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일성의 일생

김일성은 한반도 분단이후 49년동안 북한을 이끌어온 명실상부한 북한의최고 지도자이다.김일성은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공식적인 직책을 갖고 {위대한 수령}이나 {민족의 태양}으로 불리어진 절대권력자였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 두끼먹기 운동을 벌이면서도 주민들로 하여금 낙원에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지닌 살아있는 신, 그것도 모자라 북한의 현대사를 자신의 가계사로 날조해놓고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김일성은 1912년4월15일 평양의 농가에서 김형직과 강반석 부부의 세아들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성주(또는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때 일성으로 바꾸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대부분 날조되거나 지나치게 미화됐기 때문에사실과 허구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가 태어난 장소도 평양과 평안남도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등 두가지로 엇갈리고 있으며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일성에서 다시 일성으로 바꾸었다는 얘기도 있다.평양의 김일성 생가는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모든주민들이 참배해야 하는 성지가 돼있다.

대동강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풍경이 수려한 만경대는 김일성이 어린 시절타고 놀았다는 나무와 그네터, 씨름마당, 미끄럼틀, 학습장등이 잘 가꾸어져있는 공식적인 김일성의 생가인 것이다.

김일성의 만경대 생활은 그러나 아주 짧은 것이었다. 가족들이 1919년 중강진에서 20리 떨어진 압녹강 건너편의 만주땅 림강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모아산으로 더 잘 알려진 림강에서 중국계 학교인 모아산소학교에 입학했으나 1921년에는 다시 가족들을 따라 팔도구로 옮겨 팔도구소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이 학교에서의 생활도 4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중국계 학교인데다 봉건적인교육등으로 인해 그의 부친이 아들을 더이상 그냥 둘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평양 숭실학교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팔도구소학교교육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은 팔도구소학교시절 백두산을 그리고 애국이라는 제목으로 {국가와백성을 위해 복무한다}는 내용의 작문을 하고 한인을 괴롭히는 중국인 학생을때려주었다고 그의 전기는 미화하고 있으나 이시절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전무하다.

어린 김일성은 부친의 결심에 따라 이른바 {배움의 천리길}을 혼자 걸어 평양근교의 외가인 칠골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에 입학했다.

프로테스탄트교인 장노파에서 세운 이 학교에는 외할아버지 뿐 아니라 외할아버지의 6촌동생이며 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강량욱도 교편을 잡고 있었다.외할아버지는 그뒤 장로가 되고 강량욱은 목사가 됐을 정도로 김일성의 외가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는데 김일성은 이시절 학교에서는 외할아버지가강의하는 기독교를 배우고 집에서는 기독교 신자의 경건한 신앙생활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론 교회에도 다녔다.

김일성은 창덕학교도 졸업하지 않은채 다시 만주로 갔다고 한다. 아버지 김형직이 1924년 만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가 호송도중 탈주했다는 소식이전해지자 1925년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단신으로 다시 만주로 갔다고 그의 전기는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은 자신의 저작선집에서 이른바 {광복의 천리길}이라고 이름지어진 이때의 만주행에 대해 "나는 열네살때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생각하니 어린 마음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나이에 어울리지않게 비장한 어조로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배움의 천리길}이나 {광복의 천리길}에서 김일성이 혼자서 걸어갔다는 것은 뒤에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조작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배움이 천리길}에서는 그의 부친이 동행했을 가능성이 크며 {광복의 천리길}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외할아버지가 충분한 여비를 주어 철도를 이용하고 여관에서 잠을 자며 만주로 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김일성이 만주에 도착한뒤 그들의 가족은 팔도구에서 무송으로 이주했다. 그는 여기에서 다시 무송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에는 초급과 고급과정이있는 병설학교였다. 이학교도 다른 중국계 학교와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이 대부분이며 한인은 김일성 형제들외에는 불과 몇명이 안됐던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김일성은 1926년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뒤 화성의숙이라는 한인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민족주의단체 정의부가 세운 간부양성기관이었는데 김일성은 역시이학교도 불과 4-5개월만 다니고 중국인 학교인 육문중학으로 옮겼다. 이시기에 그의 부친 김형직이 사망했다. 숭실중학 2학년을 중퇴한 한의사인 김형직은 한약방을 하면서 만주에 있는 무지한 한인들을 상대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는가 하면 공산주의운동을 미워하며 민족주의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일면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결국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를 받아 사망했는데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어른들이 아버지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차마 어린 김일성에게 얘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부친을 죽인 것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는지 모르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해됐다는 점만은 충분히 알 수 있는 나이였다. 말하자면 아버지 사망을 계기로테러리즘의 냉혹한 세계를 체득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비참하게 사망한뒤 김일성은 공산청년단체에 가입함으로써 공산주의활동을 시작했으며 바로 이같은 활동때문에 학교를 퇴학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17세때 공산주의에 대해 학습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를 갖기시작한 것이다. 그가 공산주의단체에 가입한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것 같다.김일성은 자기가 육문중학에 다닐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고전을 읽었다고주장하고 있는데 중국계 사립학교인 육문중학에서는 적어도 공산주의 교육을전혀 실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함으로써 그같은 기회를 가질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경찰이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단체의 모임을 적발했을 때 김일성은 분명히 단체의 명단에 들어있었으며 수사대상으로 추적을 받기 시작하자 학교를중퇴함으로써 그의 학교교육은 중학 2학년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일본경찰에 붙잡혀 구금됐다가 1930년 5월 풀려났다.

이후 19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 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에서 나온 전기들은 이기간동안 그가 공산당및 공산청년조직에 가입하고 수많은 학생조직을 주도했으며 길림, 장춘, 이통, 압이빈등을 여행했다고 주장하다가 최근에는 이 부분을 그의 생애에서 슬그머니빼버렸다.

대신 이기간동안 김일성은 장춘과 길림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사상교화 작업을 했다고 그의 전기들은 쓰고 있다. 그는 수많은 4년제 소학교를 세웠고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론, 변증법적 유물론, 소련과 조선의역사등에 관해 가르쳤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소년이소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마르크스를 가르쳤다는 주장을 믿을 사람은 아마없을 것이다.

김일성의 집은 김형직이 사망한뒤 마적의 습격으로 금품과 재산을 몽땅 약탈당함으로써 급격히 기울어졌으며 어머니 강반석도 1932년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후 김일성은 만주에 있는 중국 공산단 유격대에 합류해 본격적인 유격대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직속상관이자 동료였던 중국인 위증민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중국인 학교에서 배운 중국어 실력이 그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됐다.

김일성은 바로 유격대 시절 생존본능을 철저하게 몸에 익히게 된다. 그는 유격대활동을 통해 자주 패배를 경험했고 거기에서 자기의 실패를 유리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남로당출신과 연안파, 소련계 한인을제거하고 유격대활동을 함께 했던 빨치산출신들까지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면가차없이 숙청한 것은 자신이 배운 생존기술을 활용한데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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