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SOS, 가족을 짊어진 아이들] (2) "나는 언제쯤 나를 살아도 될까요?" 돌봄의 굴레에 미래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오늘을 발판 삼아 차곡차곡 미래를 설계해 나간다. 학창 시절에는 꿈을 찾고 청년기에는 취업을 준비하며,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삶을 그린다. 반면 아픈 가족을 부양하며 하루를 버티는 것이 전부인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에게 '내일'은 늘 뒷순위로 밀려난다. 돌봄의 끝이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어려운 현실에서, 이들은 미래를 상상하는 일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 "제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지난달 21일 오후 2시쯤 찾은 대구 동구의 한 오래된 주택. 40년이 넘은 이 집에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하시은(14·가명) 양은 다시 외출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어머니 이송희(48·가명) 씨의 정신과 진료와 정형외과 시술이 예정된 날여서다. 시은 양은 7살 무렵부터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다. 송희 씨는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은 채 집 밖으로 나돌았던 남편 때문에 우울증을 앓다가 옥상에서 뛰어내려 크게 다쳤다. 이후 약물 부작용으로 치매 증상까지 나타나면서 혼자선 외출이 어려운 상태다. 병원에 함께 가는 날이면, 시은 양은 어머니가 진료실에 들어간 짧은 순간을 제외하곤 내내 곁을 지켰다. 말동무가 돼 주고 건망증으로 자주 잊어버리는 송희 씨의 기억을 되살려 준다. 3시간 가까이 병원을 돌다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하루가 다 지나간 기분이다. "병원을 같이 가지 않을 때는 약국에 가서 엄마가 복용하는 약을 대리 처방받고 있어요. 엄마는 항상 아프다면서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이 드셔서 약이 항상 부족해요. 마약성 진통제도 있어서 약을 탈 때마다 약사 선생님께 눈치가 많이 보여요." 몸도 마음도 망가진 송희 씨는 항상 딸이 곁에 있어 주길 바란다. 그래서 시은 양의 휴대전화는 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울린다. "수업하다가도 엄마가 전화 와서 '집에 좀 오면 안 되겠냐'고 하세요. 초등학교 때는 한 달에 4~5번 정도였고, 지금은 중학교 들어왔지만 2번씩은 부르는 것 같아요. 제가 없으면 엄마가 불안 증세를 보이세요."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시은 양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제과제빵사라는 꿈을 정했다. 아픈 엄마의 식사를 위해 부엌을 드나들면서 요리에 자신감이 생긴 것. 지난해에는 홈베이킹과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땄다. 고등학교도 제과제빵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경기도 시흥시 한국조리과학고로 정했다. 하지만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거주지를 옮겨야 하는데, 자신이 없으면 대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송희 씨가 마음에 걸린다. "전 프랑스나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제과제빵을 더 배우려는 생각도 있어요. 그런데 엄마가 편찮으시니까 제가 설계한 미래를 그대로 실현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미래 계획에 어려움을 겪는 돌봄청년은 36.7%로 3명 중 1명꼴이다. 시은 양처럼 홀로 가족을 부양하는 주돌봄자의 경우 46.8%로 더욱 높게 나타났다. 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꾸리지 못하는 이유로는 가족 돌봄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어서다. 시은 양은 평일에 하루 6시간, 주말에는 10시간 가까이 송희 씨를 돌보고 있다. 돌봄청년의 평균 돌봄시간이 주당 21.6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은 양은 두 배 이상 부담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친인척이 시은 양의 꿈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제과제빵은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수입이 안정적인 '간호사'를 추천한 것. 아픈 어머니를 돌보려면 간호 계열이 더 낫다는 말까지 들었다. "억지로 간호 관련 책을 사서 읽어봤는데 너무 괴로웠어요. 간호사가 제 꿈이 아니잖아요.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매일 들면서 억지로 하다가는 병이 날 것 같았어요. 미래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저를 둘러싼 환경은 아무래도 친구들과 차이가 큰 것 같아요." ◆"할머니 생각해서 아동학과 전공 포기했어요" 김가람(20·가명) 씨는 학교 교사와 관련된 전공을 택했지만 처음부터 꿈꾸던 진로는 아니었다. 중·고교 시절에 아동학과 진학을 희망하면서 수도권 대학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우리 손녀가 대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할머니 한마디에 꿈을 포기하고 대구에 남았다. 가람 씨는 친할머니와 살고 있는 '조손 가정'이다. 기억 속에 할머니는 관절통으로 거동이 어려울 만큼 아픈 사람이었다. 수술까지 받게 되면서 시장이나 식당에서의 소일거리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생계를 책임졌던 할머니가 쓰러지면서 가람 씨는 곧장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결혼식 뷔페 아르바이트부터, 국가 근로장학생 등 소위 돈 좀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2년 전부터는 할머니가 뇌경련으로 일어날 수도 없게 됐다. 대소변을 가리는 일부터 씻기는 것까지 모두 가람 씨가 담당해야 했다. 입원 기간에는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할머니를 돌봤다. 지금도 마찬가지. 대학생이지만 학교 수업을 무단으로 결석하고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가야 할 때가 잦다. "저는 보살핌을 받기보다 항상 할머니를 돌보는 사람이었어요. 할머니가 병원에서 한글을 못 읽으시고 움직이시는 것도 어려워서 제가 곁에 있어야 해요. 진료가 끝나도 집에 보내드리고 나서야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는데,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게 너무 벅차요." 할머니를 돌보느라 여느 또래처럼 대학 새내기를 누리지 못한 것도 아쉽지만 앞으로가 더욱 문제라는 가람 씨. 내년에 있을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해야 해서다. 공부에 전념하고 싶지만,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할머니가 방문 요양서비스를 받는 하루 2시간이 전부다. 이 시간이 끝나면 독서실에 있다가도 곧장 집으로 가야만 한다. "하루에 40~50% 정도는 할머니 돌봄과 가사 부담에 짓눌리고 있는 것 같아요." 초록우산에 따르면 가람 씨와 같은 돌봄청년들은 제대로 된 개인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여가 시간이 '1시간 미만'이라는 응답이 6.5%, '1시간 이상 ~ 2시간 미만'은 18.8%로 집계됐다. 4명 중 한 명은 하루 2시간의 여유도 갖지 못하고 있다. 돌봄에 많은 시간을 쏟다 보니 사랑을 할 여유도 없었다. 최근에는 남자친구와도 이별을 하게 됐다. "만날 시간이 없었어요. 할머니 돌보는 것만 해도 힘들어요. 결혼은 돈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할머니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커요." 앞으로 이 돌봄의 굴레가 얼마나 이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 막막하다. 병원 일정과 가사 부담까지 모두 짊어진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이 없다. "내년 11월에 임용시험이에요. 할머니가 병원을 오갈 때, 저 대신 도와줄 사람만 있어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전혀 안 돼요." [들리지 않는 SOS, 가족을 짊어진 아이들] 연재 순서 1편_부양 떠안은 어린 가장〈strong〉2편_돌봄 굴레 속 사라진 꿈〈/strong〉3편_복지 사각지대에 내몰린 청소년4편_촘촘한 지원과 든든한 울타리
2025-06-15 16:45:16
[취재현장-임재환] 장기기증 희망등록, 기자가 먼저 서명한 이유
'등록번호 2041047'. 이달 2일 기자가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하고 받은 숫자다. 국내에서 204만1천47번째 기증 희망등록자라는 뜻이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조금 늦게 기증 의사를 밝혔다.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지인에게 이 사실을 전하니 '주변 사람들이 기증 의사를 알고 있으면 되지, 굳이 희망등록까지 할 필요가 있었냐'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생명 나눔 의사를 구두가 아닌 서면으로 남겨야겠다는 데에는 개인적으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뇌사에 빠져 법상 장기기증이 가능한 순간이 오면, 내 가족이 중환자실 앞에서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지난 두 달간 장기기증 기획 시리즈 취재 과정에서 만난 유족 7명은 중환자실 앞이 그렇게나 견디기 힘들었다고 전했다. 자식이 의식불명이라는 현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한 순간에 '타인을 위해 장기를 기증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아 든 한 아버지는 24시간 내내 울부짖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생전 기증 의사를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면 그 고통은 배가 된다. 식물인간과 달리 뇌사 상태는 다시 깨어난다는 기적이 없어서 기증 의사를 물어볼 수도 없다. 생명 나눔 뜻을 문서로 반드시 남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두 번째 이유는 한 사람의 장기기증은 최대 9명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조직까지 나누게 되면 100여 명이 되살아나는 기적이 펼쳐진다. 이틀에 한 번씩 신장 투석 주사를 꽂고 인공심장을 부여잡는 환자들이 다시 걷고 숨을 쉬는 데 힘을 보태고자 했다. 생을 마감하면 한 줌의 재로 사라질 장기들을 건네면서, 죽음을 앞뒀던 환자들이 인생의 제2막을 써 내려가길 바랐다. 마지막 이유는 기증 희망등록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에 생명 나눔 문화가 뿌리내릴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미국 등 기증 선진국은 60% 이상의 장기기증 희망등록률을 보인다. 반면 우리나라는 2023년 기준 전체 인구 대비 3.4% 수준에 그친다. 그 결과 실제 기증으로 이어진 건수는 큰 차이를 보인다. 같은 해 한국의 인구 100만 명당 뇌사 기증자 수는 9.32명인 반면, 미국은 48.04명으로 집계됐다. 한국 사회에는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가치관이 남아 있다. 해외처럼 장기기증이 일상적인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선, 더 많은 국민이 기증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기자는 취재를 통해 생명 나눔을 가까이하면서 기증 희망등록을 하게 됐다. 장기기증이라는 주제가 낯선 사람들은 가족의 장기기증을 해야 할 때가 오거나, 본인이 장기를 이식받을 상황에 놓이지 않으면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다. 다행히 오는 8월 21일부터는 신분증을 발급받을 때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안내받는 제도가 시행된다.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동사무소와 구청(여권), 경찰서·면허시험장(운전면허증), 지방해양수산청(선원신분증) 등에서 이뤄진다. 일상에서 생명 나눔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움직임이다. 기증 희망등록을 하더라도 최종 결정은 남겨진 가족의 몫이다. 하지만 그 의사를 미리 밝히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가 생명 나눔 활성화로 나아간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은 결심들이 모여 장기기증이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그 기적의 순간이 오길 바란다.
2025-06-15 14:41:02
[들리지 않는 SOS, 가족을 짊어진 아이들] "가족을 돌보면서 청춘을 반납했습니다"
지난 2021년 5월 8일 어버이날. 119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신고를 한 건 아들이었다. 당시 22살이던 이 청년은 10년 전부터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홀로 돌봐왔다. 심리적·경제적 압박을 버티지 못한 끝에, 아버지를 방치하면서 '간병살인'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 사건은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한때는 '소년소녀가장'이라 불리며 동정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청년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난 것이다.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현재도 여전하다. 대구의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은 술에 취한 어머니 대신 여덟 살 지적장애 동생을 챙기느라 지각하고 있다. 시력을 잃은 아버지의 병원 동행을 위해 학교를 결석해야만 하는 고등학생도 있다.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의 청소년들은 아픈 가족을 위해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대구시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 조사에 따르면 돌봄청년(311명) 중 절반 이상이 일상생활 도움과 생계비를 부담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를 버티는 것이 전부인 돌봄청년들은 또래처럼 미래를 계획하는 일도 쉽지 않다. 건망증을 앓는 어머니의 분리불안으로 인해 그 딸은 희망하는 대학교를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것이 사치에 가깝다는 대학생도 있다. 이렇게 가족돌봄에 내몰린 청년(13~34세)은 지난해 2월 기준, 대구에 5만1천여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시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설문조사에서 도출된 돌봄청년 추정 비율을 지역 인구에 적용해 산출한 수치다. 2022년 초 정부가 가족돌봄청년 지원대책 수립 방안을 발표했지만, 정책은 수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지원 대상을 소득 기준으로 제한하고, 이들을 지원할 인력과 전담기구는 부족하다. 매일신문은 지난 한 달간 초록우산 대구지역본부의 도움을 받아 가족을 부양하는 돌봄청년 8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하루에 반나절 이상을 돌봄에 쓰며 청춘을 반납한 이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 봤다. 이를 바탕으로 돌봄청년의 지원제도의 문제점, 해법을 담은 시리즈를 4회에 걸쳐 보도한다.
2025-06-12 18:18:00
[들리지 않는 SOS, 가족을 짊어진 아이들] 아픈 가족 손발 역할 "책 한 장 넘길 여유도 없어요"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에 가족을 등에 짊어진 청춘들이 있다. 아픈 부모와 동생, 조부모를 돌보며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가족돌봄청년'이라 불린다. 또래들과 달리 학업과 교우 관계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따돌림이 두려워 어두운 가정사를 입 밖에 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아픈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게 살아가지만, 이들이 감당해야 할 심적 부담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 시력 잃은 아버지 병원 위해 '결석' 대구 한 고등학교에서 1학년으로 재학 중인 최우민(16·가명) 군은 한 달에 한 번 학교에서 '인정 결석'을 받고 있다. 아버지 영석(가명) 씨의 병원 진료를 위해 하루를 통째로 비워야 해서다. 영석 씨는 급격히 나빠진 시력으로 사실상 실명 상태라 홀로 외출할 수 없다. 영석 씨의 눈에 문제가 생겼던 건 11년 전쯤. 따끔거림과 간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단순한 안구 질환이라 생각하고 여러 안과를 전전했지만 정확한 병명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다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가면역질환인 '베체트병'으로 인한 시력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증상 발병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왼쪽 눈 시력은 0.03이 채 안 되고 오른쪽 눈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의 두 돌이 안 됐을 무렵 이혼 후 집을 떠났다. 우민 군은 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6년 전부터 아버지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병원을 가는 날이면, 영석 씨는 안과부터 류마티스 내과까지 여러 진료과를 돌아야 한다. 우민 군은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복잡한 병원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검사실을 오갈 때는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다. 우민 군과 같은 가족돌봄청년들은 집안일의 부담도 함께 지고 있다. 지난해 대구시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이 311명의 돌봄청년을 조사한 결과, 음식 준비나 설거지를 맡는 비율은 49.2%로 절반에 가까웠다. 이는 비돌봄청년들과 비교하면 약 20%포인트 높은 수치다. 부모가 차려주는 밥을 먹어야 할 12살의 나이에 우민 군은 요리를 배웠다. 라면을 끓이며 불을 다루는 법을 익혔고, 콩나물국과 오뎅탕도 만들어 아버지 식사를 챙겼다. 집은 8평(26㎡) 남짓한 작은 공간. 조금만 쓰레기가 쌓여도 금세 냄새가 난다. 우민 군은 등교나 학원을 위해 집을 나설 때 빠짐없이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은행 업무는 초등학생 때부터 터득했다. 숫자가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자금 관리까지 도맡았다. 학생이지만 일상은 늘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간다. 모처럼 친구들과의 약속이 생길 것 같으면, 영석 씨에게 병원 예약 날짜부터 묻는다. 같은 영세민 아파트 단지에 사는 할머니(74)의 돌봄도 우민 군 몫이다. 당뇨 합병증에 교통사고까지 겹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에게 파스와 두통약을 사다 드리고 있다. 식사를 거른 날엔 죽이나 도시락을 사 들고 직접 찾아간다. 그런 사이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있다. 300만원에 달하는 치아 교정이 시급하지만 150만원의 기초생활수급비에서 아버지 병원비, 생활비 등을 제하면 치과에 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최근 들어서는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20점대에 머물던 중간고사 수학 점수가 어느새 1년도 안 돼 90점까지 오른 것. 영석 씨는 그런 아들이 자신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쓰자 미안하기만 하다. 영석 씨는 "공부 의지가 생기니까 배우기만 하면 곧잘 따라가더라고요. 제가 눈을 잃게 된 시간이 10년만 더 늦춰졌다면, 이 아이가 이렇게 자기 시간을 희생하며 살지는 않았을 텐데요... 저는 우민이가 없었다면 죽어도 벌써 죽었을 몸입니다"라고 했다. 아버지를 보는 우민 군의 마음도 복잡하다. 서울권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고 몇 년 뒤엔 군대에 가야 해서다. 자신이 없을 때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를 누가 돌볼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다. "아버지는 외출하실 때마다 제 팔을 꼭 붙잡고 걸으세요.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편하게 기대실 수 없잖아요. 제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제일 놓인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 시력이 얼마나 나쁜지 잘 몰라요. 그걸 아버지가 직접 설명해야 한다면, 제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요." ◆ 지적장애 가정에 둘러싸인 수험생 척추측만증에 지적장애 1급을 가진 오빠, 그리고 지적장애 3급인 부모. 고등학교 3학년 은현(18·가명) 양은 돌봐야 할 가족이 셋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가족돌봄청년들이 돌보는 대상자 중 '장애인'은 24.2%로, 중증질환(25.7%)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신을 제외하고 가족 전체가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은현 양의 돌봄 부담은 이미 오래전에 극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지능 연령이 7살 수준에 머무른 오빠(20)를 돌보는 일이다. 오빠는 탯줄에 목이 감긴 채 태어나면서 장애를 갖게 됐다. 수저를 제대로 사용하는 법조차 익히지 못해 식사 때마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씻는 일까지 일상 대부분을 스스로 해내기 어렵다. 오빠는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배웠다. 어릴 적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자주 맞았고, 그 모습을 그대로 배운 오빠는 이제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빠의 폭력은 시도 때도 없이 이어졌다. 아침저녁으로 약을 제때 복용하지 않으면 감정 조절이 어려운 상태다. 집 안에서 싸움 소리가 나면 책 한 장 넘길 여유조차 없다. 입시만으로도 벅찰 시기에 가정폭력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감당하는 모습은 여느 또래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루는 오빠가 갑자기 집을 나간 적이 있었어요.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몸싸움이 잠깐 있었는데, 동네가 좁다 보니 친구들이 볼까 봐 정말 무서웠어요." 그렇다고 부모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더라도 바로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해줘야 한다. 인터넷 검색부터 회원가입 등 기본적인 휴대전화 조작법까지 옆에서 알려주고 있다. 최근에는 학교 성적이 떨어지고 있어 고민이 깊다는 은현 양. 입시컨설팅을 받으며 대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하다. 수급비가 들어오기 일주일 전부터 끼니를 걱정하는 자신의 형편과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오빠의 심리·언어치료에만 매달 수십만원이 지출되고 있다 보니 사교육 얘기를 꺼내는 게 사치처럼 느껴진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학원비가 많이 올랐어요. 영어와 수학을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지금 내신이 많이 불리해요." 그렇지만 은현 양은 홀로 진학 정보를 찾으며 성공에 대한 갈망을 갖고 사회복지사를 꿈꾸고 있다. 서울권 대학 진입이라는 목표까지 세웠다. "우리 집은 정상적인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요. 제가 부모님부터 오빠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꼭 좋은 대학을 가서 과외로라도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싶어요."
2025-06-12 17:21:00
[들리지 않는 SOS, 가족을 짊어진 아이들](1)알콜 의존 엄마 대신한 11살 가장
지난달 21일 오전 8시쯤 대구 한 5층 빌라. 이곳 꼭대기층 거실에는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소주병 세 개가 말끔히 비워진 걸 보니 은혜(11·가명)는 오늘도 제시간에 등교하지 못할 것만 같다. 술에 취해 잠든 어머니 대신, 지적장애 2급인 여덟 살 동생 은호(가명)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동생.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는 데만 50분이 훌쩍 지나갔다. 은호를 복지관으로 데려다줄 차량 한 대가 집 앞으로 왔다. "엄마가 술에 취해서 잘 때면 제가 동생을 차에 태워 보내야 해요. 혼자 밖에 두면 어디로 사라질지 모르니까요. 차에 올라타는 모습까지 눈으로 직접 봐야만 발걸음이 가볍더라고요." 오전 9시쯤 학교에 도착한 은혜. 30분이나 지각했다. 1교시 수업이 한창인데 조심스럽게 교실 뒷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 술 마시다 사고 난 엄마 단속에 급급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은 은혜가 1교시 수업에 자주 지각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익숙한 질문이 들려오면 은혜는 늘 준비된 두 가지 대답을 꺼낸다. "늦잠 잤어", "아침에 일어나서 숙제하다가 등교 시간을 놓쳤지 뭐야." 차마 말하지 못한다.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엄마를 대신해 등교까지 미루고 아픈 동생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집 얘기를 솔직하게 꺼내면서 힘들다고 말하면요…저는 왕따 되거나 찐따 소리 들을 게 뻔해요!"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찾아온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뛰노는 친구들과 달리 은혜는 느지막이 일어날 엄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눈을 뜨자마자 또 술을 찾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집. 다행히 엄마는 술에서 깨어 있었다. 그제야 은혜는 한숨을 돌렸다.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커피를 사다 달라는 엄마의 부탁에 집 앞 편의점으로 나섰다. 심부름이 귀찮을 법한 나이지만 은혜는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매일 술을 드시니까요. 엄마가 직접 나서면 또 소주를 사올까 봐 불안해요. 제가 대신 다녀오면 필요한 것만 딱 사서 오니까 마음이 좀 편하더라고요" 엄마는 집안 살림에 무관심한 아빠를 대신해 생계를 도맡다가 3년 전 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기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혼 과정에서 막내 은호가 지적장애 2급 판정까지 받자 정신적 충격으로 삶을 내려놓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다 보니 주량은 소주 두 병에서 어느새 네 병으로 늘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하면서 결국 사고가 났다. 지난해 3월 만취 상태로 부족한 술을 사러 나섰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 또래들이 소주병 색깔도 모를 나이에 은혜는 술이 백해무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엄마는 왼쪽 팔 삼두근 파열에다 오른쪽 갈비뼈까지 부러졌다. 은혜는 두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엄마에게 밥을 떠먹이고 샤워도 시켜줘야 했다. 술을 끊으라고 단호히 말해야 하는 것도 은혜의 몫이었다. 모처럼 나선 외식 자리에서 엄마가 소주를 주문하자 은혜는 참았던 말을 쏟아냈다. "제발 그만 마셔." 하지만 엄마는 소주병을 비워낸 뒤 자갈이 많은 길에서 넘어졌고, 겁에 질린 은혜는 119를 불렀다. 주로 집에서 술을 마시는 엄마가 외출하는 날이면 은혜의 마음은 더욱 불안하다. 집에 언제 들어오겠다는 말조차 해주지 않아서다. 하루는 자정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아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야 엄마, 언제 들어와?" 새벽 1시가 다 되어 들어온 엄마는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은혜를 깨웠다. "나 넘어졌어, 약 좀 발라줘." 눈을 비비며 일어난 은혜는 동생이 깰까 봐 불도 켜지 못한 채, 엄마의 상처를 살펴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 동생 돌봄에 친구들과 멀리하는 은혜 엄마의 술을 단속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은혜의 하루는 동생을 돌보는 데 쓰인다. 정신연령이 3~4세에 머물러 있는 동생은 자기 의사를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울음을 터뜨릴 때면 밥을 챙겨줘야 하는 신호다. 아직 불을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은혜는 밥에 김을 싸서 동생 입에 하나씩 넣어주고 있다. 설거지를 하는 순간에도 시선은 늘 동생에게 향한다. 집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동생을 씻기는 것도 은혜밖에 할 사람이 없다. "엄마가 예전에 술을 마시다 팔을 다쳐서 연골 주사를 맞고 있어요. 무릎도 안 좋으셔서 구부리는 게 힘들다 보니, 제가 동생을 씻길 수밖에 없어요. 말을 잘 안 들어서 제 몸 씻는 시간보다 3배는 더 걸리는 것 같아요." 누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생은 가끔 은혜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를 욕을 쏟아낼 때도 있다. "놀자고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동생을 돌봐야 해서 숙제가 많다고 거짓말해요. 그런데 때리는 것부터 욕까지 들을 때면 서글퍼요. 그렇다고 몸이 아픈 엄마나 가족에 무관심한 사춘기 언니(12)가 동생을 챙길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제가 해야죠." 주말에 집에 있더라도 온전히 쉬어본 적이 없다. 동생은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던지고도 정리하지 않는다. 모처럼 치킨을 시켜 먹었던 지난달 10일에는 누나 방에서 먹겠다며 고집을 부리다 가방과 인형을 죄다 내팽개쳤다. 동생과 함께 외출할 때면 신경이 바짝 쓰인다.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지 못할 때면 자리를 박차고 달아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때문에 은혜는 외출 시 '중증장애인 2급' 안내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 "편의점에서 3천원짜리 장난감 카드가 있었어요. 우리 형편에는 너무 비싼 거예요. 그래서 못 사준다고 했더니 뛰쳐나가더라고요. 차들도 쌩쌩 오가는데 붙잡는다고 힘들었어요." ◆ "저 카페라는 곳 처음 와봐요! 원래 이렇게 이뻤어요?" 같은 달 오후 3시쯤 학교를 마친 은혜가 집 근처의 한 카페에 들어섰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지만 무엇을 시켜야 할지 모른다. 이곳 분위기가 낯설기만 하다. 고심 끝에 딸기 스무디 하나를 골랐다. 열한 살이 되도록 은혜는 한 번도 카페에서 음료를 사 마셔본 적이 없다. 매장 안에서 일회용컵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날 처음 알았다. "이렇게 카페가 크고 이쁜 줄은 몰랐어요. 친구들은 카페에서 스무디나 음료를 마신다고 들었는데 저는 한 번도 따라가 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픈 엄마와 동생의 돌봄부터 집안일까지, 어린 나이에 많은 책임을 떠안은 은혜는 또래처럼 편히 놀아본 기억이 없다. 한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춤추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몸을 다쳐가면서까지 술을 찾는 엄마 때문에 2년 전부터는 그마저도 포기했다. 부족한 게 한사코 없다지만 은혜도 꾸미길 좋아하는 영락없는 10대 여학생이다. 친구들이 새 운동화를 자랑하면 부러움을 감추기 어렵다. 200만원 가량의 기초생활수급비에서 엄마와 동생 병원비, 월세, 공과금까지 빠져나가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제가 신발 끈을 잘 못 묶어요. 집에 있는 신발은 다 언니한테 물려받은 거라 끈 달린 것뿐인데 신기 어려워요. 묶을 필요 없는 새 운동화를 갖고 싶은데... 우리는 항상 돈이 부족하니까, 저는 그런 걸 사면 안 될 것 같아요."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는 초등학교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몸이 자라면서 저학년 때 샀던 옷들이 맞지 않는다. 매일 다른 옷을 입고 오는 친구들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면, 몸에 어울리지 않는 엄마 옷이라도 꺼내 입어야 한다. 친구들과 사소한 의견 충돌 속에서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학교에서 친구랑 다퉈서 속상할 때가 있어요. 사춘기라 예민한 언니한테 말하면 싸우기만 할 것 같고, 동생은 말이 안 통하잖아요. 엄마에게는 걱정을 끼치기 싫고요. 그래서 그런 날엔 맑은 하늘을 봐요." 하늘은 은혜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마음의 피난처다. 그래서 그림장에도 쨍쨍한 파란 하늘을 잔뜩 그렸다. 그마저도 동생이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런데도 은혜는 단 한 번도 동생을 미워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의학이 더 발전해서 지적장애 2급이라는 중증 질환도 치료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런 날이 올거라 생각해요. 엄마도 술을 끊고 동생도 저처럼 건강한 하루를 보내면서 평범한 가정이 되는 그러한 시간이요."
2025-06-12 16:00:02
"최고의 어머니였다" 뇌출혈로 쓰러진 60대, 장기기증으로 3명 살려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쓰러진 60대 여성이 3명에게 생명을 나눔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달 13일 중앙대 광명병원에서 한옥예(65) 씨가 간과 신장(좌·우)을 기증한 뒤 영면에 들었다고 11일 밝혔다. 한 씨는 지난 5월 8일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이송됐다. 하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뇌사 상태가 됐다. 갑작스러운 이별로 슬픔에 빠졌던 한 씨의 가족들은 건강했던 고인의 장기로 다른 이들을 살리기로 결심했다. 자신들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위기에 처해 기적을 바라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전북 정읍에서 7남매 둘째로 태어난 옥예 씨는 늘 주변 사람들을 챙겼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녀들에겐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고인의 아들 이용 씨는 "저희에게는 최고의 어머니였다"며 "생전에 고생하시고 힘들던 모습만 기억이 난다. 하늘에 가서는 편안히 하고 싶은 일 많이 하시고 행복하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삼열 장기조직기증원 원장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며 다른 생명을 살리는 기증을 결심해 준 기증자 유가족의 숭고한 생명 나눔에 감사드린다"며 "이러한 기적 같은 일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고 환하게 밝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25-06-11 10:17:54
8월부터 신분증 발급 때 장기기증 안내…"담당 인력 교육 및 홍보 시급"
오는 8월부터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을 발급받을 때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안내받는 제도가 시행된다. 장기기증의 인식 개선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제도가 안착하려면 현장 인력 교육과 체계적인 홍보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8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8월 21일부터 주민등록증과 여권, 운전면허증, 선원신분증 등 신분증을 발급받을 때 업무 담당자로부터 장기기증 희망등록 설명을 듣게 된다. 신분증 발급 외에 재발급이나 갱신 시에도 마찬가지다. 이 제도는 지난 2023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장기등이식에관한법률'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도입됐다. 장기기증 희망등록 안내는 전국 5개 기관에서 이뤄진다.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동사무소 3천596곳과 여권 업무를 맡는 구청(257곳), 운전면허증 관련 경찰서(906곳)와 면허시험장(27곳), 선원신분증을 취급하는 지방해양수산청(11곳) 등이다. 우리나라는 생명나눔 공감대가 부족한 상황이다. 지난해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7만563명으로 전년도(8만3천362명)와 비교하면 15.3% 감소했다. 전체 기증 희망등록자는 2023년 기준 178만3천284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3.4% 수준에 그친다. 반면 미국 등 기증 선진국은 희망등록률이 60%를 웃돈다. 기증 희망등록을 취소한 사례도 증가 추세다. 지난해 등록 철회자는 4천940명으로, 9년 전인 2015년(1천751명)보다 약 3배 가까이 늘었다. 취소 이유로는 '본인의 변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가족 반대'가 뒤를 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제도가 기증 희망등록률 제고와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실효성을 높이려면 인력 교육과 홍보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인철 계명대 심장내과 교수는 "미국에서는 운전면허시험장에 가면 장기기증을 하겠냐고 묻는 절차가 있는데, 우리나라도 기증 희망등록을 안내하는 건 고무적"이라며 "담당자의 안내가 기증 희망등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어서 제도 관련 홍보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서 업무 담당자들에게 두 차례 교육을 진행했다. 처음부터 일사불란하게 운영되기는 어렵겠지만 교육을 지속할 예정"이라며 "국민들께서 장기기증 제도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제도처럼 접점이 늘어나면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5-06-08 14:54:20
[기자노트-임재환] 장기기증, 이제는 사회적 약속으로 바꿔야 할 때
"제 손으로 자식의 장기를 기증한다고 생각이나 해봤겠습니까…만감이 교차했었다고 봐야죠" 장기기증 기획 시리즈를 취재하면서 세 살배기 아들을 떠나보낸 한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이다. 그는 중환자실 앞에서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을 마주해야 했다. '가족이 세상을 곧 떠난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 기증을 결정하는 일은 감당하기 벅차다.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못한 순간에, 타인을 위해 장기를 내어달라는 말이 또 한 번 상실감을 불러일으켜서다. 대부분 유족이 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생명나눔의 기회를 흘려보낸다. 2017년부터 2023년까지 장기기증이 가능한 뇌사 추정자 통보 건수는 1만6천526건. 실제 기증된 사례는 19.5%(3천224건)에 그친다. 기증자 한 명이 평균 3개의 장기를 나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간 4만여 명이 새 삶의 기회를 잃은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장기기증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이유로는 유교적 사고가 꼽힌다.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훼손해선 안 된다는 전통적 관념이다. 많은 이들이 장기기증이 고귀한 나눔이라는 데 공감하지만, 내 가족만큼은 안 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기증 참여가 저조한 현실을 벗어나려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장기기증을 '사회적 약속'으로 여기는 인식이 국민 전체에 깔려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사례를 보면 해법이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등 기증 선진국은 '옵트아웃' 제도를 도입하면서 모든 국민을 잠재적 기증자로 간주하고 있다. 기증을 원하지 않는 사람만 거부 의사를 드러내도록 한 이 제도는 기증을 '선택'이 아닌 '전제'로 인식하게 만든다. 반면 우리나라는 기증에 동의한 사람만 장기를 적출할 수 있게 하는 '옵트인'을 택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에 비해 기증 건수가 눈에 띄게 적다. 2023년 기준 한국의 뇌사 장기기증자는 인구 100만명당 9.3명으로 스페인(49.3명)에 한참 못 미친다. 지난 2018년 박능후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우리 사회에서 옵트아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며 도입에 난색을 표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고 생명나눔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환자는 30% 이상 늘었다. 2019년 5.8명이었던 하루 평균 사망자는 2023년 8명까지 치솟았다. 애써 꺼내지 않았던 옵트아웃을 다시 논의해야 할 때다. 기증을 사회적 약속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기증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생명나눔이 일상이 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25-06-01 15:29:43
보건복지부가 뇌사자에 한정됐던 장기기증 범위를 심정지 환자까지 넓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증자 수가 줄고 이식 대기자 사망이 늘면서, 정부가 새로운 대안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신문이 최근 장기기증의 현실을 연속으로 기획보도한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본지 5월 7일자 1면·10면·11면, 5월 9일자 8면·9면, 5월 13일자 10면·11면, 5월 15일자 7면, 5월 22일자 12면 보도)의 결실로 해석된다. 28일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장기등의 기증 및 이식에 관한 종합계획 수립 연구'에 따르면, 정부는 심정지 후 장기를 기증하는 'DCD' 제도 도입을 검토 중이다. DCD는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으로 심정지가 온 경우, 일정 시간이 지나 사망으로 판단되면 장기를 기증하는 방식이다. 뇌사자에 제한된 현행 기증 체계가 확대되는 셈이다. DCD가 검토되는 배경으로는 뇌사 기증자 감소가 꼽힌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따르면 2017년 515명이었던 뇌사 기증자 수는 지난해 397명으로 줄었다. 기증자가 감소하면서 이식 대기 중 사망하는 환자는 늘었다. 2019년 2천145명이었던 사망자는 2023년 2천907명으로 35.5% 증가했다. 같은 기간 하루 평균 사망자는 5.8명에서 7.9명으로 늘었다. 복지부는 DCD가 도입되면 기증 건수가 크게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한이식학회에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제도 도입 첫해에는 뇌사 기증을 포함한 전체 기증 건수가 637건, 5년 차에는 775건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과 유럽 등 기증 선진국에서는 이미 DCD가 주요한 기증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 벨기에 등 일부 국가는 전체 장기기증의 약 50%가 DCD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조원현 계명대 동산병원 교수(이식혈관외과)는 "DCD로 기증자가 늘어나는 건 당연하고 학계에서도 요구를 많이 했다"며 "외국 사례를 보면 DCD는 도입 이후 증가율이 가파른데 정부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건 반가운 소식"이라고 말했다. DCD가 실현되기 위해선 현행법 개정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한다. 우리나라 '장기등이식에관한법률'은 장기기증 범위를 사실상 뇌사자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3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DCD 도입을 위해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과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두 법안 모두 2년 가까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DCD가 이뤄지면 기증 수술이 30%가 증가할 거라는 연구 용역 결과가 나왔다"며 "법령과 시행령, 시행규칙부터 세부적인 지침 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5-05-28 15:19:51
뇌사 장기기증·인체 조직기증으로 100여명에게 희망 준 40대 엄마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쓰러진 40대 여성이 뇌사 장기기증과 인체 조직기증으로 100여명에게 희망을 주고 하늘의 별이 됐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 3월 22일 인하대학교병원에서 이지혜(43) 씨가 가족의 동의로 심장과 폐, 간, 신장(양측)을 기증하고 5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렸다고 27일 밝혔다. 인체조직도 함께 기증하면서 기능적 장애를 앓고 있던 환자 100여명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선물했다. 이 씨는 같은 달 18일 집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긴급히 이송됐다. 의료진의 적극적인 치료에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뇌사상태에 빠졌다. 가족들은 이 씨가 생전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했기에, 마지막 가는 길에도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떠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증을 결심했다. 인천에서 3녀 중 장녀로 태어난 이 씨는 밝고 활동적인 성격이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먼저 다가가 도움을 건네기도 했다. 이 씨는 23살 무렵, 아버지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힘든 시기에도 장애인과 어린아이를 돕는 봉사 동아리 활동을 했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삶의 끝에서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생명나눔을 실천 해주신 기증자 이지혜 님과 유가족분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드린다"며 "기증자와 유가족의 사랑이 다른 생명을 살리는 희망으로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25-05-27 11:55:50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5) 더 많은 생명나눔이 이어지기 위해선…법·제도 개선+인식 변화 시급
장기기증은 인간이 베풀 수 있는 가장 숭고한 나눔이다. 우리나라는 문화적 요인과 낮은 인식으로 뇌사 장기기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7년간 뇌사 추정자로 통보된 1만6천526건 중 실제 기증으로 이어진 사례는 19.5%(3천224건)에 그친다. 기증 문화 확산을 위해 유족들까지 나서고 있지만, 제도적 한계 등 기증 활성화를 저해하는 요인이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의료진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국내 장기기증이 나아가야 할 길이 멀다고 진단했다. 동시에 개선을 위해선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로드맵 마련을 강조했다. 〈strong〉◆ 딸 장기기증하고 돈 얼마 받았냐는 말에 인식 개선 앞장〈/strong〉 2년 전 스노클링 도중 뇌사에 빠진 딸 건혜 씨의 장기를 기증한 어머니 김보정(57) 씨는 지난해부터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소속 생명나눔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법무사 사무실 사무장으로 근무하던 그가 강사 일까지 병행한 것은 딸을 위해서였다. 기증 소식이 알려졌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 무서운 걸 왜 했냐'는 말을 들었다. 보정 씨는 "사랑하는 딸이 세상에 오래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장기기증으로 돈을 얼마 받았냐는 처참한 질문까지 들었다. 생명을 나눈 딸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정 씨가 마주한 교육 현장에선 장기기증을 처음 접한 학생들이 많았다. 뇌사 장기기증은 타인 사이에서 이뤄지지만, 학생들은 가족 간 주고받는 생체 이식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 교육을 진행하면서 보람찬 순간도 많았다. 무관심해 보이던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면서다. 그는 "100명 중 1명이라도 장기기증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14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아들 기석 군을 기증하고 생명나눔강사로 전직한 김태현(63) 씨도 기증 문화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그가 다녀간 학교만 80곳, 마주한 학생들은 1만명에 달한다. 태현 씨는 "기석이는 강연을 듣는 학생들과 같은 나이에 장기를 기증했다. 수업 시작 전 기석이 사진을 먼저 보여주면 아이들이 쉽게 감정이입하고 수업에 몰입하게 된다"고 했다. 학생들의 반응을 반영해 교육 자료도 끊임없이 수정하고 있다. 그는 성인들에게도 교육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기증의 의사결정권자이기 때문이다. 태현 씨는 "기증의 최종 결정권은 40~60대에게 있다. 본인이 기증자가 될 수도, 가족의 기증을 결정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연령대의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strong〉◆ 기증 활성화를 위해선 넘어야 할 장애물〈/strong〉 국내에서 장기기증 활성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옵트인(opt-in)' 방식이다. 생전에 본인이 명시적으로 동의한 경우에만 기증 동의자로 보고 있다. 반면 장기기증률이 높은 유럽 국가들은 모든 국민을 잠재적 기증자로 보는 '옵트아웃(opt-out)'을 채택하고 있다. 예컨대 스페인은 1979년 장기이식법을 제정하고 기증 거부자만 동사무소에 등록하도록 했다. 그 결과 2023년 기준 인구 100만명당 기증률이 49.3명으로 우리나라(9.3명)의 5배를 넘는다. 프랑스도 1976년부터, 영국은 2020년에 옵트아웃 제도를 도입해 기증을 사회적 문화로 확산했다. 2018년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 역시 뇌사 장기기증 건수를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이 제도는, 뇌사에 이를 수 있었던 환자가 기증자로 전환될 기회를 잃게 만든다. 생전에 고인이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하더라도 기증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계도 있다. 현행 '장기등이식에관한법률'(장기이식법)에 따르면 뇌사 판정을 받은 후 가족의 기증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오는 8월 관련 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가족 의사가 없더라도 기증이 가능해졌는데, 이도 무연고 뇌사자에만 그치고 있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생전에 기증 희망등록을 한 뇌사 추정자는 308명이었으며, 이 중 81명이 보호자 반대로 기증이 무산됐다. 전체의 약 26%에 해당하는 수치다. 여기에 지난해 불거진 의정갈등도 영향을 미쳤다. 뇌사 추정자를 발굴해 온 전공의들이 병원을 대거 이탈하면서 기증 건수가 급감한 것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월부터 8월까지 신장·간장·췌장·심장·폐 등 5대 장기이식 건수는 835건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1천82건)보다 22.8% 감소했다. 조원현 계명대 동산병원 이식혈관외과 교수는 "이전에는 뇌사 추정자가 발생하면 전공의가 담당 교수에게 알렸지만, 지금은 그러한 의료 인력이 없다"며 "교수가 직접 뇌사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살펴야 하는 상황인데, 수술 등으로 자리를 비울 때가 많다 보니 기증 진행 과정이 늦어지고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strong〉◆ 생명나눔 확산…제대로 된 로드맵 만들어야〈/strong〉 전문가들은 장기기증자 범위를 확대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선 뇌사자에 제한된 현행 기증 체계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심정지 이후 장기를 기증하는 'DCD'(순환 정지 후 장기기증)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는 심장이 멈춘 뒤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장기를 득하는 방식으로, 기증 선진국에서는 기증자 범위를 넓히는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은 "스페인과 미국, 우리나라를 제외한 아시아권 등에선 DCD를 합법화하는 추세다. 해당 나라들에서는 장기기증 비율 중 DCD로 인한 게 3분의 1이나 된다"며 "그런 부분에서 우리나라는 10~20년 뒤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학회에서도 법제화를 추진 중이지만 굉장히 시급하다"고 말했다. 장기기증에 대한 개인의 생전 의지를 확인하는 장치 마련도 필요하다. 김인철 계명대 심장내과 교수는 "미국은 운전면허증을 발급하거나 갱신할 때 장기기증 의사를 묻는다. 이런 제도를 통해 기증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들고, 생전 의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증 캠페인 전략도 보다 정교해져야 한다. 국민대 한 박사과정 논문에 따르면 이타적 성향이 높은 집단이 장기기증에 대한 행동 의도에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헌혈과 불우이웃돕기 등 공익 캠페인이 이뤄지는 현장에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안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분석이다. 기증자와 유족들을 영웅으로 대접하는 사회적 예우가 확대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동엽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는 "현재는 기증하면 그 가족에게 '생명나눔증서'를 우편으로 보내는 수준"이라며 "해외처럼 기증자 가족을 정기적으로 초청하거나 감사장을 직접 전달하는 공식 행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기증자들을 추모하는 공원도 많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시가 동작구 보라매공원에 국내 최초 장기기증기념공원을 조성한 것에 이어 여러 지역으로의 확산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 이사는 "공원을 조성해 한 사람의 기증이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기증 관련 부정적 인식은 줄어들 것"이라며 "유족 역시 자신의 선택에 대해 긍정적인 확신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증에 대한 가족 간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송윤진 서울대 법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뇌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든데 그 순간에 장기기증을 결정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중환자실 앞에서 고민하기보다 평소 가족 간 충분한 대화로 기증 의사를 공유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5-05-21 17:46:29
생명나눔강사 "타인을 위해 생명을 나눈 영웅들"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5)
"우리 사회에는 타인을 위해 생명을 나눈 영웅들이 존재합니다" 지난 4월 11일 대구 달성군 천내중. 장기기증 활성화와 인식개선을 위한 교육이 열렸다. 생소한 주제를 접했던 학생들은 장기기증이야말로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나눔이라는 데 공감을 나타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코다)은 장기기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 일반인 대상으로 '생명나눔강사'를 양성하고 있다. 2019년 1기를 시작으로 현재 4기까지 수료했고, 전국에 162명의 강사들이 청소년 등에게 교육을 펼치고 있다. 2023년 기준 739곳 학교에서 강의가 이뤄졌으며, 누적 수강생은 24만307명에 달한다. 이날 천내중 전교생 247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교육에서는 장기기증 개념부터 ▷뇌사 개념 ▷뇌사와 식물인간 차이 ▷실제 장기기증 사례 ▷기증자 예우 등이 다뤄졌다. 기자가 찾은 천내중 3학년 3반 교실. 모니터에서 장기기증자의 생전 영상이 나오자 22명의 학생 모두 말없이 화면을 응시하며 집중했다. 일부 학생은 기증 절차 등을 꼼꼼히 메모하기도 했다. 3학년 남혜인(16) 양은 "한 명의 장기기증으로 최대 9명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새 생명을 심어주신 수많은 기증자분께 감사와 애도를 표하고 앞으로 살아갈 우리 모두가 이들을 영웅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준우(16) 군도 "장기기증은 의학 드라마에서나 접해봤는데 그 숭고한 의미와 기증자 예우들도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며 "당연시 여겨지던 내 몸속 장기들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어주는 분들이 정말 존경스럽다"고 했다. 생명나눔강사들의 교육은 실제로 장기기증 문화 확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3월 25일 경주 효청보건고에서 교육을 받았던 엄태웅(17) 군은 수업 이후 부모님께 장기기증 의사를 전했다. 그러다 올해 1월 9일,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태웅 군은 5명을 살리고 하늘의 별이 됐다. 이윤정 생명나눔강사는 "남편이 장기구득 코디네이터인데, 환자 보호자들께서 너무 불편해하지 않아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강사 일을 시작했다"며 "장기기증 교육이 이뤄지는 미국과 유럽 등 해외와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부족한 현실이다.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가족과 기증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강사로서의 가장 큰 목표"라고 말했다.
2025-05-21 16:04:09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4) "우리 아가, 생명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엄마가 욕심내서 미안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숱하게 바라본 코디네이터들도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이 있다. 유족의 깊은 슬픔 앞에서 차마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던 순간들, 그 안타까운 이야기들을 모았다. 경수 씨는 장기구득 코디네이터 3년 차에 만난 생후 5개월 슈퍼맨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이 아기는 팔삭둥이로 태어나 몸무게가 5㎏이 채 되지 않았다. 너무 가벼운 상태에서 뒤집기를 하다 호흡이 멎었고, 응급실에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결국 뇌사 판정을 받았다. "아기가 심장 이식 수술을 앞두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수술실이 춥다고 들었다. 우리 아기가 사람을 살렸으니 영웅'이라며 슈퍼맨 티셔츠를 사 오셨어요. 수술이 끝나면 꼭 입혀달라고 하셨는데 그때 저는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소생 가능성이 없었지만 애끓는 마음으로 연명 치료를 이어간 부모도 있었다. 체조 도중 사고로 쓰러진 13세 학생의 부모는 기증 여부를 두고 오랫동안 망설였다. 아이의 맥박이 빨라지고 부정맥까지 나타나면서 끝내 마음을 다잡고 어렵게 기증을 결심했다. "수술 전에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속삭였어요. '우리 아가,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는데 엄마가 욕심을 너무 부렸어. 미안하고 지금까지 잘 버텨줘서 너무 고마워…'라고 하셨죠. 가족분들의 기증하려는 마음과 환자를 포기할 수 없는 마음 모두 이해가 됐어요." 민애 씨가 근무 중인 계명대 동산병원에서도 가슴 아픈 장면이 있었다. 뇌사에 빠진 10대 학생의 장기기증이 결정되면서 수술실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아이의 어머니가 갑자기 멈춰 세웠다. "우리 딸 손이 아직 따뜻해요…뇌사판정이 잘못된 거 아닌가요, 뇌가 죽으면 손이 차가워야 하잖아요.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지 아까 했던 뇌사 검사를 한 번만 다시 해주세요…"라는 통곡이었다. 꿈이 의사였던 한 학생의 사례도 잊히지 않는다. 아이가 뇌사에 빠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부모는 아이의 장래희망이 의사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뜻처럼 누군가를 살리는 선택을 했다. 기증을 앞두고 어머니의 마지막 인사 편지가 낭독되자 민애 씨를 비롯한 의료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자녀가 장기기증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그 마음을 너무나 이해하기에 말을 붙이기보다 눈물로 그리고 가슴으로 함께 울어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2025-05-14 16:25:42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4) "죽음 끝에서 묻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들을 면담하고 있습니다. '내 가족이 곧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들에게 장기기증 의사를 묻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조차 조심스럽지만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한 생의 마지막이 또 다른 생명의 내일이 될 수 있도록 해주겠냐고. 불쾌하다는 항의부터 때로는 분노를 온몸으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조차 꺼낼 수 없는 이들은 장기구득 코디네이터들이다. 기적의 시작점에 선 코디네이터들은 병원 곳곳을 오가며 생명나눔의 문을 두드린다. 〈strong〉◆ 간호사에서 코디네이터가 되기까지〈/strong〉 김경수(37) 씨는 보건복지부 산하의 한국장기조직기증원(코다) 소속 장기구득 코디네이터다. 12년 차 베테랑으로 현재 영남권역 과장을 맡고 있다. 뇌사 추정자가 발생한 병원은 코다에 통보를 해야 한다. 이때 해당 병원으로 출동해 보호자 면담부터 장기를 구득하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다. 보호자에게 최종 동의를 받으면 1·2차 뇌파 검사부터 뇌사 판정, 장기 적출 수술까지 모든 과정을 조율하고 있다. 전국에 경수 씨와 같은 구득 코디네이터들은 55명이다. 경수 씨의 첫 시작은 간호사였다. 2012년 울산대병원에서 근무하던 도중 뜻깊은 장기기증 현장에서 중심이 되고 싶었다. "장기기증을 위한 수술실이었지요. 일반 수술은 4명 안팎의 의료진이 참여하지만, 기증 수술은 장기별로 의사들이 직접 투입돼 10명 이상이 움직입니다. 그 복잡한 과정을 매끄럽게 조율하는 코디네이터 역할에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생명을 잇는 데 직접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기구득 코디네이터가 되기 위해선 400병상 이상 병원에서의 2년 근무 경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2014년 7월 1일부터 코디네이터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가 지금까지 면담한 가족만 1천건이다. 한 해에 20여 건이 경수 씨의 면담을 통해 기증이 이뤄지고 있다. 〈strong〉◆ 장기기증 동의서 한 장을 위해 교도소까지〈/strong〉 신입이었던 1~2년 차에는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장기구득 면담에서 '정보 전달'에만 급급하면서 기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었다. "뇌사란 무엇이고 장기기증 절차를 설명한 뒤 동의 여부를 물었어요. 그런데 이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면담 대상은 사랑하는 가족을 눈앞에서 떠나보내는 사람들이다. 기증 정보를 전하기 전에 그들의 감정을 공감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자식이나 배우자를 잃고 눈물조차 멈추지 못할 땐, 그저 충분히 기다려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기증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분들이 저희를 경계하는 마음, 잘 압니다. '아파서 누워있는 환자에게 칼을 한 번 더 들이미는 게 말이 되냐'는 인식이 많죠.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위로를 건네야 합니다." 아픔을 같이 공감하기 위해선 1부터 100까지 경우의 수를 고민하고 있다. 경수 씨는 면담 전에 환자의 나이, 성별, 사고 경위 등을 살핀다. 의료진에게 보호자의 정서적 상태나 예민한 사안을 미리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준비 과정이다. 장기기증을 빠르게 결정할수록 이식 가능한 장기의 수는 많아진다. 그럼에도 유족을 재촉해선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장기기증은 남겨진 가족들이 평생 안고 가야 할 선택이에요. 그만큼 시간을 들여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장기기증은 최대 9명의 생명을 살릴 정도로 고귀하지만, 실제로 면담의 3분의 2는 최종 동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동의서 한 장'을 얻기 위해 지역 곳곳을 누비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장기기증은 선순위 보호자 동의를 받아야만 해요. 포항에서 뇌사자가 발생했는데, 최종 동의권자가 거동이 불편한 분이셨어요. 2시간을 달려 영주까지 다녀왔죠. 동의서 하나를 받으려고 보호자가 복역 중인 교도소까지 간 적도 있습니다." 경수 씨는 10년이 넘도록 코디네이터로서 일하면서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장기기증이 생명을 잇는 나눔이라는 것을 넘어, 남겨진 가족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느껴왔기 때문이다. "저희 기증원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기증자 가족을 모시고 있어요. 유족분들이 '우리 아들 기증한 게 정말 큰 위로가 됐고, 그 힘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고마워요'라고 말씀하세요. 우리의 일이 기증자 가족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게 됐어요."
2025-05-14 16:25:09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4) "내 몸보다 소중한 타인의 장기들" 생명의 숨결 불어넣는 이식 코디네이터
"기증자가 선물해 준 장기를 제 몸보다 더 소중히 여겼어요. 생명이 꺼져가던 환자가 건강을 되찾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 코디네이터라는 일이 그렇게나 보람찹니다."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민애(37) 씨의 이야기다. 2011년 간호사로 근무했던 그는 신경외과와 응급실을 거친 뒤 2019년부터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이식 대기 환자들 케어에 24시간 초긴장 장기이식 코디네이터의 하루는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건강 상태를 살피는 일로 시작된다. 이식 수술은 기증자가 나타나면 급하게 진행된다. 이때 대기자의 몸 상태가 준비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민애 씨는 1천500여 명의 환자 검사 일정을 확인하고 필요 시 검진을 조율하고 있다. 전국 어느 병원에서든 뇌사 기증자가 나타나면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코노스)으로 보고된다. 민애 씨는 실시간으로 코노스를 통해 환자들과 적합한 기증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먼저 기증자 검사결과를 보고요. 장기에 따라 다르지만, 혈액형부터 백혈구 항원 교차 검사결과를 확인해야 해요. 다음으로 이식 가능한 상태인지 등 여러 가지 상황을 모두 고려해서 매칭을 진행합니다." 기증과 이식이 언제 성사될지 예측이 어려워서 항상 비상 대기다. 특히 당직 주간에는 24시간 호출에 대비해야 한다. 매칭이 이뤄지면 이식 대기자 상태를 확인해야 하기에, 한밤중이라도 연락을 취한다. "한 번은 신장 이식이 가능한 환자가 있었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애가 탔어요. 어렵게 보호자와 연락이 닿아 간신히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죠." 이식을 받은 수혜자들의 건강 상담도 이어진다. 당직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동안엔 새벽에도 수시로 연락이 온다. "장기를 받으신 분들은 면역 억제제를 꾸준히 복용해야 해요. 약을 제때 먹지 못했을 때의 대처법부터,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등 이식 후 관리법을 많이 여쭤보세요. 이런 응대도 코디네이터의 업무 중 하나입니다." ◆ 장기가 담긴 아이스박스는 손으로만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는 뇌사자가 발생한 병원으로 직접 가서 장기를 이송해온다. 보통 장기는 60ℓ 크기의 아이스박스에 담아 오는데, 얼음까지 채워지면 성인 남성도 들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민애 씨는 후배들에게 꼭 당부하는 것이 있다. 아무리 무겁더라도 아이스박스에 발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 "장기 적출 수술을 진행할 때 보호자에게 다른 곳에서 기다려달라고 안내해요. 하지만 가족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어 하시죠. 아이스박스가 무거워서 발을 지렛대 삼아 들어 올리면 '내 가족의 장기를 함부로 다룬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요." 수술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표정 관리도 중요하다. 작은 미소 하나도 유족의 눈에 띌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신입 코디네이터들에게는 '미소 금지'를 법처럼 가르치고 있다. 7년 차에 접어든 지금도 장기를 포장하는 순간만큼은 여전히 신경이 바짝 쓰인다. "혹시 장기를 잡을 때 힘이 들어가서 멍이 들지는 않을지, 포장할 때 얼음을 많이 넣어서 얼지는 않을까, 장기를 넣는 봉지를 느슨하게 묶진 않았는지…늘 머릿속으로 점검하면서 움직여요." 장기이식에는 '허혈시간'이라는 골든타임이 있다. 혈류가 끊긴 장기를 이식받는 몸에 넣기까지의 시간으로, 장기의 생존 가능성이 결정된다. 장기별로 허용되는 시간은 다르다. 심장은 단 4시간 안에 이식이 돼야 할 정도로 응급도가 높다. 폐 6시간, 간 12시간, 췌장 14시간, 신장은 24시간 이내에 이식이 이뤄져야 한다. 기증자 병원과 수혜자 병원 간 거리가 멀수록 동선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짜느냐도 중요하다. 실제로 2021년 1월 13일,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적출한 심장을 서울 지역 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기상 악화로 헬기 이송이 불가능해지면서 4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KTX뿐이었다. 이마저도 제시간에 출발하기 어려워 놓칠 뻔했으나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협조, 승객들의 보이지 않는 배려로 열차 운행 시간을 3분 지연 운행했다. 다행히 이식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한 생명이 삶의 기회를 다시 얻었다. 민애 씨는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로 일하며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으로, 수혜자들이 기증자에게 감사함을 전할 때를 꼽았다. "수혜자 중 한 분은 자신의 이식 수술 날을 기증자의 기일로 여기며 물을 떠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해요. 어떤 분은 기증자의 집이 동서남북 중 어느 방향인지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하셨죠. 매일 그쪽을 향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요. 그 마음을 들을 때마다 제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낍니다."
2025-05-14 16:25:01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자발적 시민봉사자 '생명나눔 가디언스' 모집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이하 기증원)이 생명나눔 문화 확산을 위해 자발적 시민 봉사자 '생명나눔 가디언스'를 모집한다고 12일 밝혔다. 기증원은 뇌사 추정자 또는 조직 기증 희망자 발생 시 병원으로부터 통보를 받고, 공공기관에 생명나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이번 생명나눔 가디언스 모집은 기증 인식 개선과 활성화를 위한 일환이다. 생명나눔에 관심 있는 학생과 일반인, 기업 단체 등 누구나 생명나눔 가디언스에 지원할 수 있다. 신청은 '소통24'(www.sotong.go.kr)를 통해 가능하다. 선발된 봉사자는 2025년 연말까지 개인 누리 소통망 홍보, 현장 행사 등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에 봉사 시간 인정과 활동 물품 제공, 우수 봉사자 포상도 주어진다. 이삼열 기증원장은 "생명나눔 가디언스의 선한 영향력이 인식 개선이라는 긍정적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2025-05-12 17:41:15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3) 5년, 30년 만에 세상 빛 본 사람들 "이젠 우리도 장기기증을 꿈꿔요"
생사의 경계에 섰던 수혜자들은 얼굴조차 알 수 없는 기증자에게 매 순간 감사와 미안함을 안고 살아간다. 선물 받은 삶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건강관리에 애쓰면서, 언젠가 자신들도 생명을 살리는 데 나서겠다고 다짐한다. 〈strong〉◆ 당뇨로 망가진 신장…10살 때부터 병원 생활〈/strong〉 "제 신장 두 쪽이 다 망가졌다고요?" 2013년 추석 명절에 김기욱(42) 씨가 부산대병원에서 받은 진단이었다. 10살 때부터 유전성 당뇨를 앓았던 그에게 합병증이 찾아온 것이다.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으면서 생긴 당뇨가 혈관을 손상시키고, 결국 신장 기능까지 무너뜨렸다. 기욱 씨가 진단받은 '당뇨병성 신장 질환'은 이식이 시급한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한림대성심병원과 인제대 부산백병원 등에 따르면 10년 생존율이 40%에 불과하다. "당뇨가 식습관이 중요한데 식사를 제때 챙기지 못했던 게 문제였어요. 어릴 때부터 찾았던 병원을 평생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어요." 이식을 받기까지 삶을 버티기 위해선 곧바로 투석을 받아야 했다. 이틀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 노폐물을 걸러내는 혈액 투석 대신, 기욱 씨는 배에 관을 삽입해 스스로 진행하는 복막 투석을 선택했다. 이 투석 방법은 기욱 씨를 집 안에 붙들어 놓았다. 세균 감염에 따른 복막염 위험이 있고, 20~30분씩 하루에 네 번 반복되기 때문에 외부 생활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개발자였던 기욱 씨의 일상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투석을 위해 하루 대부분을 청소에 쏟았다. 결혼 후 출가한 누나의 방을 '투석 공간'으로 바꾸고, 감염을 막기 위해 수시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야 했다. 복부에 관이 삽입된 상태라 씻는 일도 쉽지 않았다. 거품이 관으로 들어가면 염증이 생기고 다른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샤워하려면 투석 부위를 수건으로 감싸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해야 했어요. 망가진 신장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때 느꼈어요." 이식 대기 중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볼 때면 두려움이 느껴졌다. 단지 기증자만 나타나 준다면 자신도 다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따르면 뇌사자 장기를 이식받은 경우 5년 생존율이 79%, 11년 생존율은 69%에 달한다. 〈strong〉◆ 병원에서도 전무했던 동시 이식…기적같이 찾아온 선물〈/strong〉 기욱 씨는 췌장과 신장 모두 기능이 떨어져 동시 이식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두 장기를 함께 기증할 수 있는 뇌사자가 언제 나타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뇌사자 한 명이 평균 3.5개의 장기를 기증하고 있다. 췌장과 신장의 평균 대기시간이 각각 2천395일, 2천691일인 만큼 20년 가까이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속에 기욱 씨는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제가 34층 아파트에서 살았어요. 고층이다 보니 나쁜 생각도 했었죠. 그러다 하루는 살기 위해서 투석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면서 다시 힘을 내보자고 다짐했어요." 투석 6년 차였던 2018년 2월 14일. 설 연휴를 앞두고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이식 2순위입니다. 1순위분이 수술을 받지 않으면 기욱 씨 차례가 될 수도 있어요. 기대를 한 번 해보시죠." 투병 생활 동안 그토록 기다렸던 기적 같은 연락이었지만 웃지 못했다. 기증자가 교통사고를 당한 20대 초반의 여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왜 장기를 기증해야 했을까요… 제가 이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미안한 마음이 북받쳐 눈물을 쏟았다. 오전 10시 도착한 부산대병원.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기다리던 도중 '기증하려던 환자의 뇌파 파동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보다 훨씬 젊은 분이잖아요. 기적적으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면 이 사회에서도 의미가 클 겁니다." 기욱 씨는 일주일 뒤, 당초 기증 예정이었던 여성으로부터 췌장과 신장을 동시 이식받았다.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끊겼던 소변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에 네 차례 알람을 맞춰가며 투석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25년간 앓았던 당뇨 역시 사라지면서, 매일 맞아야 했던 인슐린 주사에서도 벗어났다. "제 삶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고귀한 선물입니다. 누군지 알게 된다면 찾아가서라도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매일 감사함을 전하고 있어요." 기욱 씨의 인생 마지막 목표는 장기기증이다. "과거에 당뇨를 앓아서 현재로선 피부 조직만 이식이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의학기술이 발전해서 저도 기증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strong〉◆ "나뭇잎 색깔이 초록색이라는 걸 알았어요" 30년 만에 마주한 세상의 빛〈/strong〉 나뭇잎은 초록색이고 하늘은 푸른색이라는 것을 30년 만에 다시 마주한 사람이 있다. 시력을 잃고 삶의 대부분을 확대경에 의존했던 안효숙(45) 씨의 이야기다. "8년 전이지만 아직도 생생해요. 서울성모병원에서 각막 이식 수술을 받고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 나뭇잎을 봤어요. '남들은 원래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보고 살았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효숙 씨는 7살 때 원인 모를 열병을 앓았다. 고열로 장기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진단과 함께 시력이 나빠졌다. 안경을 껴도 개선이 되지 않으면서 시각장애 5급을 받았다. 결국 시각 장애인 특수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시력이 또 한 번 안 좋아졌다. 좌우 모두 0.04로 떨어졌다. 25㎝ 거리에서 보이던 수학책 숫자들이 눈앞에 바짝 갖다 대도 흐려졌다. 확대경 없이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 "제 눈은 쓰면 쓸수록 시력이 안 좋아진다고 들었어요.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할 수도 없었는데, 병원에선 방법이 없다고 하니 정말 막막했죠…." 대학생이 된 뒤 시력은 0.02까지 내려앉으면서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레포트 작성과 시험공부로 눈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이었다. 무거운 확대경을 매번 들고 다닐 수 없다 보니 수업에서는 오롯이 청각에 의존했다. 바깥 활동은 위험이 곳곳에 존재했다. 석재볼라드(보행자 보호용 말뚝)에 부딪혀 무릎과 다리에 멍들기 일쑤였다. 주차장 입구에 설치된 차단기에 발이 걸리면서 양쪽 팔꿈치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집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다가 앞머리를 태웠다. 화재 위험으로 지인과 항상 같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눈이 틀어지면서 사시 진단을 받고 괴롭힘을 당했는데 시력이 계속 안 좋아지니까 삶이 너무 힘들었어요. 난 왜 태어나서 이렇게 고통 속에 살고 있나 생각도 했어요."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병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만나게 된 의료진은 "각막 상태가 안 좋으니 이식을 기다려 보자. 분명 잘 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힘을 줬다. 몇 달 기다리지 않아 기적 같은 이식 소식이 들렸다. 왼쪽 각막은 20대, 오른쪽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것이었다. 세상을 다시 마주하게 된 감사함은 그를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로 만들었다. "수술받고 이듬해 장기기증을 결심했어요. 비관적으로만 바라봤던 제 삶이 귀하게 바뀌었잖아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기쁨이 되려고 해요."
2025-05-12 15:32:57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3)심장 이식으로 다시 태어난 미희 씨 "생명 나눔 위해 건강관리 잘 할게요"
'뚜…뚜…' 설 연휴였던 올해 1월 28일 최미희(56·가명) 씨의 휴대전화에서 수신음이 울렸다. 발신자는 환자 미희 씨의 장기이식을 담당하는 병원 코디네이터였다. "어머니, 기증자가 나타났습니다…지금 바로 병원으로 오실 수 있으세요?" 끝내 이식으로 이어지지 않은 과거 두 차례 전화와 이번엔 달랐다. '지금 수술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몇 년간 앓았던 호흡곤란이 사라질 수 있을까. 혹시 잘못돼서 가족을 다시는 못 보는 건 아닐지.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몰려왔다. 꼭 쥔 남편 손을 끝으로 미희 씨는 10시간 동안 수술대에 올랐다. 〈strong〉◆ 산책하다 찾아온 심장병〈/strong〉 심장에 문제가 생겼던 건 2020년 9월. 대구 수성구 만촌동 화랑공원에서 산책하던 중 숨이 찼다. 뛰거나 오르막길을 걸었던 것도 아니었다. 열 걸음도 못 가서 보이는 벤치에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코로나 시기라서 마스크를 쓴 게 문젠가 싶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혔어요" 과식을 한 것도 아닌데 몸은 점점 부어만 갔다. 몸속 장기들이 부어오른 듯한 낯선 느낌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동네 한 내과를 찾았다. 초음파와 심전도 검사를 끝낸 의사는 미희 씨에게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당장 큰 대학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큰일이 났다 싶었어요. 2년마다 혈액검사부터 내시경까지 건강검진을 꾸준히 받았는데 심장은 한 번도 검사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확장성 심근병증'과 '심부전'이었다. 미희 씨는 장기에 염증을 일으키는 류마티스 다발성 근염을 앓고 있었는데, 심장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평균 생존 기간이 5년 정도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난 미희 씨는 곧장 약물치료에 들어갔다. 병원 안팎을 수시로 오가면서 본격적인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매일 시간을 맞춰놓고 약을 먹어도 쉽사리 호전되지 않았다. 호흡곤란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고 일상생활 모든 것이 불편해졌다. 20m 길이의 횡단보도를 제때 건너본 적이 없다. 남들에게 똑같은 30초의 시간이지만 미희 씨에게는 더욱 빠르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파란불이 켜지지 않으면 횡단보도에 발을 내딛지 못했어요. 빨간불이 켜져도 저는 뛸 수가 없으니까요. 도로를 건널 때 항상 무서웠어요." 2년 차 무렵에는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심장 상태가 악화하면서 부정맥과 심장마비 위험까지 생긴 것. 결국 왼쪽 가슴 부분을 절개하고 심정지 시 전기 충격을 가하는 ICD(삽입형 심장 제세동기)를 집어넣었다. 심장마비 경고등이 켜졌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오늘 잠이 들면 이대로 눈 감고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남편과 결혼도 못 한 자식들이 눈에 밟힌다. 자신이 없으면 요리도 못하는 가족들이 배달 음식이나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울 모습을 떠올리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strong〉◆ 인공 심장까지 단 미희 씨…생명줄이 끊길까 조마조마〈/strong〉 한 번 나빠진 심장은 더욱 망가져 갔다. 지난해 1월에는 심장에서 혈액을 내뿜는 기능마저 사라졌다. 동시에 '이제는 이식을 서둘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기증자가 나타날 때까지 인공 심장인 엘바드(L-VAD)에 의존하며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흉곽을 여는 대수술로 인공 심장을 단 뒤, 삶의 질은 바닥을 향해갔다. 심장 펌프질을 유지하려면 왼쪽 복부에 부착된 기계를 유선으로 충전해야 했다. 이 선은 어떤 상황에서도 끊겨선 안 되는 생명줄이다. 선의 길이는 5m 남짓. 거실 콘센트로 충전하기 때문에 집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주방과 안방, 화장실 정도로 제한됐다. 잠들 때조차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뒤척이다 선이 빠질까 두려워 선잠을 청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항상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붙여야 했다. 집 밖은 더욱 제약이 컸다. 외출을 위해선 가방을 등에 메고 배터리를 넣어야 했는데 그 무게만 6㎏에 달했다. 한 번 외출에 허락된 자유는 배터리가 버텨주는 12시간 남짓. 마음은 늘 불안했다. 모처럼 외식하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순간에도 미화 씨의 시선은 배터리가 얼마 남았는지에 향했다. "배터리는 쓸수록 빨리 닳잖아요. 6시간 정도 남았더라도 집에 들어와서 충전을 해야만 마음이 놓였어요. 지인을 만나더라도 그 시간을 온전히 즐겨본 적이 없었죠." 기계에 연결된 선이 빠지는 순간 곧바로 응급상황이다. 미희 씨의 심장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6분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가족여행도 서울이나 부산처럼 대형 병원이 있는 곳만 선택했다. "하루는 카페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선이 걸린 거예요. 다행히 빠지지 않았지만 집에 와서 보니 피가 흥건해서 바로 병원으로 갔었어요." 생명줄에 의지하며 지내기를 8달이 됐을 지난해 9월,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이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소식이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반년에 한 번씩 피를 뽑으며 건강을 확인했던 시간들. 그 모든 과정이 이식을 위한 준비였음을 그제야 실감했다. 하지만 그 심장은 미희 씨의 것이 아니었다. 우선순위에서 밀려 자신처럼 심장을 기다리는 다른 환자에게 간 것. 석 달이 흘러 또 한 번 희망이 보이나 했지만 이마저도 돌연 취소됐다. 〈strong〉◆ "매일 느끼는 당신의 심장 박동, 나도 언젠간 나눠주고 갈게요"〈/strong〉 병원에서 걸려 온 세 번째 전화 끝에 미희 씨는 마침내 기다리던 심장을 이식받았다. 그의 일상은 투병을 시작했던 2020년 9월 이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지난 3월 21일에 만난 미희 씨는 "이젠 걷거나 뛰어도 숨이 차지 않는다"고 말했다. 횡단보도 앞에서도 힘찬 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달라진 점은 인공 심장을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를 집에 가둬놓고 불안하게 만들었던 '생명줄'이 드디어 사라졌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사람 몸에 하나밖에 없는 심장을 이식받았다는 것은 누군가 영면에 들었다는 의미였다. 미희 씨는 자신에게 심장을 기증한 사람이 비슷한 연령대의 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인도 자녀분들이 있을 텐데 심장병 6년 차로 죽음을 앞뒀던 저한테 새 생명을 선물해주셨어요. 제가 감사하다는 말조차 감히 꺼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죄송한 마음이 더욱 커요." 수술이 끝나고 나서는 기증자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편지 한 통을 의료진에게 건넸다. '부모님의 몫까지 열심히 살고, 귀한 심장이 힘차게 뛸 수 있도록 건강을 잘 챙기겠다'는 다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면 가장 먼저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다. 심장이 잘 뛰고 있는지 확인하며 매일 속으로 되새긴다. '전생에 나와 인연이지 않았을까요. 당신의 못다 한 심장 박동을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 당신은 사라진 것이 아니며 앞으로 나와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라고. 미희 씨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심장을 이식받아 다시 태어난 만큼, 언젠가 자신도 건강한 장기를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떠나겠다는 것이다. 그날을 위해 매일 자전거 운동을 하고, 하루 세 끼 식사를 거르지 않으며 몸을 관리하고 있다. "수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몸 상태가 회복되면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할 거예요. 화장하면 어차피 한 줌의 재가 되잖아요. 내 몸의 일부가 다른 사람한테 가서 삶이 연장될 수 있다면 저한테도 큰 행복일 겁니다."
2025-05-12 15:32:44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2)장기기증에 서약한 아내들…남편을 먼저 승화시켰다
예기치 못한 이별 앞에서 누군가는 또 다른 생을 향한 문을 열었다. 남편과 어머니를 떠나보낸 가족들은 눈물 속에서 장기기증이라는 숭고한 선택을 했다. 이들은 기증이야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봉사라고 말했다. 〈strong〉◆ 가족여행 하루 앞두고 뇌사에 빠진 남편〈/strong〉 2012년 2월 28일 저녁 9시 무렵. 재수하는 딸을 위해 계획한 동해안 가족여행을 앞두고 고경숙(63) 씨 집은 모처럼 들뜬 분위기였다. 딸은 학원에서 마칠 때가 다 되어가는데, 직장 회식에 참석한다던 남편 임광택 씨가 통 연락이 없다. "광택 씨가 잠이 들어서 일어나질 않아요. 직접 데리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들이 대구 남구 서부 정류장 인근에 있는 회식 장소로 향했다.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이상함을 느꼈다.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고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광택 씨 몸은 축 늘어지기만 했던 것. 상황은 이랬다. 2차 회식 자리로 향하던 중 광택 씨는 계단에서 넘어졌다. 의식을 잃었지만 동료들은 잠든 줄로만 알고 자리에 앉혀뒀다. 그 사이 광택 씨를 살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명은 지주막하출혈. 뇌진탕이었다. 아들의 전화를 받은 경숙 씨는 신발이 벗겨졌는지도 모른 채 중환자실로 달려왔다. 가족여행 당일이었던 다음 날 아침. 병원 복도에 서 있던 전공의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환자분이…뇌사 상태로 보입니다." 2년 전 아들이 다니던 계명대 의대 동산병원에서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했던 경숙 씨. 막상 사랑하는 남편의 일부를 또 다른 생에 내어준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남편을 보내면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는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처음에 반대하던 딸 현아 씨도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아빠 눈(각막)은 꼭 기증해야 해. 그러면…언젠가는 아빠 눈을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잖아…." 딸의 바람대로 광택 씨는 각막을 포함해 신장, 간 등 5개의 장기를 기증했다. 시간이 흘러 서울의 한 대학병원 안과의사가 된 딸. 진료실에서 각막 이식을 받은 환자들을 만날 때마다 조용히 생각한다. '혹시 이 분이 우리 아빠의 눈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남편을 떠나보낸 지 10년이 다 되어가던 날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누군가의 기증으로 새 삶을 얻은 수혜자들의 감사한 마음이었다. 경숙 씨도 펜을 들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건강하게만 잘 살아주시면 됩니다.' 남편이 타인의 생명을 살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주변에서도 장기기증 희망등록에 나서는 이들이 생겼다. 경숙 씨는 "가족 상당수가 장기기증 서약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장기이식이 필요한 순간을 마주할 수 있어요. 기다리다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많은 만큼, 기증은 활성화돼야 합니다." 〈strong〉◆ 남편 장기기증 했다고 하니 '복 받을 거야'는 말에 눈물 펑펑〈/strong〉 "남편 장기를 기증했었어? 성애 씨 그렇게나 숭고한 결정을 하다니 당신 복 받을 거야!" 경주에서 학교 조리사로 근무 중인 이성애(51) 씨가 직장 동료에게 들은 말이다. 성애 씨는 13년 전 남편 권혁준 씨의 신장 등 장기를 기증하면서 세 명의 목숨을 살리는 결정을 했다. 혁준 씨는 경주자활센터에서 기초생활 수급자에게 쌀부터 양곡류를 나눠주는 팀장으로 일했다. 봉사 정신이 투철했던 남편은 산 중턱에 있는 수급자 한 명을 위해서라도 운전대를 잡았다. 주말에도 개인 시간을 반납하며 지역 구석구석을 다녔다. 2012년 8월 31일 금요일도 똑같은 일상이었다. 이날 성애 씨는 야근이 잦았던 혁준 씨와 간만에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을 차려놓았지만 4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던 남편. 자정이 다 되어가던 무렵 문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가건물 3층 집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혁준 씨가 쓰러져 있었던 것. 뇌부종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머리를 절개해야 할 만큼의 대수술이 이어졌다. 중환자실에서 성애 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입에서 나오는 이물질을 닦아주는 것과 몸 한 번 쓰다듬는 것이 전부였다. 입원 3일 차, '소생이 어렵다'는 말을 들은 성애 씨는 망연자실했다. 그런 그에게 장기기증을 권한 건 다름 아닌 시아버지였다. "혁준이, 마지막까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나눔을 실천해보는 게 어떻겠니…?" 10여년 전에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했던 성애 씨는 혁준 씨의 숨결이 타인에게 이어지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 여겼다. 평소 나눔을 몸소 실천해 온 남편의 삶을 떠올리며, 기증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마지막 길이라 믿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건 여전히 마음이 아프지만 장기기증에 대해선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뇌사 상태였기에 기증할 수 있었어요. 만약 즉사했다면 아무런 나눔도 하지 못한 채 떠났을 거예요. 남편이 세상에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간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장기를 이식받은 수혜자를 만날 수 없지만 사무치게 그들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내 남편의 일부가 세상에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건강하신지 물어보고 싶고…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안아보고 싶어요." ◆ 장기기증한 간호사 어머니…그 딸들도 생명을 돌본다 간호 계열에 몸을 담고서야 김연주(28) 씨와 동생 정은(20) 씨는 어머니의 장기기증이 얼마나 숭고한 나눔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쓰러졌던 2012년 1월 21일. 동생보다 연주 씨는 그날의 기억이 비교적 선명하게 떠오른다. 중학교 3학년을 앞두고 봄 방학식 날 아침이었다.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살던 연주 씨는 어머니 양은영 씨의 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잘 다녀와, 우리 딸!" 매일 데려다주면서도 처음인 것처럼 환하게 웃어주던 어머니. 그날 이후 연주 씨는 더 이상 은영 씨의 배웅을 받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셋째 외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울렸다. "연주야 어머니가 쓰러졌어…빨리 병원에 와야 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간호사였던 은영 씨는 남편과 함께 중국집을 운영했고, 잠시 다녀온다던 화장실에서 1시간이 넘도록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포항선린병원. 몇 시간 전만 해도 다정하게 속삭이던 어머니의 입가에는 인공호흡기가 달렸다. 피가 순환되지 않으면서 발생한 '급성 뇌출혈'이었다.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에 천주교 신자였던 외가 식구들이 장기기증을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나눔이라는 선행을 베풀면 은영이가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거야…." 아내를 눈물로 보내야만 했던 아버지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은영 씨는 5명의 목숨을 살리고 영면에 들었다. 간호사로 생명을 살피면서 연주 씨는 새삼 깨닫는다. 서로 다른 이들의 몸에서 나온 장기가 한 생명을 다시 뛰게 한다는 것. 그 위대한 일을 어머니가 해냈다는 사실이 존경스럽다. 간호학과 대학생인 동생 정은 씨도 어머니가 장기기증을 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평균적으로 뇌사자가 3~4개의 장기를 기증한다고 들었어요. 어머니는 다섯 명을 살리셨어요. 그 자체로 정말 대단한 거죠." 끝으로 장기기증은 뇌사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라고 했다. "기증자와 최종적으로 장기 이식에 동의하는 가족들은 사회에서 영웅입니다."
2025-05-08 14:55:22
[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2)10번 유산 끝에 얻은 세 살배기가 6명을 살렸다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겠느냐는 물음을 받아든 아버지들이 있다. 슬픔 속에서도 그들은 삶을 건네는 결정을 내렸다. 자식의 숨결이 어디선가 이어지고 있으리라는 희망 하나로, 오늘도 상실의 아픔을 다독이며 견뎌내고 있다. 〈strong〉◆ 10번의 유산 끝에 얻은 아들〈/strong〉 "지금 의사 좀 봐야 해요! 빨리요!" 2010년 8월 21일 밤 10시. 환자들이 눈을 붙인 시간 서울대병원 병동에서는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들 희찬이의 숨소리가 끊긴 걸 알아차린 아버지 홍주 씨의 절규였다. 호출을 받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동으로 허겁지겁 뛰어왔다. 세 살배기밖에 안 된 희찬이의 가슴에는 의료진의 큼지막한 손이 덮였다. '하나…둘' 심장 마사지를 반복하는 손끝. 희찬이의 생명을 붙잡을 유일함이라 믿었기에 홍주 씨는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었다. 작은 가슴이 세게 짓눌릴 때마다 여린 몸이 부서지는 건 아닐지 두려움이 차올랐다. 병상이 흔들릴 정도로 응급처치가 이어졌지만 희찬이는 심정지로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희찬이의 입과 코에는 말기 암 환자에게나 꽂힐 법한 호스들이 셀 수 없이 달렸다. 홍주 씨는 "단순 감기로만 생각했는데 심정지라니 믿을 수 없었어요. 어렵게나마 얻은 귀한 아들인데 절망적이었어요" 희찬이는 홍주 씨 부부가 열 번의 유산 끝에 얻은 아이였다. 결혼 15년 만에 품은 첫아들이었다. 그 때문에 희찬이가 세상에 첫 울음을 터뜨리던 2007년, 친인척은 물론 이웃들까지도 한마음으로 축복해줬다. 이름도 '희망찬 삶을 살라'는 뜻을 담아 '희찬'이라 지었다. 종합학원을 운영한 아빠를 빼닮은 희찬이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인지력이 뛰어나 알파벳 조립도 척척 잘 해냈다. 거실에 놓인 알파벳 그림에 희찬이의 손이 가지 않았던 건 이틀 전인 19일 목요일이었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감기에 걸렸다. 어학원을 운영 중인 아내가 여름방학을 맞아 학생들과 영국으로 떠났고, 홍주 씨는 홀로 희찬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던 것. "이 어린 것이 무슨 일로 이토록 의식이 없는 걸까요..." 홍주 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중환자실 면회 시간에 희찬이 손을 꼭 잡아주는 것밖에 없었다. 〈strong〉◆ 장기기증이라는 소중한 가치…"아들이 이 땅에 온 이유가 있어요"〈/strong〉 "희찬이 뇌가 많이 다쳐서 소생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입원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의사는 홍주 씨에게 최후통첩 같은 말을 건넸다. 심정지로 산소 공급이 끊기면서 뇌가 손상된 것. 홍주 씨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책했다. 아들의 불규칙한 숨소리를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리고 손을 썼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는 울분이었다. 희찬이가 뇌사 가능성에 접어들면서, 절차에 따라 장기기증 의사를 확인하는 '장기구득 코디네이터'가 홍주 씨를 찾아왔다. 뇌사 개념부터 기증 가능한 장기를 조목조목 읊어가는 찰나에 홍주 씨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족이라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마련입니다. 장기기증을 동의하겠다고 하면 우리 희찬이의 생명을 포기하는 거잖아요." 면담을 뿌리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홍주 씨. 면회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자꾸만 코디네이터의 말이 떠오른다. '시간이 흐르면 기증할 수 있는 장기 수는 줄어든다'는 것. 열 번의 유산 끝에 얻은 아들을 허무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주 씨는 다시 전화를 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우리 희찬이 장기기증 하겠습니다." "고민이 많이 됐어요. 자식을 포기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나서 이 세상에 남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했어요. 만감이 교차했었다고 봐야죠." 6명의 생명을 살리고 하늘의 별이 된 희찬이를 매일매일 그린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아들의 장기기증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다. "삶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이잖아요. 희찬이가 놓아준 징검다리를 딛고 다시 살아난 이들이 모두 제 자식이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장기기증으로 아들이 승화되면서 함께 숨 쉬고 있다고 위로합니다."
2025-05-08 14: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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