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끌어다 앉힌다. "기자 양반 이리 앉아. 그래 뭘 취재하는데…" 설을 며칠 앞둔 비둘기호 814호. 새벽 6시10분 강릉을 출발해 오전 10시54분에 영주에 '떨어지는' 열차다. 손녀 손을 잡고 봉화에서 영주로 목욕가던 할아버지의 '공격적인 기습'에 기자는 멍하다. 오히려 한참을 '취재' 당하곤 일어설수 있었다.
비둘기호. 이름만 들어도 서민적인 맛이 확 풍긴다. 할아버지처럼 인정이 그리운 이들이 많다. "어디 갔다 오니껴?" "석포예" "그건 뭔데" "콩요" "까만콩잉교 하얀콩잉교" "하얀콩예" "얼마친데""얼마 안됩니더" "진작 팔지" "설에 낼라꼬예"…. 스무고개처럼 짧은 질문과 답이 끝없이 이어진다. 처음 보면서도 싫은 내색없이 주고 받는 대화가 칡소쿠리마냥 투박하면서도 푸짐하다.814호 비둘기호에는 봉화와 영주 장에 나가는 해물들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앉아 있다. 오징어명태 마른가자미…. 곁을 지나니 짭짤한 바닷냄새가 난다.
3량짜리 전철 객차. 중간객차는 긴 장의자 객차다. 장에 가는 아줌마, 보건소에 나가는 할머니, 귀대하는 군인. 설 대목이라 보기 드물게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영동선은 소백산맥 오른쪽 자락에 얹혀 강릉까지 간다.
영주에서 출발해 봉화 춘양 석포 철암을 거쳐 강릉까지, 산간 마을을 지나고 바윗산과 준령을 넘어 바닷바람을 쇠는 열차선이다. 193.6km 35개 크고 작은 역을 지나는 영동선의 비둘기호. 철마다 나오는 산나물에 갖가지 해물들이 올라오고, 짠내 흙내 탄(炭)내까지 냄새도 갖가지다.이 비둘기호의 설대목 풍경이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 영동선의 비둘기호는 상하행 6편. 농번기에는 객차당 10여명, 농한기에는 50여명의 승객이 고작이다. 2백~7백원짜리 단거리 손님이 주종. 홍진광차장은 "차장 2명에 기관사 1명이지만 운임으로는 1명의 월급도 겨우 나온다"고 한다.올해 안에 비둘기호가 없어지고 통일호가 '통근열차'란 이름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다. 봉화역 유제인부역장(34)은 "영업계수로 따지면 1백원 벌려고 8백원을 쓰는 꼴"이라고 했다.사람으로 치면 고희(古稀)를 넘긴 70년대 객차, 적당한 흔들림에 철거덕거리는 소음조차 정겹던비둘기호. 옛 흑백영화처럼 마지막 향수를 뿜으며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비둘기호에서 박정희(65)할머니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영주 오후3시15분발 813호 열차. 객차한켠에서 시금치를 열심히 다듬고 있는 할머니. 얼굴주름이 깊게 패고 손등도 수세미처럼 거칠지만 당당하고 자신에 찬 것이 '터줏대감' 같은 느낌이 풍긴다.
아니나 다를까. "이게(비둘기호) 집"이란다. 만나고 싶던 그런 사람이다. 박할머니는 31년동안 거의 매일 이 열차를 타고 다니며 채소와 어물장사를 해오고 있다. 영주에서 나물을 사 도경(삼척근처 작은역)에서 팔고 다시 어물을 사서 영주나 봉화장에 내다 판다. 오가는 동안 나물을 다듬고, 가자미 양미리 명태 문어들을 손질한다. 하루 8시간 이상을 열차에서 보내니 비둘기호가 '직장'이고 '집'인 셈.
"이름이 좀 걸시지(사납다). 대통령 이름이니". 옛날 열차화물을 부치면 사람들이 '청와대로 보낼까요?'라며 농담하기도 했단다.
18세에 예천서 영주로 시집와 소장사하던 남편덕에 형편이 좋았다. 그러나 소값 파동으로 하루아침에 '쫄딱' 망하곤 남편이 위장병으로 고생하자 시작한 것이 이 장사였다.
"처음엔 사는게 겁이 났지. 이젠 겁이 안나. 보자기만 하나 들고 나서면 돼". 무엇보다 자식들이다 착하고 잘 커서 그게 재산이란다. 2남 5녀를 이걸로 키웠다. 딸 다섯 낳고 겨우 아들 둘을 낳았다. "쫓겨 날 뻔 했지"라고 해놓곤 옆에 앉은 할머니 보고 한마디 덧붙인다."내 자랑이 아니라 내가 이래도요. 두루막을 못하나 도포를 못하나 솜씨는 좋아요"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해놓곤 계면적은지 '파!' 웃는다. 자식얘기에 시집얘기가 나오니 근처에 있던 할머니들이 저마다 하나씩 얘기보따리를 푼다.
그러면서도 박할머니는 부지런히 시금치를 다듬는다. 다섯 보따리에 2백단, 얼추 60~70kg은 돼 보인다. 사온 시금치 석단을 다듬어 넉단으로 나눈다. 3천원짜리가 4천원짜리로 '알을 까는' 단계.짐 한보따리의 운임이 6백원이니까 모두 3천원에 할머니운임 2천50원. 왕복 1만원에 점심 사먹고하면 2만~3만원 벌이도 어렵다. "아이네픈(IMF)지 뭔지가 사람 잡는다"며 '뼈아픈' 한마디를 내뱉는다.
"비둘기호 없어지면 어쩌지요?"라고 물으니 "없으면 없는대로 다 살지 뭐"라며 "언젠 있었나?"고반문한다. 차장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풀어 헤쳐놓던 '좌판'이 이제 통일호로 대체되면 힘들게 됐다.
열차는 양원간이역을 거쳐 산속에 파묻혀 '하늘도 세평 땅도 세평'이란 승부역을 지난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눈 덮인 철길의 콘트라스트가 더욱 강해진다.
취재진의 종착역은 철암. 박할머니도 그동안 다듬었던 두보따리의 시금치를 철암에서 '중간 상인'에게 넘겼다. 2시간여 함께 온 것도 인연이라고 박할머니는 열차밖으로 몸을 내밀며 잘 가라는인사를 던졌다.
힘들지만 강하게 살아온 할머니의 모습에 굽은 산길을 돌아 가파르게 올라가는 비둘기호가 오버랩된다.
(특별취재반: 정지화기자.서종철기자.김중기기자.정우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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