작은 조형물 하나가 있다.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의미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대구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유일한 표지석이다. 1919년 3월 8일 오후 2시. 장날을 맞은 시장은 평소처럼 사람들로 붐볐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군중의 품에는 태극기가 숨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강렬한 항일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만집과 김태련이 사람들 앞에 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학생과 주민, 종교인 등 1천여 명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이날을 기리고자 표지석은 2010년 3월 1일 세워졌다. ◆ 감시 피해 오르던 90계단 청라언덕으로 향하는 오르막에는 좁고 길게 뻗은 90계단이 이어진다. 계단 곳곳에 걸린 태극기가 이곳의 성격을 말해준다. 90계단은 대구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대구3.1운동 당시, 운동 참여를 계획하고 있던 학생들은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고자 90계단을 애용했다. 그때의 역사는 벽면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그 중 '대구고보' 학생들의 결의에 가득 찬 단체 사진은 단연 눈길을 끈다. 교장과 교사 대부분이 일본인이었지만, 200명이 넘는 학생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옥고를 치렀다. '신명학교' 학생 40여 명도 함께 만세를 외쳤다. 당시 신명여중 2학년이던 김학진 할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언니들이 말하기를, 공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일제의 압제 밑에 있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거다. 그 말은 우리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기숙사 이방 저방 쫓아다니며 태극기 만들기와 의복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 교육으로 키운 저항의 씨앗 북성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재개발 이후 들어선 아파트들이 하늘을 가로막는다. 그 아래 늘 그늘진 자리에 '우현하늘마당'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남 이일우 선생의 고택을 전시관으로 꾸민 공간으로, 우현서루의 역사를 전한다. '우현'이라는 이름에는 역사 속 현자들을 벗으로 삼겠다는 뜻이 담겼다. 우현서루는 1904년, 이일우 선생의 부친 금남 이동진이 세웠다. 이후 이일우가 이를 이어받아 교육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운영했다. 교육을 통해 일제에 맞설 정신을 기른다는 철학 아래, 150여 명의 애국지사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총 150여명의 애국지사가 우현서루에서 성장했다. 이일우 선생의 조카인 이상화뿐만 아니라 이육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 박은식,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등이 이곳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일우 선생의 가족들은 교육의 뜻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그의 자손들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셋값을 낮추고 기부를 이어가며, 일제에 짓눌린 시민들의 삶을 보듬었다. 이들을 길러낸 이일우 선생의 생가인 우현 하늘마당은 눈에 띄게 지붕이 낮다. 하늘이 높으니 하늘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하고, 돈이 있어도 돈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는 이씨 집안의 '겸손'이 녹아있는 설계다. ◆ 이름 없이 이어진 또 하나의 이야기 아쉽게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파란만장한 독립투사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우현서루의 하늘을 가린 아파트 부지와 백화점 '무영당' 근처에는 1967년 설립된 현재의 대구은행(iM뱅크)과는 별개로, 1913년에 설립되었던 일제강점기 옛 대구은행이 있었다. 의열단 부단장이던 이종암 열사가 의열단 창단의 자금줄을 마련한 곳이다.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부산상고를 중퇴한 그는 1914년 대구은행에 취직했고, 불과 1년 만에 출납계 주임으로 승진했다. 시간은 흘러 1917년 12월, 마감 시간 5분이 지난 순간. 한 상인이 1만5천원(현재 가치 약 10억원)을 들고 은행을 찾았다. 이종암 열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돈을 들고 만주로 달아났다. 의열단의 활동 기반이 된 돈이었다. 이종암 열사는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열사였다. 쇠약해지는 몸을 이끌고도 동경에서 거사를 치르겠다며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됐다.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930년 5월 29일 순국했다. 표지석은 작고, 계단은 낡았고, 마당 위 하늘은 가려졌고 건물은 사라졌다. 대구 독립운동의 현장들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지만, 일부러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2026-01-29 11:3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숫자가 드러낸 지역의 온기… 압도적인 봉사 참가율 대구경북
쌀쌀한 겨울이 찾아오기 직전에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있다. 붉은 양념을 배추에 묻혀 차곡차곡 통에 담아 나누고, 얼룩덜룩해진 손으로 연탄을 옮겨 창고를 가득 채운다. 따뜻한 손길이 담긴 봉사활동. 다른 곳보다 대구경북에서는 그 온기가 더욱 뜨겁다는데. 그 비결은 뭘까? ◆ 봉사가 만든 1조 5천억의 가치 행정안전부와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가 공동으로 조사한 '2025 대한민국 자원봉사 현황'을 살펴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두 기관은 전국 자원봉사센터의 현황을 조사해 매년 1회 발표하고 있다. 왜 봉사활동 현황을 꼼꼼히 살펴봐야 할까. 보고서는 자원봉사 활동의 경제적 가치에 주목한다. 지난 2024년 공식적으로 기록된 자원봉사 활동 시간이 총 5천823만 시간. 평균 임금으로 환산할 경우의 경제적 가치는 1조 5천334억원에 달한다. 공식 집계되지 않은 자발적 자원봉사까지 포함한다면, 봉사가 창출하는 사회적·경제적 가치는 더 불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 평균부터 살펴보자. 지난 2024년 자원봉사 포털에 자원봉사자로 등록한 인원은 1천593만9천641명에 달했다. 등록인원은 여성(56.9%)이 남성(43.1%)보다 약 13.8%p 더 많았다. 인당 평균 봉사시간은 26.7시간, 평균 봉사횟수는 8.3회였다. 이들의 활동을 보조하는 자원봉사센터는 총 246개였으며, 경기도가 32개로 가장 많았다. ◆ 대구·경북, 활동률로 전국 상위권 등록 인원 가운데 실제로 한 해 동안 봉사활동에 참여한 사람은 219만1천277명이다. 전체 등록자의 13.7%에 그친다. '이름만 올린 봉사자'가 상당수라는 의미다. 지역별로는 어땠을까. 세종이 19.8%로 활동률 1위를 기록했고, 경북(18.9%)과 대구(18.8%)가 뒤를 이었다. 대구경북은 등록된 봉사자들이 실제 활동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대구는 '자주 꾸준히' 참여하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1인당 평균 봉사 횟수는 10.2회로 전국 평균(8.3회)을 웃돌며, 울산과 함께 광역시 중 공동 1위를 차지했다. 특히 20대의 참여가 눈에 띈다. 대구 20대의 연평균 봉사 횟수는 10.2회로, 전국 20대 평균(5.3회)의 두 배 수준이다. 반면 경북은 노년층이 지역 봉사를 단단히 떠받치고 있다. 경북의 60대 이상 봉사자 비율은 20.5%로, 전국 평균(15.3%)을 크게 웃돈다. 다만 경북은 활동률은 높지만, 1인당 봉사 횟수는 7.7회로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소수의 인원이 반복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마을 단위로 한 번씩 힘을 모으는 봉사 형태가 자리 잡은 것으로 해석된다. '모든 주민이 한 번쯤은 꼭 참여하는 대규모 동네 행사형 봉사'에 가깝다. ◆ 대구 경북의 비결은 조직력 대구는 단체 수 자체보다 개별 단체의 규모와 내실이 탄탄한 지역이었다. 눈에 띄는 점은 단체의 '규모'다. 대구의 자원봉사단체 회원 수는 4만8천430명으로, 인구가 훨씬 많은 서울(3만3천611명)이나 부산(3만756명)을 앞선다. 단체 수는 적어도, 한 단체 안에 많은 회원이 결속된 구조다. 경북은 '단체 기반'이 강하다. 도 단위 기준으로 경기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자원봉사 단체와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서울이나 다른 광역시보다도 규모가 크다. 여기에 활동을 지원하는 자원봉사센터도 23곳으로, 전남과 함께 전국 세 번째로 많다. 실제 현장에서도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기업자원봉사협의체, 재난현장통합자원봉사지원단, 대학 등 민·관·학 네트워크를 통해 조직력을 강화한 덕에 높은 참여율을 기록했다고 봤다. 대구광역시 자원봉사센터 관계자는 "매월 셋째 주를 자원봉사주간으로 지정해 구·군 자원봉사센터 연합활동을 정례화하는 등 조직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며 "똘똘 뭉친 시민들은 타지역의 재난에도 거리낌없이 손을 내밀어, 전국적으로 모범이 돼 뿌듯할 따름이다"고 했다. ◆데이터1 - 전체 등록률 : 31.1% (2024년 1365 자원봉사포털에 등록된 국민은 10명 중 3명) - 전체 활동률 : 13.7% (자원 봉사활동을 실제로 한 사람은 10명 중 1.4명) - 경북 지역 활동률 : 18.9% - 대구 지역 활동률 : 18.8% ◆데이터 2 지역별 자원봉사단체 현황 - 합계: 20,503개 - 서울: 743개 - 부산: 684개 - 대구: 881개 - 인천: 974개 - 광주: 213개 - 대전: 364개 - 울산: 880개 - 세종: 198개 - 경기: 4,195개 - 강원: 1,910개 - 충북: 1,362개 - 충남: 1,977개 - 전북: 804개 - 전남: 914개 - 경북: 2,573개 - 경남: 1,318개 - 제주: 513개
2026-01-29 11:30:00
[두나의 두발 산책] 골목에 담긴 4色 종교의 역사… 남산100년향수길
반월당역은 언제 와도 소란스럽다. 지하철이 도착할 때마다 쏟아지는 사람들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언제나 동성로, 혹은 백화점에 닿게 된다. 오늘은 다른 곳으로 향해보자.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와 유교가 나란히 숨 쉬고 일제에 맞섰던 저항의 기억과 순교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남산 100년 향수길'이 가까운 곳에 있다. ◆ 태극기 만들던 보현사 스무 개가 넘는 반월당역 출구중에, 1번 출구에서 곧장 보이는 골목으로 발을 들인다. 번화한 역 주변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를 마주할 수 있다. 입상 형태의 보현보살 발아래에서 피워 올린 향냄새가 골목을 채우고, 보살에게 고개를 숙이는 신도들로 주변이 어수선하다. 1910년부터 동화사의 포교당으로 자리매김한 보현사의 첫 인상이다. 당시 동화사 주지였던 장활허사는 신도들과 함께 성금을 모아 절을 세웠다. 문을 연 지 9년 뒤인 1919년, 일제에 맞선 3·1운동이 전국으로 번질 즈음, 보현사의 승려들도 침묵하지 않았다. 열 명의 승려는 보현사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완성된 깃발을 품에 안은 이들이 향한 곳은 지금의 염매시장. 승려와 학생들뿐만 아니라, 뜻을 함께한 시민은 2천 명에 이르렀다. 골목과 시장을 가득 메운 목소리는 대한독립만세로 하나가 됐다. 그 대가로 열 명의 승려는 각각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 가운데 세 명은 광복 이후 건국훈장을 받으며, 늦게나마 그 공을 인정받았다. 보현사는 단순한 신앙의 공간이 아니라, 저항의 구심점이었던 셈이다. 절을 뒤로하고 동부교육지원청을 끼고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또 다른 종교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벽면에는 아이들이 손수 그린 그림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성당과 교회의 모습이 투박하게 그려진 가운데, 교회도 성당도 아닌 낯선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관덕정'이다. ◆ 박해 시달린 종교… 대거 순교 관덕정 순교기념관은 본래 조선시대 무과를 치르던 관아였다. 활과 창으로 무인을 가리던 이 공간은, 근대에 이르러 전혀 다른 역할을 맡게 된다. 신앙을 이유로 사람의 생명을 꺾는 처형장이었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로 이어진 천주교 박해 속에서 모두 25명의 천주교 신자가 이곳 관덕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이름은 지금도 관덕정 앞 비석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순교자 가운데에는 성인으로 시성된 성 이윤일 요한도 있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신념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목을 베어야 할 망나니에게조차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품속에서 돈을 꺼내 건네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 요긴하게 쓰게. 다만,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주게"라고 했다. 그의 삶 전반과 최후는 관덕정 내부 스테인드글라스에 기록돼 있다. 햇살이 강할수록, 색유리에 담긴 이야기는 더욱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관람객을 맞이한다. 관덕정은 천주교뿐 아니라 천도교(동학)의 역사에서도 지울 수 없는 장소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사람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를 설파했다. 그러나 그 사상은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죄가 됐다. 체포된 최제우는 경주에서 경상감영으로 압송돼 옥살이하다, 1864년 3월 10일 관덕정 뜰에서 참형을 당했다. 지금의 관덕정 건물은 1930년대 이후 한차례 철거된 뒤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후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갖춰졌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와 관련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최제우의 발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관덕정의 옛터에 해당하는 동아백화점과 현대백화점 사이 보행로에는 '최제우 순도비'가 세워져 있다. 달성공원에 남아 있는 최제우 동상 역시, 대구 곳곳에 상징처럼 흩어져 남아 있는 그의 흔적 가운데 하나다. ◆ 낡은 한옥에 깃든 선비 정신 관덕정에서 인쇄소들이 늘어선 골목을 따라 꼬불꼬불 내려오다 보면, 낮게 엎드린 한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인을 돕는다'. 논어의 한 구절에서 이름을 빌린 이곳은 지역 문인들이 유교의 가르침을 갈고 닦던 곳이다. 또 영남 선비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시 모임을 여는 유교의 중심이기도 했다. 지금의 문우관은 세월을 숨기지 않는다. 기둥은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삭았고, 덜컥거리는 잠금장치 하나에 의지한 채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초라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그 낡음은 오히려 이곳이 견뎌온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일제강점기, 유교를 배우고 전하던 선비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공부할 곳도, 마음을 붙일 공간도 사라진 시대였다. 그 현실을 안타까워한 유학자 채헌식은 문우관의 문을 열었다. 달성군 출신인 그는 과거 시험을 포기하는 좌절을 겪었지만, 끝내 유교의 맥을 잇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상덕사비각'은 또 다른 사연을 품고 있다. 17세기와 18세기, 경상도를 다스렸던 관찰사 이숙과 유척기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직접 세운 비석이다. 대구이사청이 사라진 뒤, 떠돌던 비석이 자리를 잡은 곳이 문우관이었다. 문을 지키는 '진덕문' 현판에는 또 다른 인연이 깃들어 있다. 진골목에서 생을 마친 석재 서병오 선생의 스승, 서경순의 글씨다. 안쪽에 걸린 논어 문장은 서병오의 제자이자 영남서화회장을 지낸 주병환이 남긴 것이다. 문우관은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여러 세대의 손길이 겹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마당 한쪽의 매화나무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이 나무는, 문익점 선생 후손들이 모여 살던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서 건너온 백매화의 자손목이다. 봄이 오면 다시 꽃을 피울 이 나무처럼, 문우관의 역사도 손쉽게 끊기지 않을 것이다. ◆ 교회 넘어 거리까지… 만세 외친 교회 대구 최초의 교회 역시 반월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붉은 벽돌로 쌓은 외벽과 봉긋하게 솟은 유리창이 골목 사이에서 유독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건물은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지금은 기독교역사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한때 이곳은 대구·경북 기독교의 중심이었다. 1893년 문을 연 대구제일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공간에 머물지 않았다. 신앙과 함께 새로운 지식이 이 골목으로 흘러들었다. 1899년, 지금의 동산의료원인 제중원이 이곳에 세워졌고, 1906년에는 중등교육기관인 계성학교가 뒤를 이었다. 교회는 종교의 중심 기능을 넘어서서, 근대 병원과 학교 설립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3.1운동 참여교회라는 영광스러운 이름도 붙었다. 당시 제일교회 목사인 이만집은 독립선언서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3가지 행동 강령을 읽고, 가장 먼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서문시장에 모인 1천만명의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해마다 3월 1일, 교회를 찾으면 그날을 기리는 예배가 이어지는 이유다. 이 골목에는 만세를 외친 승려들이 있었고, 신념을 지키다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글과 사상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선비들이 있었고, 거리 한복판에서 독립을 외친 목회자도 있었다. 서로 다른 믿음과 사상은 이 좁은 공간에서 부딪히고, 겹치고, 이어지며 지금의 대구를 만들어왔다. 다음에 반월당을 지날 때는 출구 번호보다 근처 골목을 먼저 떠올려보자. 무심코 지나친 길 위에는, 여전히 명을 잇고 있는 종교의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2026-01-22 11:30:00
[커버스토리] 닮은꼴 남발 도시재생 사업… 변화 꾀하려면
4천400억 원을 쏟아부은 도시재생 사업은 마을마다 다른 이름으로 진행됐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세부 사업 10개 중 8개는 닮은꼴이었고, 재생은 커녕 '복제'에 가까운 풍경만 남겼다. 지난 2018년부터 대구에서 시행된 27개 도시재생 사업을 전수 분석한 결과, 세부 사업 124개 가운데 95개(약 77%)가 기능적으로 유사했다. 막걸리 전수 사업이나 반려동물 특화 재생, 고택 문화스테이처럼 지역 고유성이 드러나는 사업은 29개에 그쳤다. 단순 환경 정비에 그친 사업인 ▷안심길 조성 ▷가로 정비 ▷집 수리 사업은 스무 차례 넘게 시행됐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소유자가 확인된 주택만을 대상으로 노후 건축물을 손보는 수준에 머물렀다. 정비된 거리마다 들어선 사회간접자본(SOC) 시설도 사실상 복제됐다. 대구에 조성된 SOC 시설은 모두 76곳이지만, 이 가운데 4곳 중 1곳은 카페 기능을 포함한 유사 시설이었다. 공방·목공 작업실은 9곳, 공유부엌은 10곳으로 특정 유형의 공간이 반복적으로 양산됐다. 차별화된 기능이나 지역 특성을 반영한 사례는 찾기 어려웠고, 남은 공간 역시 사무실·경로당·주차장으로 채워지는 획일성이 보였다. 무작정 비슷한 시설을 짓다 보니 이용률과 수익성은 저조할 수밖에 없다. 중구의 '한옥마을 공유공간'은 이용객을 확보하지 못해 2년 가까이 문을 닫은 채 방치됐다. 구청은 지난해 말에야 해당 공간의 용도를 '방앗간'으로 변경해 활용에 나섰다. 운영의 지속 가능성도 취약하다. 전체 시설 가운데 공공이 직접 운영하는 비율은 46.1%로 가장 높았고, 민간 운영이 42.1%, 공공과 민간이 함께 운영하는 경우는 11.8%에 그쳤다. 공공이 운영에 개입할 경우, 도시재생 사업이 종료돼 재정 지원이 끊기면 시설 유지 자체가 어려워진다. 민간 운영 시설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운영 주체 대부분이 영세하고 전문성이 부족해 장기 운영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 때문에 비교적 수익을 내기 쉬운 카페 조성에만 집중하는 구조가 굳어졌다. 실제로 민간이 관리하는 시설 가운데 63%는 카페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도시재생 정책의 취지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국토교통부는 지역 특성에 맞춘 재생을 유도하기 위해 ▷경제재생거점 ▷우리동네 살리기형 ▷지역특화재생 ▷뉴:빌리지 ▷인정사업 등 다양한 유형을 마련해 지원해왔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이 같은 정책 취지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사업은 획일적으로 진행됐고, 주민 체감도는 낮았다. 달서구 송현동에 거주하는 장모(70)씨는 "센터 하나 지어진 것 말고는 삶이 달라진 게 없다"며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골목에 버려진 쓰레기도 그대로인데, 2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어디에 쓰였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될까. 전문가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도시재생 사업 구조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지자체가 중앙정부가 정한 예산과 사업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고, 사업을 수행하는 용역사 풀 역시 제한적이다 보니 짧은 기간 안에 성과를 내기 쉬운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동진 경성대 도시계획학과 교수는 "결국 이미 '성공 사례'로 평가된 사업을 답습하는 구조다"며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사업이 진행되고, 결과 역시 닮아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구조는 성과 평가 방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도시재생 사업은 지자체가 자체 평가한 결과를 국토교통부에 제출한 뒤, 경쟁을 거쳐 시상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평가 체계 속에서, 장기적인 운영 가능성이나 지역 변화의 지속성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장명준 대구대 행정학과 교수는 "일회성 성과보다 중요한 것은 사업이 끝난 뒤에도 효과가 유지되는지다"며 "지속 가능성을 평가 기준에 포함한다면 사정이 조금 나아질 것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사전 조사'의 부재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도시재생에 공감하고 참여할 의지가 있는 주민이 있는지, 보존해야 할 지역 자산이 무엇인지부터 면밀히 살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됐다. 결국 주민들 상당수는 사업이 끝난 뒤에도 '도시재생'과 '재개발'을 구분하지 못했고, 마을을 유지·보존하기보다는 도로 확장이나 편의시설 확충 같은 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도시재생의 개념과 주민 역할에 대한 충분한 설명 없이 사업이 추진되다보니, 사업 종료 후 주민들이 맡아야 할 거점 시설 운영도 동력을 잃었다. 강 교수는 "도시재생 사업의 주체는 정부가 아닌 주민이다. 주민이 스스로 사업을 이끌어나가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지자체가 중앙정부와 주민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주민 참여 여부와 마을의 특징을 지자체가 사전에 조사한 뒤, 중앙 정부에 사업을 신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시 역시 사업이 하나 둘 종료되는 올해를 기점으로, 대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대구시 관계자는 "사업 개수 자체는 줄이고, 사업 기간을 늘려 문제를 해결해보려 한다. 신규 사업을 신청할 때도 고심할 계획이다"며 "특히 거점시설의 활용도를 늘리기 위해, 올해 안으로 운영 현황을 전수조사한 뒤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2026-01-15 11:30:00
[커버스토리] 8년간 27곳 도시재생… 대구 얼마나 바뀌었나?
갈라진 페인트와 방치된 빈집, 이용객 없는 거점 시설은 예산 투입의 무색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편의시설 하나 없다며 평했고, 무작정 지어진 거점 시설의 운영 부담까지 안았다. 수십억 원이 투입된 대구 도시재생사업은 주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strong〉◆ 예뻐졌지만, 여전히 텅 빈 마을… 체감 효과 불투명〈/strong〉 지난 2일 배나무 샘골로 불리는 남구 이천동 403번지 일대를 찾았다. 동네 입구로 가는 길은 황량했다. 풍성한 수풀 속에 세워진 '이천동 시간풍경 골목길'이라는 안내판만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시간 풍경이 흐르는 배나무 샘골'이라는 주제로 도시 재생 사업이 이뤄진 마을이다. 남구청은 지난 2019년부터 5년간 사업을 벌여왔다. 이곳에만 117억8천300만원 가량이 투입됐다. 마을을 되살리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을 분위기를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형형색색의 벽화만이 사람 없이 황량한 골목을 지켰다. '샘골'을 형상화해, 긴 골목을 따라 칠해진 파란색 페인트는 군데군데 갈라져 흉물이 됐다. 어울리지 않는 조형물을 지난 후 골목은 점점 더 좁아졌고, 어두워졌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난 오래된 주택은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방치돼 있었다. 깨진 시멘트와 장독, 생활 쓰레기와 다 늘어진 빨랫줄만이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빈집에서 사는 길고양이는 이 동네의 골칫거리다. 빈집이 하나 둘 늘어나며 고양이도 개체 수를 늘렸다. 주택 앞에 변을 보지 않도록 하고자, 주민들은 담벼락 곳곳에 페트병을 늘여놓는 궁여지책을 내놨다. 말 그대로 '죽은 마을'이었다. 100억이 넘는 예산이 투입된 이후에도,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 "도시재생? 체감 못 한다" "도시재생 사업 효과? 글쎄요. 한 번 마을을 둘러보시면 알 텐데요. 어디가 재생됐다는 거죠?" 김명식(가명·49)씨는 남구 이천동 403번지 일대에서 태어나 쭉 이곳에서 자랐다. 군대에 다녀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천동 일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 골목 곳곳은 명식씨의 놀이터이자 등·하굣길이었다. 어렸을 적 골목을 요란하게 울리며 뛰어가는 초등학생이나,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주부들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골목에 자리잡은 주택들은 하나 둘 연기를 피웠다. 시간이 흐를 수록 이천동은 조용해졌다. 명식 씨의 친구들은 결혼, 취업, 자녀 교육 등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마을을 떠났다. 골목 곳곳에 놓여진 빈집은 명식 씨의 친구들이 살던 옛집이었다. 40년이 훌쩍 넘은 주택들은 워낙 오래됐다보니, 수리를 거듭해도 새 주인은 찾아오지 않았다. 신축 건물이 없으니 셋방살이를 자처하는 젊은이도 줄었다. 명식씨는 "남은 사람은 어르신뿐이다. 옆집, 앞집 지인들에게 의지해 남은 생을 살아가는 노인들만 남은 셈이다"고 했다. 도시재생사업이 끝난 뒤 상황은 반전됐을까. 그는 "전혀 체감할 수 없다. 바뀐 게 없는데, 100억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되려 물었다. 좁다란 도로 환경은 그대로였다.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은 보행기를 끌고 불법주차 차량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편의점 하나 들어오지 않았고, 빈집도 그대로 방치됐다. 벽과 계단에 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구청 홍보 게시글을 본 관광객들이 생겼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지갑을 열 만한 상권도 없다보니, 이들은 잠시 마을을 둘러보다 떠났다. 마을 특색을 살리겠다며 붙인 '배나무 샘골'이라는 사업 이름도 생소했다. 마을에 남은 배나무는 열매가 두어 개 밖에 열리지 않아 존재감이 희미하다. 그는 "결국 왜소한 배나무 옆에 '가짜 배나무'를 심더라. 관광객을 불러오고자, 마을 사람들도 잊은 지 오래인 배나무 얘기를 억지로 꺼내 온 것 같다"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을이 바뀌었다'고 체감한 건 훨씬 이전이었다. 1990년대 후반 이천동 마을에는 차량 두 대가 너끈히 교행할 수 있는 넓은 길이 생겼다. 차량 진입이 손쉬워지고, 걷기도 쾌적한 도로가 들어서면서 유동 인구가 늘었다. 오전 7시가 되면 출근길, 등하굣길의 오르는 이들로 도로가 복작해졌다. 도로와 함께 도시가스가 들어서고, 산발적으로 나 있던 우물도 메우면서 삶의 질은 더욱 올라갔다. 신식 빌라도 하나 둘 건설되기도 했다. 주민들은 '재생'보다 여전히 '인프라 개발'에 목말라 있었다. 명식씨는 "삶의 질을 높이는 건 편의점이나 주차장, 큰 도로다. 이번 도시재생 사업에서는 빠진 것들이다"며 "주민들에게 '마을이 살아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겠느냐'는 질문 없이 사업이 진행했으니 당연한 결과다"고 했다. ◆ "장 보러 먼길… 차 없이는 불가" 권영교(67)씨는 도시재생 사업이 한창이던 지난 2020년 이천동 일대로 이사를 왔다. 근처에서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본가에서 떨어져 아들과 함께 머물 곳을 찾은 결과다. 조용한 마을 분위기와, 새벽 운동을 할 수 있는 공원이 가깝다는 점은 영교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같은 마음으로 이주해 온 이들이 늘어났냐는 질문에, 영교씨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영교씨는 "이곳 저곳을 개선하느라 부산스럽긴 했다. 하지만 사업이 끝난 이후에도 마을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유입 인구가 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영교씨는 고민도 하지 않고 '편의시설'을 꼽았다. 마트는 커녕, 편의점과 슈퍼도 없어서다.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영선 시장이 있지만, 식재료를 들고 먼 길을 걷기에는 무리가 있다. 영교씨는 "조용한 분위기 말고는 이점이 크게 없다. 시장에 가거나 마트에 방문하려면 차가 꼭 필요하다"며 "근처아파트 주민들을 위해서라도 작은 마트, 편의점 하나라도 들어서길 바란다"고 염원했다. 시장에 방문하고 싶어도, 손쉽게 돈을 찾을 수 있는 은행이 가까운 곳에 없는 점도 문제다. 휴식을 즐기거나 동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카페도 없다. 영교씨는 다행히 무사히 적응을 마쳤지만, 새 주민이 들어온다면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걱정했다. 〈strong〉◆ 무작정 지은 건물… 활용도 높이느라 애먹어〈/strong〉 "우리 동네 초등학교 입학생이 올해 38명이에요. 75세 이상 노인은 1천500명이죠. 어때요. 도시재생이 된 거 같습니까?" 2일 방문한 대구 동구 복합근린허브센터. 지난 2023년 11월 개소한 이 시설을 짓는 데만 53억원이 들었다. 이 건물 운영은 '소목골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의 몫이다. 건물에 딸린 주차장과 카페, 치킨집을 운영하며 수익 창출을 꾀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이날 점심 식사를 마친 주민 4~5명은 카페에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저렴하고 따뜻한 커피는 주민들을 단골로 만들었다. 단골 주민들은 카페 근무자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카페에 녹아들었다. ◆ 수익 창출에 골머리 앓아 그 내막은 순탄치 않다. 인건비와 재료비를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주차장을 제외한 대부분 수익 사업이 겨우 적자를 면하고 있다. 1층에 있는 치킨집이 들어서기 전, 조합은 맥주가게 '까치펍'을 야심차게 차렸다. 소목골에서만 볼 수 있는 메뉴를 개발하고, 마을 사랑방 역할을 도맡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지역성'을 살리자니 수익이 변변찮았다. 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단 3달만에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딸린 조합원들에게 인건비를 주기 위해 백방으로 방법을 찾았고, 사업 취지에 공감한 프랜차이즈 치킨집과 업무 협약을 맺고 겨우 수익을 내게 됐다. 이곳도 영업을 오래할 수록 인건비가 불어나, 하루 7시간만 문을 열기로 했다. 이것저것 사업을 벌려봐도 인건비만 겨우 감당하는 '풍전등화' 신세다. 손에 떨어지는 수익은 5%가 채 되지 않는다. 당연히 운영을 도맡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 임기를 딱 1년 남긴 김광수 소목골 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의 시름이 깊은 이유다. 김광수 이사장은 "돈 한 푼 받지도 않고 사무실에 살다시피 하며 조합을 운영하는데, 나아질 기미가 없어 다음 이사장을 맡을 사람이 있겠냐. 젊은 피도 수혈되지 않아, 결국 노인들이 어렵게 꾸려나가야 한다"며 "동네 살리는 데 220억이 들었다. 차라리 현찰로 줬으면 이것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고 했다. ◆ 청년 없는 곳에 들어선 청년 센터 남은 공간인 2층에 들어선 청년센터도 고민을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 곳은 예약자를 대상으로 물건을 팔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거나, 촬영이 가능한 스튜디오와 강의실을 대여해주고 있다. 시설 만족도와 재방문율은 높지만, 새로운 이용객이 눈에 띄게 늘지 않고 있는 게 문제다. 비슷한 성격의 시설이 또 생긴다는 점도 우려된다. 차로 15분 거리인 경북대 일대에서 새로운 도시재생사업이 추진되고 있어서다. 이곳에도 청년 창업과 모임을 지원하는 거점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동구 청년센터 이용자 다수가 경북대 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수요가 분산돼 동구 시설의 활용도는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동구 청년센터 관계자는 "건물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건 매우 감사한 일이지만, 근처 상권이 발달되지 않은 데다가 접근성도 좋지 않아 청년들이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며 "청년센터가 있으면 가까운 곳에 있는 동구시장도 활성화 될거라 기대했지만, 시장도 센터도 이용객이 크게 늘지 않았다"고 했다. ◆ 비슷한 시설 우후죽순… 똑같은 숙제 안아 1층 카페와 조합 사무실, 구청이 관리하는 주거복지센터까지. 달서구 송현희망센터는 동구의 시설과 똑 닮았다. 운영 책임인 배민균 든들행복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역시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이 곳은 인건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마진이 남으면 조합원들끼리 나누는 식이다. 새로운 수익 모델도 찾지 못했다. 결국 기댈 곳은 구청뿐이다. 최소한의 운영비도 없어, 부족한 카페 테이블을 구매하는 것조차 부탁해야 한다. 하지만 구청 예산 상황도 넉넉하지 않아 요구가 실현될 지는 미지수다. 주요 도시재생 사업 중 하나인 '주차장' 사업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며 한탄했다. 만들어진 주차장은 고작 19면. 단독주택이 많은 마을 특성상, 골목을 꽉 채운 불법주차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다. 그러니 운영이 버거운 송현희망센터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가 않다. 배 이사장은 차라리 이 자리에 주차장을 세운 뒤 이용비를 받았더라면, 조합 살림이 나아졌을 것이라 본다. 배 이사장은 "멋들어진 건물이 지어지고, 무허가 건물들이 정비된 건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건물 관리를 전문성 없는 우리가 맡으려니 감당이 안 된다"며 "도시재생사업 기간이 끝나고 현장지원센터가 철수한 뒤, 맡을 사람이 없어 겨우겨우 조합이 떠안게 됐다. 제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2026-01-15 11:30:00
[커버스토리] '복사+붙여넣기'… 색깔 잃은 대구 도시재생
27개. 총사업비 4천403억3천400만원. 지난 2018년부터 대구 곳곳에서 추진된 도시재생사업의 요약본이다. 골목을 살리고, 마을을 되살리겠다며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했다. 그렇다면 정말 동네는 바뀌었을까. 8여년간의 사업이 마무리 된 뒤 남겨진 마을 주민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겉모습만 놓고 보면 변화는 분명하다. 길은 정비됐고, 낡은 집들은 손을 탔다. 벽화가 생겼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동네마다 풍경은 엇비슷했고, 덜컥 시작된 사업의 운영 부담은 주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주민들의 얼굴은 울상, 또 울상이었다. 도시재생은 단순히 마을을 '고쳐쓰는' 일이 아니다. 그 공간이 왜 생겼는지, 누가 지키는지, 시간이 지나도 남을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그러나 대구의 도시재생은 이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주간매일은 27개 사업 전수조사 통계와 실제 현장을 살펴보고, 실패가 반복된 구조와 원인을 추적했다.
2026-01-15 11: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경계의 확장과 과밀의 시대… 도시 계획의 시작
[소개] 대구시가 기획, 제작한 책 〈지상대구〉를 통해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 자료를 통해 대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췄는지 추적한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의 조성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총 4부로 소개한다. 연재를 여는 1부에서는 도시의 뼈대에 해당하는 행정시설의 변천사와 함께, 확장되는 도시 구역을 다룬다. 1934년 대구 인구는 무럭무럭 늘어나 14만8천명에 육박한다. 당시 인구밀도는 1명당 면적이 81㎡로, 이상적이라 꼽는 1인당 100㎡을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 인구를 감당치 못하면서 대구부는 점차 덩치를 불렸다. 대구역으로 가로 막힌 경상감영 북편을 제외하고, 도심은 점점 동과 서, 남으로 확장됐다. 총독부는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고자 1937년 3월 23일 대구시가지계획구역, 지역가로, 토지구획정리구역과 면적을 정리했다. 당시 대구부 면적에 약 927만㎡에 주변지역 222개동을 포함시킨 약6천722만㎡이 도시 계획구역으로 꼽혔다. 이 중 거주지역으로 지정한 곳은 4천819만㎡였다. 점점 더 넓어지는 도심을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새로운 운송수단이 필요해졌다. 1929년 대구 부영버스가 첫 운행을 시작하게 됐다. 수요에 따라 교외선까지 증편되면서, 동촌과 화원까지 총 4개의 노선 버스가 다니게 됐다. 최초 1년 간 적자 운행을 하던 부영버스는 이듬해인 1931년 영업 개선을 통해 흑자를 기록하며 성장한다. 총독부는 대구 지역의 인구가 더욱 늘어날 것을 전제로 도시 계획을 펼쳤다. 1934년 당시 인구는 15만명에 미치지 못했지만, 1965년에는 약 35만명으로 늘어날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도시 성장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 인구 유입이 이어졌다. 결정적 변수는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대 피란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대구는 극심한 인구 과밀 상태에 놓였다. 1953년 대구의 인구는 50만 명으로 늘었고, 이 가운데 18만 명이 피란민이었다. 수많은 피란민이 먹고 잘 만한 곳은 없었다. 이들은 금호강 기슭과 신천 강변에 움막과 판자집을 짓고 생활했다. 전후 재건과 도심 재구축이 필요한 때였다. (4편에 계속)
2026-01-15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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