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3년에 폐교됐다가 82년에 복교한뒤 올봄에 재폐교, 내년 봄쯤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에 재복교로 점철된 대구복명초등학교.
일제 치하에서 몽매에도 잊지못할 조국 광복의 염원을 담아 '복명'(復明)이라 이름지어졌던이 초등학교에는 대구의 개화기를 이끈 두 여성, 서주원(徐周原)과 김울산(金蔚山)여사의 육영의지의 산물이다.
1907년에 들불처럼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한푼의 기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신발이 닳도록 돌아다녔던 가정부인 서주원(이면주의 아내)과 '향이(香伊)'라는 예명을 지녔던 관기 출신의 김울산여사는 여자로서의 길은 달랐지만 '명신여학교를 이은 복명초등학교'라는 교육의 끈으로 대구·경북 여성들을 이끈 보기드문 이들이다.
김울산 여사(1944년 작고)가 지금부터 72년전인 1926년에 개교한 복명여학교의 연원은 그로부터 16년을 거슬러 1910년에 문을 연 대구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에서 비롯된다.대구 명신여학교는 1909년 1월7일 순종이 대구를 순시하면서 하사한 7천2백원 가운데 교육비로 할당된 2천원의 10%인 2백원이 종자돈이 됐다.
당시 2백원은 여성들의 개화운동을 선도하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대구지회에 돌아갔고, 마침 대구지회장은 대구여성들의 개화 계몽을 이끌던 철저한 애국여성 서주원이 이끌고 있었다.
입에 풀칠할 '땟거리'를 구하기도 힘들던 궁핍한 시절, 나라빚을 갚아야한다며 안방마님들을찾아다니며 국채보상운동기금을 모았던 열혈 애국 여성 서주원은 이 2백원에 대구유지들의기부금을 보태 남문밖 관덕정을 빌려서 1910년 8월26일 사립 대구명신여학교를 출범시켰다.설립자겸 초대 교장은 서주원, 항해 목적지는 교육을 통한 대구여성들의 개화였다.그러나 딸에게 신식공부를 시키겠다는 의식이 거의 없던 시절, 학생들은 월사금을 낼 형편이 되지 못했고, 특별나게 후원을 받기도 어려웠던 서주원은 심한 경영난으로 개교한지 일년이 채 못되는 1911년 6월14일 천도교 중앙총본부(교장 오세창)로 학교 운영권을 넘기고말았다.
선교사들이 선교를 최종 목적으로 대구 여성들의 교육개화를 이끌기위해 외국계 자본으로문을 연 여타 여학교와는 달리 순수한 애국자본으로 출범했던 명신여학교는 민족종교 천도교가 운영하던 6년간(1911~1917년) 민족시인 이상화의 삼촌이 세운 사립 '달서여학교'( 7·8회 참조)를 통합하는 등 나름대로 교세를 확장해왔다.
그러나 다시 경영난에 부닥친 천도교 중앙총본부가 1917년 2월 6일 대구유지 이종면(李宗勉), 정해붕(鄭海鵬)외 11명에게 학교 운영권을 넘겨주었고 , 5년뒤인 1922년1월1일에는 박기돈씨에게 연결됐다.
이후 1924년 7월14일에는 서희원여사(희원학교 설립자이기도 함. 1·4회 참조)에게 넘어가는등 4차례나 어려움을 당한 대구 명신여학교의 경영난을 일시에 해결한 독지가가 바로 김울산여사이다.
고향이 울산인 김울산여사는 1925년 12월26일 대구 명신여학교를 인수한 뒤 조국광복의 염원을 담아 교명을 대구 복명여학교라 개칭하고 부설 유치원까지 개원하였다. 이 유치원의원훈은 부지런히 익혀 지혜를 늘리자는 뜻의 '습여지장'(習與智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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