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환 기자 rehwa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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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삶 선물한 장기 기증자를 그리며'…고인의 숭고한 뜻 되새겨

    '새 삶 선물한 장기 기증자를 그리며'…고인의 숭고한 뜻 되새겨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 12일 서울 라움아트센터에서 '2025년 생명나눔 기증자 기념행사'를 개최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아픔 속에서 생명나눔을 결정한 기증자와 유족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올해로 12회를 맞은 생명나눔 기념행사는 누군가에게 새 삶을 선물하고 떠난 기증자를 추모하고, 남겨진 가족의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 기억하는 자리다. 행사에는 기증자 유가족 78명을 비롯해 이형훈 보건복지부 제2차관, 장호연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장,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생명을 잇다'를 주제로 ▷유공자 포상 ▷의료진 감사 편지 낭독 ▷기증자 감사패 전달 ▷유가족과 수혜자, 의료진의 토크콘서트 등으로 진행됐다. 특히 토크콘서트에서는 5살 딸을 장기기증한 전기섭 씨가 참여해 '기증 후 삶의 변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전 씨는 "어리고 소중한 딸이라 떠나보내기 어려웠지만, 어디선가 소율이의 심장이 뛰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직 함께 있는 것 같아 위안이 된다"며 "심장과 두 신장으로 아픈 아이 3명이 새 삶을 살게 됐다. 비록 만날 수는 없지만, 소율이처럼 사랑받으며 건강히 자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생명나눔이라는 숭고한 결정을 내려주신 기증자와 유가족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며 "정부, 의료기관, 학·협회와 긴밀히 협력해 기증자 예우와 생명나눔 문화 확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2025-09-15 12:56:48

  • 동료 구하려다 뇌사…시각장애 5남매 아빠 장기기증 결정

    동료 구하려다 뇌사…시각장애 5남매 아빠 장기기증 결정

    맨홀 안에서 쓰러진 동료를 구하려다 뇌사에 빠진 40대 시각장애인 남성이 장기기증으로 3명에게 새 삶을 선물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 7월 14일 인하대학교병원에서 이용호(48) 씨가 간과 양쪽 신장을 세 명에게 각각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11일 밝혔다. 오·폐수 관로 조사업체 대표인 이 씨는 같은 달 6일 인천시 계양구의 한 도로 맨홀에서 쓰러졌다. 당시 그는 유해가스에 중독돼 맨홀 안에서 쓰러진 일용직 근로자를 구하러 갔다가 함께 의식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루 뒤 구조됐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뇌사 상태에 빠졌다. 대구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 씨는 선천적으로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이었다. 몸이 불편함에도 늘 아픈 사람을 먼저 살폈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 씨는 지인의 소개로 결혼한 필리핀 아내와의 사이에 5남매를 뒀다. 막내는 생후 4개월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집안일을 도맡고 아이들과 놀아주던 자상한 남편이자 친구 같은 아버지였다. 이 씨의 가족은 "아빠가 남긴 숭고한 생명나눔을 아이들이 자랑스럽게 기억하길 바란다"며 기증을 결정했다. 이 씨의 누나 이정화 씨는 "용호야, 너가 지키려고 했던 가족들을 우리가 함께 지키면서 살 테니까. 너도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잘 지켜봐 줘. 내 동생 사랑해"라고 말했다. 아내 이시나 씨는 "여보, 아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테니 우리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할게"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시각장애를 갖고 계셨음에도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다가, 동료를 구하려다 안타까운 일을 당하셨다"며 "어린 다섯 자녀를 남기고 떠난 기증자의 뜻을 기억하며, 유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25-09-11 14:35:52

  • 서울광장에서 장기기증의 날 행사 8일 개최…14일까지 생명나눔 주간

    서울광장에서 장기기증의 날 행사 8일 개최…14일까지 생명나눔 주간

    서울시가 주최하고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가 주관하는 '제12회 서울시 장기기증의 날 기념행사'가 오는 8일 서울광장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는 '생명나눔, 희망 잇는 서울광장'을 주제로, 장기기증의 가치를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5일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따르면 서울시는 2014년 '장기등 기증등록 장려에 관한 조례'를 통해 9월 9일을 장기기증의 날로 지정해 매년 기증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이번 기념식에는 뇌사 장기기증자 유가족들에게 '생명의 별' 기념패를 전달한다. 장기이식으로 새 삶을 얻은 이식인들도 무대에 올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또 성우 김보민 씨가 사회를 맡고,지난 2월 아내에게 신장을 기증한 드러머 리노 씨가 축하 공연을 펼친다. 행사 후에는 장기기증 희망등록부터 감사 메시지 작성, 퀴즈 풀이, 초록리본 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민 참여형으로 진행된다. 아울러 오는 8일부터 14일까지는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 생명나눔 주간으로 운영된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이 기간 생명나눔 희망의 씨앗 캠페인을 진행하며, 장기기증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기증 희망등록 참여를 독려할 예정이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캠페인에는 지자체 125곳과 공공기관 10곳, 의료기관 42곳 등 모두 177곳 기관이 참여한다. 각 기관은 장기기증 희망등록 상담부터 홍보물 배포 등 대국민 홍보 활동을 펼친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생명나눔 주간 희망의 씨앗 캠페인을 통해 국민 모두가 장기·인체조직기증에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2025-09-05 13:39:17

  • "너무나 착하게 살아왔다" 50대 여성, 장기기증으로 3명 살리고 하늘의 별 됐다

    장애복지센터에서 봉사를 실천해 온 50대 여성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장기를 기증하면서 3명을 살리고 하늘의 별이 됐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 7월 21일 제주대학교병원에서 김미란(52) 씨가 뇌사 장기기증으로 간과 신장 양측을 나눴다고 4일 밝혔다. 김 씨는 같은 달 8일 지인과 식사를 마치고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병원으로 이송됐고 의료진의 적극적인 치료에도 의식을 회복하고 뇌사 상태에 빠졌다. 10년 전에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했던 김 씨는 평소에 가족에게도 생명나눔의 뜻을 얘기했다고 한다. 김 씨의 가족들은 "너무나 착하게 살아왔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다른 생명을 살리는 좋은 일을 하길 원했다. 기증을 통해 몸의 일부라도 누군가의 몸속에 살아 숨 쉬면 좋겠다"며 기증을 결정한 배경을 설명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서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난 김 씨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농협에서 일했고 결혼하면서 아들과 딸을 키우다 최근에는 남편과 함께 식당을 운영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주말이면 장애 복지센터에서 봉사를 했다. 김 씨의 남편 이동엽 씨는 "내 인생의 스승이었던 여보. 결혼하고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며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줘서 고마워. 아이들과 행복하게 잘 지낼게. 하늘에서 우리 아이들 잘 지켜봐 줘. 행복하게 잘 지내고 사랑해"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장기기증을 실천해 주신 기증자 김미란 님과 유가족분들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에 감사드린다"며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기적과 같은 일이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고 밝게 밝히는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5-09-04 16:32:33

  •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6>(끝)이원화된 재난 제도 개선…현장 전문성 강화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6>(끝)이원화된 재난 제도 개선…현장 전문성 강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우리나라가 재난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분기점이었다. 이후 30년간 제도적 보완으로 안전망은 두터워졌지만, 재난관리 체계의 개선 필요성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기후변화로 자연재난의 위력이 거세지고 이태원 참사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사회재난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선 대응 기관의 역할이 겹치며 지휘 체계가 흔들리고 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이재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상화된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선 새로운 로드맵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strong〉◆ 재난 관련 제도 개선 필요〈/strong〉 먼저 특별재난지역 선포 요건이 모호한 현행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특별재난지역은 피해 복구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지만, 사회재난은 행정적 판단에 좌우돼 선포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반면 자연재난은 피해액 등 정량 기준이 선포 요건으로 명확히 규정돼 있다. 이영주 경일대 소방방재학부 교수는 "사회재난은 새롭게 발생하는 것들이 많아 유형화하는 것부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만 그간 발생한 사례만이라도 추려, 어느 정도의 피해가 발생했을 때 이를 '중대한 재난'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와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으로 나눠진 현 지휘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재난 대응 시 역할이 중첩됨에 따라 발생하는 혼선을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영주 교수는 "중대본은 재난 관리를 총괄하고 중수본은 현장 대응을 맡는 구조라 위계상 문제는 없다. 그러나 중대본이 현장까지 가동되는 경우, 중수본 본부장이나 해당 부처 장관의 역할이 모호해질 수 있다. 중대본이 현장까지 지휘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중수본을 최소화하고 중대본 중심으로 운영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고 제언했다. 재난 발생 후 이원화된 심리지원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현재 심리지원은 행안부의 중앙재난심리회복지원단과 복지부 산하 통합심리지원단이 각각 운영하며, 유사한 기능을 병행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당시 무안공항 1층에는 통합심리지원단이, 2층에는 중앙재난심리회복지원단이 따로 배치돼 중복 대응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배재현 국회입법조사처 행정안전팀장은 "행안부와 복지부가 각기 법적 근거를 내세워 심리지원단을 운영하지만, 무안공항 사례를 보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며 "재난 관리 주무 부처인 행안부를 중심에 두고 규모와 유형에 따라 복지부가 협력하는 구조로 바꿀 필요가 있다. 또 이를 위해 각 부처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는 프로토콜(규칙과 절차 등 약속 체계)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재난 피해의 빠른 회복을 위해 사전에 복구 계획을 그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겪은 일본은 국토교통성을 중심으로 방재대책은 물론, 재난 이후 복구까지 고려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대응하고 있다. 이영주 교수는 "재난은 한 번 발생하고 빠르게 회복하지 않으면 또 다른 재난으로 이어지면서 피해가 커진다. 우리나라에서 빈도가 높았던 재난의 피해를 파악하고, 복구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놓으면 빠른 수습을 기대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strong〉◆ 현장 재난 전문성 강화해야〈/strong〉 재난 피해를 줄이려면 초기 대응이 중요한 만큼, 현장 중심의 지자체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대본이 가동되면서 시·도지사가 이끄는 지역재난대책본부의 권한이 축소되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재난정보학회는 중앙정부와 분리된 지방재난관리센터를 설치해 지역 맞춤형 대응과 자율적 권한을 보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자체의 재난안전 분야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해 대구에서 재난안전 분야 교육을 이수한 공무원은 786명으로 전체의 4.7%에 불과하다. 여기에 순환보직 관행으로 담당자가 평균 2년마다 교체되면서 대응의 연속성과 전문성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영주 교수는 "공무원 증원은 행안부와 기재부 승인이 필요해 쉽지 않으므로 정원 내에서 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지자체장이 다른 부서의 인력 축소에 따른 반발을 감수하더라도 추진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속한 재난 대응을 위해 관련 부서장의 지위를 격상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영주 교수는 "많은 지자체에서 재난안전 부서장은 다른 부서장과 동급이거나 한 단계 낮아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고, 타 부서에 협조를 요청하기도 쉽지 않다"며 "재난 책임자를 지자체장 직속 실장급으로 두면서 다른 부서가 따르도록 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strong〉◆ 촘촘한 이재민 지원 〈/strong〉 복구 지연으로 임시조립주택에 장기 거주하는 이재민이 늘면서, 이들의 정서 안정과 사회적 단절을 막을 커뮤니티 시설 필요성도 제기됐다. 일본의 경우 10세대 이상 단지에는 40㎡ 규모 담소실, 50세대 이상 단지에는 100㎡ 이상 커뮤니티 센터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김성삼 대구한의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임시조립주택에 거주하게 된 분들은 급격한 환경 변화를 겪는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하며 그 중심에 커뮤니티 시설이 있다"며 "커뮤니티 시설을 소통 창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적절한 프로그램이 지원되는 등 복합 기능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난 이후 복합적인 문제를 겪는 이재민들에게 일원화된 창구를 통해 관련 서비스를 안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난 수습 과정에는 공공과 민간의 다양한 기관이 협업하고 있지만, 분절된 서비스로 여러 기관을 전전하면서 불편이 크다는 것이다. 이영주 교수는 "이재민들은 재난지원금 신청이나 피해 입증 절차를 스스로 챙기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기관을 오가지 않도록 통합 창구가 필요하다"며 "중앙정부가 만들더라도 결국 업무가 내려가는 만큼, 지자체가 단일 창구를 운영하는 것이 직접적인 대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난 트라우마를 해소하기 위해 보다 촘촘한 지원 서비스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성삼 교수는 "현재 재난 트라우마 상담은 체크리스트 기록에 그쳐 깊이 있는 상담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또 대면 상담보다 전화 문답이 많아 실질적 치료가 안 되는 상황"이라며 "최소 1~2시간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재난 발생 시 국가에 의존하는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 일환으로 '풍수해보험'을 눈여겨볼 만하다. 행정안전부와 지자체가 보험료의 55% 이상을 지원하는 이 정책보험은 태풍과 지진 등으로 인한 재산 피해를 저렴한 비용으로 보장한다. 함승희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풍수해보험은 재난 피해 시 6천만~8천만 원을 보상받을 정도로 수령률이 높지만 제도 자체를 모르는 국민들이 많다"며 "풍수 등 재난 집중 시기 전에 가입 독려 메시지를 보낸다거나 정책 홍보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이 발생하면 국가 차원에서 현금 지원과 융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며 "상담을 통해 증상이 심각한 경우 보건복지부 산하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연계해 치료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사회재난의 특별재난지역 선포 기준을 정량화하기 위한 연구를 계획 중이며, 풍수해보험 홍보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25-09-04 15:18:51

  •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 <5>복구보다 수습에 그친 지원…'재난 이전의 삶' 돌아가지 못해 고통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 <5>복구보다 수습에 그친 지원…'재난 이전의 삶' 돌아가지 못해 고통

    해마다 국가적 재난이 잇따르고 있지만 관련 법령은 기준이 불명확해 현장에서 혼란이 반복되고 있다. 재난 피해자들은 실질적인 복구보다 수습에 그친 지원을 받으면서, '재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긴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재난이 남긴 상처는 트라우마로 굳어져 일상을 잠식하는 반면, 심리 상담은 단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안전을 책임지는 공무원은 부족한 데다 잦은 인사이동으로 재난 대응의 전문성과 연속성마저 떨어뜨리고 있다. 〈strong〉◆모호한 기준 커지는 혼란〈/strong〉 '재난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대형 사고나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에 특별재난지역을 선포할 수 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를 시작으로 2023년까지 총 57건의 특별재난지역이 지정됐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 공공시설 복구비와 재해구호비 등 일부를 국고가 추가로 부담하면서 지자체는 재정 부담을 덜 수 있다. 복구에 필요한 행정·의료 지원도 이뤄진다. 이처럼 특별재난지역 선포 여부는 피해 지역의 복구 속도와 회복 수준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문제는 특별재난 선포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같은 법 시행령에 따르면 사회재난은 '지자체 재량으로 수습이 곤란해 국가 지원이 필요한 재난'과 같이 행정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국고 지원 대상 피해 기준금액의 2.5배를 초과하는 재난' 등 정량적 기준이 마련된 자연재난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 같은 한계는 국립재난안전연구원도 지적한 바 있다. 지난 2023년 '특별재난지역 선포제도 개선을 통한 사회재난 복구지원체계 개편' 연구를 수행한 연구원은 "사회재난은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위한 정량적 기준이 없어, 적절성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반복되고 불필요한 행정력 소모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별개로 재난사태 선포 기준 또한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난해 재난안전법 개정으로 시·도지사는 관할 구역에 재난이 발생하거나 그러한 우려가 있을 때, 시도위원회 심의를 거쳐 재난사태를 선포할 수 있게 됐다. 재난이 초기 대응이 중요한 만큼 지자체장의 권한을 강화한 것. 그러나 선포 기준은 불명확하다. 법령에는 '극심한 인명 또는 재산 피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재난'으로 명시돼 있어 해석 여지가 크다. 대구에선 지난 4월 발생한 북구 함지산 산불을 포함해 1년간 단 한 건의 재난사태 선포가 이뤄지지 않았다. 〈strong〉◆수습에 그친 지원〈/strong〉 3년 전 울진 산불로 손금옥(72) 씨는 막대한 재산 피해를 봤다. 손 씨는 "산불이 나면서 집 전체가 불이 탔는데 안채 앞에 있던 황토방은 보상도 받지 못했다. 지원된 금액은 당시 시공금액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주택 복구와 수리비에 집중되고 있다. 행정안전부의 '2024년도 재난피해 회복수준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재난을 겪은 1천469명 중 54.4%가 경제적 부담 원인으로 '복구 및 수리비 상승'을 꼽았다. 우리나라 정부는 재난으로 복구가 필요한 주택에 대해 지원하고 있다. 문제는 피해 금액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은 각각 주택복구비와 주거비 명목으로 전파(114㎡ 이상) 기준 최대 3천600만원에 그친다. 의연금과 기부금 등 국민성금 역시 실질적인 피해 회복에는 못 미치고 있다. 자연재난 시 지급되는 의연금은 지난해 9월 기준 500만원(전파 기준)에서 1천만원으로 상향됐지만, 여전히 현실적인 복구와는 거리가 멀다. 사회재난의 기부금은 규모에 따라 지원액이 달라지고 있다.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각지대도 존재한다. 국내 대표 송이 주산지였던 울진은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송이 등 임산물은 재난안전법 및 하위 법령상 복구지원 품목에 포함되지 않아 초기에 보상을 받지 못했다. 송이 농가를 운영한 홍진철(64) 씨는 "보상 임산물에 송이가 포함되지 않아 농가의 상심이 컸다"며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울진군과 지속적으로 노력한 끝에, 어렵게나마 6개월 만에 일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3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송이 등 일부 품목들은 보상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경상북도는 올해 초 영남권 산불을 계기로 지난 4월 복구지원 대상에 임산물 범위 확대를 산림청에 건의했다. 경북도 관계자는 "송이나 능이 등 채취 임산물이 복구 대상에 들어가지 않다 보니 피해를 입은 분들을 구제하기 위해 의견을 냈다"며 "아직 피해 보상이 안 되는 작물들이 있긴 하지만 대체 작물 조성 사업 등으로 예산을 지원받았다"고 설명했다. 〈strong〉◆단편적인 심리 상담〈/strong〉 재난 피해자들은 물리적 피해뿐만 아니라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있다. 권석만 전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재난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최대 21%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치료가 시급하지만 심리지원 체계는 일시적이고 단편적이다. 울진 산불 이재민 김옥수(60) 씨도 "대피소에서 심리상담을 한 번 받은 게 전부"라며 "안정제 처방이나 병원 안내 같은 실질적인 조치는 없었고 그저 상태만 확인하는 수준이었다"고 털어놨다. 반면 미국은 장기적 관점에서 재난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다.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후, 피해자 코호트(동일집단)를 구성해 매년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관련 질환에 대한 치료와 보상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지난 2023년 9월 기준 현장 응급구조대원과 자원봉사자 등 8만6천481명과 생존자 4만945명이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도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된 바 있다. 지난해 1월 신현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재난 피해자의 지속적인 치료 체계와 재난 트라우마 주치의 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재난안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해당 법안은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strong〉◆ 담당 인력 부족에 전문성 약화〈/strong〉 재난이 갈수록 복잡·대형화되고 있지만, 이를 감당할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공무원의 순환보직 체계는 재난 대응의 전문성과 연속성마저 위협하고 있다. 대구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재난안전 분야 교육을 받은 공무원은 786명에 그친다. 이는 시청, 구·군, 산하 공단·공사를 포함한 전체 공무원 수 1만6천797명의 4.7% 수준이다. 각종 재난 대응 매뉴얼과 현장 대응법 등을 숙지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셈이다. 교육을 이수하더라도 공무원 인사 특성상 2~3년 안에 해당 부서에서 나와야 한다. 대구시의 인사 기본계획상 동일 부서에서 근무 기간은 2년으로 제한하고 있고, 실·국 간 부서 이동도 5년 주기로 이뤄진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한 부서에서 경험을 쌓고 재난 업무에 익숙해질 때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구조인 셈이다. 최은기 한국재난안전기술원 책임연구원은 "재난을 몇 번 경험한 공무원들은 선제적으로 조치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지만, 처음 겪는 경우 훈련하고 교육을 거치더라도 대응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공무원들이 순환 보직제로 이뤄지다 보니 지자체의 재난 대응 역량 자체가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25-09-03 15:57:43

  • 울진 산불로 생계 '송이' 생산 뚝…목숨 담보로 바다 뛰어든다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4>

    울진 산불로 생계 '송이' 생산 뚝…목숨 담보로 바다 뛰어든다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4>

    3년 전 경북 울진을 덮친 초대형 산불은 한순간에 주민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삼켜버렸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화마에 평생 일군 재산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피해 주민들은 무너진 생계와 끝없는 트라우마, 새 보금자리 마련의 고민 속에서 오늘도 힘겹게 버티고 있다. 2일 경북 울진군에 따르면 지난 2022년 3월 4일 북면 두천리에서 시작된 산불은 축구장 1만9천795개에 달하는 산림(1만4천140ha)을 태웠다. 사유시설 피해액만 228억5천여만원에 달했고 주민 468명은 삶의 터전을 잃고 이재민이 됐다. 〈strong〉◆ 전 재산 사라지고 장비 없이 바다로〈/strong〉 지난달 7일 오후 1시쯤 찾은 울진군 죽변면. 마을회관에서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5분쯤 차로 달리자, 논공단지 위로 조성된 임시조립주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 5m 간격으로 늘어선 11개 동 중 10곳은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이재민들이 살고 있었다. 육한태(62) 씨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20대부터 울진에 터를 잡은 그는 산불 이후 3년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8평 남짓한 조립식 주택은 겨울에 춥고 여름엔 숨이 막힐 정도의 더위가 찾아온다. "입시조립주택의 거주 기한이 지나 이젠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세입자였던 저희는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집을 새로 지을 형편도 안 되는데 어디로 가란 건지 모르겠습니다." 육 씨는 한평생 산업잠수사로 살아왔다. 수중 용접과 방파제 공사, 해양 구조물 유지보수 등을 도맡아 일했고,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장비들을 틈틈이 사 모았다. 2016년에는 사업체를 꾸렸고 4년 뒤엔 울진 바닷가에 있던 2억8천만원 상당의 주택을 팔아 장비 마련에 투자했다. 고압 콤프레셔와 수중 촬영 장비, 다이빙벨 등 그가 갖고 있던 장비는 자그마치 3억원을 훌쩍 넘었다. 그러나 산불은 모든 걸 앗아갔다. 창고에 보관해 뒀던 고가의 장비들이 한순간에 불에 타버렸기 때문이다. 육 씨에겐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 평생의 노력이자 전 재산이었다. "바닷속에서 하는 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 좀 들더라도 수입 장비들로 구입했어요. 그게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산업잠수사로서의 일을 할 수 없게 된 육 씨. 결국 산소 호스 하나에 의존해 바닷속에서 작업하는 인부 이른바 '머구리'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특수 장비 없이 수심 60m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잠수병으로 결국 사고가 났다. 좌우 고관절과 견관절 수술을 받으면서 장해 6급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최소 1년 휴식을 권했지만 육 씨에게는 그러한 여유가 없었다. 산불로 전 재산을 잃은 탓에 생계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하는 바다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런 남편을 보는 아내 김옥수(60) 씨는 산불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는 "산불만 안 났으면 남편이 안전한 장비를 갖추고 산업잠수사로 일할 수 있었다"며 "울진 앞바다는 홍합이나 조개 채취가 잘 안돼서 독도까지 가서 작업하는데, 연락이 끊기면 불안해서 미칠 지경입니다"고 말했다. 〈strong〉◆ 송이 주산지는 옛말…"이번 생에서는 틀렸어요"〈/strong〉 울진군은 경북 영덕군에 이어 국내 두 번째 송이 주산지였다. 주민 약 20%인 1만여명이 송이 채취로 생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산불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울진 산자락엔 송이 향 대신 매캐한 냄새만이 자욱하다. '송이의 고장'이라는 위상도 옛말이 되고 말았다. 지난해 울진 송이 생산량은 약 7t(울진산림조합 수매 물량 기준)으로, 산불 이전인 2021년 12t의 절반 수준이다. 북면 십이령로에 사는 홍진철(64) 씨는 올해 가을도 빈 산을 바라보며 지낼 예정이다. "그 많던 송이가 다 사라졌지요. 매년 10월쯤 되면 송이를 판매했던 저도 이제는 사 먹는 처지가 됐습니다." 30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친 홍 씨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9만평 산에서 품질 좋은 송이를 키우며 제2의 인생을 계획했다. 잡목을 베어내고 송이 생육에 적합한 소나무만 남기는 산림 설계도 마친 상태였다. 퇴직 석 달 만에 덮친 산불은 홍 씨의 꿈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불길을 피한 곳은 산 초입 일부에 불과했다. 송이가 자라는 7~8부 능선은 산불에 초토화돼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속이 상한 홍 씨는 그날 이후 산에 오르지 않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국민성금으로 3년 치 생산량만큼의 보상을 받았지만 생계 수단을 잃은 상실감을 메울 수는 없었다. 대체 작물로 심은 도라지는 잡목으로 인해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다. "도라지가 자라기 위해선 잡목들을 제거해야 하는데 수익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했습니다. 송이가 다시 자라려면 30년은 더 걸리는데, 제 시대에서는 이제 틀렸죠…." 북면 검성리에 사는 엄정섭(65) 씨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그는 6만평에 달하는 개인 소유 산에서 해마다 250㎏가량의 송이를 채취했지만 산불 이후 수확은 뚝 끊겼다. 불이 났던 산을 오르는 것도 쉽지 않다. 엄 씨는 개인 목상을 불러 불에 탄 나무들을 벌채했는데, 업자가 나무를 수거해가지 않아 산길이 막혔다. "송이를 팔아 자식들 대학을 보내고 결혼도 시켰는데, 이제는 작은 밭에서 마늘이랑 참깨 농사로 버티고 있습니다. 수익도 해마다 들쭉날쭉하지만 이게 최선입니다." 〈strong〉◆ 30년간 들인 노력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strong〉 산불은 집과 산림만 태운 게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잿더미 너머엔, 한평생 쌓아온 삶의 노력이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피해'를 3년 넘게 겪고 있는 전병명(69) 씨의 이야기다. 울진군 북면 주인2길. 이 마을 산 아래에 살고 있는 전 씨는 집 한 채만 잃은 게 아니었다. 30년 넘게 수집한 한문 서적과 고서들은 모두 3천권이 넘었다. 구한말과 한국전쟁 이전에 인쇄된 희귀본들로 전 씨의 보물 1호였지만 산불에 모두 타버렸다. 더 참담했던 건 고향 울진에서 어르신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수십년간 손으로 직접 만든 강의자료들이었다. A4용지 한 장을 만드는 데만 네 시간이 걸린 원고는 모두 10권. 이 가운데 8권이 불길에 휩싸였다. 집보다 소중했던 것들이었지만 어떤 보상도 받을 수가 없었다. "저에겐 단순한 책과 강의자료가 아니었어요. 90년대부터 한 자씩 눌러쓴 제 인생의 시간이었죠. 다시 써보려 하고는 있지만, 언제 끝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도 깊다. 이날 전 씨는 집에서 나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산 능선을 보고 눈물을 쏟아냈다. 검게 그을린 채 뼈대만 남은 소나무들은 화마가 마을을 집어삼켰던 그날의 악몽을 되살린다. 하루는 '산림청'이라고 적힌 헬기가 머리 위를 지나가자, 곧장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주저앉았다. 지난 3월에는 영덕에서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았다는 전 씨. 하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돌아섰다. "사람이 없는 차에 미등만 켜져 있어도 불이 날까 봐 걱정돼요. 직접 차주를 찾아가 시동을 꺼달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산불이 나기 전에 헬기를 무서워하거나 불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은 몰랐어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25-09-02 16:11:15

  • [취재현장-임재환] 재난 이후에도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

    [취재현장-임재환] 재난 이후에도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

    "시간이 몇 년이나 지나다 보니 그냥 살아가는 거죠." 지난 한 달간 태풍과 산사태, 지진, 산불 등 재난을 겪은 이들을 찾아다니며 줄곧 들었던 말이다. 어르신들은 "우린 이제 괜찮은데 젊은 양반이 고생이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구에서 먼 길을 달려온 만큼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손주 이야기 같은 일상부터 풀어내며 천천히 다가가야 했다. 두세 시간씩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어르신들의 너스레는 차츰 깊은 속내로 바뀌었다. 덮어 두었던 상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고 말끝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괜찮다'는 말은 살아 내는 법을 스스로 달래는 자조였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재난도 사람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그 양상은 제각각이었지만, 지워지지 않는 재난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굳어져 삶 전체를 옥죄고 있었다. 3년 전 포항 힌남노 태풍으로 지하 주차장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매일 그곳을 찾아 눈물로 기도한다. 순식간에 덮친 산사태에 아내를 잃어버린 남편은 지금도 숲길을 지날 때마다 차를 세우고 있다. 나뭇가지에 걸린 물건 하나에도 아내의 흔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한 줌의 가능성을 붙잡고 싶어서다. 지진을 겪은 노인은 더 이상 손주들을 보금자리로 불러들이지 못하고 있다. 집에서 밥을 해 먹이며 누렸던 소소한 행복을 이제는 기억으로만 꺼낸다. 산불로 인한 불씨가 화살처럼 집을 폭격하는 모습을 본 어르신은 하늘에 '소방 헬기'만 뜨면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재난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장기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체계는 잘 가동되지 않는다. 포항시처럼 트라우마센터가 지어진 곳을 제외하고는 피해자 대부분이 홀로 그날의 아픔을 삭이고 있다. 기자가 취재한 21명 가운데 심리 지원을 받아 본 이들은 극히 일부였고, 이마저도 재난 당시 1회에 그친 경우가 적잖았다. 재난 대응 선진 국가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재난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다. 미국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후, 피해자 코호트(동일 집단)를 구성해 매년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관련 질환에 대한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2023년 9월 기준 현장 응급구조대원과 자원봉사자 등 8만6천481명과 생존자 4만945명이 등록돼 있다. 재난이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아픔이라는 사실을 제도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를 기점으로 재난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면서 안전망이 두터워졌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상흔을 어루만져 주기보다 복구에 중점을 두는 모습이었다. 지난해에도 신현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피해자의 지속적인 치료 체계와 재난 트라우마 주치의 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재난의 상흔은 '복구'라는 행정 용어로는 지워지지 않았다. 무너진 집은 다시 세울 수 있어도, 가족을 잃은 슬픔과 재난의 기억 속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재난 대책은 복구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긴 호흡으로 피해자들의 삶을 붙들어 줄 장치가 필요하다. 지역사회와 제도가 함께하는 촘촘하고 지속적인 돌봄이 뒷받침돼야 한다. 기후 변화로 자연 재난의 위력이 거세지는 오늘날, 재난은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사전 예방을 위한 대응도 중요하지만,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버팀목을 마련하는 일도 절실하다. 그것이 재난을 겪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자, 또 다른 재난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2025-08-31 14:39:12

  • 지진으로 쩍쩍 갈라진 집…언젠가 무너질까 매일밤 선잠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3)]

    지진으로 쩍쩍 갈라진 집…언젠가 무너질까 매일밤 선잠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3)]

    경북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한 지 어느덧 8년. 땅을 뒤흔들며 생명을 위협했던 강진은 멈췄지만, 지진을 온몸으로 경험한 이들의 삶은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 벽에 균열이 가득한 아파트에 머무는 주민들은 오늘 하루만이라도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며 잠을 청한다. '언제 또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사회로 복귀하지 못한 채 고립된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 ◆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에 손주도 못 부릅니다" 지난달 16일 찾은 북구 흥해 한미장관맨션. 4개동으로 지어진 이 아파트 단지는 지진 피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외벽 타일은 깨져 내부 콘크리트가 훤히 보였고, 떨어지는 잔해를 막기 위해 보행로에는 안전 그물망과 비계가 설치돼 있었다. 지진이 발생하고도 이곳에서 거주하는 윤성일(76) 씨는 매일 밤 잠드는 것이 두렵다. 22평 남짓한 집 내부 벽지를 걷어내면 곳곳에 균열이 가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 벽면 타일도 깨져 샤워기를 틀면 물이 뒤쪽 안방으로 스며든다. 침대와 베개가 축축하게 젖는 것도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비가 많이 올 때면 1초에 한 방울씩 빗물이 떨어질 정도로 집에 누수가 생겨요. 빗물이 외벽 사이로 계속 들어가면 내구성이 약해질 텐데 무너지지 않을지 걱정하면서 삽니다." 더욱 암울한 건 제대로 된 보수 공사도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균열이 간 아파트에 장비를 사용한 대규모 시공을 했다가 오히려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결국 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임시방편에 가까운 시공이 최선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실리콘으로 외벽 틈을 메우며 버티고 있다. "제가 2층에 사는데, 저희 집만 실리콘을 발라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빗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까 3층부터 5층까지 다 막아야 누수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윤 씨가 거주하는 2층 위로 모두 빈집이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전 층 실리콘 시공 비용 50만원을 혼자서 부담해야 했다. 평온했던 일상도 지진을 겪으면서 송두리째 바뀌었다. 오후 8시에 눈을 붙여 9시간의 숙면을 취했지만, 지금은 오전 2~3시면 눈이 떠진다. '지진이 또 발생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제 눈으로 직접 땅이 흔들리고 차가 넘어질 듯한 장면을 봤어요. 자다가 하루에 3~4번은 바닥이 파도처럼 울렁이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내는 빗소리만 들어도 잠을 못 자서 정신과 약까지 먹고 있습니다." 한때는 손녀들을 집으로 초대해 밥을 먹이며 소소한 행복도 누릴 줄 아는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붕괴 위험이 도사리는 이곳에 데려올 수도 없다. "우리도 불안한 이 집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어떻게 들이겠어요. 명절에 오면 외식 한 번 하고 돌려보내고 있어요." ◆ "또 지진이 나면…3층에서 뛰어내리렵니다" 한미장관맨션에서 약 250m를 걸으면 채희수(66·가명) 씨가 거주하는 공동주택이 나온다. 그는 지진 이후 거실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지진으로 거실 바닥이 움푹 꺼졌어요. 해를 거듭할수록 그 깊이가 더 심해지고, 8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걸을 때마다 '쿵쾅'거리는 소리도 확연히 커졌죠. 아내는 위험하다며 거실 한가운데를 피해서 가장자리로만 다니라고 늘 당부합니다." 채 씨의 집을 수평기로 측정해 본 결과, 거실과 방 3곳 모두 바닥이 왼쪽으로 기운 모습이었다. 막내아들 방은 책장이 침대 쪽으로 쏠려 있어 채 씨는 매번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하는 수 없이 남은 선택지는 대비하는 것뿐이다. 채 씨는 집에 하중이 가지 않도록 대리석 식탁과 테이블을 모두 가벼운 나무 소재로 교체했다. 돌로 된 소파도 패브릭 소재로 바꿔야만 했다. 무거운 가전제품은 꿈도 꾸지 못한다. 3대 효자 가전으로 불리는 건조기도 집 균열에 무리를 줄까 봐 끝내 사지 않았다. TV 선반 역시 바닥에 두지 않고 실리콘으로 벽에 부착해 사용하고 있다. "아무래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들을 집에 두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살아가는 데 최소한의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바닥에 두지 않아요." '한 번 지진이 났던 곳에 또 안 난다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일상을 잠식했다. 채 씨는 자녀들의 돌반지와 귀중품, 가족사진, 통장 등을 한 곳에 모아두었다. 유사시 빠르게 챙겨나가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채 씨의 집은 3층. 지진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온 가족은 비상 탈출 요령도 미리 정해두었다. "지진이 나면 먼저 이불을 밖으로 던지고, 베개를 꼭 안은 채 남은 이불로 몸을 감싸고 뛰어내리기로 했어요. 실제로 그럴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지진을 겪고 나니 저희는 늘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만 그럴 여력은 없다. 7천만원을 호가했던 집값은 지진 이후 5천만원으로 떨어졌다. "옆동에 같은 평수가 5천만원에 내놔도 안 팔리고 있습니다. 저희보다 조금 작은 평수는 2천만원까지 내려앉았어요. 지진 피해가 있는 집에 누가 살려고 오겠습니까?" 채 씨를 비롯해 주민들은 전파 판정과 함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는 바람뿐이다. 앞서 포항시는 전파 판정을 받은 공동주택들을 매입하고 보건소와 트라우마센터 등을 지었다. "저는 언젠가 이 집이 무너질 거라 봐요.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 더 무서운 겁니다." ◆ 트라우마로 일상이 무너졌다 같은 달 14일 찾은 북구 흥해읍 '포항트라우마센터'. 지진을 경험한 최호연(46) 씨와 김윤자(63) 씨는 매일같이 이곳을 찾고 있다. 지진으로 생긴 불안과 공포심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다. 최 씨는 "하루 일과를 트라우마센터에서 시작한다. 재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센터의 민감 소실 장비를 이용하면 몸에 쌓인 불안감이 조금은 가라앉는다"고 말했다. 트라우마센터에 따르면 2019년 개소 이후 등록 회원은 3천892명이다. 지난해 실태조사 결과 약물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고위험군은 201명으로 전체의 5.16% 규모다. 지진 당일 집을 알아보던 최 씨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진이 났을 때 무너질 듯한 소리가 잊히질 않는다. 차량들의 경적음 소리에 깜짝 놀라고 휴대폰 진동에도 심장이 철렁인다"고 말했다. 2018년 4월부터 공황장애 판정을 받은 최 씨는 하루에 3번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있다. 언제 발작이 올지 몰라 운전대도 잡지 못하게 되면서, 야심 차게 계획한 야채·과일 장사도 수포가 되었다. 긍정적이었던 김 씨 또한 지진을 경험하면서 평온을 잃었다. 지진에 대한 악몽이 날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김 씨는 "하루는 지진이 발생해 대피하는 꿈을 꿨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식탁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며 "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눈물을 쏟아냈다. 이런 가운데 대구고법은 지난 5월 12일 포항시민 49만여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지진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국책사업인 지열발전에 의한 촉발지진이라는 점은 인정되나, 과실을 입증할 만한 내용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주민 1인당 최대 300만원을 배상하라는 1심 판결도 '0원'으로 뒤집혔다. 포항시 관계자는 "대법원 상고와 관련해서 대법관 출신의 변호인을 선임해서 대응 중"이라며 "항소심 판결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적극 대응하면 최선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25-08-29 07:30:00

  • 중졸 이후 40년간 공장서 일한 가장, 장기기증으로 4명 살렸다

    중졸 이후 40년간 공장서 일한 가장, 장기기증으로 4명 살렸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평생을 공장에서 일했던 50대 가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4명을 살리고 하늘의 별이 됐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달 18일 의정부 을지병원에서 손범재(53) 씨가 뇌사 장기기증으로 심장과 양쪽 폐, 간을 기증하면서 4명의 생명을 살렸다고 28일 밝혔다. 손 씨는 지난달 7일 일을 마치고 잠시 쉬던 중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성실하고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손 씨가 장기기증을 통해 어디선가 살아 숨 쉴 거라는 믿음에 기증을 결심했다. 경기도 구리시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손 씨는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업 훈련원을 거쳐 공장 생활을 시작했다. 쇠를 깎고 자르는 선반 작업과 도장이라는 힘든 공장 일을 하면서도 늘 밝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먼저 나서서 도움을 건네기도 했다. 베트남 출신 아내와 결혼해 슬하에 2명의 딸을 둔 다문화 가정의 가장이었던 손 씨. 그는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캠핑과 여행을 다녔고, 집안일을 함께하는 가정적인 남편이었다. 아내 오정원 씨는 "은하 아빠, 애들 돌보고 나 도와주느라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까 천국에서는 꽃길만 걷고 행복하게 살아. 애들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잘 키울게. 꼭 지켜봐 줘. 사랑하고 고마워"라고 말했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삶의 끝에서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내주신 주신 기증자 손범재님과 유가족분들의 따뜻한 사랑에 감사드린다"며 "기증자와 유가족의 사랑이 다른 생명을 살리는 희망으로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25-08-28 09:59:50

  • 14개월 젖먹이 손녀를 산사태로 떠나보낸 할머니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

    14개월 젖먹이 손녀를 산사태로 떠나보낸 할머니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

    "매일 제 옆에서 자던 손녀 채윤이 사진을 매일 봐요." 최희영(60) 씨는 2년 전 경북 영주에서 발생한 집중호우로 생후 14개월 손녀 이채윤 양을 떠나보냈다. 시간이 흘렀지만 손녀에 대한 그리움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고 그날의 기억은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던 2023년 6월 30일 새벽. 최 씨는 남편과 잠을 뒤로 하고 집 안으로 스며든 빗물을 퍼내고 있었다. "마실 수 있는 지하수에 빗물이 섞이면 안 되니까 뜬눈으로 지켜봐야 했어요. 염소도 키우고 있었는데 비를 맞으면 안 되니 돌봐야 했고요." 집 안팎을 오가기를 반복하던 오전 4시 40분쯤 큰아들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엄마! 채윤이가 깔렸어!"라는 절규였다. 폭우로 산의 지반이 약해지면서 무너져 내린 토사가 최 씨의 집을 덮쳤고 큰아들 방부터 붕괴됐다. 그 방에서 자던 채윤이는 외벽이 무너지면서 쏟아진 잔해에 깔렸다. 토사가 끊임없이 떠내려온 탓에 온 가족이 달려들어도 채윤이를 꺼낼 수 없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이 2시간 만에 구조했지만, 채윤이는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 채윤이는 최 씨가 처음 맞은 손녀였다.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기에 채윤이는 최 씨의 일상이었다. 밭을 갈 땐 등에 업고 밥도 직접 먹이며 키웠다. "엄마 아빠보다 제가 밥을 떠주면 더 잘 먹었어요. 저만 보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아장아장 달려와 안기기 바빴던 손녀였어요." 할머니에게 깊은 애착을 느낀 채윤이는 항상 최 씨 옆에서 잠들곤 했다. 하지만 산사태가 발생한 그날 밤만은 달랐다. 밤새 빗물을 퍼내느라 집 안팎을 오가야 했고, 곁에 두면 잠든 아이가 깰까 봐 큰아들 방에 재운 것이었다. 최 씨는 채윤이를 어렵게 손에 안았다. 큰며느리가 임신 8개월 차에 코로나19에 걸렸고 태동이 느껴지지 않아 급히 출산했다. 팔삭둥이로 태어난 채윤이는 자가 호흡이 어려웠다. 결국 기도 삽관된 채 헬기를 타고 영남대병원으로 옮겨진 뒤에서야 생명을 이어갔다. "죽어가던 손녀를 간신히 살려냈는데…산사태로 목숨을 잃었다는 게 지금도 믿을 수가 없어요. 큰아들 부부 사이에 다시 손자가 태어났지만 이 아이를 봐도 채윤이가 자꾸 떠올라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손녀를 잃은 뒤 최 씨 가족은 무너졌다. 큰아들은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있다. "채윤이를 잊어보려고 휴대전화에 있는 사진을 지워보려 했지만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정말 보고 싶을 때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더 두려워요." 산사태 원인이 폭우였기에 최 씨는 이제 가랑비만 내려도 숨이 막히고 불안에 휩싸인다. 이틀 전에도 갑자기 쏟아진 비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담벼락이 무너지지는 않을지 걱정돼 수시로 집을 나갔다가 들어왔다. 대가족이 살던 집도 붕괴되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가족은 옛날부터 다 같이 지냈어요. 그런데 집이 사라졌고 그만한 규모의 주택을 다시 마련할 형편도 못 되다 보니, 결국 첫째·둘째 아들 부부도 다 따로 흩어져 살게 됐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25-08-27 15:37:53

  • 물살에 휩쓸린 아버지, 아들 이름만 목놓아 불렀다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2)]

    물살에 휩쓸린 아버지, 아들 이름만 목놓아 불렀다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2)]

    지난달 23일 찾은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2길. 100년 가까이 평화롭던 이 마을은 2년 전 여름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초토화됐다. 경상북도에 따르면 2023년 6~7월 예천군에는 731㎜의 비가 내렸다. 평년 연간 강수량이 978㎜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1년간 하늘에서 내릴 물의 4분의 3이 한 달 사이에 쏟아진 셈이다. 유광호 감천면 벌방리 이장은 "산사태로 마을 25가구 모두 피해를 입었고, 그중 6가구는 전파되면서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이 마을은 산사태취약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동시에 수해복구 흔적의 모습이 보였다. 비포장도로는 차량이 다닐 수 있을 만큼 정비됐고, 외벽이 부서진 집들도 일부 수리를 거쳐 제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마을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아 있다. 경북 산사태로 숨진 29명 가운데 실종자 2명이 이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이들은 지금도 사무치는 아픔 속에 살아가고 있다. ◆산사태에 하천으로 떠내려간 '부자' 벌방2길에 장대비가 쏟아진 건 2023년 7월 15일 토요일 자정을 넘긴 시각. 아버지와 함께 유류 납품 업체를 운영해 온 김창우(36·가명) 씨는 주말이면 서울 본가로 향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해외에서 들여온 수입 설비를 설치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예천에 남았던 것. 서울에 있는 아내와 통화하던 김 씨는 예사롭지 않은 빗줄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집 밖을 나섰다. "집 앞 하천이 걱정돼서 나가 보니 이미 범람해 발목까지 물이 차 있었어요. 창고에 있는 전기 설비들이 비를 맞으면 안 되니까 아버지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해서 들어가려 했죠. 그런데 삽시간에 물이 불어 무릎까지 잠겼습니다." 곧장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선 김 씨. "아버지 비가 정말 많이 온다"라고 말하던 순간이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나무와 돌덩이, 흙더미가 굉음을 내며 덮쳤고 두 사람은 집 앞 하천으로 휩쓸렸다. 평소 잔잔하기만 했던 하천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성난 파도로 변해 있었다. 김 씨와 아버지는 속수무책으로 휘몰아치는 물살에 휩쓸려 300m 가까이 떠내려갔다. 이후 하천은 두 갈래로 갈라졌고, 김 씨는 수심이 얕은 쪽으로 아버지는 깊은 물가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운명은 갈렸다. "아버지께서 샌드위치 패널을 붙잡은 채 떠내려가셨는데 제 이름을 목 놓아 부르셨어요. 새벽이라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만 들렸던 그때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산사태로 쏟아진 잔해에 무릎과 다리가 찢긴 김 씨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상처 부위를 절개할 만큼 큰 수술이 진행됐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했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오직 하나의 바람뿐이었다. 패널이 뗏목 역할이라도 해 아버지가 살아 있기를. 김 씨를 비롯한 가족 모두 예천으로 내려왔지만 군·경·소방의 수색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적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인력 1만9천10명과 보트·헬기 등 장비 5천52대가 투입된 수색은 68일간 이어지다가 중단됐다. 실종자가 유실됐을 가능성과 집중 수색에도 흔적을 찾지 못한 점, 가족이 수색 종료를 받아들인 점 등이 고려됐다. 누적 수색 거리는 총 1천972㎞.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하는 낙동강 전체 길이인 510㎞를 4번 오간 셈이다. "소방대원이 그러더라고요. 집 앞 하천에서 낙동강까지 떠내려갔다면 강 폭이 너무 넓어 찾기 어렵다고요. 차라리 매몰됐으면 수색 반경이라도 정해진다고 하던데…저는 결국 아버지 시신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잃어버린 슬픔은 일상 곳곳에서 찾아온다. 둘이서 하던 유류 납품 업무를 혼자서 떠안을 때마다 늘 아버지가 생각난다. 사망이 아닌 '실종'이었기에 이후 행정 절차도 복잡했다. "토사가 덮쳐 폐차해야 할 차량부터 통장까지 모두 아버지 명의였습니다. 아버지가 실종됐으니까 서류 업무가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실종자에 한해 인정 사망 처리 절차가 끝나기까지 6개월이나 걸렸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아내, 지금도 찾아요…" 김 씨와 같은 벌방2길에 거주 중이던 이승호(65·가명) 씨는 2년 전 산사태로 실종된 아내를 아직도 찾고 있다. 운전 도중 나뭇가지에 무언가 걸려 있는 듯한 모습이 보이면, 차에서 내려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이 씨의 집은 산 끝자락에 있었던 탓에 산사태의 피해를 정면으로 맞았다. "집 옆 과수원에 비 피해가 있을 것 같아서 나왔는데,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났어요. 그래서 손전등으로 비춰봤더니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평생 일군 터전이 사라진 것도 참담했지만 더 큰 문제는 아내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휴대전화도 두고 나온 탓에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산사태로 뒤덮인 토사를 손이 닳도록 치워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날이 밝으면서 투입된 굴착기 수십 대가 흙더미를 치워도 아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 씨는 아내의 실종 소식을 듣고 수원에서 내려온 두 아들과 꼬챙이를 손에 쥔 채 마을 곳곳을 헤집었다. 당국의 수색이 끝난 뒤에도 이 씨의 머릿속에는 '아내가 하천을 따라 떠내려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마을 초입부터 낙동강 하류까지 움직인 것도 수십 번이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이 씨는 아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사과 농사를 생업으로 삼았던 그는 아내와 함께 약을 치고 사과를 따며 노후를 보낼 줄 알았다. 이제는 홀로 남겨진 이 마을에서 비가 오는 날이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저에게 안 돌아와도 되니까, 어딘가에서 살아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같은 하늘 아래 숨이라도 쉬고 있다면 그것으로 됩니다." 이 씨는 현재 거주 중인 임시조립주택도 내년 7월이면 나가야 한다. 가지고 있는 돈이 넉넉하지 않아 인근에 조성 중인 이주단지로 들어갈 형편도 못 된다. "아내 실종과 관련해 받은 보상금이 총 8천만원인데 재난으로 잃어버린 사과 농사 장비를 다시 마련하느라 이미 다 써버렸어요. 매년 1천만원 남짓 벌어 겨우 먹고사는 처지라 이곳을 나가면 갈 곳이라곤 과수원 농막뿐입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25-08-27 15:37:40

  • 신분증 발급 시 장기기증 희망등록 안내…

    신분증 발급 시 장기기증 희망등록 안내…"제도 안착 위해 교육과 홍보 시급"

    "장기기증 희망등록은 안내문에 적힌 홈페이지 또는 가까운 보건소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 21일 오전 10시쯤 대구 서구청 1층 민원실. 여권 창구를 찾은 민원인에게 공무원이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안내하며 이같이 말했다. 접수대 옆에는 '한 사람의 기증이 최대 9명을 살릴 수 있다'는 문구가 적힌 홍보물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만난 박모(72) 씨는 "마음속으로 장기기증은 좋은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구청에서 안내해주니 그 가치를 알게 되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라며 "받은 안내문을 집에 가서 차분히 읽어보고 가족들과 논의 후 등록할지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 발급 시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안내받는 제도가 시행되면서 생명나눔 문화 확산에 힘이 실리고 있다. 다만 시행 초기라 제도를 숙지하지 못한 일부 기관이 있었고, 민원인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려면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26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장기기증 희망등록 안내는 전국 5개 기관에서 이뤄진다.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동사무소 3천596곳과 여권 업무를 맡는 구청(257곳), 운전면허증 관련 경찰서(906곳)와 면허시험장(27곳), 선원신분증을 취급하는 지방해양수산청(11곳) 등이다. 신분증 발급 외에 재발급이나 갱신 시에도 마찬가지다. 이 제도는 지난 2023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장기등이식에관한법률'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이달 21일 시행됐다. 일상에서 생명나눔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가 나오지만, 제도가 자리 잡으려면 홍보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시행 첫날 면허증을 발급하는 지역 한 경찰서의 경우, 관련 공문을 받지 못해 제도가 시작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공무원 대상으로 장기기증 교육이 깊이 있게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신분증을 발급하는 한 공무원은 "직원들이 영상으로 두 차례 교육을 받긴 했지만, 민원인들이 상세하게 물어보면 '홈페이지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고 안내할 수밖에 없다"며 "심도 있는 교육을 건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원현 계명대 동산병원 이식혈관외과 교수는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이나 한국장기조직기증원 등에서 장기기증 교육을 맡을 인력은 충분하다"며 "국민이 신분증을 발급받을 때 한 번쯤 기증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설명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제도 관련 공문을 각 지방경찰청과 시군구에 보냈지만, 하부까지 전달이 안 된 곳도 있는 것 같다"며 "모든 기관이 인지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내년부터 교육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장기기증 활성화를 위해 수가 조정과 홍보 계획 등을 담은 5개년(2026~2030년) 종합계획을 9월 말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우리나라 장기기증 관련 지표는 악화하고 있다. 현행법상 장기기증이 가능한 뇌사자는 지난해 397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도 483명에서 17.8% 감소한 수치다. 장기 수급 불균형으로 이식이 필요한 환자들의 대기 기간은 더 길어지고 있다. 조혈모세포와 안구 등을 제외한 장기 이식 대기자는 올해 4월 30일 기준 4만595명으로, 평균 대기시간이 2천193일(약6년)에 달했다.

    2025-08-26 15:00:48

  • 재난 지나간 자리, 남겨진 사람들 여전히 '악몽'

    재난 지나간 자리, 남겨진 사람들 여전히 '악몽'

    올해 3월 영남권 8개 시·군을 덮친 산불은 공식 통계를 작성한 1987년 이래 가장 큰 피해를 냈다. 불길이 삼킨 면적만 10만4천㏊로 축구장 약 14만개와 맞먹는다. 피해액은 1조818억원으로 종전 2022년 동해안 산불 피해액 2천261억원보다 4.8배 많았다. 대피하지 못한 주민 27명과 화마와 싸우던 진화대원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재난은 유형을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삶의 풍경을 뒤바꾼다. 평화롭던 마을은 전쟁터처럼 변하고, 보금자리를 잃은 주민들은 '이재민'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단 한 번의 재난은 많은 이들의 시간을 멈춰 세웠다. 지하주차장을 덮친 폭우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매일 그곳을 찾아 눈물을 쏟는다. 산사태로 아내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남편은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뭇가지에 무언가 걸려 있으면 차에서 내려 눈으로 확인한다. 한때 손주들을 집에 불러 소소한 행복을 누렸던 노인은 지진 이후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균열이 가득한 집에 더는 들일 수 없어서다. 전 재산을 들여 마련한 장비를 산불로 잃은 잠수사는 이제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며 생계를 잇고 있다. 재난이 남긴 상처는 눈에 보이는 피해를 넘어 트라우마로 굳어졌다. 언제 닥칠지 모를 또 다른 위협에 시달리며 불안감이 일상을 잠식했고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지난해 행정안전부의 '재난피해 회복수준실태조사'에 따르면, 재난 피해자 102명 가운데 54.9%가 불안 증세를 호소했다. 앞으로 재난피해는 더욱 불어날 것으로 예고돼 있다. 기후변화로 자연재난의 위력은 거세지고, 이태원 참사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사회재난도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를 기점으로 재난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왔지만, 피해 규모를 온전히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재난 안전과 대응을 책임지는 공무원들은 부족하다. 잦은 이동은 업무의 전문성과 연속성마저 떨어뜨리며 재난 대응을 위협하고 있다. 매일신문은 지난 한 달간 태풍과 산사태, 지진, 산불 피해자 21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재난으로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어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재난 제도의 빈틈과 해법을 담은 시리즈를 6회에 걸쳐 보도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25-08-21 15:07:21

  •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 (1) 태풍으로 멈춰버린 시간

    [재난 이후, 끝나지 않은 고통] (1) 태풍으로 멈춰버린 시간

    2022년 9월 6일 태풍 힌남노가 몰고 온 거센 물살이 포항 남구 아파트 지하주차장 3곳을 덮쳤다. 불과 100m 떨어진 냉천이 상류 저수지에서 쏟아져 나온 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범람한 탓이었다. 이 사고로 주민 8명이 목숨을 잃었다. 3년이 다 되어가지만 유족들의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최근 사고 책임자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마저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유족들의 상흔은 더욱 깊어졌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났다. 당시 사고의 기억과 트라우마 등을 짚었다. ◆생사를 가른 안내방송 지난달 26일 만난 유족들은 지하주차장 침수 사고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라며 울분을 쏟아냈다. 한국농어촌공사가 많은 물을 방류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점, 지하주차장에 물이 차오르는데도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주민들에게 차량을 빼라고 한 점 등이 명백한 책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 2월 농어촌공사와 관리사무소 관계자에게 무죄 또는 공소기각을 선고했다. 포항 냉천 유가족협의회 이모 대표는 "구속영장만 두 차례 청구됐고 검찰이 중대하다고 판단해 징역 4년을 구형한 사건인데, 무죄가 나온 건 혐의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 것"이라며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포항시에 방류 사실을 통보해도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어떻게 판사가 단정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법원의 무죄 판결로 김은숙(55) 씨는 마음을 크게 다쳤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다. 태풍 힌남노가 지하주차장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날.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들 주영(당시 15세)이를 떠나보낸 뒤 은숙 씨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힌남노 태풍은 사고 전날부터 폭우를 쏟아냈다. 9월 5~6일 사이에 하루 최대 541㎜의 비가 내렸다. 20년 만에 기록한 최대 강우량이었다. 비가 걷잡을 수 없이 퍼붓던 오전 6시쯤. 은숙 씨는 아파트 관리실 방송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지하주차장에 물이 들어오고 있으니 차량을 급히 지상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다급한 안내였다. 출입구에서 가장 먼 구석에 차량을 세워뒀던 은숙 씨. 주영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함께 출입구 경사로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주민들이 차량을 빼내려 몰려들면서, 주차장은 뒤엉켜버렸고 은숙 씨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 흙탕물이 차량 앞유리를 강하게 내리치며 주차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물이 순식간에 허리까지 차올랐고, 은숙 씨는 아들과 함께 차에서 내려야 했다. "차량 출입구로는 파도처럼 물이 몰려와 나갈 수 없었어요. 지상으로 올라가는 문들도 물살에 막혀 열리지 않았고요." ◆눈앞에서 아들과의 이별 지상으로 향하는 길이 막히자 은숙 씨는 하는 수 없이 차량 위로 올라갔다. 정전으로 캄캄해진 주차장에선 아들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아 목소리로만 생사를 가늠해야 했다. 빗물은 계속 쏟아졌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은 천장 아래 30㎝ 남짓한 에어포켓뿐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서서히 물이 차오르면서 은숙 씨는 천장에 달린 전기선을 붙잡고 버텼다. 물은 턱밑까지 차올라 숨조차 내쉬기 힘든 순간, 주영이가 은숙 씨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엄마, 미안해요. 그리고 엄마 사랑해요." 은숙 씨도 끝이 될지 모를 인사를 건넸다. "주영아, 엄마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우리 천국에서 만나자." 물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자 은숙 씨는 천장에 입을 맞대고 흙탕물을 마셔가며 숨을 이어갔다. '하나님, 그냥 이대로 저를 데려가주세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만큼 견디기 버거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조대가 물을 퍼내기 시작하면서 다시 에어포켓이 생겼고 은숙 씨는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외친 건 아들의 이름이었다. "주영아!" 하지만 주차장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주영이를 포함해 주차장에 있었던 사람들 7명 모두…하늘나라로 가셨더라고요." 차가운 물에 오래 잠겨 저체온증이 찾아오고 손에서 힘이 빠져가던 순간, 보트를 탄 소방대원들이 내려왔고 은숙 씨는 14시간 만에 구조됐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내내 아들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남편에게서 '주영이가 천국을 갔다'는 말을 들은 은숙 씨는 그 자리에서 울부짖었다. ◆1년 365일을 아들 생각…비만 오면 트라우마 은숙 씨에게 주영이는 누나들과 10살 넘게 터울이 나는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키가 177㎝까지 자란 주영이는 늘 "엄마는 내가 지켜줄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든든하던 아들을 눈앞에서 떠나보낸 뒤, 은숙 씨 가족의 고통은 지금도 여전하다. 눈만 감으면 주영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루는 병원을 갔다가 주영이 뒷모습과 똑같은 학생이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는데, 제 아들이 아니었어요. 주영이가 제 옆에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거죠." 생전 겪어보지 못한 트라우마도 생겼다. 비만 오면 또다시 침수가 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뒤덮는다. 10시간이 넘게 지하주차장에 갇혀 있었던 기억 때문에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지금도 창문을 열어둔 채 지내고 있다. 숨이 막히는 느낌을 떨치기 위해서다. 은숙 씨는 아직도 아들을 떠나보낸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영이가 5살 때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남편은 아들과의 모든 추억이 이곳에 남아 있다며 떠나지 않아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저는 지하주차장에 차를 빼라고 방송한 아파트 관리사무실도 싫고 마음이 너무 힘들어요." ◆ 추모관 찾으면 억장이 무너져 같은 아파트에서 아들 서보민(당시 22세) 씨를 떠나보낸 서모(58) 씨의 삶 역시 무너졌다. 서 씨는 당시 해병대를 전역한 지 5개월 된 아들과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주차장이 물에 잠기기 직전 기적적으로 차를 타고 나온 서 씨와 달리, 보민 씨는 출입구에서 먼 곳에 세워둔 차량을 빼려다 끝내 나오지 못했다. "저와 아들이 탄 차가 바뀌었다면 운명도 달라졌겠죠. 아비로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커서 살 수가 없습니다." 서 씨의 먹먹한 마음은 매년 태풍·장마철이 되면 더욱 깊어진다. 그럴 때면 옷장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인사를 건네곤 한다. "'보민아 아빠 회사 다녀올게'라고 얘기를 한 뒤에 집을 나서요. 3년이 지났지만 집안에 보민이의 물건들이 보일 때면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보민 씨는 지난 2023년 3월 의사자로 인정받았다. 지하주차장에 물이 들어찼을 때 자동차에 갇힌 운전자의 문을 열어주고 어르신들의 대피를 도왔던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매달 아내와 보민이가 있는 추모관을 찾는 서 씨. 이곳에서 아들을 마주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눈물을 쏟고 있다. "훌륭하게 커서 장하고 고맙다고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요.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추모관을 가면 그제야 실감해요. 보민이가 세상에 없다는 걸요…"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25-08-21 15:06:08

  • "떠날 때 도움 되고 싶다"던 60대, 뇌사 장기기증으로 4명 살렸다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뇌사 상태에 빠진 60대 남성이 장기기증으로 4명을 살리고 하늘의 별이 됐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 6월 27일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이훈(61) 씨가 뇌사 장기기증으로 폐와 간, 양쪽 신장을 나눴다고 7일 밝혔다. 이 씨는 같은 달 15일 잠을 자다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의료진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뇌사 상태에 빠졌다. 생전에 이 씨는 "내가 떠날 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하면 좋겠다"고 자주 이야기했고, 가족들은 고인의 뜻을 존중하고자 기증을 결심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 씨는 회계 사무소 부장으로 근무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주편을 살피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따뜻한 성품까지 가졌다고 한다. 이 씨의 딸 유주 씨는 "아빠, 함께 하면서도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나눠 주셨지만, 마지막 이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해줘서 감사해요. 하늘에서도 늘 저희 지켜봐 주세요. 아빠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삶의 끝에서 생명과 희망을 나누어 주신 기증자 이훈 님과 유가족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실 분들이 기증자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사회에 따뜻함을 나누며 살아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2025-08-07 18:45:41

  • 장기기증 희망등록 의사 15.4% 감소…생명나눔 지표 악화

    장기기증 희망등록 의사 15.4% 감소…생명나눔 지표 악화

    지난해 장기 기증 관련 지표가 전반적으로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뇌사 기증자는 물론 장기 기증 희망등록자까지 줄어들면서, 이식 대기자들의 기다림은 더욱 길어질 전망이다. 5일 국립 장기조직혈액관리원이 펴낸 '2024년도 장기 등 기증 및 이식 통계 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뇌사 장기 기증자는 397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483명에서 17.8% 감소한 수치다. 가족이나 친지 간에 이뤄지는 생존자 기증도 2천339명에서 1천980명으로 15.3% 줄었다. 그 결과 장기 등 이식 건수도 5천54건으로 전년보다 15% 감소했다. 더 큰 문제는 '생명나눔'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마저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7만563명으로 전년도(8만3천362명)와 비교하면 15.4% 감소했다. 장기 수급 불균형으로 이식이 필요한 환자들의 대기 기간은 더 길어지고 있다. 조혈모세포와 안구 등을 제외한 장기 이식 대기자는 올해 4월 30일 기준 4만595명으로, 평균 대기시간이 2천193일(약6년)에 달했다. 인구 100만명당 뇌사 기증자 수를 의미하는 뇌사 기증률도 지난해 7.75명으로 전년보다 1.66명 감소했다. 이는 미국(49.7명), 스페인(47.9명) 등과 비교하면 크게 뒤처지는 수준이다. 한편 정부는 생명나눔 문화 확산을 위해 제도 개선에 나서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오는 8월 21일부터 신분증 발급 시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안내하기로 했다.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동사무소와 구청(여권), 경찰서·면허시험장(운전면허증), 지방해양수산청(선원신분증) 등에서 이뤄진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장기기증이 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수가 조정, 홍보 계획 등을 담은 5개년(2026~2030년) 종합 계획을 9월에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5-08-05 18:10:04

  • "엄마 아들로 태어난 게 행운"…장기기증 후 하늘로 떠난 50대女

    집에서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뇌사 상태에 빠진 50대 여성이 장기를 기증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 6월 30일 인하대학교병원에서 김소향(51) 씨가 간을 기증하면서 소중한 생명을 살렸다고 4일 밝혔다. 같은 달 11일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김 씨는 곧장 병원으로 이송됐다. 하지만 의료진의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뇌사 상태가 됐다. 가족들은 김 씨가 평소 사람을 좋아하고 남을 도왔던 만큼, 마지막 모습 또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일을 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난 김 씨는 사람들을 이끄는 것을 좋아하고 밝은 성격이었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본인 것을 나눠주고, 불의한 것을 볼 때면 당당히 맞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김 씨는 호주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심리학을 전공했다. 결혼 후에는 자녀를 키우다가 3년 전부터는 중·고등학교에 심리 상담 강의를 다녔다. 김 씨의 아들 유한주 씨는 "엄마의 아들로 태어난 게 저의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행복하고 감사했어요. 늘 애정 표현 많이 해주셨는데 하늘에서는 행복하고 즐겁게 사세요. 감사하고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원장은 "생명나눔을 실천해 주신 기증자 김소향 님과 유가족분들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에 감사드린다"며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기적과 같은 일이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고 밝게 밝히는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5-08-04 11:34:02

  • [인사] 대구대

    [인사] 대구대

    ◆ 대구대 ▷입학처 부처장 강선구 ▷기획조정팀장 김종구 ▷입학사정관팀장 김봉심 ▷장학복지팀장 이용욱 ▷연구지원팀장 이철환 ▷디지털혁신팀장 이정엽 ▷경영전략팀장 겸 홍보팀장 손대영 ▷IT·공과대학 행정실장 겸 소프트웨어중심대학사업단 행정실장 김영준 ▷재활과학대학 및 글로벌경영대학 행정실장 이응창

    2025-07-29 16:58:27

  • 영남이공대, 장애 인식 개선 '수어교실 프로그램' 운영

    영남이공대, 장애 인식 개선 '수어교실 프로그램' 운영

    영남이공대는 이번 여름방학을 맞아 재학생을 대상으로 '수어 교실 프로그램'을 열었다고 28일 밝혔다. 3주간 10회로 개최되는 수어교실은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주관하는 특별교육 과정이다. 보건과 복지, 상담 등 장애 관련 분야 진출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직무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학생들은 한국농아인협회 대구시협회 소속 전문 강사로부터 수어 기본 개념과 인사, 가족 소개, 학교 생활, 경제 활동과 손동작 등 소통에 필요한 교육을 이수했다. 이재용 영남이공대 총장은 "수어 교실은 단순한 언어 교육을 넘어 장애인 등 타인과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배우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25-07-28 2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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