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나의 두발 산책] 폐역이 된 경산 삼성역, 문학은 남아 숨쉰다
10분마다 한 번씩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근처에 심겨진 나무들은 몸을 떨며 나뭇잎을 떨어뜨렸다. 기차의 굉음이 잦아들고 나면,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시골 동네는 다시 고요해진다. 외지인들이 찾아오던 벚꽃 철마저 지나간 지금, 삼성역의 풍경은 더욱 쓸쓸하고 조용하다. 이제는 사람이 내리지 않는 폐역이 돼서다. 사람 소리 대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이곳에는 한 소설가의 삶이 묻어 있다. ◆ 귀향의 시작, 삼성역 "삼성, 홈의 그 하얀 현관 앞에서 나는 무심코 호주머니를 뒤지어 차표를 꺼내보았다". 이동하 작가의 '우울한 귀향'은 삼성역에서 시작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막막함에 시달리다 귀향을 결심한 주인공 윤의 혼잣말이다. 유년시절 전쟁을 겪은 주인공은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기에 이른다. 이후 윤은 고향 경산에서 과거를 반추한 뒤, 다시금 고향을 떠나며 정신적 성장을 이룬다. 주인공의 삶은 지역 작가 이동하와 떼놓을 수 없다. 이동하 작가의 고향도 이곳이어서다. 그는 삼성역 주변 조용한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태어난 건 일본이지만, 워낙 어린 시절 일본을 떠나 경산을 고향이라 여겼다. 이를 기념하는 문학비는 삼성역 바로 옆 샛길에 터를 잡았다. 여름날의 무성한 풀숲 속에서 문학비는 오늘도 오가는 열차를 마주보고 서 있다. '향토 출신 작가'라는 이동하 작가의 수식어는 그를 지역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경산의 애정 어린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 기차는 떠나도 문학은 남고 이곳에서 겪은 이야기는 고스란히 소설이 됐다. 초등학교까지 도보로 10분 거리인 작은 시골동네의 풍경은 '우울한 귀향'의 배경이 됐다. 초등학교 시절 겪은 6.25 전쟁과 대구로 이사 간 이야기,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은 '장난감 도시'에 오롯이 담겼다. 여러 장편소설을 쓴 이동하 작가의 첫 시작은 1966년 신춘문예였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 '전쟁과 다람쥐'를 펴내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백여 편에 달하는 단편을 꾸준히 써내며 문학가의 삶을 이어갔다. 또 새로운 문학가가 탄생하도록 힘을 썼다. 목포대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30년 가까이 지망생들을 가르쳤다. 각종 문학 협회의 자리를 도맡고, 지역 사회에서 문학 강의를 이어 나가기도 했다. 그가 소설적 영감을 얻었을 곳을 돌아보고자 모교인 남천초등학교까지 천천히 걸었다. 인도와 차도 구분 없이 잘 깔린 도로 위에는 자동차를 보기 어려웠다. 눈높이보다 낮은 담장 너머, 온갖 식물이 자라고 있는 주택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화려한 도심의 소음 대신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주인인 곳, 경산 삼성역과 남천면의 골목길들. 비록 주인공 윤의 귀향은 '우울'했을지 몰라도, 그 우울을 딛고 피어난 이동하의 문학은 이곳 경산의 고요한 풍경 속에 오래도록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세 번의 반성, 세 명의 성현 역과 지명도 쉬이 넘길 수가 없다. 삼성(三省)이라는 한자에는 '세 번 되돌아보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하루 세 번 자기가 한 일을 반성하라는 뜻의 고사성어 '삼성오신(三省五身)'과 같은 한자다. 경산에서 '삼성'이라고 하면 보통 삼성현(三聖賢)을 떠올리지만, 삼성역과는 한자가 다르다. 삼성현은 경산이 낳은 세 명의 현인으로 원효와 설총, 일연을 의미한다. 원효는 신라 671년에 통불교를 제창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한국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고승 중 하나로 꼽힌다. 설총은 신라 중대의 문장가로, 한글 창체 전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된 '이두'를 집대성했다. 꽃나라를 다스리는 화왕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미(美)보다는 바른 도리를 더 가까이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남기기도 했다.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를 모두 모아 엮어낸 '삼국유사'의 아버지 일연도 경산에서 났다. 그는 민중들의 입과 입을 타고 내려오는 한민족의 뿌리를 기록하는 동시에, 당대 사람들의 삶과 세계관을 꼼꼼하게 남겼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기록했던 세 성현의 발자취 위에 또 하나의 문학적 숨결이 더해졌다. 세 번의 반성과 세 명의 성현을 품은 땅, 경산에는 우리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깊고 단단한 문장들이 남았다.
2026-06-26 14:00:00
[창간80년, 격동 80년] 북으로 향하던 총구, 결국 서울로… '실미도 사건'의 전말
"청와대로 가자." 총을 든 남자들이 버스 기사를 위협하며 출발을 재촉했다. 북한 무장공비도, 범죄 조직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비밀리에 길러낸 북파공작원들이었다. 1971년 8월 완전무장한 채 서울 한복판으로 향한 이들의 행렬은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훗날 '실미도 사건'으로 불리게 된 이 비극은, 사실 3년 전 청와대를 노렸던 북한의 1.21 사태에서 시작됐다. ◆ 보복 위해 비밀부대 결성 1968년 청와대를 습격해 대통령을 살해하려는 1.21 사태 이후, 정부는 보복을 결심했다. 결심은 빨랐다. 그 해 4월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 김형욱은 북한으로 보낼 특수공작원을 키우고자 실미도에 북파목적의 특수부대인 684부대를 창설했다. 소리 소문없이 재빠르고 사나운 '오소리' 마냥 북한에 침투하라는 의미로 '오소리 공작대'라 불리기도 했다. 만에 하나 일을 그르쳤을 때 꼬리를 자르기 위해, 가난한 민간인 31명을 부대원으로 택했다. 상당한 봉급과 장교급 대우를 약속받은 31명은 3개월 간의 훈련을 위해 실미도로 모여 들었다. 기밀 유지를 위해 이들에게 가짜 군번을 부여했고, 북파 임무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영종도 옆 작은 실미도에 모인 이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더 빠르게 달리기 위해 등 뒤에서 총을 쏘곤 했다. 가혹한 훈련을 버티지 못해 뼈가 부러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교육대장의 지시에 따라,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 동료를 구타하기도 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7명의 부대원이 사망했다. ◆ 갈 곳 잃은 '오소리' 부대원 약속한 3개월이 지났지만 실제 침투 작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이 논의되는 등 화해정국으로 돌아서서다. 미국 역시 남과 북의 갈등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당시 닉슨 정부는 중국과 핑퐁 외교를 펼치며 평화 분위기 조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 가운데 북파공작원의 파견 사실이 알려지면,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북과 대립해야 할 위험이 컸다. 그러나 부대는 해체되지 않았다. 부대원의 존재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휴가나 가족과의 교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들은 섬 안에 방치된 채 3년 4개월이란 시간을 보냈다. 약속했던 봉급과 대우는 받지 못했고, 군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점점 열악해졌다. ◆ 북 아닌 서울로… 실미도 탈출 축적됐던 분노는 1971년 8월 23일에 폭발했다. 부대원들은 숨겨 뒀던 소주를 나눠먹다가 들킨 것이 계기였다. 비인간적 대우를 견디지 못한 부대원들이 총을 들었다. 결국 섬에 주둔해 부대원들을 관리하던 기간병 18명이 총격 중 숨졌다. 부대원들은 기간병의 시체를 뒤로하고 섬을 빠져나갔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고발하겠다는 일념으로 부대원들은 서울로 향했다. 민간인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탈취해 한창 가던 중, 군과 경찰을 마주했다. 지금의 서울 동작구 대방동 일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조여드는 포위망에 방도를 찾지 못한 부대원들은 수류탄을 터뜨렸다. 귀청이 떨어질 만큼의 굉음이 터진 뒤, 살아 남은 건 4명의 부대원뿐이었다. 사건에 휘말려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도 목숨을 잃었다.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자, 정부는 부랴부랴 기밀 사수에 나섰다. 생존자 4명에게 "사건에 대해 함구하면, 월남전에 보내주겠다"며 회유에 나섰다. 언론에는 공군 산하의 특수범들의 폭동이라고 알려, 진실을 왜곡했다. ◆ 탈출 결말은 비극… 전원 사망 약속은 또 지켜지지 않았다. 다음 해 3월 10일, 입을 걸어 잠갔던 생존자들은 모두 사형당했다. 또 이들에 대한 처분은 비공개 군사 재판으로 처리해 입단속을 시켰다. 부대원들이 사형당하는 그 순간에도 결국 가족들은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 어느덧 30년이 넘게 흐른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실미도 사건을 파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 날의 진실이 드러났다. 위원회는 사망한 부대원들의 유해를 찾아 신원 조회에 나섰다. 그러나 이 과정에도 서울 침입 뒤 살아남았던 4명의 사형수의 유해는 끝내 찾지 못했다. 국가는 이들을 만들었지만, 그 필요가 사라지자 존재마저 지우려 했다. 실미도 사건은 단순한 폭동도, 우발적인 참극도 아니었다. 남과 북의 갈등이 만들어낸 국가폭력의 결과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 묻혀 있던 진실은 드러났지만, 희생자들이 겪어야 했던 시간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다.
2026-06-26 13:37:00
전세 가고 월세 온다… 거래 3건 중 2건이 월세 [데이터로 보는 세상]
임차인은 월세 부담을 줄이고, 집주인은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다. 이 두 가지 장점을 기반으로, 전세는 오랜 기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임대 형태로 자리 잡아왔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옛말일까. 최근에는 월세 거래가 빠르게 늘어나며 전세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한때 당연하게 여겨지던 전세는 왜 힘을 잃고 있을까. 최근 5년간 대구의 임대차 거래 흐름을 통해 변화를 들여다봤다. ◆ 전세 대신 월세 택했다 법원 등기정보광장을 통해, 최근 5년간 대구에서 확정일자를 받은 임대 거래 중 전·월세 비중을 분석했다. 대구 지역의 전월세 거래 수 자체는 늘어나는 추세였다. 지난 2021년 거래량은 6만2천180건에서 2025년 7만7천974건으로 늘었다. 전세 거래량은 2022년을 정점으로 매년 감소하고 있으나, 월세 거래량이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며 전체 임대차 거래 규모를 키우는 모양새다. 대구의 경우 월세 비중은 2021년 약 50.3%에서 2025년 약 65.8%까지 가파르게 상승했다. 2021년에는 전세 거래가 3만911건, 월세가 3만1천261건으로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 2024년까지도 월세 비중은 57.8%으로, 4년간 증가율은 고작 7% 수준이었다. 상황이 반전된 건 2025년이었다. 월세 비중은 65.8%로 크게 상승해, 임대 거래 3건 중 2건이 월세였다. 실제로 맺어진 거래는 5만1천288건에 달했다. ◆ 무너지는 전세 신뢰 월세 거래의 증가는 전국적 흐름이다. 월세 비중은 2021년 약 42.8%에서 2025년 약 62.8%로 지난 5년간 약 20%p 급증했다. ▷울산 ▷대전 ▷제주와 같은 주요 특광역시는 월세 비중이 70~80%대에 육박하며, 전세 소멸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전세 소멸의 이유로는 전세사기 두려움, 전세금 증가 등이 꼽힌다. 특히 2022년 말 '빌라왕 사기'가 소멸을 가속화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무자본으로 임차인에게 받은 전세보증금으로 다른 빌라를 사고, 그 집에 또 임차인을 들여 새 주택을 구매하는 방식의 사기 수법이다. ◆ 지역마다 다른 월세 비중 대구 9개 구·군 별로 맺어진 월세 거래의 비중도 달랐다. 거래량이 100여 건에 불과한 군위군을 제외하고, 이들 거래를 분석해봤다. 조사 결과 월세 비중이 높은 곳은 남구 (76.6%), 달성군 (71.6%), 중구 (68.6%) 순이었다. 대구에서 월세 거래의 비중이 가장 낮은 곳은 수성구였다. 하지만 동시에 월세 비중이 가파르게 늘어난 장소로 꼽혔다. 2021년 수성구 월세 비중은 38.9%였지만 2025년 58.1%로 19.2%p나 증가했다. 월세 증가율이 가장 낮은 곳은 서구로, 5년간 13.3%p 증가하는 데 그쳤다. ◆ 보증금 흐름으로 본 전세 시장 대구 지역의 전세 시장은 어땠을까. 다른 지역에 비하면, 대구는 전세보증금이 저렴한 편이었다. 2025년 기준 서울의 평균 전세 보증금은 약 4억3천23만 원인 반면, 대구는 약 2억1천78만 원으로 서울의 절반 수준이다. 다른 특광역시와도 비교했을 때 보증금은 낮았다. 울산은 2억2천750만원, 부산은 2억1천992만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5년간 전세보증금은 큰 변화를 맞지 않았다. 2021년 2억1천631만원에서 2025년 2억1천78만원으로 소폭 감소했다. 2023년에는 1억9천464만원으로 최저점을 찍기도 했다. 구·군별로는 전세보증금이 가장 크게 감소한 곳이 중구였다. 2억6천만원 선에서 3천700만원 가량 감소했다. 그 뒤를 이은 수성구의 경우 3억1천만원의 보증금을 자랑했으나, 2025년 2억9천만원 선으로 하락했다. 되려 서구와 군위, 남구는 전세 보증금이 상승한 지역으로 꼽혔다. 특히 서구의 경우 1억 513만원에서 1억 8천만원으로 보증금 상승액이 가장 큰 곳이다. 평리뉴타운 등 신축 아파트 늘어난 영향으로 추정됐다. 한때 '내 집 마련 전 단계'로 여겨질 만큼 익숙한 전세제도, 이대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의 흐름이 이어진다면, 일부 지역에서는 전세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시장의 변화는 이미 통계로 드러나고 있다. 주택 보유자와 임차인, 거래를 고민하는 시민들 역시 달라지는 흐름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6-06-20 17:00:00
출근길도 함께…강아지 때문에 회사를 골랐다 [반려동물]
아침 9시 30분. 직장인 김나라 씨(30)가 집을 나선다. 남들보다 여유로운 출근 시간이라지만 아침은 늘 바쁜 법이다. 노트북 가방을 챙기느라 분주한 그의 뒤로 작은 발소리가 따라붙는다. 반려견 '나무'다. 목줄을 채워주자 기다렸다는 듯 꼬리를 흔들고 제일 먼저 현관 앞에 자리를 잡는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김 씨의 출근길에는 늘 나무가 함께한다. 반려동물 1천500만 시대. 바야흐로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시대다. 함께 밥을 먹고, 카페를 찾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최근에는 더 나아가 반려동물과 함께 일하고 근무시간을 보내는 직장 문화까지 등장하고 있다. 사적인 여가 시간을 넘어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업무 공간까지 반려동물과 공유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 "혼자 두고 출근할 생각하면 끔찍" 나무는 상주시 보호소에서 구조된 유기견 출신이다. 어미개와 함께 논에서 발견된 뒤 보호소를 거쳐 새 가족을 만났다. 추정 생일이 4월 5일 식목일이라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를 담아 이름도 '나무'로 지었다. 어릴 때 가족을 만난 덕분에 특별한 트라우마는 없지만 원래 성격 자체가 예민하고 겁이 많은 편이다. 보호자가 집을 비우면 밥도 먹지 않고 배변까지 참을 정도다. 김 씨가 현재 직장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입사 전부터 반려동물 동반출근이 가능한 회사라는 점을 알게 됐고, 나무를 오랜 시간 혼자 두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김 씨는 "상경해서 하루 종일 나무를 집에 두고 출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며 "반려동물과 함께 출근할 수 있다는 점이 입사를 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반려동물과 함께 출근하게 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죄책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김 씨는 "나무를 혼자 두고 출근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며 "회사에서도 계속 걱정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에게 반려동물과 함께 일하는 삶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강아지를 위해 내 일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내 일을 위해 강아지를 희생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의미다"라며 "언젠가 나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더라도 혼자 두었던 시간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게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 직장견 나무의 하루 사무실에 도착한 나무는 가장 먼저 팀장 자리로 향한다. 매일 챙겨주는 간식을 얻어먹기 위해서다. 간식 타임이 끝나면 나무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다. 김 씨는 "사회생활 해보면 다양한 성격의 사람이 있듯 강아지도 마찬가지"라며 "우리 나무는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스타일"이라고 웃었다. 이어 "겁이 많은 편이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다른 강아지들과 달리 대부분 제 책상 옆에 앉아 쉰다"며 "회의를 하러 가거나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껌딱지처럼 따라다닌다"고 말했다. 가끔 심심할 때면 직원들에게 개인기를 보여주고 간식을 얻어먹기도 한다. 종이컵 노즈워크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나무가 근무하는 회사에는 여러 직원들이 반려견과 함께 출근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강아지도 있고, 나무처럼 보호자 곁에 머무는 강아지도 있다.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반려동물을 챙긴다. 외근이 생기면 대신 돌봐주기도 한다. 김 씨는 "업무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때면 서로 맡아주겠다고 할 정도"라며 "아이 하나를 온 마을이 키운다는 말처럼 강아지 한 마리를 회사 전체가 함께 돌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 배려와 책임으로 유지되는 동반출근 물론 반려동물 동반출근이 마냥 자유로운 것만은 아니다. 비반려인 직원도 있고, 동물을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입사 전부터 동반출근이 가능한 회사라는 점이 충분히 공유돼 있었고 회사 자체가 반려동물 친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며 "다들 이해해주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반려인들이 배려에만 기대는 것은 아니다. 배변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실외 배변을 시키거나 매너벨트를 착용한다. 간혹 배변 실수가 발생하면 사내 메신저를 통해 알리고 보호자가 즉시 처리한다. 김 씨는 "모든 사람이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반려인들의 책임도 중요하다"며 "동반출근 문화가 유지되려면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수"라고 말했다. ◆ 반려동물도 가족… 직장 문화도 변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직장 문화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최근에는 반려동물 동반출근뿐 아니라 반려동물 장례휴가, 돌봄휴가, 입양 지원금, 반려동물 생일 축하금 등을 운영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일부 기업은 사내에 반려동물 돌봄 공간이나 강아지 유치원을 마련하기도 한다. 취업준비생 조수현(26) 씨는 "예전에는 연봉과 복지만 봤다면 요즘은 반려동물 친화 여부를 따지는 사람도 적지 않다"며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늘면서 관련 복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업무 집중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고, 동물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김 씨 역시 이런 시선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동물을 좋아하지는 않을 수 있고 회사에서는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서도 "막상 지내보면 강아지들도 스스로 루틴을 만들고 인간과 공생하는 방법을 배워간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회사가 동반출근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다만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진 만큼 직장 문화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26-06-20 13:45:00
반려견 동반출근, 복지인가 민폐인가…갑론을박 일기도 [반려동물]
"동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오히려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는 시대가 온 걸까요" 동물 공포증(Zoophobia)을 앓고 있는 김모(35) 씨의 말이다. 대구 서구에 사는 김 씨는 어린 시절 개에게 물린 이후 지금도 동물만 보면 식은땀이 흐른다. 최근 반려동물 친화 문화가 확산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걱정도 커지고 있다. 그는 "길을 걷다가 강아지를 마주치는 건 이해한다. 산책을 하는 건 일상이고 잠깐 스치는 일이니까 괜찮다"며 "하지만 직장까지 동반출근한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숨이 턱 막힌다"고 말했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관련 문화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동물을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직원도 있고, 알레르기 문제나 소음, 위생 문제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업무 공간은 공적인 장소인 만큼 개인의 반려동물을 함께 데려오는 것이 적절하냐는 의견도 나온다. 반려동물 동반출근 문화는 국내에서는 아직 낯설지만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비교적 오래전부터 도입돼 왔다. 실제 미국 아마존과 구글 등 일부 기업은 반려동물 친화 정책을 운영하며 직원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동반출근이 항상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Dogs in the Workplace: Benefits and Potential Challenges' 연구는 반려견 동반근무가 직원들의 정서 안정과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생산성 저하와 집중력 분산 등의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반려견 보호자가 업무 중 반려견의 행동에 신경 쓰거나 배변·산책 등을 위해 자주 자리를 비울 수 있고, 반려견이 사무실을 돌아다니거나 짖는 행동이 다른 직원들의 업무를 방해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비반려인 직원에 대한 배려도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개털 알레르기가 있거나 동물을 무서워하는 직원에게는 업무 공간 자체가 불편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수백만 건의 개 물림 사고가 보고되고 있으며 일부는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전문가들은 반려동물 동반출근의 성패는 제도 자체보다 운영 방식에 달려 있다고 본다. 직원들의 충분한 동의와 사전 고지, 예방접종 관리, 배변 처리 규정 등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이 마련돼야 반려인과 비반려인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6-06-20 13:45:00
[MZ 연구소] 어떤 음식에나 찰떡 재료… 보라색 '우베'의 유혹
하루만 지나도 금세 새로운 유행이 등장하니, 따라가려 해도 쉽지 않다. 자녀나 손자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머쓱해지는 일이 어느덧 일상이 됐다. MZ 연구소는 이런 독자들을 위해 젊은 세대의 유행과 문화를 쉽고 친근하게 풀어 소개한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말이다. (편집자 주) 젊은 층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재료로 '우베'가 떠오르고 있다. 우베는 보라색 참마로, 필리핀에서 자라는 마의 일종이다.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수천년 전부터 구황 작물로 소비됐으며, 최근에는 디저트 재료로 애용되고 있다. 우베는 일반 참마와는 조금 다른 맛과 향을 풍긴다. 담백한 데다가 견과류의 고소한 맛도 나고, 독특한 향이 없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우베를 갈아 만든 파우더를 음식에 넣으면 독특하고 선명한 보라색이 된다는 점도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한 카페를 찾아 우베 라떼를 먹어봤다. 우유 위 진하게 녹아든 우베는 몇 번 휘저으니 은은한 연보라색으로 바뀌어 눈이 즐거웠다. 처음 입에 머금었을 때는 고구마와 엇비슷한 맛이 났다. 끝맛은 국화와 비슷한 향이 난다. 은은한 향이 크게 거슬리지 않아, 우유와 섞였을 때 조화가 좋았다. 보라색은 그닥 식욕을 당기는 음식은 아니다. 그럼에도 왜 MZ세대는 우베를 사랑할까. 비밀은 색깔에 있다. 수많은 SNS 게시글 중 눈길을 끌려면 독특해야 해서다. 선명한 보라색 음식은 손쉽게 '좋아요'를 받을 수 있어 선호되고 있다. 실제로 SNS에는 우베 쿠키와 우베 아이스크림, 우베 푸딩 등을 인증하는 게시글도 빠르게 늘고 있다. 특유의 연보라색 덕분에 사진을 찍으면 화면이 화사하게 살아난다는 반응도 많다. 단순히 맛뿐만 아니라 '사진이 잘 나오는 음식'이라는 점도 우베 열풍을 키우는 이유로 꼽힌다. 그 덕에 우베는 미국 등 해외에서 '컬러푸드'로 먼저 유행한 뒤, 지난 4월부터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컬러푸드는 '알록달록한 음식을 다양하게 섭취하는 건강한 식단'이지만, 최근에는 '색깔이 선명해 눈길을 쉽게 끄는 음식'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우베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말차'의 다음 주자가 됐다. 프렌차이즈와 편의점, 카페에서는 우베 라떼와 우베 케이크를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디저트뿐만 아니라 우베 막걸리, 우베 맥주까지 등장해 MZ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제 언제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게 된 보라색 음료인 우베다. 낯설다고 무작정 멀리하지 말고, 한 번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2026-06-19 13:30:00
[두나의 두발 산책] 한국 안경산업의 산실… 대구 안경특화거리를 걷다
동그란 알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 조형물이 반기는 이곳은 대구 북구의 안경특화거리다. 이곳은 한국의 안경 80%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안경 생산지다. 골목에 있는 소매 안경원은 약 4곳이다. '할인점'이라는 안내판을 단 가게들은 저렴한 가격을 강점으로 들었다. 10년 동안 소매 안경원을 운영한 A씨는 "예전에는 10여 곳의 소매점이 있었는데, 하나둘 문을 닫게 됐다"며 "30년 넘게 운영한 다른 가게들과 비교하면, 10년은 명함을 내밀기도 어렵다"며 긴 역사를 설명했다. 특화거리라고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소매 안경원은 많지 않은 편이다. 특화 거리를 이끄는 핵심은 안경 공장이다. 안경 공장은 대로가 아닌 골목 안 공단 구석구석과 아파트형 공장 '아이빌' 속에 숨어 있다. 일반 시민들이 오가는 길목에는 안경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버스정류장 지붕과 가로등에는 주황색 안경이 걸려 있고, 안경 너머로 희번덕하게 뜬 눈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끈다. 인도 바닥에도 안경 그림이 새겨져 있어 이곳이 안경특화거리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언제부터 이 골목 곳곳에 안경이 깃들게 됐을까. 골목을 걸으며 그 역사를 되짚어봤다. ◆ 수입으로 시작한 안경 역사 한국에 안경이 등장한 건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김성일 선생의 안경 그림을 통해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중국과 일본과 교류하면서 안경을 당시 조선으로 안경을 수입해 왔다. 수요가 늘면서 조선에서도 자체 안경 제작에 돌입했다. 1767년 황윤석의 『이재유고』에는 친구 김이신이 "이것은 경주의 수정으로 만든 안경"이라며 귀한 수정안경을 선물한 기록이 남아 있다.질 좋은 수정이 많이 산출된 경주는 당시 특산물인 수정으로 만든 옥돌안경을 만들어냈다. 수정은 유리 렌즈에 비해 흠이 많아서, 사물을 뚜렷하게 보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안경은 신분이 높은 상류층만 착용할 수 있다고 인식되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 대중화가 이뤄지기 시작한다. ◆ 한국 첫 안경 공장, 대구 북구에 그 흐름을 이어간 게 대구 북구였다. 1946년 3월, 한국 최초로 '국제세루로이드 공업사'라는 안경업체가 세워졌다. 김재수 대표는 일본에 작은 안경테 제조공장을 운영하다가, 태평양 전쟁을 맞아 어쩔 수 없이 공장의 문을 닫았다. 그는 일본에서 일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일본에서 쓰던 공장 기계와 재료들을 모조리 긁어와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옮겨왔다. 일본 정부에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만들겠다'는 말로 둘러댄 덕에 해낸 일이었다. 하지만 선산은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아 제대로 된 안경을 만들기엔 부족해, 예전만큼의 안경을 만들 수가 없었다. 김재수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적당한 땅을 물색했다. 이때 새로운 보금자리로 택한 것이 대구였다. 대구는 서울과 부산의 중심으로, 기찻길이 나 있어 전국 어디든 쉽게 유통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6.25 전쟁의 피해도 적어 공장을 꾸리기 적당했다. 그 덕에 후발주자도 나타나며, 대구 북구는 안경 산업의 메카가 될 수 있었다. 단순히 많이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1961년 안흥진 대표의 안흥공업사는 국내 최초로 스테인리스 스틸을 재료로 사용하는 안경을 찍어냈다. 가볍고 편안한 안경은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 흥망성쇠 모두 겪은 안경산업 산업 개발에 속도가 난 건 박정희 정권과 만나서다. 품질 좋은 안경은 외화벌이 수단으로 제격이었다. 정부 지원에 힘입어 안경은 대량생산되기 시작한다. 이미 해외 시장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제 안경보다 저렴한 덕에 한국 안경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처음에는 동남아시아와 중동 지역에 주로 수출하다가, 1960년대 말에는 미국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중국이 저렴한 가격으로 해외 시장에서 승부를 걸면서, 안경산업의 지위는 위태로워졌다. 위기를 직감한 정부는 2006년 이곳을 안경특구로 지정하고 새 활로를 찾기로 했다. 골목의 역사를 잇겠다는 의지였다. 안경골목에 밀집한 업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테를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첨단 기술을 접목하기로 했다. 신소재 개발과 VR 등 IT 산업과의 만남도 시작됐다. 이를 통해 해외 시장에서도 뒤지지 않는 고품질 안경을 개발하겠다는 큰 그림이다. 둥근 안경알 2개가 상징처럼 자리 잡은 골목. 자칫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조형물 안에는 한국 안경산업의 흥망성쇠가 숨어 있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로 첫발을 뗀 뒤 세계 시장을 누볐고, 거센 경쟁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변화를 멈추지 않은 역사가 있다. 과거의 영광과 위기의 시간을 모두 품은 안경특화거리는 오늘도 쉬지 않고 안경을 만들고 있다. 한국 안경의 다음 100년을 위해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로.
2026-06-19 12:44:00
45.6㎞ 끝에서 만난 이름 없는 묘… '한티 가는 길' 순례 [두나의 두발 산책]
돌아보는 길이 끝났다면, 이제는 비워내고 뉘우친 뒤 용서와 사랑으로 다시금 채우는 일이 남았다. '한티 가는 길'의 남은 구간은 총 4개다. 이 중 꼭 들러봐야 할 곳들 위주로 걸어봤다. ◆ 사기점 공소 첫번째와 두번째 구간을 이겨낸 순례자는 사기점 공소에 도착할 수 있다. 이곳은 두 번째 구간을 닫고, 세 번째 구간을 열고 있다. 공소는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곳으로, 성당의 대체 공간이었다. 사제들은 여러 공소를 순회하며 가르침을 이끌곤 했다. 공소 근처에는 박해를 피해 온 천주교인들이 모여 살았다. 신나무골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사기점 공소도 옹기와 사기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만들기도 쉬운 데다가 재료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서, 포졸이 들이닥치면 챙겨야 할 세간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특히 이곳은 질 좋은 모래가 나와 사기를 굽기가 좋았다. '사기점'이라는 이름 역시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실제로 사기점 공소와 창평지 근처 땅은 붉고 무른 흙으로 이뤄져 있다. 걷는 이들이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밑으로 푹 빠질 정도로 고운 모래들이었다. 이 같은 역사를 이어받아, 현 가실성당 자리가 아닌 사기점 공소 자리에 본당을 세우려 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양반들의 반대로 적당한 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사기점 공소에서 창평지를 둘러 나가며 시작되는 '뉘우치는 길'은 대부분 급경사다. 어려운 길을 헤쳐나가며 지금까지 인생에 있었던 굴곡진 일들을 반추하라는 의미다. 과거 있었던 행위를 반성하고, 더 나은 인생을 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산행이 시작된다. 구간과 구간을 잇는 숲길은 결코 쉽지 않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고개를 오르다보면 숨이 가빠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춘다. 얼굴로 달려들며 비명을 지르는 날벌레들은 그 꼴을 두고 보지 않는다. 벌레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장 큰 적은 역시 더위다. 줄줄 흐르는 땀은 눈앞을 흐리게 만든다. 벅벅 눈을 비비다가 따가움에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마시려고 가져온 물은 어느새 땀을 씻어내는 데 다 써버린다. ◆ 동명성당 구불구불 숲길과 임도를 반복해 걷다 보면, 반가운 도심을 만난다. 편의점과 3차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3구간의 종점인 동명성당에 도착한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는 문구 뒤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작은 성당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자그마한 공소였다. 반복되는 박해와 6·25 전쟁으로 공소의 흔적조차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동명성당은 건축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문을 연 건 1979년이었다. 그 해 12월, 동명성당은 어엿한 '본당'으로 승격하게 됐다. 동명성당의 순례자의 집은 '한티 가는 길'을 걷는 이들에게 단비 같은 장소다. 물을 마실 수 있는 작은 카페는 물론이고, 예약 시 이용할 수 있는 숙소도 제공한다. 기나긴 1~3구간을 걷느라 퉁퉁 부은 발을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 한티순교성지 삶을 돌아보고, 비우고, 뉘우친 이들은 끝내 한티순교 성지에 다다른다. 한티순교성지는 신나무골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해발 600m 이상 높은 곳에 있다. 높은 산지는 포졸들의 눈을 피하기 쉬웠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을 타고 올라오는 포졸을 눈치채기 쉬웠다. 게다가 한티는 대구와도 멀지 않았다. 먼저 붙잡힌 천주교인들이 대구 경상감영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어, 교인들은 대구와 한티를 바쁘게 오가며 옥바라지를 했다.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신자들의 아늑한 은신처는 결국 발각됐다. 경신, 병인박해를 거치며 한티에서는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앞서 신나무골 성지에 이장된 이선이 순교자가 경신박해 당시 목숨을 잃은 장소도 이곳이었다. 한티순교성지에 묻힌 순교자는 모두 37명, 이 중 신원을 밝혀진 이는 4명뿐이다. 나머지는 신원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다. 당시 포졸들은 닥치는 대로 신자들을 죽이고, 시체를 팔공산 자락에 방치한 채 떠났다. 결국 나중에 찾아온 다른 신자들이 순교 장소에 그대로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순교자들의 묘지를 보기 위해 마저 순례길을 걸었다. 조그마한 안내판이 다음 묘지로, 또 다음 묘지로 안내하고 있었다. 이름은 없고, 묘를 구분 짓게 하는 번호표와 십자가만이 묘를 지키고 있었다. 박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아기'라고 적힌 묘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종점에 다다를수록 순례를 마쳤다는 성취감에 들뜬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한티에서 마주한 이름 없는 십자가와 묘역은 그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순례길 내내 겪은 고통은 어느새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신앙을 지키다 숨진 이들의 삶 앞에서, 돌아보고 뉘우치며 사랑을 실천하라는 순례길의 가르침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다.
2026-06-13 17:00:00
[커버스토리] 사례로 본 노년 여가의 해법… 문턱 낮추고 관계 넓히고
놀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노인복지관에는 운동과 취미, 배움의 기회가 마련돼 있다. 다만 공간의 존재만으로 사람을 끌어모을 수는 없다. 현장에서는 처음 방문하는 부담을 줄이고 자연스럽게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돕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쉽지 않은 첫 방문 "조금 더 느끼하게 발음하셔야 해요!" 얼굴을 잔뜩 찡그린 노인들이 서툴게 연필을 쥐고 알파벳을 따라 그렸다. 완만한 경사로와 손잡이가 설치된 노인복지관에서는 영어부터 우쿨렐레, 스마트폰 교육, 미술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활동이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일부 노인들은 복지관 대신 반월당역을 찾을까. 이용자들은 그 이유로 '친구'를 꼽았다. 친구의 권유나 동행 없이 처음 복지관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오랜 기간 운영된 복지관일수록 기존 이용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처음 방문하는 이들의 부담이 더 크다. 실제로 지난 2일 수성구 대구시노인종합복지관 1층에서는 홀로 방문한 한 어르신이 이용을 망설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한동안 이용 방법과 안내문, 주의사항을 꼼꼼히 읽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끝내 등록을 하지 않은 채 발길을 돌려 정문으로 회관을 빠져나갔다. 이곳에서 바둑을 두던 한 노인은 "친구를 가까이에 두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회관을 이용한다"며 "혼자 처음 찾아오는 건 쉽지 않다. 집 근처에 회관이 있어도 친구를 따라 먼 곳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심리적 장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통계가 말해주듯, 복지관 수 자체가 부족해 이용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구시노인종합복지관은 많을 때 하루 900명이 찾는 탓에, 점심시간에는 쉴 자리조차 찾기 어려웠다. ◆ 밥심·접근성이 관건 노인복지관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는 심리적·물리적 접근성을 모두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구의 인동촌노인복지관은 서구노인복지관의 분관으로, 복지관 규모를 키우기보다 생활권 가까이에 분관을 설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무작정 시설을 늘린다고 이용자가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개관 초기 이용자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소규모 시설이다 보니 식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복지관은 이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백년식당'을 열었다. 회관에서 걸어서 1분 거리의 작은 식당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텅그렁 식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인사가 오간다. 하루 평균 130~150명의 노인들이 1천800원짜리 식사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고기와 나물, 국으로 구성된 화려하지 않지만 집밥 같은 한 상이다. 시내 보리밥집처럼 풍성하지도, 특별히 맛집으로 알려진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저렴한 가격과 접근성 덕이다. 식사는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지난 4월 문을 연 비산노인복지관은 비교적 짧은 운영 기간에도 높은 이용률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공간을 찾는 데 부담을 느끼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모습이다. 김보라 비산노인복지관 팀장은 "관할 지자체 주민이라면 누구나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 보니 부담 없이 찾는다"며 "밥 한 끼 먹으러 왔다가 프로그램을 둘러보고, 식사 친구와 함께 복지관을 이용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역에 머물거나 집에만 있는 노인들은 우울감에 빠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회 관계를 맺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복지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도록 심리적 문턱을 낮추는 데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월당역 지하가 저렴한 식사로 노인들을 불러 모은다면, 복지관은 그 식사를 계기로 관계와 배움·여가로 이어지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 자발성도 핵심 부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인들이 스스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공간 조성에 나섰다. 노인 전용 복합문화공간인 '하하센터'는 자발적인 모임 활동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8일 방문한 부산 해운대구 재송 하하센터. 이날 오전 1층에서는 보드게임 모임이 한창이었다. 8명의 어르신은 익숙한 모습으로 책상 위에 검은 보를 깔고 자리에 앉았다. 보드게임 '루미큐브'를 할 준비를 마치자마자 교실은 뜨거워졌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라며 게임에 몰입한 목소리가 터졌다. 자발성을 기반으로 모임은 점차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회원들은 초등학교와 다른 노인 모임을 찾아 보드게임을 가르치는 재능기부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다시 모임에 합류하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모임에 참여한 권필옥(65) 씨는 "보드게임은 치매 예방이나 기억력에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모임이 구성됐다"며 "게임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대화도 많아진다. 은퇴 후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부산시 관계자는 "노인회관의 주 이용층보다는 젊지만, 은퇴해 노인 반열에 오른 이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며 "자유로운 공간 활용과 자발적인 모임 구성으로 방문의 문턱을 확 낮췄고, 그 덕에 이용자 만족도도 높아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6-06-12 14:30:00
[커버스토리] 공공장소는 유토피아 아냐… 쫓겨나는 노인들
놀 준비는 돼 있지만 놀 곳은 부족하다. 마땅한 여가 공간을 찾지 못한 노인들은 오늘도 지하철역과 공원으로 향한다. ◆ 저렴한 밥에 이끌린 노인 반월당역의 지상은 젊은 사람의 공간이지만, 지하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같은 공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진다. 오전부터 어르신들로 붐비고, 형형색색의 옷차림을 한 이들이 의자마다 자리를 채운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앉을 자리도 없이 지하가 복작해진다. 점심시간이 되면 지하 2층은 식기 부딪히는 소리로 소란해진다. 이 일대 식당들은 비교적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어르신들을 겨냥해 형성됐다. 가격은 저렴하고, 반찬은 넉넉하며, 회전율이 빠른 한식 위주의 가게가 여럿 자리잡았다. 그 중에서도 단연 인기가 높은 건 보리밥이다. 밥 양과 나물의 종류는 자신의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 가격은 단돈 5천원. 식사를 마친 후 음료를 사먹기도 부담스럽지 않다보니, 오전 11시부터 2시까지 손님은 끊이질 않는다. 이 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대부분 혼자다. 홀로 와 조용히 식사를 담은 뒤, 핸드폰을 보며 묵묵하게 식사를 마친다. 입을 여는 때는 가게를 나설 때 '잘 먹었습니다'고 인사할 때뿐이다. ◆ 남은 시간은 '버티기' 저렴한 먹거리에 이끌려 반월당역을 찾았지만 식사를 마친 후 놀거리가 마땅한 건 아니다. 결국 노인들은 가게 앞에 놓인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내려, 지하철역 안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다. 오랜 시간 지하철역에 머무는 이들이 많다 보니 각자 나름의 방식도 자리 잡았다. 딱딱한 의자 위에 두툼한 박스를 깔고 앉아 불편함을 줄인다. 잠시 일행을 기다리느라 자리에 앉은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대화 없이 지나가는 이들을 구경하고 있다. 대화할 만한 상대가 없을 때는 유튜브 속 세상으로 빠져든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유튜브 영상을 또렷하게 듣기 위해서 음량을 최대로 높인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는 지하 공간에서 적당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무료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 반월당역은 노인들을 불러 모으는 공간이지만, 관계를 만들거나 새로운 취미를 즐기는 공간은 아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머무를 뿐,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공간은 아닌 셈이다. ◆ 공공장소 쟁탈전 문제는 이마저도 안정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월당역과 공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공공간이다. 지금은 노인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용 방식이 바뀌거나 민원이 늘어나면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노인들의 '성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은 대표적인 사례다. 인기몰이의 비결은 장기였다. 바둑과 장기를 직접 두거나, 두는 이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기원과 달리 돈을 내지 않아도 오락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술도 먹고 근황을 나눴다. 이곳은 지난해 7월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노상방뇨나 음주가무, 쓰레기 투기로 골머리를 앓던 종로구청의 결단이었다. 탑골공원에서 장기판 이용을 금지하고 술도 먹지 못하게 했다. 탑골공원이 유일한 오락이던 노인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대신 새로 지은 탑골 어르신 문화놀이터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넓다란 공원과 달리 놀이터 공간은 20평 남짓. 들어가지 못한 노인들은 '젊은 손님이 들어오지 않으니 비켜달라'는 주변 상인들의 눈초리를 피해 숨어든다. 노인들은 줄을 서서 놀이터 입장을 기다리거나, 지하철이나 계단에 몸을 숨기고 무료급식을 기다린다. 이 같은 풍경이 대구에서도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경상감영공원과 반월당역, 두류공원 역시 특정 세대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어서다. 지금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모여들고 있지만, 탑골공원 사례가 보여주듯 공공공간은 노인들의 여가를 책임질 안정적인 기반이 되기 어렵다.
2026-06-12 14:30:00
은퇴는 더 이상 삶의 마침표가 아니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정년 이후의 시간은 수십 년에 이르는 또 하나의 인생이 됐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배우고, 사람을 만나고, 취미를 즐기며 살아가려는 노인도 늘고 있다. 하지만 도시의 준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노인 인구는 빠르게 늘어났지만, 이들이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맺을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노인들은 지하철역과 공원으로 향한다. 저렴한 밥 한 끼를 먹고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지만, 그 공간이 외로움을 달래주거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몇 없는 노인복지관 역시 처음 발을 들이는 데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여야 하고, 익숙한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국 공간이 있어도 문턱이 높으면 이용은 쉽지 않다. 대구는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이제 노인 정책은 돌봄과 생계 지원을 넘어, 건강한 노년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사회와 연결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늘어난 수명만큼 길어진 노년의 시간.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살펴봤다. 누구나 때가 되면 정년을 맞는다. 오랜 시간 이어온 일을 내려놓고, 새로운 일상을 마주하는 시기다. 최근에는 은퇴 이후의 삶이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다.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은퇴 이후의 삶이 길어졌다. 이들은 가진 자산을 알뜰하게 관리하면서도, 사회 생활과 여가를 적극적으로 즐기려 한다. 하지만 이들을 뒷받침할 지역 사회의 인프라는 여전히 부족하다.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이어갈 공간이 마땅치 않다. 준비된 노년과 달리, 이를 담아낼 도시의 환경은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 노인 놀거리 '빈약' 도시 2024년 기준 대구 지역의 노인 인구(60세 이상) 1천 명당 노인 여가 복지 시설 수는 2.7개에 불과하다. 전국 평균인 4.9개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서울(1.6개), 인천(2.1개) 등과 함께 대도시 중에서도 매우 열악한 수준으로 드러났다. 노인 여가 시설 1천858개 중 경로당이 1천806개로 전체의 약 97.2%를 차지하는 것 역시 문제다. 경로당은 거주지 가까이에 다수 설치돼 있어 접근성이 좋지만, 회원제로 운영되는 경우가 대다수여서다. 특정 연령에 도달해야 하거나, 기존 회원의 추천이 없다면 쉽게 어울릴 수 없다. 게다가 면적이 좁은 경로당에서 교육을 받거나, 다양한 여가 활동을 펼치기는 어려워 단순 사교장으로만 활용된다. 그나마 노인들에게 다양한 여가거리를 제공하는 노인복지관은 대구 전역에 24개뿐이다. 종합노인복지관의 경우 전문 인력이 항상 상주하는 데다가, 건강 관리 및 일자리 지원 등 체계적인 노인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이다. 수업 신청도 쉬운 일이 아니다. 대구 북구노인복지관의 경우, 43개 수업 중 비인기 과목 9개 가량을 제외하고 전 과목이 수강 인원보다 많은 신청 인원을 받는다. 복지관 측은 무작위 추첨을 통해 최종 수강신청자를 선정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 대안은 시니어 주택? 대구엔 없어 비교적 건강한 시니어가 갈 곳은 없을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을 위한 시설로 여가 시설과 주거지를 결합한 '노인복지주택'이 떠오른다. 과학기술인공제회가 운영하는 노인복지주택 '사이언스 빌리지'는 노인들의 취향을 반영한 부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스크린골프연습장부터 영화감상실, 그림과 공예 공방, 노래방, 당구장, 도서관 등을 갖추고 있다.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여가 환경이 조성돼있다보니,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여가 활동을 누릴 수 있다. 건전한 여가활동을 통해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건강을 증진할 수있다는 장점도 있다. 아쉽게도 대구에는 돌봄이 필요 없는 시니어를 위한 이런 시설은 아직까지 없다. 공공은 물론이고 민간이 운영하는 시설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대구에 있는 노인주거시설은 대부분 요양이 필요한 이들 혹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만 운영된다. ◆ 놀거리 없으니… 일하러 가자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지난 4월 노인일자리사업 참여 노인 실태조사를 분석한 결과, 점차 비경제적 이유로 일자리를 찾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013년과 비교했을 때, 74세 이하 노인 중 생계비 및 용돈 마련으로 일자리사업에 참여한 이들은 83.6%에서 2025년 68.4%로 줄어들었다. 이에 비해 건강 유지나 자아 실현 등의 이유로 일자리를 찾은 이들은 16.4%에서 31.6%로 대폭 상승했다. 사회 참여와 다른 노인들과의 관계 유지 욕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 우울한 노인… 대책은 이 가운데 '행복하다'고 느끼는 노인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23년 기준 대구 65세 이상 노인의 최근 삶에 대한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5.9점으로 나타났다. 대구시 전체 평균(6.3점)이나 예비 노인층(6.2점)보다 낮은 수준이다. 80세 이상 노인 삶의 만족도는 5.5점, 행복 정도는 5.4점으로 전체 노인 평균보다 더 낮았다. 이들이 겪는 가장 큰 심리적 문제는 '외로움과 소외감'이었다. 특히 대구 남구와 수성구 노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대구 평균보다 높았다. 남구는 노인 인구 비율이 28.6%에 달하고, 수성구는 비교적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 결과는 다소 의외다. 노인이 많이 모여 있으면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는 기대나, 경제적 여건이 나으면 삶의 만족도도 높을 것이라는 통념과는 다른 결과다. 건강하고, 놀 준비가 돼 있는 시니어들을 위한 '유토피아'는 아직 지역 안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여가와 관계를 이어갈 공간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 이들은 스스로 머물 곳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2026-06-12 14:30:00
"주사기 구합니다"… 전쟁 여파에 신부전 반려동물 비상 [반려동물]
재난문자가 울릴 때마다 반려인들은 한 번쯤 비슷한 생각을 한다. "우리 강아지는 어떻게 데리고 나가지?" "고양이 이동장은 어디 있더라?" 위험이 닥쳤다는 소식 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집 안에서 자신만 바라보고 있을 반려동물의 얼굴이다. 가족처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인 만큼 재난 상황에서도 이들을 두고 떠나는 일은 쉽지 않다. 실제로 지난해 경북 산불 당시에도 반려동물과 함께 대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거나 이동 방법을 고민하는 보호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중동 전쟁 여파로 의료용 주사기와 수액팩 등 일부 의료 소모품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만성질환을 앓는 반려동물 보호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신부전 진단을 받은 노령묘를 키우는 서승희 씨(38)는 "사람들에게는 주사기 하나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이 생명과 직결된 문제"라며 "반려동물 관련 물품은 늘 후순위로 밀리는 것 같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 중동 전쟁 여파에 반려동물 비상 서 씨의 반려묘 '버니'는 11살이다. 지난 3월 신부전 진단을 받은 뒤부터 집에서 매일 피하수액 치료를 받고 있다. 고양이 신부전은 노령묘에게 흔한 질환이다. 신장 기능이 떨어지면 소변량이 급격히 늘어나 만성 탈수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이 때문에 몸속 독소를 배출하기 위한 수분 공급이 필수인데 집에서 직접 피하수액을 놓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피하수액은 혈관에 직접 놓는 정맥 수액이 아니라 피부 아래 공간에 천천히 수액을 주입해 흡수시키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액팩과 함께 일회용 50cc 주사기, 나비침, 굵은 바늘, 알코올솜 등이 필요하다. 문제는 최근 중동 전쟁 여파로 이 물품들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주사기와 수액팩의 주요 원료인 석유화학 제품 폴리프로필렌(PP) 가격이 급등하면서 공급 차질이 이어지고 있다. 서 씨는 "예전에는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다음 날 바로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주사기나 나비침은 아예 품절인 경우가 많다"며 "수액은 그나마 3~4주 뒤 예약이라도 되는데, 매일 집에서 1~2번씩 수액을 놓으려면 주사기와 나비침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의료 물품들은 뉴스에도 나오고 빨리 대책이 마련되는 것 같은데 반려동물 관련은 늘 후순위인 느낌"이라며 "결국 보호자들끼리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공유하면서 알아서 버티고 있다"고 토로했다. 실제 반려동물 커뮤니티에는 '주사기 구합니다', '나비침 몇 개만이라도 구할 수 없냐'는 글들이 잇따르고 있다. 일부 보호자들은 남은 재고를 서로 나누거나 구매 가능한 사이트 정보를 공유하며 버티는 상황이다. 실제 현장의 어려움은 개인 보호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동 전쟁 이후 의료용 주사기 공급이 인체 의료 현장에 우선 배정되면서 동물병원들도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부 동물병원은 주문 물량의 일부만 공급받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으며, 광견병 예방접종 사업을 연기한 지방자치단체도 나왔다. 대한수의사회는 사태가 장기화하자 사상 처음으로 중국산 동물용 주사기를 긴급 수입해 전국 동물병원에 공급하고 있다. 대한수의사회 관계자는 "동물병원 역시 사람과 동일한 주사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공급 부족 시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에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최근 동물병원 관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주사기 생산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유통 병목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며 "동물병원이 인체용과 동일하거나 일부 특화된 주사기를 사용하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현상에 대해 실질적인 수요 파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 위기 상황에서는 여전히 제도 밖 이번 주사기 품귀 사태는 단순한 의료 소모품 부족 이상의 질문을 던진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위기 상황은 과연 어디까지 반려동물을 고려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처음이 아니다. 산불과 집중호우, 태풍 등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반려인들은 비슷한 고민에 직면해 왔다. 재난문자가 울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족의 안전이듯, 많은 보호자들에게는 반려동물 역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존재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20년 '반려동물 가족의 안전을 위한 재난 대피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했지만 실제 재난 현장에서는 반려동물과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대피소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상당수 대피소가 동물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보호자와 반려동물이 분리되거나, 보호자가 대피를 망설이는 상황도 발생한다. 현행 재해구호법 역시 구호 대상을 '사람'으로 한정하고 있다. 반려동물은 법적으로 여전히 보호 대상이 아닌 재산으로 분류된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2022년부터 반려동물과 보호자가 함께 머물 수 있는 '동반 대피소' 지정을 추진했지만 현재까지 뚜렷한 진전은 없는 상태다. ◆ 인간=동물 동등? "그건 아냐" 반면 사회의 모습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반려동물 양육 가구는 꾸준히 늘고 있고, 반려동물 보험과 장례 서비스 시장도 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반려동물 동반 출입이 가능한 식당과 카페도 늘어나는 추세다. 실제 대구시는 올해부터 반려동물 동반출입 음식점 확대를 위한 행정 지원에 나서는 등 관련 제도의 안착을 추진하고 있다. 반려동물을 단순한 동물이 아닌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번 주사기 품귀 사태처럼 의료 물품 공급이 부족해지면 동물병원은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동물병원들이 사용하는 일부 주사기는 인체용과 동일한 제품이어서 공급 부족 시 동물용 수요가 후순위로 밀리는 구조다. 재난 상황에서도 반려동물은 공식 구호 대상이 아니다. 물론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의료 물품이나 재난 구호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당연히 사람이 우선"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실제 온라인에서는 "사람이 쓸 주사기도 부족한데 동물까지 챙길 여력이 있느냐",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것과 공공 자원을 배분하는 문제는 별개"라는 반응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반려인들은 이번 논의가 사람과 동물 중 누가 더 중요한지를 가리는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과 동물을 동일한 기준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이 늘어난 만큼 재난과 의료 체계 역시 변화한 사회 현실을 일정 부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려인들은 "사람과 동물을 똑같이 대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안전망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족처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인 만큼 재난과 의료 위기 상황에서도 반려동물을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식당에는 함께 들어갈 수 있고, 보험에 가입하며, 마지막 순간에는 장례를 치르는 시대다. 반려동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이 됐다. 그러나 전쟁과 재난, 의료 자원 부족 같은 위기 앞에서 그들은 여전히 제도 밖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중동 전쟁이 불러온 작은 주사기 품귀 현상은 결국 우리 사회에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가족이 된 반려동물을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을까'
2026-06-06 17:40:00
건강 위한 선택 '제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데이터로 보는 세상]
입맛을 돋우는 탄산음료뿐만 아니라 젤리, 과자, 아이스크림까지. 편의점에 진열된 온갖 군것질이 무설탕 이름표를 달고 있다. 유행처럼 번지는 무설탕, 건강에 좋아보인다는 이유로 무심코 장바구니에 담곤 한다. 무설탕 제품은 알룰로스나 스테비아 등 대체 감미료를 이용해 단맛을 내는 음식을 뜻한다. 시중에는 흔히 '제로'로 표현되고 있다. 대기업이나 프렌차이즈 카페에서는 제로 음식을 연달아 내며 유행을 이어가고 있다. 실제로 대구경북 지역 청년들은 무설탕 제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유행이 번지는 속도만큼 소비하고 있을까. 지난해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배수희 등이 발표한 〈대구 지역 성인의 무설탕제품에 대한 인식도 및 섭취 실태〉는 이 물음에 답을 내놨다. ◆ "건강 위해"… 89%가 제로 소비 조사 결과, 한 달에 1회 이상 무설탕 제품을 섭취하는 경우는 89%에 달했다. '응답자 스스로 무설탕제품을 자주 섭취한다고 생각하는가' 질문에 '예'라고 응답한 경우는 66.7%였다. 지역 청년들의 삶에 무설탕 제품이 깊숙하게 침투했다는 뜻이다. 무설탕 제품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건강이었다. 한 달에 1회 이상 섭취한다고 대답한 집단을 대상으로 무설탕제품을 자주 섭취하는 이유를 조사한 결과,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응답이 52.9%로 나타났다. '체중 조절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가 33.2%로 그 뒤를 이었다. 여성의 경우 체중 조절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응답이 40%로 유독 높았다. 또 '맛있어서'라는 응답은 유독 남성이 10.3%로 여성(2.2%)보다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다이어트 경험도 무설탕 제품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줬다. 다이어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일반 가당음료 대신 무설탕 음료를 선택해 섭취하는 비율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 ◆ 압도적 1위 탄산… 편의점 점령 이들이 먹는 제품은 주로 어떤 것이었을까. 조사 결과 탄산음료가 30.5%로 가장 선호되는 제품군이었다. 주류와 소스류가 각각 7.9%로 그 뒤를 이었고, 과일과 채소류는 7.8%로 집계됐다. 무설탕 제품을 알게된 경로는 '대중매체 및 인터넷'이 51.4%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상품 자체의 정보 확인'이 38.1%, '주변인의 추천'이 10.5%로 그 뒤를 이었다. 무설탐 제품 중 가장 선호되는 음료 제품의 구매처를 물었더니, 편의점이 41.9%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슈퍼마켓 및 마트(39.5%), 인터넷(12.4%), 식당 및 음식점(4.3%), 카페(1.4%)로 조사됐다. 무설탕 제품이 다양해진 만큼 구매처도 많아지는 모양새다. ◆ 제로의 두 얼굴… 잘 모르면 독 응답자의 22.4%는 무설탕제품 섭취로 인한 부작용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무설탕 제품은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기에 섭취 시 성분명을 확인하고 과량 섭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작용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건 설사로, 13.3%가 설사를 겪었다. 그 외에도 복통과 소화불량,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무설탕 음식 관련 대구 경북 청년들의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소비량도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적당한 양이 어느 정도인지 일반 소비자가 판단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연구자들은 "소비자는 무설탕 제품의 긍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잠재적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균형 있게 파악해야 한다"며 "대체감미료의 종류를 구분하는 방법, 영양표시와 성분명을 읽는 방법, 그리고 대체감미료의 부작용과 적정 섭취량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영양교육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2026-06-06 12:39:00
[창간 80년,격동 80년] 주민등록증도 예비군도… 시작은 '김신조 사건'
1968년 대한민국에는 많은 것이 새로 생겨났다. 향토예비군과 주민등록증, 교련 수업과 반공웅변대회, 천리행군과 유격훈련, 북악스카이웨이와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까지. 지금은 너무 익숙해진 제도와 풍경 상당수는 사실 한 사건 이후 등장했다. 그 출발점은 1968년 1월 21일 밤.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500m 앞까지 침투했던 '1·21 사태'다. 사건은 유일한 생존자였던 북한 공작원 김신조(金新朝)의 이름을 따 흔히 '김신조 사건'으로 불린다. 실패한 침투 작전이었지만, 그날 이후 대한민국은 이전과 다른 나라가 됐다. ◆ 박정희를 죽여라… '124부대' 1968년 1월 2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은 청와대와 미국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동시 타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작전에 투입된 것은 함경도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특수부대 '124군 부대' 31명. 이들은 국군 복장으로 위장한 채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완전 무장했다. 1월 5일부터 황해도 사리원에서 청와대 모의 습격 훈련이 반복됐고, 1월 13일 최종 목표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확정됐다. 1월 18일 새벽, 특공대는 휴전선을 넘어 얼어붙은 임진강을 걸어서 건넜다. 그러나 서울 진입 직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1월 19일 경기 파주 초리골 야산에서 땔감을 하러 온 우씨 형제 4명과 마주친 것이다. 당황한 공비들은 북한에 처리 지시를 요청했지만 암호를 해독하지 못했다. 결국 투표 끝에 형제들을 살려 보내기로 했다. "신고하면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협박도 남겼다. 하지만 형제들은 집에 내려오자마자 부모에게 사실을 알렸고, 곧바로 신고가 이뤄졌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경보가 울렸고 군·경 합동 소탕작전이 시작됐다. 다른 공비들이 차례로 사살되는 동안 김신조(金新朝)는 한 독립가옥에 숨어 자폭용 수류탄 하나만 남긴 채 버텼다. 1월 22일 새벽 2시 25분, 군이 "나오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수류탄을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31명 가운데 29명은 사살됐고,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오직 김신조만 생포됐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를 처단하러 왔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 대한민국이 달라지다 김신조 사건은 단순한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이후 대한민국의 안보 시스템과 사회 분위기 자체를 바꿔놓은 역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정부는 곧바로 국가 안보 체계를 전면 재편했다. 대표적인 변화가 250만 명 규모의 향토예비군 창설이었다. '국민 모두가 안보의 주체'라는 개념 아래 민간인까지 포함한 전국 단위 동원 체계가 구축됐다. 이후 전투경찰대와 육군3사관학교 설립도 추진됐고, 청와대 경비 및 대간첩 작전 체계 역시 대폭 강화됐다. 군 문화도 크게 달라졌다. 국방력 보강을 이유로 군 복무 기간이 연장됐고, 육군은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해·공군은 3년에서 3년 6개월로 늘어났다. 오늘날까지 군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천리행군, 유격훈련, 5분 대기조 같은 강도 높은 훈련 체계 역시 이 시기를 거치며 자리 잡았다. 사회 분위기 역시 급격히 변화했다. 학교와 직장, 마을 단위까지 반공 교육과 안보 의식이 일상처럼 스며들었고, 반공웅변대회와 교련 수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과 북악스카이웨이 조성 역시 안보 상징 강화 흐름 속에서 추진됐다. 주민등록증 제도도 이 사건 이후 본격 도입됐다. 당시 정부는 간첩과 불순분자를 식별하고 행정 통제를 강화한다는 명분 아래 전국민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구축하고 주민등록증 발급을 확대했다. 북한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비밀 특수부대인 '684부대', 이른바 실미도 부대도 창설됐다. 김신조 일당과 같은 31명 규모로 꾸려진 이 부대는 북파 공작 임무를 목표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결국 실패한 침투 작전이었던 1·21 사태는 이후 대한민국 사회를 더욱 강한 안보 국가 체제로 재편하는 계기가 됐다.
2026-06-05 13:30:00
4시간 오솔길에 숨겨진 박해의 역사… 한티가는 길 순례 [두나의 두발 산책]
45.6km에 달하는 순례길이 개통된 지 어느덧 10년. 칠곡군 왜관읍 곳곳을 오가는 '한티 가는 길'은 명실상부 칠곡군의 대표 숲길이 됐다. 개통 10주년을 맞이해, 좁다란 숲길에 담겨 있는 박해의 역사를 직접 걸어봤다. 놀랍게도 이 길의 역사는 고작 10년이 아니다. 1880년대 팔공산 자락에 천주교 신자들이 하나둘 생길 때부터, 신자들의 도망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생겼다. 박해를 피해서 도망쳐 온 신자들은 산길을 오르며 신앙심을 다졌다. 이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1984년부터 신나무골과 한티를 잇는 길 33km를 걷는 행사가 이뤄져 왔다. 시간이 흘러 2016년, 칠곡군청이 개청 100주년을 맞이해 이 길을 확장하고 '한티 가는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불리는 한티 가는 길을 찾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 5칸집에서 출발… 칠곡 가실성당 순례길의 첫 번째 관문은 가실성당이다.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895년 초대 주임 신부인 가밀로 파이아스 신부가 오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성당이 아니라, 5칸 기와집을 본당으로 사용했다. 대신 곳곳에 흩어진 공소를 들락날락하며 가르침을 전파했다. 위치도 쉽게 결정한 게 아니었다. 낙동강과 가까운 점은 천주교 가르침을 설파하는 데 제격이었다. 수로를 이용하면 안동과 대구, 부산까지도 쉽게 닿을 수 있었다. 낙동강 가까이에 있었음에도 6.25 전쟁 당시 이곳만큼은 평화로웠다. 남과 북 모두가 가실성당을 야전병원으로 사용해서다. 신로마네스크 형식으로 지은 건물의 외형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빅토르 루이 푸아넬 신부가 설계를 맡은 건물이다. 폭싹 속았수다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입소문을 탔다. 이곳에 성순교 가문을 기리는 순교비가 자리하기도 했다. 창령 성씨 집안의 성섭이 먼저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집안에 가르침을 나눴다. 그의 자손 중 하나인 성순교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다, 경신박해 때 상주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 기나긴 순교의 시작 이들의 순교 역사를 시작으로, 45.6km의 한티 가는 길 순례가 시작된다. 1815년부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은 신자들의 행선지를 담아낸 길이다. 총 5개 구간인 ▷돌아보는 길 ▷비우는 길 ▷뉘우치는 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은 종점인 '한티 성지'에서 끝난다. 지난 25일 이 중 첫 번째 구간을 직접 걸어봤다. 신나무골 성지까지 10.5km의 '돌아보는 길' 순례는 5개 구간 중 가장 긴 코스로, 총 4시간 30분이 걸린다. 가실성당 옆으로 난 조그마한 문을 지나면 순례를 시작할 수 있다. 성당 주변 마을을 지나, 좁은 산길을 만나면 본격적인 고난이 시작된다. 라디오나 음악과 같은 즐길 거리를 전부 놓아두고 순례길에 올랐다. 첫 고비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다. 걸은 지 20분 만에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곳곳에 젖은 땅은 발목을 붙잡았고, 멋대로 난 나뭇가지를 헤쳐야 했다. 발목에 힘을 단단히 줘야만 오를 수 있는 오르막과 무릎을 시큰거리게 하는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온몸이 지치게 된다. 뱀까지 지나가는 이 길에는 그 흔한 울타리조차 없다. 넘어지는 순간, 아무도 없는 이 순례길에서 고립된다는 공포감이 덮쳐온다. 그럴 때는 머리를 비우고 딱 2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길의 이름에 맞도록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볼 것, 그리고 파란색과 주황색으로 된 리본길을 따라갈 것. 길을 잃을까 쌍리본을 쫓다 보면, 잡생각이 들어설 틈이 없다. 힘들었던 점과 후회되는 일, 이 산에서 내려가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한참 돌아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흐른다. 중간중간 순례길을 이겨낼 수 있는 평상도 준비돼 있다. 먹을거리를 준비한 이들은 구간 중간 부근에 있는 전망데크, 바람쉼터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 감시 피해 도자기 굽던 역사 한창 숲길을 걷다 보면 도암지에 도착한다. 한눈에 보이는 못에는 연꽃이 잔뜩 피어있고, 그 주변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북쪽의 용소봉 정상이 바위로 돼 있어 암동이라고 불렸다. 그 이후 천주교 신자가 조정의 감시를 피해 와 도자기를 굽고 살았다고 해 '도암'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도암지로 가는 길목에는 그 역사를 담은 연화예술원이 있다. 옛 연화초등학교를 수리해 도자기 공예 체험을 할 수 있는 예술원으로 꾸렸다. 박해를 피한 신자들의 유일한 구명처였던 '도자기'는 이제 이 지역의 역사로 자리 잡았다. 예술원에는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와 도자기를 구워보고, 지역에 담긴 아픈 역사를 배우고 간다. 이제 종점이 멀지 않았지만, 마지막 산길을 오르기 전 재충전이 필요한 때다. 이를 위해 도암지 바로 앞에는 순례자를 위한 쉼터 정자가 마련돼 있다. 이곳 '양심 냉장고'에서는 시원한 생수와 아이스크림, 막걸리 등의 먹거리를 구매할 수 있다. ◆ 박해 피해 산으로… 신나무골 성지 냉장고를 지나쳐 다시 숲길로 들어서면 마지막 산길이 순례자를 기다리고 있다. 좁고 긴 골짜기에 난 길을 오르는 건 쉽지 않다. 숲길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은 성녀상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또 1시간 남짓을 걸은 뒤에야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옥 성당을 만날 수 있다. 왜 이들 성지는 산자락에 자리했을까. 조선 조정의 박해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산을 타는 것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신나무골에서 모여 산 것으로 추정했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이들은 골 곳곳에 임시 집을 세운 뒤 어깨를 맞부딪혀가며 열악하게 지냈다. 정착한 후에도 평탄하진 않았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또 도망길에 올랐다. 여러 차례 도망치고 또 도망치던 신자들은 한티와 신나무골 사이의 산길을 바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보고 "천주교 신자들은 축지법을 쓴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순교자 이선이의 묘는 그 당시 잔인한 박해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는 칠곡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경신박해 당시 박해를 피해 신나무골, 한티까지 숨어들었다. 그러나 결국 포졸들에게 들켜 목숨을 잃게 됐다. 포졸들은 신앙심을 포기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했으나, 이선이와 그의 아들은 뜻을 굽히지 않아 순교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이선이의 묘만 남아 있다. 이 곳에 흉상으로 남은 로베르 신부는 특히 영남 지역 선교에 열과 성을 다한 인물이다. 그는 신나무골 거점으로 30년 넘게 선교에 헌신했다. 그는 연화서당이라고 불리는 학당을 이곳에 세우기도 했다. 학당은 1920년 첫 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45.6㎞의 길을 그저 걷기 좋은 숲길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군데군데 끊기듯 이어지는 산길과 울타리 하나 없는 비탈길은,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신자들의 막막함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길을 잃을 것 같은 순간이면 자연스레 파란색과 주황색 리본부터 찾게 된다. 작은 리본 하나를 보고 안도하게 되는 그 순간, 당시 신자들도 보이지 않는 믿음 하나를 붙들고 이 산길을 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티 가는 길은 종교 순례길이자,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길이다. 이 길은 200년 전 사람들의 발자국 위에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발을 얹으며 이어지고 있다. (2편에 계속)
2026-06-05 13:11:00
[백년대구 아카이브]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구… 도시 정책의 방향성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마지막 순서인 4부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 개발, 그리고 문화 및 행정 시설의 외곽 이전 전략에 따른 도시의 질적 변화를 다룬다. 연구와 집필과 출간에 참여한 조재모·김훈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건축도시공간연구소 김주야 연구교수, 우지현 겸임교수, 우소영 연구원의 도움을 받았다. (편집자 주) 새천년을 앞둔 1990년대 후반, 대구의 인구와 차량은 빠르게 늘어났다. 국가 차원의 국토종합개발계획이 수정되고, 200만호 주택 건설 정책까지 추진되면서 도시 역시 팽창의 흐름에 올라탔다. 대구시는 이를 감당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수차례 손질했다. 대구시는 2001년을 목표 연도로 도시기본계획 수정에 나섰다. 성서첨단과학연구단지의 체계적인 개발을 추진하고, 고속도로망의 중심 도시로서 기능을 강화하려는 구상이 담겼다. 비슷한 시기 개통한 신천동로 역시 변화한 도시의 풍경을 보여준다. 신천대로의 기능을 보조하기 위해 조성된 도로로, 1998년 개통 이후 대구종합유통단지와 도심, 수성못오거리 일대를 잇는 역할을 맡았다. 도시고속도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자동차전용도로는 아니다.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함께 설치된 독특한 구조를 갖췄다. 신천보다 낮은 지대에 있어 침수 위험이 크다는 한계도 있지만, 수변 풍경을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20회에 걸쳐 도면과 사진으로 따라가 본 과거의 대구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사라진 공간도 있었고, 이름이 바뀐 장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의 변화에는 언제나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삶이 반영돼 있었다. 읍성이 철거된 이후 대구는 도시의 경계를 조금씩 넓혀왔다. 건물은 더욱 촘촘해졌고, 인구도 꾸준히 늘었다. 도심의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공공기관이 자리를 옮겼고, 서대구역 건설과 혁신도시 개발 같은 굵직한 변화도 이어졌다. 2023년 군위군 편입까지 이뤄지면서, 1910년대의 대구와 지금의 대구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갖게 됐다. 성곽 안에 중심이 모여 있던 도시는 이제 길게 뻗은 거대한 생활권으로 변모했다. 물론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인구 구조와 생활 방식이 달라지고, 산업과 교통 체계가 바뀌면 도시 역시 새로운 요구에 맞춰 움직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지나치는 거리와 건물들 역시 언젠가는 또 다른 모습의 '옛 대구'로 남게 될지 모른다.
2026-05-29 15:30:00
[창간 80, 격동 80] 조작된 간첩단, 무리한 수사… 1967년 동백림 사건
1967년 7월 8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소식이 전해진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에서 대규모 이적행위가 이뤄졌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한국 교민과 유학생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됐다"고 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의 이적행위가 1958년부터 시작됐다고 봤다. 또 "동백림의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 행위를 벌이고, 일부는 북한에 가거나 노동당에 입당했다"고 했다. ◆ 사상 최대 간첩단의 등장 이들 발표에 따르면 사상 최대 규모의 간첩단 안에는 대학교수와 의사, 예술인과 공무원 등 젊은 지식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문화예술계의 윤이상과 이응로, 학계의 황성모, 임석진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문리대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도 정조준됐다. 사건의 발단은 1967년 4월 14일 벌어진 기자 실종사건이었다. 당시 서독 주재였던 이기양 조선일보 특파원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입국한 후 사라졌다. 이 사건을 들은 임석진은 북한이 이기양을 납치했다고 판단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과거 대북 접촉을 한 사실이 드러날까 싶어 전전긍긍했다. 결국 5월 19일 임석진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수한다. 소식을 들은 박 대통령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직접 수사를 지시했다. 중앙정보부뿐만 아니라 검찰, 경찰, 군 방첩대까지 모두 동원돼 합동 수사본부를 차린다. 6월 말까지 국내에서만 39명, 해외에서는 30명이 체포되며 수사는 속도를 냈다. ◆ 간첩단의 실체 동베를린에서는 정말로 이적 행위가 만연했을까. 이곳에서 한국 교민이 북한과 접촉한 것은 일부 사실이었다. 다만 이들은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을 찾거나, 북한에 대한 호기심으로 북한대사관을 찾은 것에 불과했다. 특히 당대 유학생들은 북한대사관을 '무료로 밥을 주는 데다가 호의를 베푸는 일종의 마실터'로 보고 자주 왕래하곤 했다. 조직적인 간첩 활동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사건은 조직적인 대북 활동으로 부풀려졌다. 수사 과정에서 강제 연행이나 고문도 만연했다. 수사를 받았던 천상병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해 생전에 '유고시집'을 발표할 정도로 건강이 쇠했다. 결국 프랑스 정부와 서독은 "영토주권의 침해다"며 강하게 반발하며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등 외교 문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최종심까지 거쳤지만 간첩죄가 인정되지 않거나 감형됐다. 이 가운데 '인권 유린'을 이유로 전 세계적인 비판까지 받으면서, 더 이상 관계자들을 묶어둘 수 없었다. 결국 1970년 12월 관계자들은 모두 석방됐다. ◆ 동백림에 묻힌 거리의 시위 일련의 동백림 사건은 박 대통령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전체 의석이 73.7%를 차지하자, 신민당과 학생들이 대대적인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섰다. 결국 박 대통령은 16일 부정선거를 인정하며, 7개 지구 당선자를 당에서 제명했지만 시위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 가운데 저명한 예술가들이 간첩으로 호명되자, 사회의 관심도가 동백림 사건에 쏠리며 시위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지식인 역시 동료들이 대거 잡혀가는 것을 보고 섣불리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3선개헌안을 통과시키며 장기 집권의 토대를 닦았다. 시간은 흘러 2006년,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동백림 사건과 관련된 발표를 내놓는다. 진실위는 "단순 대북접촉 및 동조행위까지도 국가보안법과 형법상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며 "대학생들의 규탄시위를 약화하고자 민족주의비교연구회를 무리하게 수사했다"고 발표했다. 동백림 사건은 국가 권력이 얼마나 손쉽게 공포를 만들고, 사건을 키워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냉전과 반공의 시대 속에서 평범한 접촉과 왕래도 죄가 됐고, 예술과 학문마저 의심받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삶은 무너졌고, 일부는 평생 후유증 속에 살아야 했다. 뒤늦게 진실 규명과 사과 권고가 이뤄졌지만, 이미 남겨진 상처까지 지워내진 못했다.
2026-05-29 13:30:00
[두나의 두발 산책] 시가 흐르는 범어천… 물길 따라 흐르는 정호승 문학
졸졸졸 소리를 내며 잔잔하게 흐르는 강변에 시가 붙어 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시구에 담긴 뜻을 곰곰이 곱씹게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에 나섰다가, 사유의 길을 걷게 만드는 이곳은 정호승 시인을 있게 한 범어천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인 정호승 시인은 수성구 범어천 근처에서 나고 자랐다. 1956년 범어천 앞 골목에 위치한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범어천에는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과 외삼촌, 친구의 집이 있었고 목욕탕과 슈퍼, 극장도 있었다. 유년시절 그의 곁에는 항상 범어천이 있었다. ◆ 시의 뿌리, 범어천 지금은 제방이 높게 쌓인 데다가 깨끗한 자갈이 깔려 있지만, 과거의 모습은 달랐다. 그는 여름이 되면 범어천에서 물장난을 쳤고, 물고기를 잡았다. 겨울에는 얼음 썰매를 탔고, 물가에 부는 바람을 이용해 연을 높게 날리곤 했다. 즐거움도 잠시, 종종 장대비가 내리면 천에서 죽거나 겨울철 동사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그는 범어천에서 자연과 삶의 아이러니함을 생생하게 배웠다. 그는 "범어천은 내 문학의 고향이고, 내 시의 모태다"며 "범어천이 없다면 시인 정호승도 없었다"고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시도 범어천의 풍경을 담뿍 담고 있다. 그는 계성중학교 2학년으로 재학할 때, 국어숙제를 위해 시 '자갈밭에서'를 썼다. 시 속에 범어천을 쉴 새 없이 오가며 소년이 느낀 감정을 오롯이 담았다.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 준 범어천을 빙 둘러 걷다보면, 붉은 색의 정호승 문학관에 다다른다. 2층 높이의 아담한 문학관 안에는 정호승의 모든 것들이 깃들어 있다. 기분을 좋게 하는 커피 콩 볶는 냄새와 함께, 시인이 소장한 책 여러 권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책 표지를 구경하며 2층으로 올라서면 본격적인 시의 세상이 펼쳐진다. ◆ 시대의 아픔과 인간의 외로움까지 이곳에서는 시인의 생애 전반을 엿볼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이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건 1970년대부터다. 경희대 국문학과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시로 조명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그 혜택을 보지 못하는 소외계층과 군부 독재에 억눌린 민중의 마음을 세심하게 표현했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 사랑과 고통의 본질에 대해 시를 썼다. 대표작으로는 '수선화에게',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등이 꼽힌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들을 여럿 펴낸 덕에, 그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불리게 됐다. 그의 예술 활동은 시를 쓰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여러 장르와 협업하며 시구가 다양한 형태로 대중에게 닿을 수 있게 노력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막사발이다. 김용문 막사발 장인과 시인은 2008년 함께 시와 도자전을 열었다. 우리 민족이 밥과 국을 먹고 술을 마시던 막사발에 시구를 담아 우리 민족의 얼을 형상화했다. 시인이 직접 시구를 새긴 막사발은 문학관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 문학의 확장… 음악으로 읽는 시 음악과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시 90여 편은 노래로 작곡됐다. 가요뿐만 아니라 동요, 가곡, 합창곡의 노랫말로 재탄생했다. 가장 최초로 노래가 된 시는 이동원이 부른 '이별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대구가 낳은 두 예술가가 만나기도 했다. 가수 김광석은 유작으로 '부치지 않은 편지'를 내놨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부르고 녹음한 노래로, 사후 추모 앨범에 수록됐다. 애절한 목소리로 읊는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시구는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 외의 정호승 시인의 시구가 붙은 노래들 역시 문학관에서 들어볼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은 문학관을 찾아주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남겼다. "세상 살기가 쉽지 않다. 시구는 힘든 삶에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문학관에 와서 그런 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의 바람은 이뤄졌다. 박물관 1층 벽면에는 손바닥 크기의 종이에는 방문객들의 후련함이 새겨져 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위로를 받았다"거나 아기 손으로 서툴게 적은 "좋은 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가 시선을 끈다. 소년의 희노애락이 담긴 범어천은 이제 한국인의 희노애락을 담은 문학이 됐다. 문학관과 범어천 산책길은 그다지 길지 않아 무더운 여름철 걷기도 어렵지 않다. 시원한 음료 하나 손에 들고, 물길 따라 흐르는 시를 읽으러 가보길 바란다.
2026-05-29 12:40:00
3년 전 타지인 대구에 첫발을 들였을 때, 외로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덮쳐왔다. 길을 모르니 내비게이션 없이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혹여 버스를 잘못 탈까 싶어 정류장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버스 번호를 강박적으로 확인했다. 이제는 지도 앱 없이도 주요 관공서를 찾아갈 수 있게 됐고, 골목 곳곳의 맛집도 제법 꿰게 됐다. 누군가 대구에 놀러올 일이 있으면, 자신 있게 안내자를 자처하며 대구 사람 행세를 하기도 했다. 길을 잃고 진땀을 흘리던 과거는 몽땅 잊어버리고, '이 정도면 대구를 안다'고 자만에 빠졌다. '두나의 두발 산책'을 쓰며 자만은 보기 좋게 깨졌다.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편하게 내달리던 대로와 대로 사이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골목들이 실핏줄처럼 촘촘히 이어져 있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신축 아파트 단지 사이로는 재개발의 광풍을 비껴간 오래된 동네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곳들은 버스나 택시만으로는 닿기 어려웠다. 30분 넘게 걷는 건 예삿일이 됐고, 좁은 골목 입구를 찾지 못해 길을 헤맸다. 400m 남짓한 짧은 골목이어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짧지 않기에, 같은 골목을 몇 번이고 왕복하며 숨겨진 이야기를 찾았다. 골목을 방문하기 전에는 관련 기사와 자료를 찾아 읽기도 했다. 언론 속 골목은 대체로 암울했다. 대형 상권에 밀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거나, 볼거리가 부족해 쇠퇴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하면 사전 지식은 무용지물이 됐다. 조그마한 우물 속 올챙이들이 쉼 없이 헤엄치듯, 골목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동감을 품고 있었다. 오래된 간판을 보며 가게 이름의 뜻을 물어봤을 뿐인데, 이야기는 예상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다. 시집을 올 때부터 이 가게를 지켜왔다는 주인은 좁은 가게 안에서 두 자녀를 키워낸 이야기, 어느새 아이들이 장성해 결혼까지 하게 된 과정을 들려 줬다. 그 밖에도 10년 넘게 찾아오는 단골손님의 이름을 줄줄 외우고 있는 상인, 휴대전화 속 오래된 사진을 꺼내 보이며 골목의 변천사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어르신들까지. 자신이 언제부터 이 자리를 지켜왔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표정에는 묘한 애정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박물관이나 보도자료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들은 골목이 가진 시간과 역사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실제 변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젊은 세대가 오래된 골목을 재해석하면서, 한때 낡고 오래된 공간으로만 여겨졌던 장소들이 또 다른 얼굴을 갖기 시작했다. 청과시장으로 이름을 알렸던 칠성시장은 이제 장난감과 레트로 감성의 공간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인쇄소 골목으로 기억되던 남산동은 책을 읽는 문화를 세련된 취향으로 소비하는 이른바 '텍스트 힙' 공간으로 재해석됐다. 어르신들은 "이 골목이 이렇게나 변했나"며 놀라고, 젊은 세대는 "이곳에 이렇게 깊은 역사가 있었느냐"며 새삼 신기해했다. 우리는 오래된 골목을 너무 쉽게 '쇠락'이라는 단어로 규정해 왔는지도 모른다. 직접 걸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골목은 멈춰 있는 공간이 아니라, 느리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었다. 지도 앱에 시선을 고정하고, 익숙한 길로만 다닌다면 골목의 매력을 읽을 수 없다. 골목을 지켜온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가 더해져야만 비로소 대구라는 도시가 완성된다. 그래서 오늘도 두 발로 그 이야기를 배우러 간다. 굽이굽이, 굳이굳이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2026-05-24 17:30:00
[두나의 두발 산책] 전국 도매상 몰리던 대신동 양말골목, 오늘날의 모습은
대신동에서 남산동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비좁은 길목이다. 무심코 지나치려는 순간, 발길을 붙잡는 건 작고 알록달록한 색동 양말이다. 양말을 매대에 가득 펼쳐놓은 가게들이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즉석에서 구매할 수 있는 일반 양말부터 전국 각지로 유통될 양말 묶음이 골목 곳곳에 쌓여 있다. 오로지 양말만을 파는 독특한 거리. 대구 양말골목의 과거와 현재를 걸어봤다. ◆ 최대 100곳… 양말가게 전성기 골목의 역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제일모직 등 유명한 섬유·직물 업체들이 북구 일대에 자리 잡았던 시기다. 대신동은 양말 재료를 빠르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고, 대구·경북 상권의 중심인 서문시장과도 가까웠다. 양말 장사에 최적의 입지를 갖춘 셈이었다. 그렇게 양말골목은 빠르게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이 작은 골목에만 100여 개 업체가 모여 있었다. 전국으로 유통되는 양말 상당수가 이곳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값싸게 양말을 대량 구매할 수 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골목은 자연스럽게 손님의 발길을 끌어모았다. 손님은 일반 소비자에만 그치지 않았다. 전국 전통시장과 마트, 문구점 상인들이 양말을 떼가기 위해 골목을 찾았다. 아예 숙소를 잡고 이틀 동안 물건을 고르는 도매업자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 전성기 지나 조용해진 골목 지난 12일 찾은 대신동 양말골목은 다소 한산했다. 평일인데도 휴일처럼 조용한 분위기였다. 한때 100곳이 넘었던 양말 가게 가운데 지금 남은 곳은 15곳 남짓. 이날 문을 연 곳은 10곳에 불과했다. 양말 가게 대신 카페나 채소 가게가 들어서면서 골목의 정체성도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 특히 남산동 방향에 있던 30개가 넘는 점포들은 재개발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매일 양말을 신는다. 그런데 왜 양말골목을 찾는 이들은 줄었을까. 섬유산업의 쇠퇴는 골목에 직격탄이 됐다. 인건비 부담을 견디지 못한 대형 양말 공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고, 산업 구조도 크게 바뀌었다. 과거 공장에서 기술을 익힌 이들이 소규모 공장을 차려 사업을 이어가는 형태로 변했다. 수출 시장 축소도 이유 중 하나다. 과거에는 저렴한 인건비와 생산 단가 덕분에 해외 주문이 많았지만, 지금은 경쟁력이 예전만 못하다. 자연스럽게 양말 골목의 주 고객도 해외가 아닌 내수 시장이 됐다. 교통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도시철도 3호선 서문시장역 개통 이후 유동 인구가 눈에 띄게 줄었다. 예전에는 역에서 내려 서문시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양말골목을 지나갔지만, 이제는 골목을 거치지 않아도 이동이 가능해졌다. 통행량 감소는 곧 소매 손님 감소로 이어졌다. 1988년부터 양말골목에서 가게를 운영 중인 김모(62) 씨는 "전성기와 비교하면 매출이 3분의 1 수준이다"며 "여름에는 덧신조차 신지 않고 샌들을 신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 장사가 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상인들은 골목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는 손님들이 많이 찾는 여름용 덧신을 가게 앞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차곡차곡 쌓아두며 말을 이었다. 김씨는 "그래도 먹고살 만큼은 수익이 난다"며 "30년 넘게 지켜온 가게인 만큼 앞으로도 계속 자리를 지켜나갈 생각이다"고 했다. ◆ 골라보는 재미 남은 오늘날 쇠퇴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골목에는 여전히 다양한 양말이 빼곡했다. 원하는 디자인이 없다면, 대량으로 제작을 의뢰할 수도 있다는 안내판이 방문객을 반겼다. 골목을 지나가는 이들은 큰 노력 들이지 않고도 온갖 종류의 양말을 한자리에서 구경할 수 있다. 등산용 양말부터 무지 양말, 형형색색의 패션 양말, 레이스가 달린 패션 양말이 판매대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통풍 기능이 강조된 제품, 발가락 양말, 면 양말 등 기능성을 강조한 양말도 손쉽게 볼 수 있다. 가게마다 조금씩 다른 질감과 디자인을 비교하며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직접 양말을 집어 들고 만져보니 품질 차이도 확연했다. 시장 한편에 무더기로 쌓인 저가 양말과는 촉감부터 달랐다. 맨들한 면 소재는 땀 흡수도 잘될 것 같아 자연스럽게 지갑을 열게 됐다. 한 상인은 "흔히 판매되는 중국산 제품보다 질은 더 좋은데 가격은 훨씬 저렴하다"고 자랑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면 양말 10켤레 가격은 1만원 수준. 인근 서문시장보다도 50% 이상 저렴한 편이다. 골목은 예전처럼 북적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양말골목의 하루는 계속된다. 누군가는 싼값에 양말을 고르고, 상인들은 전국으로 보낼 물건을 분주히 포장한다. 양말 한 켤레를 살 겸 가볍게 한 번 걸어보며, 양말 골목의 오래된 과거와 현재를 곱씹어보길 바란다.
2026-05-22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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