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4월16일 조선일보가 주최한 재경 여자외국유학생 친목회. 중국 미국 일본 등지에서유학한 신여성 6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들자 일경 고등계 형사들이 가자미눈으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또다시 3.1운동과 같은 민족저항운동이 터질새라 조바심을 내며 등장한 고등계형사는 모였던 신여성들이 부드러운 얘기만 교환하고 한가하게 다과를 들면서 레코드 감상까지 하자 안심하고 발길을 돌렸다. 일경의 감시에서 벗어난 유학파 신여성들은 여성단일단체의 결성을발기, 그 자리에서 발기인 총회 준비위원을 선정했다.
이어 5월27일에는 종로 YMCA강당에서 종교와 파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리지않고 전조선 지식층 여성들이 총망라, '근우회(槿友會) '창립총회가 열렸다.(사진)
항일단일여성단체로 태동한 근우회의 창립이념은 여자의 단결 및 지위향상에 모아졌다. 근우회 선전조직부에 소속된 대구여성 정칠성(丁七星.22회 게재 예정)은 자신의 명의로 발행된기관지 '근우(槿友)' 창간호에서 1천만 조선여성들이 구시대의 봉건적 유물과 현대적 모순때문에 가장 불우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고 통렬히 지적했다.
이러한 불합리에 맞서 싸우려면 전국여성이 단결해야하며, 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해가는 것은 일천만 자매의 역사적 임무라고 근우회는 명시하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바로 조선사회를 위하고, 세계인류를 위한 행동이 되지않으면 안됩니다"라고 외친 근우회원들은 여성들이 해방되는 날 세계도 해방될 것이니, 조선자매들아 단결하자고 밀어붙였다.
이러한 근우회의 외침은 지방으로 파급, 1928년 근우회 대구지회.김천지회.포항지회.영주지회.군위지회.영천지회.왜관지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서양여자들이 조선여자보다 비교적 해방이 된 것은 경제력이 우리보다 낫기 때문"이라고적시한 근우회원들은 조선여성들의 '성차별'이 경제권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적시하는 탁견을 보였다.
근우회 대구지회는 1928년 9월16일 대구조양회관에서 여성문제대강연을 열고 당시 한국 여성이 안고있던 최대과제인 문맹퇴치와 농촌여성계몽을 열렬히 외쳤다.
"일천만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급선무는 문맹퇴치입니다. 또한 근우회 운동의 지방적 역할은 농촌여성의 계몽운동에 전력을 집중하여야되겠습니다"
기생에서 여성혁명가로 변신한 정칠성은 근우회 대구지회가 조양회관에서 연 여성문제대강연에서 '여성으로서 본 현 사회'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박호진은 '조선여성운동의 당면문제'라는 연제로 각각 강연을 했다.
이듬해 7월3일에도 근우회 대구지회는 조양회관에서 '가정불화의 원인은 남자? 여자?'라는논제로 찬반토론을 펼쳐 올바른 부부관계 정립과 가정상 정립에 주력했다.
근우회 김천지회는 1928년 3월5일 춘기원족회(소풍)를 다녀왔으며, 대구지회도 1928년 5월 5일 동촌 금호강으로 봄나들이를 다녀오는 연예.오락활동도 폈다. 김천지회는 근우회를 선전하고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1928년2월7일 부인척사대회(윷놀이)를 열어 화목과 단합을 꾀했고, 이보다 한해전인 27년 9월3일 제1회 집행위원회에서는 부인야학 실시를 건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근우회 군위지회는 28년3월16일 창립대회에서 ▷조혼을 폐지하라 ▷인신매매를 폐지하라고주장했다. 근우회 경북지회의 활동은 대구부(府).김천군.군위군등 3개 지역이 가장 활발했다.여성유일단체 근우회는 신간회와 함께 일제에 의하여 가장 주의를 요하는 단체로 주목받는바람에 창립 이후 활동이 부진했으나, 근우회 군위지회와 김천지회에서 결의한 내용을 보면시대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새로운 여성상 정립을 위하여 분투했음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崔美和기자〉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