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향토체육의 맥 명문 영남대 이끈 3인의 지도자

영남대 유도부는 지역유일의 대학팀으로 5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향토유도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영남대 유도부의 저력은 기록만으로도 쉽게 알수 있다.

전국체전 대학부경기에서 8회우승, 전국학생유도대회 5회 우승으로 각각 최다우승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외 각종 대회에서도 영남대의 우승기록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영남대유도부의 이같은 저력에는 뛰어난 선수들의 활약이 컸지만 그 이면에는 숱한 이들의 노력과 땀이 숨어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영남대유도의 뿌리는 구대구대와 청구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영남대(구 대구대)가 유도부를 구성, 전국규모대회에 최초로 참가한 것은 54년 전국체전때. 권수보씨 등 내로라하던 일반부 선수들이 영남대에 복학, 우여곡절끝에 구성된 유도부는 처녀출전한 전국체전에서 대학최강 홍익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해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영남대유도부는 각종 전국대회를 휩쓸며 명성을 높여갔지만 엄밀히 보면 50년대와 60년대이후는 선수구성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체육행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50년대에는 일반부선수들 상당수가 영남대에 편입하거나 가등록상태로 유도부활동을 한 것.

이같은 현상은 60년대 송희원교수(작고)가 유도부를 맡아 고등부 선수들이체육특기생으로 입학, 유도부를 구성하면서 사라졌다.

영남대에 특기생으로 입학한 선수는 60년 윤창희를 시작으로 윤복균 김종우윤철수 신창식 김덕수 등 영남고와 계성고 출신의 쟁쟁한 선수들이 줄을 이었다.

이때부터 영남대는 실력을 쌓아나가며 50년대 일반부선수들이 떨치던 기세를이어 향토유도의 명성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떨쳐나갔다.영남대유도부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송희원교수는 영남대 재학시절 원래투포환과 씨름선수로 활동했으나 웬만한 투기종목에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만능선수였다.

그중 유도에 특히 열정을 보이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유도부활성화에 전념했다.

그는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선수들을 질책하고 독려하는 일에는 말을 아끼지않았다.

영남대유도부 출신 설옥현씨(대구유도회 전무)는 "송선생님의 침묵은 곧 칭찬의 뜻으로 통했습니다. 조금만 잘못이 있으면 대회에서 우승하고도 꾸지람을 들을 정도였으니 칭찬은 아예 기대도 못했죠"라며 당시를 기억했다.67년12월 대구대와 청구대가 통합하면서 영남대 유도부 전력도 한층 강화됐다.

청구대는 62년부터 유도특기생을 선발, 통합당시 이미 전국강호들과 어깨를견줄 정도의 전력을 갖춘 유도부를 보유하고 있었다.

청구대 유도부가 이처럼 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팀창단에서부터 영남대로 통합할 때까지 유도부에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은 이진화교수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교수는 계성고 재학당시 최영호 선생에게서 지도받으며 주전으로 활동하다44년 일본체육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영남대 박성규교수는 "이진화선생의 유도실력은 해방직전 일제에 의해 각종유도대회가 통제되는 통에 정확한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유도에 대한 열정도 누구 못지 않게 높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라고 기억했다.

해방후 대구에 돌아와 교직에 몸을 담은 후에도 식지 않고 있던 그의 유도에대한 열정은 61년 청구대교수로 부임하면서 마침내 뿜어지기 시작했다.대구대유도의 강세로 유도부 창단에 난색을 표하던 학교측을 설득, 62년 처음으로 윤중희를 유도부 신입생으로 선발한 뒤 양영돈 강승철 이재우 강재식권재국 이일구 최정술 정장웅 등 뛰어난 선수들을 차례로 입학시켰다.단체전출전선수구성이 가능해진 67년11월 청구대는 제17회 전국학생유도대회에 출전, 단숨에 4강에 올라 주위를 놀라게 했다.

청구대는 준결승전에서 강호 경희대에 4대1로 졌지만 첫 참가로는 누가 보기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대회직후 영남대로 통합되면서 청구대는 전국대회에서 이름을 발견할 수 없게되지만 청구대유도부가 향토유도발전에 끼친 공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청구대에서 해마다 3~5명의 특기생을 뽑은 덕에 2명만을 뽑는 대구대에 진학하지 못한 고교선수들이 상경하거나 유도를 그만두지 않고도 대학진학이 가능케됐다.

통합이후 영남대 유도부가 해마다 특기생 5명을 선발하게 된 것도 청구대에유도부가 있었기 때문.

이로 인해 지역고교유도가 더욱 활기를 띠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통합이후 영남대 유도부는 송희원교수가 맡아 이진화선생은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그뒤로도 그는 유도부에 꾸준한 관심과 노력을 보였다.이후 영남대는 전국체전 전국학생선수권 등에서 꾸준히 우승권에 머물며 유도명문의 명성을 떨쳐나갔다.

74년 송희원교수의 뒤를 이어 박성규교수가 유도부를 맡게 됐다.박교수는 본격적인 유도선수는 아니었지만 유도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부친이 경찰에서 유도를 한 까닭에 일찍 유도를 접한 박교수는 경북고 재학시절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2학년때 경북학생유도연맹의 실무를 맡기도했다.

박교수는 고려대를 졸업한 이후 청구대 강사로 부임해오며 이진화선생이 이끌던 유도부에 관여하게 됐고 통합이후에도 꾸준히 유도부를 도왔다.영남대 유도부를 맡은 74년이후 유도부 발전에 몰두해온 그는 선수육성에 힘을 쏟으며 84년 영남대에 유도장건설을 추진하는 등 노력을 계속, 향토유도발전에 기여해오고 있다.

특히 지난해 그가 발간한 '경북유도80년'은 향토유도의 지난 역사를 낱낱이담은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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