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나의 두발 산책] 걸어서 만나는 가장 오래된 대구… 선사시대 역사 따라
대구하면 '근대' 유산이다. 수많은 예술가와 독립운동가가 머물렀던 흔적은 대구의 대표 관광 아이템으로 불린다. 하지만 우리 생각과 달리, 대구의 역사는 그리 짧지 않다. 제대로 된 문자가 없던 시절부터 대구는 인류의 보금자리였다. 비교적 각광받지 못했던 그 역사를 둘러볼 수 있는 산책 코스를 소개한다. 달서구의 '선사시대로' 산책을 통해 그 역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여러 산책코스 중에서도 가장 최근 조성된 코스를 따라 걸어봤다. ◆ 대구의 시작, 2만 년 전으로 2006년, 월성동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눈에 띄는 돌이 출토된다. 긁개, 새기개, 찌르개, 좀돌날 등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역력한 모양이었다. 이때 출토된 구석기 유물은 무려 1만 4천175점이었다.청동기부터 인간이 살았을 거란 기존 추측과 달리, 대구 역사의 시작은 2만년 전 구석기였다. 유물들은 입을 모아 한 가지를 말한다. 대구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정주하기 좋은 곳이었다. 특히 달서구 월배선상지 근처는 마을이나 경작지가 자리 잡기 딱 좋았다. 특히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이곳에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꾸렸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유적을 살펴보면, 대구는 '폐쇄'된 도시가 아니었다. 추론의 근거가 되는 건 '흑요석'이다. 흑요석의 산출지는 백두산인데, 그 먼 곳에서부터 대구까지 물자가 이동했다는 의미다. 게다가 흑요석은 가공까지 끝나, 아마도 경기 등 중부지방을 먼저 거친 뒤 대구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그저 두 다리만 있었을 원시인들이 대구와 백두산을 들락거렸을 풍경이 상상이나 되는가. ◆ 삶의 터전, 공원에서 되살아나다 이곳저곳을 교류하다가 보금자리인 대구로 온 이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그 흔적을 '선돌공원'에서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청동기 시대 원시인들의 거주지 모형에 들어가 볼 수 있다. 당시 잠자리는 구덩이를 파서 조성했다. 바닥에 불을 피워 흙을 단단하게 해, 습기가 올라오는 걸 막는 아이디어까지 돋보인다. 움집 근처에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는 붉은색 털옷을 두른 원시인 미니어처는 과일을 따 먹거나, 땅을 파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리조리 둘러보면 선사시대를 실감할 수 있는 장식품이 가득하다. "뿌우우우!", "앗 깜짝이야!". 길게 뻗은 코를 따라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북슬북슬한 털과 하늘로 솟은 뿔까지 재현된 4m짜리 '매머드 모형'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다. 움직일 줄 몰랐던 행인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급히 자리를 뜬다. 실제 유적도 둘러볼 수 있다. 아파트 신축공사 과정에서 발굴된 고인돌은 공원 외곽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상인동에서 출토된 고인돌은 두껍고 거대해 원시인들이 돌을 어떻게 옮겼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이와 달리 진천동은 납작한 '돌침대'와 유사해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 가장 오래된 역사, 놀이로 함께 선돌공원과 선돌마당공원을 이어주는 보도교 역시 눈길을 끈다. 거대한 선돌이 흙빛 고가교를 떠받치는 구조다. 계단은 마치 손수 만든 듯 칸마다 높이가 들쑥날쑥해 조심히 올라야 한다. 이 '선돌'은 실제 월암동에서 5개나 발견됐다. 선돌은 장례에 기념물로 사용했거나, 수호·풍요를 기원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혹은 이정표, 지역의 경계를 뜻하는 실용적인 물건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선돌을 따라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면, 어두운 굴에 도착한다. 굴 벽면에는 선사시대에 살았을 사슴, 멧돼지를 잡는 원시인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보도교 중앙은 양쪽 벽면이 투명한 유리인 덕분에, 공원의 전경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보도교를 지나 선돌마당공원으로 내려오면 분위기는 또 한 번 반전된다. 이 곳은 선사시대 분위기가 가미된 현대식 놀이터에 가깝다.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날도 아이들은 추위도 잊고 공룡의 뼈 모양 놀이기구에 올라탔다. 형형색깔 칠해진 미끄럼틀을 오르내린 뒤, 지친 아이들은 '움집' 모양의 평상에 앉아 숨을 골랐다. 몇몇 아이들은 발굴을 체험할 수 있는 흙더미에 앉아 모래를 만졌다. 걷다 보면 놀이터가 되고, 다시 유적이 된다. 달서구 '선사시대로' 산책길은 기나긴 설명보다는 풍경으로 대구의 시간을 말한다. 근대의 도시 뒤편에 숨겨진, 가장 오래된 대구의 이야기가 산책로에 녹아있다.
2026-03-12 12:3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막혀도 너무 막혀!… 데이터로 본 대구 교통
출·퇴근을 위해 차 시동을 걸고 나면, 나오는 건 한숨뿐. 차들로 꽉 막힌 길을 어떻게 뚫어야 할지 막막하다. 붉은 정차 신호를 한 번 마주할 때마다 도착 예정시간은 5분, 10분씩 늘어난다. 운전자의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드는 대구의 교통체증, 과연 체감만큼 심한 걸까. 데이터로 한 번 살펴봤다. ◆ 조사 내용 바탕으로 해결책 모색 대구시는 매년 실시하는 교통 기초조사를 통해 어디가 가장 막히는지, 언제 막히는지를 비교 분석한다. 교통 조사는 왜 필요할까. 버스 노선을 조정하거나 새로운 도로를 닦는 등 교통체증을 해결하는 데 꼭 필요한 데이터여서다. 지난해에도 대구시는 어김없이 교통 상황을 조사해, 지난 12월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은 시 경계, 교량, 간선도로, 교차로 등 대구 교통의 병목 구간 전반이다. 조사 기간 중 휴가철 등 비정상적인 교통 수요가 발생하는 시기는 제외했다. ◆ 가장 막히는 시간과 장소 하루 중 차가 가장 막히는 시간인 '첨두시(尖頭時)'는 오전 8시부터 9시 사이였다. 시 경계와 교량, 간선도로 모든 조사 지점에서 같은 결과가 나왔다. 대부분의 직장 출근 시간인 오전 9시에 맞춰 이동하는 차량이 집중된 것으로 분석됐다. 퇴근 시간대는 출근 시간보다 비교적 한산했다. 퇴근 시간대에는 오후 5시와 6시 사이가 가장 혼잡했다. 가장 붐비는 곳은 어디였을까. 금호강과 신천으로 나뉜 대구를 잇는 교량 가운데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은 수성교다. 하루 9만 대가 넘는 차량이 통행했으며, 첨두시에는 시간당 6천 대가 수성교를 건넜다. 교차로 가운데서는 범어네거리가 가장 혼잡했다. 첨두시 교통량은 1만907대로, 대구 주요 교차로 중 가장 많은 수치다. 이어 만촌네거리(9천700대), 죽전네거리(9천313대) 순이었다. 간선도로 중에서는 신천대로가 가장 많은 교통량을 감당하고 있다. 반나절 동안 신천대로가 수용하는 차량은 8만9천845대에 달했다. 다른 시·군과 맞닿은 경계 가운데서는 경산 방면 '건천지(대구시시지노인전문병원)'앞이 가장 붐볐다. 하루 교통량은 6만4천797대로 집계됐다. ◆ 그나마 널널한 곳? 시 경계·교차로 조사 결과, 대구시의 전체 교통량은 전년 대비 4%가량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미하지만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눈에 띄게 교통량이 줄어든 곳은 시 경계 지역이다. 2024년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8.41% 감소했고, 최근 5년간(2021~2025년) 연평균 4.28%의 감소 추세를 보였다. 특히 왜관방면은 전년 대비 29.78%나 감소했으며, 성산대교(-55.19%)와 일반국도 제25호선(-29.16%) 지점에서 큰 폭으로 교통량이 줄었다. 주요 교차로 역시 전년 대비 8.1%의 교통량이 감소했다. 태전고가교오거리(-45.20%), 상인네거리(-40.73%), 큰고개오거리(-38.71%), 복현오거리(-38.70%) 등에서 교통량이 전년보다 매우 큰 폭으로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 인구 줄어도 병목 그대로… 왜? 왜 인구는 줄어드는데, 체감 도로 혼잡도는 크게 줄지 않을까. 그 배경에는 세대 수 증가와 핵가족화가 있다. 세대수는 지난 5년간 연평균 1.11%씩 지속적으로 늘었다. 그 와중에 세대당 인구는 연평균 1.56% 감소하면서, 가구 분화가 일어나 전체 세대수가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가구당 1대만 소유하더라도, 차량 수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승용차 등록대수는 2021년에 일시적으로 소폭 감소한 것을 제외하면 매년 1.03%씩 증가하고 있다. 출근길 한숨이 쉽게 줄지 않는 이유가 데이터에서도 확인됐다. 인구는 줄었지만, 차는 여전히 늘고 있다. 오늘도 신호 앞에서 늘어나는 도착 예정 시간을 바라보는 이유다. 세대 분화와 차량 증가라는 흐름이 이대로 이어진다면, 교통체증이 완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데이터를 토대로 더 나은 해결책을 반드시 찾아내야 할 때다.
2026-03-12 12:0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땅속으로 발전하는 도시… 지하철과 KTX의 시대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이 가운데 2부는 철도와 도로 같은 도시의 필수 시설이 어떻게 자리 잡아왔는지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팽창하는 도시는 땅 위를 갈고 닦으며 도시로 변모시켜왔다. 땅 위를 오가는 차들과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땅 아래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교통량을 땅 위와 아래가 각각 분담하면서 교통 체증도 줄어들 거라는 기대를 품었다. 밑그림을 그린 건 1990년이었다. 대구지하철을 건설하기로 하고, 운영 기본계획을 짰다. 27.6km의 1호선은 월배와 안심 사이에 짓고, 2호선은 성서와 고산 사이 23.6km을 오가도록 했다. 3호선의 경우 칠곡에서 출발해 범물에 도착하도록 했는데, 총 길이는 21.5Km 였다. 당시 계획상에는 6호선까지 계획됐다. 5호선과 6호선은 도합 48.4km로, 2020년 전에 모두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4호선은 순환선으로, 대구 중심지 주변을 둥글게 순환하며 1~6호선에 고루 환승할 수 있도록 했다. 1호선이 성공적으로 개통하면서, 그 중심부를 차지한 건 '반월당역'이었다. 뒤이어 2호선까지 개통하면서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깊고 길게 파인 지하상가는 상권을 활성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의 비상상황에도 유용할 것이라 기대했다. 당초 지하상가는 파리의 지하 복합단지인 '포름데알'과 비슷한 수준의 대형 지하상가를 목표로 했다. 포름데알은 복합환승센터뿐만 아니라 영화관과 공공도서관, 수영장 등이 입주돼 있는 시설이다. 이에 따라 100미터 간격으로 시민 휴게 시설을 짓는 등 지하가 다양한 기능을 담당할 수 있도록 했다. 혹여 지상 도로가 고가 공사를 지을 것까지 대비해, 지반 붕괴를 막는 '파일'을 지하부터 지상까지 꼼꼼하게 설치하기도 했다. 동대구역 고속철도 역사도 새 옷을 입는다. 1996년에는 숙박과 업무, 금융시설과 주상복합, 문화센터가 함께 들어설 수 있도록 계획했다. 이후 2010년 기존 계획을 수정해 기존 역사를 증축하고, 주변에 있던 버스터미널과 지하철을 흡수하기로 했다. 이 계획은 국가시범사업으로 선정됐고, 신세계백화점의 투자로 현실화됐다.
2026-03-12 11:45:00
[두나의 두발 산책] 고쳐 쓰고, 고쳐 쓰고… 자동차 명장들의 동네
'위-잉.' 나사가 돌아가다 빠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곳은 남산동 자동차부속 골목이다. 이 골목을 걸을 때는 자연스레 발 아래로 시선이 향한다. 잠시 방심하면 어디선가 굴러 나온 나사를 걷어차고 당황하기 십상이다. 명덕네거리에서 2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 자동차가 오갈 수 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자동차 공업사가 늘어서 있다. 문을 연 업체만 50여 곳.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온통 자동차 부품이다. 보닛을 활짝 연 차들이 갓길에 줄지어 서 있고, 코너마다 주인을 기다리는 타이어가 산처럼 쌓여 있다. 장·단거리를 오가며 쉽게 상하는 택시를 정비하기 위해 업체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골목이 형성됐다. 경일택시, 제일택시, 신한택시 등 수많은 택시 회사 차량이 이곳에 차를 세워두고 대기했다. 지금은 대부분 부품 업체만 남았지만, 당시에는 폐차장과 세차장도 여럿 자리 잡고 있었다. 점차 고장 난 택시뿐 아니라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일반 차량들도 골목을 찾기 시작했다. 수리와 부품 구매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고, 서울이 아니면 구하기 어려운 부품까지 취급한다는 점이 강점이었다. 그야말로 자동차 '백화점'이었다. 골목의 주력 상품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단순 수리에서 출발해, 차량의 멋을 더하는 튜닝이 호황을 누리던 1980년대가 찾아왔다. 튜닝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단속이 시작되기 전까지, '차 좀 탄다'는 유행의 선도주자라면 꼭 한 번은 이 골목을 거쳤다. 시간은 흘러 지금의 골목이 됐다. 명장들에게 일을 배운 형제와 자녀, 후임들이 자리를 이어 지키고 있다. 차량 액세서리 전문점을 운영하는 오광원(50)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1999년 이 골목에 들어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 사장 자녀들이 가업을 잇지 않게 되면서, 일을 배우던 오씨가 가게를 맡았다. 오씨는 "일을 처음 배울 땐 호되게 배웠다. 출근 시간은 8시, 퇴근 시간은 없이 일했다. 손님이 있으면 새벽 4시까지도 일했다"며 "그때는 그만큼 손님이 많아서 쉼 없이 일하며 배웠는데, 이제는 다 옛말이다"고 회상했다. 오씨를 비롯한 장인들은 여전히 그 솜씨를 뽐내고 있다. 죽어버린 전조등과 음향기기를 살려내고, 이제는 단종돼 구할 수 없는 부품을 뚝딱 고쳐낸다. 엔진오일처럼 주기적으로 교체해야 하는 소모품은 물론, 광택을 잃어 거무죽죽해진 차량도 이 골목을 거치면 새 차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골목의 풍경은 예전과 같지 않다. 30년 넘게 광택 전문점을 운영해 온 장학민(54)씨는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각종 장비와 정비를 한꺼번에 맡는 대형 '종합 모터스'가 대세다. 종합 모터스 하나가 들어선 자리에 예전에는 소규모 전문 업체 5~6곳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던 셈이다. 자연스럽게 가게 숫자도 줄었고, 명장들도 골목을 떠났다. 장씨는 "한 업체에서 여러 부품을 함께 판매해 마진을 남기고, 손님에겐 편리함을 주는 구조다"며 "예전처럼 한 분야만 전문적으로 해서는 장사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꼭 이 골목이 아니어도 차를 고칠 곳이 많아졌고, 인구도 줄다 보니 영업이 안 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돌파구로 골목은 '스트리트 모터 페스티벌'을 꺼내 들었다. 지난해 14회를 맞으며 명실상부 대구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았다. 페스티벌이 열리면 골목은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다. 차량이 오가던 도로 위에 휘황찬란한 스포츠카와 리무진이 줄지어 주차된다. 방문객들은 차량에 타보기도 하고, 차량을 둘러싼 튜닝 부품들도 구경해볼 수 있다. 축제가 끝나고 차들이 빠져나가면, 골목은 다시 쇠와 기름 냄새가 뒤섞인 일상으로 돌아간다. 화려한 변신은 잠시뿐이지만, 이 골목이 버텨온 시간은 축제보다 길다. 장인들의 고집스러운 손길은 이 골목을 조금 더 오래 살게하지 않을까.
2026-03-05 12:00:00
[창간 80년, 격동 80년]"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1955년 매일신문 피습 사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학도는 본래 학업에 전념하여 지식과 덕성을 기르는 데 그 목적이 있음에도, 그러하지 아니하고 외부의 필요에 따라 그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 적지 않다. 최근 대구 시내의 예로서는 현관(顯官)의 출영까지 학생들을 이용하고 도열을 지어 3∼4시간이나 귀중한 공부시간을 허비시켜 가면서 늦여름의 뜨거운 태양 밑에 서게 한 것을 목격했다. 이와 같은 행위는 학도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관련자들은 이 점을 깊이 살펴 조심해야 할 것이다". 1955년 9월 13일. 매일신문의 주필이자 편집부장 최석채는 사설을 게시했다. 더 이상 국가가 주관하는 행사에 국민들, 특히 중고등학생을 동원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부 주도로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철수가 필요하다는 대규모 시위가 잇따르면서, 동원은 잦아졌다. 이들 위원회는 정전협정의 내용이 준수되는지 감독했는데, 스웨덴과 스위스, 공산주의 진영에서 추천한 체코와 폴란드로 구성돼있었다. 이승만 정부 측은 체코와 폴란드 측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며, 시위를 통해 위원회 철수를 압박했다. 사설이 게시되기 3일 전. 이 반발심에 불을 지피는 사건이 발생한다. 시국 강연을 위해 대구를 방문한 임병직 UN 대사를 위해 또 한 번 학생들이 동원된다. 여당인 자유당과 관변단체인 국민회의 주도로, 학생들은 오전 8시 30분부터 비행기를 기다렸다. 태극기를 든 학생들은 폭염과 싸우며 무려 4시간을 허비했다. 마땅히 기사를 써야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반대 측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동원했던 국민회의는 '사설 중 문제된 일부를 취소, 집필자를 처단하고 사과문을 게시하라'고 요구한다. 매일신문 측은 당연하게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회 경상북도 총무차장 김민과 자유당 경북도당 감찰부장 홍영섭 등 약 20명의 청년들은 행동을 게시한다. 1955년 9월 14일, 오후 4시 25분쯤 탈취된 시영버스 402호가 신문사 앞에 선다. 버스에서는 곤봉과 해머 등 무시무시한 무기를 쥔 이들이 내렸다. 곧장 신문사로 쳐들어간 이들은 통신 시설과 인쇄 기계를 죄다 박살냈다. 배송을 기다리던 신문들 역시 모두 빼앗겼다. 당시 연판부장이던 우종구는 얼굴을 크게 다치는 등 총 8명의 직원이 부상을 입었다. 정상적인 신문 발행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16일 매일신문은 지면을 통해 상황을 알리고, 2~3일간 임시 타블로이드 판을 발행한다. 막을 기회가 있었으나,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약 1시간 쯤 전인 오후 3시 15분, 매일신문은 피습 사건이 있을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지금의 남부경찰서인 남대구 경찰서에 연락했지만, 경찰 측은 고작 2명의 형사만 파견했다. 사건 이후에도 방해 공작이 이어졌다. "백주 대낮에 일어난 테러가 무슨 테러냐"며 경상북도청 사찰과장이 가해자들을 두둔하고 나선다. 자유당은 테러를 '의거'라 명명하고, 사건 조사단장인 최창섭은 "청년들이 애국심에 불타 벌인 일이니, 훈장을 주어야 하지 처벌해선 안 된다"고 발언했다. 경찰 측은 가해자들의 소재를 알 수 없다며 체포하지 않고, 화살을 최석채에게 돌린다. 간첩 행위를 하는 중립국감독위원회 비판에 필요한 동원 시위를 비난한 일은 곧 이적행위라고 뒤집어씌운다. 결국 최석채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도움의 손길 역시 차단됐다. 매일신문을 옹호하면, 이적행위로 간주하겠다는 협박장이 대구 시내에 뿌려지기도 했다. 테러를 자행한 가해자를 옹호하는 목소리만이 남았다. 다행히 오명은 멀지 않은 미래에 모두 벗겨진다. 최석채 주필은 체포 1개월 만에 풀려나고,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다. 주도자들은 벌을 받았다. 정부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자 주도자인 홍영섭과 김민은 체포 영장을 발부받고, 김민은 대구형무소에 투옥된다. 최석채 주필은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가 뽑은 20세기 언론 자유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협회 측은 "언론 자유의 강력한 옹호자였고 오랜 언론인 생활동안 모든 형태의 부정에 반대하는 용기를 보여줬다"며 시상 이유를 밝혔다. 단순히 기사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이 신문사를 습격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 이면에는 폭력을 묵인하고 부추긴 정부 권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매일신문 사설 한 편을 둘러싼 탄압은 당시 언론 자유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저항이 훗날 얼마나 값지게 평가받는지를 보여줬다. 이 사건은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권력 앞에서 침묵하는 대신, 당당히 해야할 말을 던지는 것. 시간이 흘러도 그것이 언론의 변치않을 역할이다.
2026-03-05 11: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사통발달의 시작, 도로망과 간선 교통의 발전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이 가운데 2부는 철도와 도로 같은 도시의 필수 시설이 어떻게 자리 잡아왔는지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모든 도로는 경상감영과 대구역 일대를 중심으로 짜여졌다. 1906년 대구 대일본 거류민회는 성벽을 철거하고, 중심지 일대에 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중반까지 도청을 중심으로 하는 중심부, 대구역 근처, 일본인이 거주하던 동쪽에 도로를 건설했다. 내부를 연결하는 도로가 완성된 이후, 외부와 내부 도로를 자연스럽게 잇는 작업이 시작됐다. 1등 도로는 경성과 부산, 천안 등 비교적 먼 지역을 향했고, 경주와 통영, 부천으로 향하는 도로는 2등 도로의 이름표를 받았다. 도로들이 교차하는 중심은 어김없이 대구역 앞이었다. 시간은 흘러 1965년, 대구 곳곳으로 향하는 크고 작은 도로들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도로와 도로가 겹치는 부분에 '교통 광장'을 설치할 때가 됐다. 총 14개의 네거리를 형성해 도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당시 지은 이름 중 일부는 지금도 남아 우리에게 익숙하다. 중앙대로와 달구벌대로가 만나는 곳은 반월당 네거리로 명명했다. 서대구로와 두류공원로, 달구벌대로가 만나는 두류네거리도 이 때 만들어졌다. 서대구로와 노원로, 팔달로가 만나는 만평네거리 역시 이 당시 기획된 네거리다. 당시 계획을 담은 지도에서는 파란 점으로 표시돼 있다.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대구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 도로는 완공됐지만, 남북으로 이어지는 교통망은 아직 부족했다. 이에 따라 신천을 따라 아래에서 위를 가로지르는 '신천대로' 계획이 등장하게 된다. 두산동 동대구로에서 팔달교까지 이어졌으며, 총 연장 14.45km, 폭 50m에 달했다. 도로는 1991년 완공을 목표로 연차적으로 건설하도록 설계됐다. 완공된다면, 신천변에 남아있던 불량지구들의 개발을 촉진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도 볼 수 있으리라 추측했다.
2026-03-05 11: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대구를 살리는 생명선… 낙동강 수원(水源) 시스템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이 가운데 2부는 철도와 도로 같은 도시의 필수 시설이 어떻게 자리 잡아왔는지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1960년대 대구는 이미 취수장과 정수장, 배수지를 일부 갖추고 있었지만, 도시 확장에 따라 더 많은 시설이 필요해졌다. 당시 상수도계통평면도를 살펴보면, ▷수성 ▷대봉 ▷중동 ▷상동 ▷가창에 각각 취수장을 두고 있었다. 이곳에서 얻은 물은 산격과 가창에서 걸러져 도시로 공급됐다. 이중 댐과 함께 취수장, 정수장, 배수지를 모두 갖춘 신식 시설은 가창뿐이었다. 이에 따라 강정 취수장과 감산 정수장, 두류와 신천 배수지를 추가 개설해 더 나은 체계를 갖추기로 했다. 낙동취수장에서 얻은 물은 감산 정수장을 거쳐 각 인근 가정으로 공급되는 식으로 배관 계획을 짰다. 도시로 공급되는 물의 '원천'인 신천과 금호강 역시 개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단순히 강을 '수자원'으로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가 공간으로 재해석하려 했다. 당시 신천과 금호강은 도시 내부를 흐르며 오염을 피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하수 처리장 건설과 하천 유지수 확보 등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졌다. 최종적으로는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고기가 노닐고 철새가 찾아오는 생명력 있는 하천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신천을 일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근린공원'으로 개발하자는 그림도 이 당시 그려졌다. 금호강은 하천 주변의 지형을 이용해 지구공원, 자연공원, 유원지 등 성격을 구분해 개발키로 했다. 접근성 문제도 언급됐다. 이상적인 대구시의 '오픈스페이스'로 강을 변신시키기 위해서다. 도심에서부터 도보나 자전거 도로를 통해 각 하천 공원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신천(27.5km)과 금호강(81.4km) 전 구간에 걸쳐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를 조성하기로 했다. 또 보도와 자전거 도로, 자동차 진입로를 체계적으로 설계해 언제 어디서든 강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온갖 유희시설도 계획에 포함됐다. 축구와 농구, 정구장뿐만 아니라 모험 놀이터, 게이트볼장, 스케이트장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노곡지구의 경우 광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주차장과 피크닉장까지 설계했다.
2026-02-26 12:00:00
[두나의 두발 산책] 노래가 된 골목, 영원한 가객을 만나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신천대로 인근을 걷다 보면 쌩쌩 달리는 자동차 소음에 옆 사람의 말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대로변에 붙은 김광석 다시그리길로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는 달라진다. 소음은 잦아들고, 노랫소리와 기타 선율이 골목을 채운다. 귀를 쫑긋하며 자리에 서서 노래를 감상하는 이들, 벽에 적힌 노랫말을 눈으로 읽는 이들... 김광석의 노래는 다양한 방식으로 방문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 영원한 가객 걸어온 길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됐으면 합니다". 이 말을 남긴 김광석은 대봉동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서울로 이사 가기 전까지 대구에서 머물렀다. 중학생 시절 바이올린을 접하며 음악과 인연을 맺었고, 대학 동아리 활동을 통해 가수의 꿈을 키워갔다. 대학교 1학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창단 멤버로 가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학창 시절 친구들과 결성한 그룹 '동물원'의 1집은 그의 공식적인 음악 활동의 출발점이었다.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거리에서', '먼지가 되어'… 이후 셀 수 없는 대표곡을 쏟아내며 대중의 찬사를 받는다. 음악에 담긴 철학은 이 골목과 닮았다. 화려하지 않고, 주택과 시장과 멀지 않아 관광객이 아닌 평범한 주민들이 자주 오가는 길이다. 그의 생전 인터뷰와도 결을 같이 한다. "제 노래는 그저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고 느끼는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들을 노래에 담아낸다고나 할까요". ◆ 인기 비결, 세대 넘어 공명한 노래 골목에 울리던 '서른 즈음에' 역시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먼 가사를 자랑한다. 실제로 자신이 30살이 되면서 겪은 고뇌를 담았다. 그는 "30대쯤 되면 뭐 하나 정해놓고 아등바등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답답해져서 그런 내용을 담아 '서른 즈음에'를 불렀다"며 "노래 가사처럼 된다고 해서 한동안 안 불렀던 노래다"고 했다. 누구에게다 공감을 사는 가사는 골목 벽에 또렷하게 기록됐다. 이미 한참 30대를 지나온 것처럼 보이는 방문객 한 명은 한참 벽화를 바라봤다. 벽화 위에 달린 스피커에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생각에 잠긴 듯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인기는 식지 않았다. 솔로 활동을 이어가며 정규 앨범 4집과 리메이크 음반 '다시 부르기' 시리즈 2집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팬들에게도 '성실한' 가수였다. 인기를 얻은 뒤에도 대학로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무대를 이어갔고, 1995년 8월에는 통산 1천 회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 골목, 다시 노래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 골목에서 되살아났을까. 배경에는 인근 방천시장이 있다. 시장은 한때 점포 수가 1천 개에 달할 정도로 붐볐다. 쌀과 떡이 유명한 시장으로 유명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며 급격히 쇠락했다. 손님이 끊긴 시장에는 오래된 건물만 남았다. 활로가 필요했다. 그때 눈에 띈 것이 대구에서 태어난 '김광석'이었다.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김광석을 '다시 그리기'로 했다. 그렇게 망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시장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그 시절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가게들도 덩달아 자리 잡았다. 이제는 보기 어려운 오락실과 문구점, 뽑기 기계가 줄지어 영업 중이다. 저렴한 가격에 혹한 사람들은 자리에 서서 구경한다. 입안을 색소로 온통 물들이는 불량식품 두어 개를 구매해 먹어보고, 손톱만 한 장난감이 쏟아지는 뽑기 기계를 돌리며 추억에 젖는다. 그의 인생 철학도 이 골목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다. 그의 측근들은 김광석이 무명 가수들을 도왔다고 회상한다. 라디오 진행을 시작하고 공연이 대박난 후, 큰돈을 만지게 된 김광석은 돈이 없어 음반을 내지 못하는 후배들에게 돈을 건넸다. 현재 방천문화예술협회가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고, 지난해에는 12회를 맞은 예술 페스티벌이 열릴 만큼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청년 작가들은 김광석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작품을 전시하거나, 공연을 벌이며 관람객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골목 조성이 시작된 2011년 이후로 시간이 적지 않게 흘렀다. 여전히 찾는 발길은 있지만, 예전만 못하다. 야외 콘서트홀을 울리던 공연은 줄었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던 가요제도 중단된 지 오래다. 벽면에 그려진 김광석의 얼굴에는 세월의 때가 묻어 어두워지고 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 상업과 예술, 그리고 김광석이 교차하는 이 골목을 둘러봐 주길 바란다. 노래로 되살아난 골목이 다시 노래할 수 있도록. 이 골목이 오래도록 가객을 그릴 수 있도록.
2026-02-26 12:0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가장 행복한 요일은 토요일?… 대구 '행복' 분석기
당신은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더 행복한 대구'를 만들기 위해, 대구 시민들의 행복도를 측정한 자료를 살펴본다. 대구시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은 시민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행복 저해 요인)을 분석해, 시민들이 체감하는 '현장 맞춤형' 행복 정책을 만들기위해 지난 2025년 만 19세 이상 시민 1천66명을 설문으로 조사한 결과를 공개했다. ◆ 전국 평균보다 낮은 행복도 대구시민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뭘까. 가장 먼저 떠올리는 키워드는 '건강한 삶'(26.5%)이었다. 연령이 높아질수록(50대 33.9%, 60대 이상 39.8%) 이를 최우선 가치로 꼽았다. 평화·평온한 삶(22.5%)과 화목한 가족·가정(17.9%)이 그 뒤를 이었다. 돈보다는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 더욱 중요하다고 봤다. 대구 사람들에게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구 사람들의 주관적 행복감은 6.23점으로, 전국 평균(6.56점)보다 낮았다. 게다가 전국 평균 행복감은 2023년도에 소폭 상승했지만, 대구시민의 주관적 행복감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전국 평균과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주관적 삶의 만족도도 낮게 측정됐다. 전국 평균은 6.24점, 대구는 6.01점을 보였다. 이는 특·광역시 중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삶의 영역별로 만족 수준은, 미래 안정성과 생활 수준, 공동체 소속감이 전국 최하위권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 왜 우울하냐 부정적인 정서를 느끼는 이들이 많은 게 영향을 줬다. '어제 느낀 감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걱정(3.85점), 우울(3.08점), 짜증(2.87점)을 느꼈다는 응답이 이어졌다. '나보다 행복한 사람'이 많다고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도 전국 평균보다 높게 측정됐다. '신뢰' 영역에서 독특한 결과가 도출됐다. 가족에 대한 신뢰수준은 3.77점으로 전국 평균(3.65점)보다 높았지만, 그 외 영역에의 점수는 전국 평균 대비 낮게 측정됐다. 이웃과 지인, 낯선사람, 종교적 신념과 국적이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다는 의미다. 시민들은 가족 중심적으로 강력하게 결속돼 있지만, 그 외 인간관계에서 신뢰수준이 약해 만족도가 떨어진 구조다. 경제적 요인은 대구시민의 행복을 저해하는 가장 큰 외부 요인이다. 시민들은 행복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 '개인적인 경제적 여건 또는 생활환경의 열악함'(32.3%)을 꼽았다. 미래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5년 후 삶의 만족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서는 전국 평균 7.02점이 나왔지만, 대구는 6.88점에 그쳤다. ◆ 가장 즐거운 요일은 '토요일' 전체 응답자 중 가장 행복한 요일로 토요일을 꼽은 비율(35.1%)이 가장 높았다. 다음으로 금요일(23.8%), 일요일(22.6%) 순이었다. 토요일이 가장 즐거운 이유로는 "여유를 즐길 수 있고, 늦잠을 잘 수 있다", "가족과 외식하거나, 캠핑·나들이를 할 수 있다"는 응답이 나왔다. 가장 선호되지 않은 요일은 목요일(2.6%)이었다. '월요병'을 부른다는 월요일의 경우 7%가 선호해 비교적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오히려 월요일은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인데다가, "기다리던 택배가 도착하는 날"이라는 의미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응답이 나온다. ◆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정책 대구 시민들이 행복 증진을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본 정책은 '건강·여가·문화 활동 기회 제공'(16.7%)과 '저소득층 및 취약계층 생활 안정 지원'(16.5%)이었다. 경제적 안정뿐만 아니라 삶의 질과 관련된 문화적 욕구도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연령대별로 원하는 정책은 달라졌다. 20~30대는 고용 불안정과 사회적 고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립 청년 및 미취업 청년 대상 맞춤형 상담·교육 지원에 대한 수요가 다른 연령대보다 현저히 높았다. 40대는 건강과 여가 활동 기회 제공을 1순위로 꼽았고, 50대 이상은 경제적 안정을 위한 저소득층 및 취약계층 생활 안정 지원을 요구했다. 건강한 삶을 원하면서 미래를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가족은 믿지만 그 외는 낯설다. 대구 시민의 행복은 복잡다단한 선 위에 놓여 있다. 당신이 느끼는 오늘의 행복은 몇 점일까. 그리고 그 점수를 올리기 위해, 도시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 데이터가 남긴 숙제를 잘 풀어내야 할 때다.
2026-02-26 11: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도시 구성의 필수 요소 '물길'… 상수도와 댐 건설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이 가운데 2부는 철도와 도로 같은 도시의 필수 시설이 어떻게 자리 잡아왔는지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아침에 눈을 뜬 뒤, 다시 잠에 들 때까지 우리는 얼마만큼의 물을 사용할까? 마시는 물뿐만 아니라 몸을 씻고, 요리를 하고, 옷을 세탁하는 모든 행위에 물이 소모된다. 환경부 조사 결과, 우리가 1일 사용하는 물의 양은 대략 287L에 달한다. 이 많은 물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아래에 촘촘하게 깔린 수도 시설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온다. 갓 근대적 도시로 태어난 20세기 대구의 수도 시설은 어땠을까. 기존 수도시설로는 확장된 교외까지 물을 보급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가 확장되고 있었다. 대구부는 전수 조사에 나서며 1930년 '대구부수도전도'를 그렸다. 전도에는 가창수원지에서 수도산(대봉)배수지까지 수도를 확장하겠다는 계획이 담겨있다. 이 계획을 토대로 확장 공사를 진행했고, 1933년부터 교외 지역까지도 수도가 보급됐다. 고질적인 홍수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팔거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하중도' 인근과 대구역 북쪽에 해당하는 현 침산교 인근은 매년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에 시달렸다. 이에 따라 양쪽에 제방을 쌓고, 하천 곡선을 완만하게 해 침수를 방지하고자 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도시로 물을 공급하는 정수장도 처리 용량의 한계에 부딪혔다. 주요 수자원이던 가창 정수장이 하루 동안 처리할 수 있는 물은 5천톤이었다. 1인당 하루 수돗물 사용량인 287L로 계산했을 때, 수용 가능한 인구 수는 1만7천여 명에 불과한 셈이다. 깨끗한 물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증축 공사는 필수였다. '근대적 형태' 상수도 사업의 첫 발인 댐이 등장할 때였다. 가창댐은 비슬산맥과 최정산 사이를 걸쳐 흘러 내려오는 용계천을 막아서 만들었으며, 가창 저수지라고도 불렸다. 공사를 능률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1955년 건설 사무소까지 설치됐다. 공사가 끝난 건 이듬해였다. 가창댐을 축조하면서 저수량은 200만톤, 정수량은 하루 2만톤으로 대폭 늘었다. 이조차 부족해, 추가 공사가 진행됐다. 1980년대 가창댐의 저수 용량을 910만톤으로 한차례 더 늘리고, 하루 동안 1만톤을 정수할 수 있는 냉천 신정수장까지 축조했다. 드디어 먼 교외뿐만 아니라 대구 중심지에도 깨끗한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됐다.
2026-02-19 11:30:00
[두나의 두발 산책] 다방에서 태어난 책… 예술의 아지트 다방
다방. 달달한 커피와 쌍화탕, 레트로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이 먼저 떠오른다. 젊은이보다는 옛 추억을 찾는 노인들의 장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 다방의 이미지는 지금과 달랐다. 1950년대 대구, 특히 경상감영공원과 중앙로역 인근 골목에 자리 잡았던 다방은 단순한 찻집이 아니었다. 예술인들이 숨을 고르고, 원고를 펼치고, 책의 탄생을 축하하던 문화의 현장이었다. 이들 다방은 경상감영 바로 옆, 현 수제화 골목 인근에 복작하게 모여 있었다. ◆ 시집·소설집의 데뷔 무대 1950년대 대구의 다방은 책이 처음 세상과 만나는 자리였다. 향촌동에서 예술인들이 먹고 마시고 잠을 청하던 시절, 시집과 소설집의 출판기념회는 자연스럽게 다방에서 열렸다. '모나미(Mon ami)' 다방은 프랑스어로 '나의 친구'를 뜻하는 이름처럼, 예술인들을 다정히 품어주던 장소였다. 6·25 전쟁 직후, 종군작가단인 문총구국대의 경북지대장을 맡았던 이효상도 그 중 하나다. 이후 국회의장까지 지낸 그는 이곳에서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꽃자리다방은 대구 문인의 정신적 지주인 구상 시인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공간이다. 그의 시 '꽃자리'에서 다방 이름을 땄다. 시집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표지는 그의 친구 이중섭이 그렸다. 살으리다방은 소설가 최인욱의 첫 단편집 '저류' 출판기념회가 열린 곳이다. 당시 그는 공군종군문인단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고, 공군 주관 공연 '날개 춘향전'의 각색을 맡는 등 대구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한 문인이었다. 그를 축하하기 위해 아동문학가 마해송, 소설가 최정희 등 많은 작가가 다방으로 모여들었다. 살으리다방은 축하의 장소이자, 문인들의 사랑이 오간 공간이기도 했다. 시인 이호우가 당시 이화여전 출신인 묘령의 여인에게 마음을 품고, 시인 박훈산이 묘령의 여인과 밀담을 나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 전쟁 문학의 거점 다방은 단순한 사교 공간이 아니었다. 1951년 5월, 아담다방에서는 '육군종군작가단'이 결성됐다. 이곳에서 문인들은 군가를 만들고, 전쟁의 기록을 문학으로 남기길 다짐했다.이후 종군작가단은 문학지 '전선문학'을 발간하며 전시 문학의 명맥을 이었다. 중앙로역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향수다방은 수필가 전숙희가 피란 생활 중 문을 열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에는 고향을 잃고 대구로 도망쳐 온 문인들이 마음을 달래던 곳이었다. 유치환의 '보병과 더불어', 조지훈의 '풀잎단장' 출판기념회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 단순 단골집? 특별한 의미 부여 2층 찻집이었던 세르팡다방은 김춘수 시인의 단골 공간이었다. 그는 1960년대 경북대와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며 이 다방을 자주 찾았다. 김춘수는 다방 주인을 각별히 아꼈다. 찻집을 열도록 권유한 것도 그였고, '뱀'을 뜻하는 프랑스어 '세르팡'이라는 이름 역시 직접 지어주었다. 이 주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까지 펴냈는데, 그 유명한 '수련별곡'이다. 백록다방의 구석에서 화가 이중섭은 그림을 그렸다. 구상은 생활고와 가족 문제로 지친 친구 이중섭에게 대구에 머물 것을 권유했다. 그는 대구역 인근 경복여관에 머물며 개인전을 준비했는데, 이 당시 작업 공간이 바로 백록다방이었다. 담배 은박지 위에 그린 '은지화' 역시 이곳에서 탄생했다. 은다방은 백기만 시인의 삶을 기리는 장소가 됐다. 현진건·이상화와 함께 '거화' 동인을 결성했던 백기만은 대구 근현대 문학의 기둥 역할을 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상화와 고월', '씨뿌린 사람들' 등을 펴내며 지역 문화계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뇌졸중으로 투병하던 시절, 동료 문인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은다방에 모였다. 이곳에서 금성 동인의 회고 시화전을 열었고, 그 수익금으로 금메달을 마련해 백기만 시인에게 '대구시민문화상'을 건넸다. 90년대를 거치며 다방들은 하나둘 사라졌고, 지금은 그 자리를 알리는 동판만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 골목을 다시 걸어봐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이곳에서 태어난 책과 시, 그림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어서다. 이 골목을 걷는 행위는 사라진 다방을 추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위기의 시대에도 예술을 품어냈던 골목의 힘과 도시의 기억을 되짚는 일이다.
2026-02-19 06:30:00
나만의 연하장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생성형 AI를 활용하면 손쉽게 연하장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여러 방식 가운데서도 자신의 사진을 활용해 연하장을 제작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먼저 생성형 AI를 사용하기 위해 계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지 생성이 가능한 서비스로는 챗GPT, 나노바나나 등이 있다. 연하장에 활용할 본인의 얼굴 사진도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준비를 마쳤다면 AI 채팅 입력란에 원하는 내용을 명령어로 입력한다. 아래 예시 문구와 함께 준비한 사진을 첨부하면 이미지 생성이 가능하다. 한복의 색상이나 배경, 연하장에 들어갈 문구는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예시 명령어] 첨부한 사진이 들어간 신년 연하장 이미지를 만들어줘. 인물이 붉은색 한복을 입고 웃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비춰주는 극사실주의 스타일의 사진이다. 생동감 있는 표정으로 새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물은 화면 왼쪽에 배치하고, 오른쪽에는 신년 인사 문구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넣어줘. 글자 위에는 먹으로 그린 듯한 붉은 말 그림을 은은하게 배치한다. 배경은 따뜻한 노을이 지는 풍경으로 설정한다. 움직이는 연하장도 만들 수 있다. '인물이 사진 속에서 미소를 짓도록 해달라'거나 '배경의 해가 서서히 기우는 모습을 담아달라'는 식의 추가 명령을 입력하면 된다. 다만 영상이나 애니메이션 생성 기능은 일부 서비스에서 유료 구독이 필요할 수 있다. 원하는 연하장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할수록, 또 반복적으로 수정 요청을 할수록 결과물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원하는 이미지를 표현하기가 어려울 때는 참고할 만한 연하장 예시를 제시하며 비슷하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2026-02-12 12: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도시 성장의 기폭제… 경부철도 개통과 대구역의 성장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이 가운데 2부는 철도와 도로 같은 도시의 필수 시설이 어떻게 자리 잡아왔는지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대구의 힘줄이자 핏줄이었던 경부철도의 역사를 따라가 보자. 경부철도는 1904년 12월 27일 개통했다. 1905년 지도를 보면, 대구읍성 북문 바로 앞에 대구역이 들어서 있다. 성곽 안에 머물던 방어의 도시는 이때부터 바깥으로 길을 내기 시작했다. 대구는 성 안의 도시이자,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지금의 대구역을 떠올려보자. 각종 음식점과 카페, 일행을 기다릴 휴게실과 사무실까지 갖춘 복합 시설의 형태다. 하지만 처음의 대구역은 기차를 타고 내리는 기능만 수행하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노선도 촘촘하지 않았다. 부산 초량과 대구, 대전, 영등포에만 멈추는 정도였다. 역다운 모습을 갖춘 건 1913년이다. 2층 규모의 목조 르네상스풍 역사가 완공됐고, 2년 뒤에는 대구역과 경상감영을 잇는 중앙로가 열렸다. 인도 폭 4m, 차도 6m로 당시 대구에서 가장 넓은 길이었다. 중앙로가 생기자, 지도 속 대구역 일대는 눈에 띄게 빽빽해졌다. 부산과 수도권을 잇는 철도의 중간 지점. 대구역 앞은 자연스레 '만남의 광장'이 됐다. 숙소를 찾는 이들, 한 끼를 해결하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기차를 타지 않는 이들도 이곳을 약속 장소로 삼았고, 각종 시민 집회와 모임 역시 대구역 광장을 무대로 삼았다. 하지만 도시가 커지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대구역 북쪽으로 도시를 넓혀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고, 역사는 도시 확장의 장애물이 됐다. 남북을 이을 해법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1966년, 대구시는 대구역을 고층화하고 고가교로 오가게 하는 계획을 내놓는다. 철길을 걷어낸 자리에 107동의 상가를 지어, 역 주변을 더 번화롭게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대구역 앞 광장에 지하도로를 내 남북 소통을 실현했다. "대구역 광장에서 보자"는 말이 지금은 쏙 들어간 이유기도 하다. 대구역과 대구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 경상북도 상품진열소 등 주요 건물을 잇던 넓은 공간은 쪼개졌고, 사람들이 모여 설 만한 공간은 사라졌다. 1969년 동대구역이 문을 열며 승객이 분산되자, 광장의 역할은 다시 한 번 축소돼 지금의 형태가 됐다. (2부 2회에 계속)
2026-02-12 12:30:00
[두나의 두발 산책] 포성 속에서도 울린 노래와 문학… 향촌동이 품은 전쟁 속 문화사
전쟁은 예술을 멈추지 못했다. 6·25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진 예술인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대구 향촌동 골목에 모였다. 포성이 가까웠던 시기에도 이 좁은 골목에서는 시가 쓰였고, 음악이 울렸으며, 무대가 올랐다. 피란지 대구에서 예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향촌동 골목에 남은 흔적을 따라가 본다. ◆ 피란지 향촌동에 모인 문인들 경상감영공원 입구에서 쭉 뻗은 골목으로 발을 구르면, 2층 높이의 상가 건물이 늘어진 향촌동에 가닿는다. 6.25 전쟁 전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이 좁은 골목은 예술이 간신히 숨을 붙일 수 있던 공간이었다. 줄지어 있는 막걸리집, 다방을 오가며 작품을 구상했고, 술집과 여관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듯 작품 이야기를 나눴다. 시대 상황과 맞물려, 문인들은 종군활동과 창작을 병행했다. 시인 구상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원에서 대구로 피란해 육군종군작가단 부단장을 맡았다. 전쟁을 기록하는 임무와, 시를 쓰는 삶이 동시에 그의 어깨 위에 놓였다. 구상이 자주 찾던 곳은 골목 한가운데 자리한 '대지바'(북성로 104-11)였다. 바로 옆이었던 '화월여관'은 그가 머물던 숙소였다. 피란 예술인들은 이 일대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전쟁 속에서도 써낼 수 있는 언어를 고민했다. 대지바가 있던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내부는 당시 예술 활동의 흔적을 되짚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구상과 함께 종군 작가로 활동한 이들은 당대 문단의 중심인물들이었다. '나그네' 박목월 시인, 소설 '역마'의 김동리 등 유명 예술인들이 구상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전쟁 기록을 남기거나 애국심을 진작시킬 수 있는 작품, 혹은 전쟁이 벌어지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향을 담은 글들이 태어났다. ◆ 포성 사이로 흐른 음악 향촌동에서는 문학만큼이나 음악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녹향 음악감상실(서성로 14길 100)은 그 상징적인 공간이다. 녹향은 광복 직후인 1946년, 이창수 선생이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을 모아 만든 예육회에서 출발했다. 축음기 한 대와 레코드 500장.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음악을 향한 갈증은 그보다 컸다. 이곳은 이내 예술인들이 모여드는 사랑방이 됐고, 시인 양명문은 이곳에서 시 '명태'를 쓰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장소는 바뀌었지만, 녹향의 이름은 남아 있다. 향촌문화관 지하에 마련된 공간에는 스피커와 안락한 의자가 놓여 있다. 관람객들은 신청곡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음악을 듣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귀를 기울이는 방문객의 마음가짐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51년 문을 연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경상감영 1길 62-9)는 전쟁 속에서도 음악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전선이 현풍 앞까지 내려온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고전 음악을 듣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몸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작은 난로 하나뿐이었지만, 좁은 방 안에는 피아노 선율이 가득 찼다. 이 풍경을 본 외신은 르네상스를 "폐허 속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리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향촌문화관 인근 단층 주택건물의 벽에 붙은 터 표식만이 남아있다. 향촌동에는 음반 제작의 중심 역할을 한 오리엔트레코드사도 있었다. 악기점을 운영하던 이병주가 설립한 이 회사는, 전쟁으로 서울의 레코드사들이 무너진 사이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전쟁을 피해 내려온 작곡가와 작사가들이 이곳에 모였다.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90장의 음반과 170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전우야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노래는 전쟁으로 상처 입은 민중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 피란지에서 다시 오른 막 일제강점기 '키네마구락부'로 시작해, 국립 중앙극장의 칭호까지 얻게된 한일극장도 향촌동 인근에서 태동했다. 한일극장(당시 문화극장)은 연극인들의 보금자리로 활용됐다. 1.4 후퇴 당시 대구로 내려온 극단 '신협'이 대표적이다. 무대에는 우리 고유의 서사를 담은 창작극부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까지 올랐다. '자명고', '마의태자', '맹진사댁 경사'가 상연됐고, '햄릿'은 유독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전쟁 통에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에 대한 선호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앞다투어 한일극장을 찾았다. 특히 햄릿은 매번 관객들이 만석을 이룰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53년 서울의 국립극장이 한일극장으로 이전하며, 극장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흔히 대구는 전쟁의 피해를 비껴간 '무풍지대'로 기억된다. 그러나 전선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대구는 결코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예술인들이 모여든 향촌동 골목에서는 문학과 음악, 연극이 새로이 피어났다. 전쟁 속에서 탄생한 이 문화적 에너지는 피란지의 임시 산물이 아니라, 오늘날 대구 문화의 토대가 됐다.
2026-02-12 12:30:00
세뱃돈, 얼마가 적당할까… AI가 본 명절 세뱃돈 기준
명절은 일상에서 벗어나 가족과 시간을 나누는 소중한 순간이다. 그러나 반가움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른바 '명절 스트레스'다. 장시간 정체되는 도로, 차례 준비, 이어지는 잔소리까지. 그중에서도 해마다 고민을 키우는 건 단연 '용돈' 문제다. 물가가 올랐으니 용돈 액수도 달라져야 할까. AI에게 물어봤다. 주요 생성형 AI 무료 모델을 대상으로 동일한 조건에서 진행했다. 사용한 모델은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오픈AI의 챗GPT(GPT), 중국계 모델 딥시크(DeepSeek), xAI가 개발한 그록(Grok)이다. 질문에 설정한 '나'의 조건은 고등학생 자녀를 둔 50대 가장이다. 명절을 맞아 조카들과 부모님에게 용돈을 건네는 상황을 가정했다. 조카의 경우 영유아(0~6세)부터 중학생까지 각 연령대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금액을 물었다. 부모님은 70대로 설정했다. 부모에게 각각 용돈을 드리는 경우가 아니라, 한 번에 함께 드린다는 조건을 붙였다. ◆ AI가 본 명절 용돈의 공통분모 네 개 AI 모두 연령이 올라갈수록 용돈도 단계적으로 상승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영유아는 화폐 가치를 알지 못하다는 점에서 1만~5만 원 수준의 상징적 금액이 적당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초등학생부터는 차이가 벌어졌다. 또래와의 비교가 시작되는 만큼 3만~5만 원 선에서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중학생은 사실상 '어린이 용돈'의 마지노선으로, 5만~10만원이 기준선으로 제시됐다. ◆ 입학 앞두면 용돈 올려야 하나? 입학 시기에 웃돈을 얹어야 하는지를 두고는 AI 간 의견이 갈렸다. 챗GPT·제미나이·딥시크는 평소보다 2만~5만 원 정도 더 챙겨주는 게 자연스럽다고 봤다. 이들은 입을 모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조카에게는 5만원,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에게는 10만원 정도를 추천했다. 반면 그록은 입학 자체를 용돈 인상의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고 봤다. 대신 입학 이후 학교생활 전반에 걸쳐 일정한 수준의 용돈을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 금액보다 중요한 '기준'. AI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건 절대 금액보다 기준이었다. 자녀를 둔 50대 가장이라는 조건을 감안해, 무리한 지출은 피해야 한다는 점을 여러 모델이 짚었다. 특히 제미나이는 "자녀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지출해야 하는 교육비가 상당한 가운데, 체면을 차리기 위해 과도한 지출을 하는 건 위험하다"며 "내가 받은 만큼, 혹은 내 자녀가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상호주의 원칙을 지키는 것도 좋은 대책이다"고 했다. 딥시크는 한발 더 나아가, 조카가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인지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봤다. 고등학생 자녀와 상의해 또래 감각에 맞는 선을 정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책으로 꼽혔다. ◆ 부모님 용돈은 네 개 생성형 AI는 부모님께 드리는 명절 용돈으로 30만~50만 원을 공통된 적정선으로 제시했다. 물가 상승과 자녀 세대의 부담을 함께 고려했을 때, 이 범위가 도리와 현실 사이의 균형점이라는 판단이다. 부모님에게 명절 용돈은 단순한 생활비가 아니라 '자식 농사 성적표'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AI들은 공통적으로 현금에 선물을 더하는 방식을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다. 부담이 될 경우 금액을 낮추는 대신, 정성이 담긴 선물을 곁들이는 게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 실제 응답은… "조카 5만원, 부모님 30만원" 실제 사람들의 인식도 AI의 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은 지난해 설 명절을 한 주 앞두고 3일간 이용자를 대상으로 '설날 용돈 적정 금액'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카에게 주는 용돈으로 가장 적절하다고 꼽힌 금액은 5만 원이었다. 전체 응답자의 38%가 5만 원을 선택해 1위를 차지했다. 이어 10만 원(28%), 3만 원(14%) 순으로 나타났다. 부모님이나 웃어른께 드리는 용돈은 30만 원이 적당하다는 응답이 31%로 가장 많았고, 이어 50만 원(22%), 20만 원(20%) 순으로 집계됐다. AI들의 답변은 금액보다 기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얼마를 주느냐보다, 매년 감당할 수 있는 선을 정해두는 게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실제 조사에서도 명절 용돈은 일정 수준에 머무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명절마다 부담을 키우기보다는, 감당 가능한 범위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쪽이 현실적이다. 따라서 명절 용돈은 부담스럽지 않은 기준을 세워 두고, 그 선을 지키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 부담스러운 액수의 봉투보다, 평소의 연락과 방문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 더 중요하다는 점도 함께 짚을 필요가 있다.
2026-02-12 11:30:00
설과 추석을 일주일 앞두고 대구 쪽방상담소는 분주해진다. 쪽방 주민들을 위한 합동 차례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명절을 혼자 보내는 1인 가구도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상담소 직원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차례상을 차린다. 쪽방 주민 다수는 1인 가구다. 함께 시간을 보낼 가족이나 친지가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 명절일수록 외로움이 커진다. 이웃들마저 고향으로 떠나면 안부를 확인할 사람도 없다. 명절 전후로 고립이 심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담소는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합동 차례다. 행사는 어느덧 21년째를 맞았다. 장소는 해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행사를 거르지 않았다. 처음엔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50명 안팎의 주민이 모이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심리치료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된 건강 수업이 끝나면 본격적인 차례가 시작된다. 전과 나물, 탕국 등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은 빠짐없이 준비한다. 주민들은 여느 가정의 차례처럼 절을 올리고 술을 따른다. 의식이 끝나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며 근황을 전한다. 쪽방촌 주민들에게 합동 차례는 이제 없으면 섭섭한 존재가 됐다. 명절이 다가오면 상담소로 "언제 차례를 지내느냐"는 문의가 먼저 들어온다. 21년 동안 행사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명절의 형식과 분위기를 지키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노인복지시설과 노숙인 시설에 합동 차례 비용을 지원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차례상을 차리기 어려운 경우에는 명절 음식을 포장해 전달하기도 한다. 대구쪽방상담소 관계자는 "1인 가구가 늘면서 설 분위기를 느끼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명절에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를 혼자 사는 분들도 함께 나누길 바란다. 여력이 되는 한 행사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가정에서 즐기던 명절 오락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난 2018년부터 6년간 명절 연휴 기간 편의점 화투 매출을 조사한 결과, 국민 오락이던 화투 판매량은 2022년을 제외하고 매년 감소했다. 가족이 모여 놀이를 즐기기보다, 각자 게임이나 영화, 휴대전화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늘어난 영향이다. 대신 명절 오락은 집 밖에서 이어지고 있다. 공공기관은 명절 기간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국립대구박물관은 널뛰기와 활쏘기, 제기차기 등 민속놀이를 준비했고, 정월대보름을 맞아 달서구 본리노인종합사회복지관은 윷놀이 청백전을 연다.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해체됐지만, 명절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이는 장소와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함께 밥을 먹고 절을 올리며 시간을 나누는 순간 속에서, 명절은 형태를 바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2026-02-12 11:30:00
[커버스토리]설날 연하장 변천사… '축하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잘 구겨지지 않는 빳빳한 종이에 또박또박 덕담을 적는다.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는 염원을 담아. 새해가 되면 서로 주고받던 '연하장'의 풍경이었다. 그해를 상징하는 동물 그림이 인쇄된 카드에 사인을 남기거나, 손수 그림을 그려 보내기도 했다. 연하장은 처음부터 누구나 주고받는 대중적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왕에게 올리는 새해 인사의 수단으로 사용됐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도입부와 임금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 송축으로 마무리되는 엄격한 형식을 갖춘 일종의 의례 문서였다. 연하장이 대중화된 것은 근대식 우편 제도가 자리 잡으면서부터다. 1900년대 초 연하장은 우체국을 통해 각 가정으로 배달됐다. 그 인기가 대단해, 설날은 '우편배달부가 가장 바쁜 날'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지금은 널리 사용하는 '근하신년'은 근대 일제강점기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새해를 축하한다는 일본식 한자어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유입됐다. 한정된 연하장 지면에 네 글자만 적어도 새해의 안녕과 행복을 전할 수 있어, 간결하면서도 실용적인 축하 인사로 널리 쓰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연하장은 점점 자취를 감췄다. 새해가 되면 문구점마다 진열되던 각양각색의 연하장도 보기 힘들어졌다. 연하장은 형태를 바꿨을 뿐, 카카오톡과 문자 메시지, 이미지 파일로 새해 인사가 오간다. 가득 차던 우편함은 사라지고, 연신 울리는 메신저 알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붉은 말의 해를 맞아 붉게 칠한 말과 떠오르는 해를 담은 이미지가 공유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얼굴이나 부부 사진을 함께 넣기도 한다. 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이 결실을 보길 바랍니다',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와 같은 짧은 인사말을 덧붙인다. AI로 움직이는 연하장을 만드는 '꿀팁'도 공유되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자주 뵙지 못하는 친척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영상 연하장을 만들 수 있다. 한복을 입은 사진을 합성해 영상을 만들고, 목소리도 AI로 생성해 붙인다. 발음이 또렷하지 않은 영유아의 목소리나,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의 인사도 대신 전할 수 있어 호응을 얻고 있다. 새해의 복을 비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꾹꾹 눌러 적던 네 글자는 이제 화면 위에서 깜빡인다. 방식은 계속 바뀌겠지만, 새해를 맞아 안부를 묻고 복을 비는 행위만큼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26-02-12 11:30:00
민족 대명절인 '설날'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몸을 씻고 한복을 차려입는다. 막히는 도로를 뚫고 고향에 도착하면 반가운 가족들이 맞아준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덕담을 나누고 차례상 앞에서 절을 하고, 떡국을 나눠 먹는다. 윷놀이와 화투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설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몇십 년 사이 전통적인 설날 풍경은 보기 어려워졌다. 명절에 꼭 고향으로 향하지 않아도 되고, 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는 연휴에도 일터로 향하고, 누군가는 여행지에서 설을 보낸다. 젊은 층들은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며 웃고, 주부들은 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며 한시름을 놓았다. 전통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이를 보완하듯 합동 차례와 공동 행사가 이어지고, 공공기관은 집 밖에서 명절놀이의 장을 연다. 전통적 의미의 명절은 느슨해졌지만, 설이라는 시간 자체는 여전히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기술도 힘을 보탰다. 연하장은 종이를 떠나 메시지와 이미지로 바뀌었고, 덕담은 파일 형태로 오간다. AI로 복원된 얼굴과 목소리가 영정사진과 지방을 대신한다. 설은 사라지지 않았다. 각자의 삶의 방식에 맞춰 형태를 바꾼 채 명맥을 잇고 있다.
2026-02-12 11:30:00
[커버스토리] 달라진 설 명절 풍속도 … AI 복원한 조상들 새해 덕담
예전 명절 차례상에는 가족들이 모여 돌아가신 조상들의 이름과 신위를 적어 모시는 지방(紙榜)이나 영정사진 앞에서 절을 올렸다.최근에는 AI 복원 기술로 아이들은 AI가 생성한 이미지와 동영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생생한 목소리로 새해 덕담을 듣는 등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달라진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론 전통적인 차례를 지내진 않지만 가족들이 다함께 모여 외식을 하거나 긴 연휴동안 해외여행을 떠나고 있다. ◆ 흐릿한 사진 이제 그만… 활짝 웃는 모습 복원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어요. 이번 설에는 납골당에 사진을 넣어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차례상에 오르는 사진도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있다. SNS에 부모님 사진과 함께 사연을 올리면, 이를 본 누리꾼들이 사진 복원에 나서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마스크에 가려 턱선이 보이지 않고, 편안한 일상복 차림이던 아버지의 사진은 어느새 단정한 정장을 입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하는 모습, "딸이 보고 싶다"는 음성이 담긴 영상까지 만들어진다. 명절을 앞두고 SNS를 통한 사진 복원 요청은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AI를 활용한 사진 복원이 손쉬워지면서 나타난 새로운 모습이다. AI 활용이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도 SNS를 매개로, 기술에 능숙한 젊은 세대의 도움을 받아 부모님의 모습을 복원한다. 흐릿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얼굴은, 그렇게 다시 또렷해지고 있다. ◆ 줄 서는 간식 들고 귀성… '유행'된 설 선물 전통적인 의미의 설을 쇠지 않으면서, 귀성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스팸이나 샴푸 같은 전통적인 명절 선물세트는 MZ세대 귀성객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대신 부모가 평소 접하기 어려운 '요즘 유행' 제품을 들고 고향을 찾는 모습이 늘고 있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이른바 '두쫀쿠(두바이쫀득쿠키)'다. 줄을 서야 맛볼 수 있는 간식으로 알려지면서, 설을 맞아 이를 사 들고 귀성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선아(27) 씨는 "부모님은 우리가 사다 드리지 않으면 직접 사 드시지 않을 것 같다"며 "이럴 때라도 새로운 걸 경험해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날짜에 맞춰 미리 예약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주변에도 설 맞이해서 두쫀쿠를 사 가려는 친구들이 많아 예약은 필수"라고 덧붙였다. ◆명절 대세 된 '차례상 대행' 경산에 거주하는 한동호(40,가명)씨는 2년 전부터 명절 때마다 '차례상 대행 업체'를 이용한다. 한 씨는 "아내가 제사 음식 준비에 힘겨워해 처음 대행업체를 이용할 때는 집안 어르신들의 반대가 심했다"며 하지만 "음식 품질이 만족스럽고 가격도 합리적이라 이제 어르신들도 만족스러워하신다"고 했다. 명절 음식에 부담을 느껴온 MZ세대 젊은 부부들은 "빨리 차례 지내고 해외여행 가자" 며 대행 서비스를 찾고 있다. 최근들어 명절 연휴를 '휴가'로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그래도 차례를 안 지내는 것보단 대행 업체를 이용하더라도 지내는 게 낫다"며 이용하는 고객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strong〉◆ 명절 대신 일터로〈/strong〉 "차라리 일하고, 공부하는 게 낫죠. 설이라고 특별할 게 있나요". 이번 설에 박한별(가명·25) 씨는 설 당일에만 고향인 부산에 가기로 했다. 이번 설에만 특별히 '혼설족'을 택한 건 아니다. 대학에 진학하며 본가를 떠나온 뒤, 명절마다 반복된 일이었다. 설 명절에 집에 내려가지 않는 한별씨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즉답했다. "설이라고 특별한 건 없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마다 집 근처 화장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 연휴 때도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왜 대타를 구하지 않았을까. 그는 어렵게 잡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답했다. 〈strong〉◆ 모이지 않는 집, 가벼워진 설〈/strong〉 '자취생'이 아닌 청년들은 다를까. 본가에 머무르고 있는 '캥거루족' 청년들도 달라진 설 분위기를 체감했다. 황예은(26) 씨의 명절도 한별씨와 마찬가지다. 황씨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명절 당일에만 잠시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큰집에 가서 다 같이 식사하고, 안부 정도만 묻다가 돌아올 예정이다. 분위기가 크게 바뀐 것은 10년 전쯤부터다. "증조할머니가 계실 때는 몇십 명씩 모였다. 제사도 지냈다. 외가, 친가도 하루씩 방문하느라 명절이 모자랐다. 이제는 이모, 삼촌 정도만 모이니 명절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명절보다는 가족사, 개인적인 기념일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로 전환되는 모양새다. "차라리 다른 기념일에 더 많은 가족이 모인다. 조부모님 생신 때나, 칠순, 팔순. 조카들이 태어날 때가 더 많이 모이는 거 같다". 가족 간의 끈끈함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조금 반가운 점도 있다. 설 밥상의 단골 주제인 '정치' 논쟁에서 떨어질 수 있게 됐다. 〈strong〉◆ 차례 대신 외식〈/strong〉 신만숙(54) 씨는 올 명절에는 차례상을 차리지 않기로 했다. 제사를 지내지 않은 지 십 년이 넘었다. 세 명의 며느리들은 각각 튀김, 나물, 생선 등을 나눠 제사 음식을 준비해 왔는데, '번거롭다'는 큰 형님의 선언 이후 제사는 몽땅 사라졌다. 그래도 명절 분위기를 내고 싶어 매년 조금씩 제사 음식을 만들어왔다.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가족 모두 옹기종기 모여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쳐 나눠 먹었다. 이제는 그것도 '번거롭다'는 자녀들의 툴툴거림에 없애기로 했다. 대신 가족들이 모여 외식을 하기로 했다. 신씨 주변에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주부들이 많다. 허리를 굽혀 제사 음식을 차릴 바에야 일본, 중국 등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 신씨 가족들도 이번 연휴에 경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래도 명절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흩어져 지내는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어서다. "가족들이 다 모이기만 해도 명절 분위기가 나요. 굳이 장을 보고 요리를 하지 않더라도, 얼굴만 봐도 좋아요".
2026-02-12 11:3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고향 향한 사랑의 힘… 대구경북 어땠나
수도권으로 사람은 몰리고 지역은 점점 쇠락해진다. 조급해진 지자체는 묘수를 냈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기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고향의 향수를 담은 답례품도 준비했다. 그렇다면 대구·경북을 향한 출향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컸을까. 데이터를 통해 그 깊이를 들여다봤다. ◆ 지방 살림 도우미 '고향사랑기부제' 고향사랑기부제는 개인이 자신이 거주하지 않는 지자체에 기부하면, 해당 지자체가 이를 지역 살림에 활용하는 제도다. 기부자는 세액공제와 함께 지역 특산물로 구성된 답례품을 받는다. 지방재정 확충과 기부 문화 확산을 동시에 노린 제도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모인 기부금은 879억3천만원, 기부 건수는 77만4천 건이다. 시행 첫해인 2023년과 비교해 금액은 35%, 건수는 47% 늘었다. 특히 비수도권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비수도권 지자체 1곳당 평균 모금액은 4억5천만원으로, 수도권(1억4천만원)의 3.3배 수준이다. 재정 여건이 열악한 지역을 돕겠다는 제도 취지가 일정 부분 성과를 낸 셈이다. 기부금의 90% 이상은 세액공제 한도인 10만원에 집중됐다. 소액 기부를 중심으로 한 참여 구조가 정착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 대구 10개 기관 8억9천만원… 기부 지형 어땠나 대구시 본청과 9개 구·군이 2024년 한 해 동안 모은 기부금은 총 8억9천만원이다. 군위군이 2억100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대구시 본청(1억5천10만원), 달성군(1억1천100만원), 달서구(8천500만원)가 뒤를 이었다. 기부자의 주력 연령대는 30대였다. 전체 모금액의 61%는 11~12월에 집중돼 연말 쏠림 현상도 확인됐다. ◆ 내부 결속+외부 유입으로 만든 기부 구조 기부자 주소지를 분석한 결과, 대구 시민들의 '지역 내 상호 기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구에 거주하면서 다른 구·군에 기부한 금액은 1억7천294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경기(1억6천만원), 서울(1억5천747만원), 경북(1억5천444만원) 순이었다. 외부 기부금은 규모가 큰 자치구로 몰렸다. 달서구는 전체 기부의 48%가 서울·경기에서 유입됐고, 북구 역시 수도권 비중이 44%에 달했다. 대구 시민들의 '자기 도시 사랑'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남구였다. 전체 기부자의 42.4%가 대구 내 다른 구·군 거주자였다. 반면 수성구는 경북 거주 기부자 비중이 27.9%로 가장 높아, 대구보다 인접 지역의 기부자 비중이 더 컸다. 대구 시민들이 외부로 기부할 경우, 절반은 경상북도로 향했다. 이는 부산, 인천 등 다른 광역시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 먹거리 중심 답례품 전략 대구 본청과 9개 구·군이 답례품 구매에 쓴 비용은 총 2억512만원이다. 전체 모금액의 23% 수준이다. 가장 강세를 보인 품목은 가공식품과 밀키트였다. 동인동 찜갈비(동구), 신대장떡볶이(북구) 등 지역 유명 음식을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제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미식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영향을 준 셈이다. 전통적인 인기 품목은 한우와 쌀이었다. 군위군의 '현토미'와 한우, 서구 '풍국쌀' 등은 지역 대표 농산물로서 안정적인 수요를 유지했다. ◆ 집행은 제자리… 체감 효과는 미흡 모금 규모와 달리 기금 사용은 아직 소극적이다. 10개 기관 중 사용 내용이 있는 곳은 2곳뿐이다. 수성구와 군위군이 홍보비로 각각 850만원, 1천700만원을 사용한 것이 전부다. 나머지 기금은 전액 예치 중이다. 지정기부를 통한 집행 사례도 아직 없다. 지정기부는 기부자가 특정 사업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기부의 체감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다. 전남 곡성군의 '소아과 선물', 충남 청양군의 '초·중·고 탁구부 후원'처럼 목표액을 조기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는 것과 대조적이다. ◆ 대구형 전략 필요할 때 데이터는 고향사랑기부제가 '대규모 후원'보다 '일상적 참여'에 가까운 제도임을 보여준다. 고액 기부를 노리기보다, 소액 기부를 반복하게 만드는 구조 설계가 관건이다. 10만원 기부가 정착된 만큼, 참여 장벽을 낮추는 간편한 기부 동선과 직관적인 혜택 안내가 중요하다. 기부자의 상당수가 인접 지역에 분포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는 대구가 전국 단위 경쟁보다, 출향인을 중심으로 한 기부 전략에 집중해야 함을 시사한다. 단순한 특산물 나열을 넘어, 지역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답례품 기획이 요구된다. 기부자의 상당수가 인접 지역에 분포한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대구가 전국 단위 경쟁보다, 출향인을 중심으로 한 기부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단순한 특산물 나열이 아니라, 지역의 서사와 기억을 결합한 답례품 기획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부 이후가 중요하다. 현재 대다수 기금이 예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만큼, 기부금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체감할 수 있는 장치가 부족하다. 지정기부 사업을 통해 기부 목적과 사용처를 명확히 제시하면, 일회성 참여를 지속적인 기부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향사랑기부제가 출범한 지 4년째에 접어들었다. 이제 제도는 정착의 문턱에 서 있다. 고향사랑기부제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지, 지역 재정을 떠받치는 제도로 자리 잡을지는 지자체의 기획에 달려 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촘촘한 전략 설계가 필요한 때다.
2026-02-12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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