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톨릭 대구교구 본당서 설립

1백년전, 교육적인 측면에서 대구여성의 개화를 도운 3대 교육기관은 '신명여자소학교'(대남남자소학교와 함께 종로초등학교 전신·6회 참조) '신명학교'(현 신명여고· 회 참조) '성립여학교'이다. 그러나 신명여자소학교나 신명학교와는 달리 성립여학교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이는 성립여학교가 1908년에 개설된 천주교계 '성립학교' 부설 여자부로 1910년에 더부살이 고고성을 터뜨린데다 '해성여학교'(1915년) '효성여학교'(1924년) '효성초등' 등으로 교명이 자주 바뀌었고, 여학교에서 남녀공학으로 전환된 정체성의 변동 등이 복합작용했기 때문이다.일제 병합기 이래 여성계몽과 신문화운동에 찬연한 공적을 남긴 성립여학교는 초창기 대구교구를맡은 김보록신부·소세신부, 서상돈·이근우·김찬수 등 유력 신자, 서울에서 파견된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의 아낌없는 지원에다 개화를 갈망하는 대구여성들의 열의가 어우러져 1백년 전통의교육기관으로 맥을 잇고 있다.

성립여학교를 여성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성장시킨 힘은 이 여학교를 탄생시킨 성립학교의 뿌리 '해성재'(海聖齋)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대구본당 초대주임신부로 부임한 김보록신부가1899년 현 계산성당자리에 한국적인 건축양식을 살린 십자형 기와집 성당을 봉헌하면서 부속건물로 교육관인 해성재를 함께 세웠다. 성당서당(훈장 배석규)으로 더 잘 알려진 해성재에서는 한문을 가르치면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쳐나갔고, 1901년 십자형 성당이 화재로 소실됐을때도 해성재건물은 화재를 피해 성립학교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러나 김보록신부는 '1895~1896' 성사집행 보고서에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 현재 27명이 좋은품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발전이 거듭된다면 내년에 학교를 하나 더 지어야할 것"이라고 명기돼있어 일부에서는 1895년부터 해성재가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학당은 날로 발전, 교실이 부족하여 학생들을 다 받아들일 수 없자 발전적인 해체가 거론됐다.김신부는 서당을 학교로 승격시키기위해 1908년 봄, 이근우 박진문 김상진 김찬수 김덕래 등 유지신자들과 함께 학교설립발기회를 갖고 모든 신자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신자대회를 개최하였다.그해 3월1일, 해성재는 성립학교로 바뀌어 4월1일 개교했고, 이근우(李根雨·1872~1932·사진)가설립자 겸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교감은 박진문, 학감은 김덕래 김찬수였다. 성립학교가남자학교로서 시설과 교육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1910년 3월1일 여자부를 개설하였다. 여자부는처음에는 야간학교였다.

성립학교는 남자부와 여자부 이원제로 운영됐다. 남자부는 김신부가 7년간 개인부담으로 운영하다가 1914년 3월 졸업식때 경영난으로 폐교를 선언할 지경이 됐고, 여자부 역시 재정난으로1913년 소세신부의 개인경영으로 넘어갔다.

1913년 성립여학교 첫 졸업식에서 두 명의 여학생이 감격의 졸업장을 받았다. 성립여학교는 1916년 바다의 별을 상징하는 해성학교로 개칭됐고, 20년에는 해성여자야학강습회까지 설립하여 주경야독하는 여성 개화에 열성을 쏟았다. 이어 1924년, 해성학교 여자부가 효성여학교로 개칭되었고, 이듬해인 1925년부터 효성여학교가 효성여자보통학교로 승격됐다.

초창기 이래 성립여학교는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며, 초창기에는 강부길테끌라수녀와 방스테파나수녀 등 2명의 조선인 수녀가 교육을 맡아 큰 역할을 하면서 학교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성립여학교 초대교장 이근우는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을 높이 든 서상돈과 이질간으로 식견이 높았으며, 투철한 교육정신과 실천가로 존경받으며 여성교육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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