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간동안 동해안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일어났던 영해기미독립만세운동이 광복 50주년인 8·15를 앞두고 그 의의를 더하고 있다.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3월18일(음력 2월17일)영덕지역 기독교인, 유림,애국청장년2백40명이 주축이 돼 영해장날을 기해 태극기를 흔들며 궐기한 3·18독립만세운동은 당시 일제의무단통치에 억눌려있던 백성들에게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고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한 의거였다.
한국독립운동사등에 따르면 영해만세운동은 당시기독교장로파였던 김세영선생(30·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이 평양신학교에 입교하러가다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되돌아와 구세군참위인 권태원선생(29·병곡면 송천리)과 모의하면서 비롯.
이들은 곧 영해를 중심으로 기독교인사를 비롯, 남세혁선생(44·영해면 괴시리)등 유림대표들의 동의를 얻어 거사일을 영해장날인 음력2월17일로 정하고 극비리에 애국청장년을 밤낮으로 규합하는등 거사전 철저한 준비를 했던것으로 일본고등경찰요사와 참가자들의 회고는 전하고 있다.거사당일인 오후1시 이들은 싸전과 주재소앞광장에서 미리 준비한 대형태극기를 높이들고 남세혁선생등이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일제히 가슴에있던 태극기를 꺼내 만세소리를 따라외치자 장날에 모여있던 상인3천명도 호응철시를 하고 합세했다.
시위대는 곧바로 주재소(영해지서), 면사무소, 우체국등에 달려가 저지하는 일본순사를 구타하고 이들건물을 점거한뒤 파괴하는등 시위가 격렬해져영덕경찰서장 무의손등 4명의 순사를 무장해제시키고 감금했으며 기독교인·정규하선생(34·영덕군 병곡면)등 5백여명은 20리떨어진 병곡까지 연도를따라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에 일본군은 이날오후 평해주둔 일본군헌병을 파견, 발포를 시작했으며이튿날 영해, 병곡, 창수, 축산등 4개면주민이 다시 영해에 집결 만세를 외치자 대구주둔 18연대기마병을 동원 해산을 종용하다 거절하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난사를 벌였다.
이로인해 임창목의사등 8명이 일본군의 총탄에 즉사하고 권정돌선생등 16명이 총상을 입으면서 이틀에 걸쳐 일본군의 간담을 놀라게한 시위는 해산됐다.
이후 일본군의 주동자색출에 남세혁, 남효직, 정규하선생등 2백여명이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손괴·상해등 보안법 위반혐의로 붙잡혔다.영해만세운동은 그러나 그후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못하다 고박순천여사, 고곽상훈선생등을 중심으로 의거탑건립추진위가 구성돼 1억5천여만원의성금을 모아 지난83년 영해면 성내3리에 고이은상선생이 비문을 쓴 의거탑을건립함으로써 빛을 보게됐다. 영덕·정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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