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부수립 50돌 되돌아본 문화예술 (2)공연예술

공연예술계는 한국전쟁의 혼란, 군사정권의 규제등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지난 50년동안 질적.양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음악계는 연주부문 만큼은 세계가 인정할 만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예술감독을 거쳐 빈 필하모닉의 지휘를 잡았던 정명훈을 비롯하여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강동석, 김영욱, 장영주, 첼리스트 장한나 등이 그들이다.또 지휘자 카라얀이 '신이 내린 목소리'라고 극찬한 소프라노 조수미, 신영옥, 홍혜경씨등은세계 무대의 프리마돈나들이다.

그러나 세계 정상의 연주가로 받돋움한 이들은 한결같이 외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들이다.

미국 줄리아드음대에는 재학생 7백명중 한국인이 1백명을 훨씬 넘고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등 유럽에 유학중인 학생들은 수천명을 헤아린다.

이는 건국이후 50년동안 우리의 음악을 일궈온 원로.중진 음악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 음악교육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나마 엘리트 교육에 치우쳐 있음을 의미한다.더욱이 서울에 편중돼있는 공연시설이나 교향악단, 실내악단, 오페라단등은 그수가 부끄러울지경이고 팝이나 가요등 대중음악에 밀려 일부계층만을 위한 문화로 간주된지 오래다.한편 전통음악은 1951년 국립국악원의 개원과 64년부터 시행된 문화재지정을 계기로 활기를띠기 시작했다.

국악 50년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60~70년대의 김기수, 백병동, 강석희등의 국악창작이다. 신국악으로 불리는 기악독주, 중주, 관현합주곡 등은 60년대부터 시작해 70년대에 꽃을 피웠다.

70년대의 판소리, 민요, 창극 등을 중심으로 한 국악공연의 확대와 풍물을 재구성한 사물놀이는 해외공연을 통해 전통음악의 흥과 멋을 두루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0년대부터 90년대 들어 전통음악의 대중화와 함께 해외공연도 활발하게 이뤄졌다.특히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세계 연주계에서의 성공, 영화 '서편제'의 대성공에서 비롯된 판소리 음악의 대중화는 우리 음악계가 눈여겨 보아야할 대목이다.

연극계는 1950년'원술랑'으로 개관공연을 가진 국립극단과 극단 신협등을 중심으로 힘겹게무대를 이어오다 60년대에 드라마센터를 비롯 실험극장, 자유극장, 민중극장, 드라마센터 등이 생겨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82년 극장허가 제한 완화등을 주요 내용으로한 공연법 제정과 88 올림픽을 즈음한 공연자율화 정책, 그리고 예술의 전당과 문예회관등 공연장의 잇단 개관 등에 힘입어 대학로를 중심으로 연극의 대중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90년대에 이르러 연극에 대한 순수성과 열의를 잃어가면서 상업주의. 선정주의에 깊이 물들어 뮤지컬의 경우, 우리 문화의 정서와 거리가 먼 국적불명의 저질무대를 양산하고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뜻있는 연극계 인사들은 △정신이 아닌 기능만을 가르치는교육 △연극인들의 안이한 상업주의 △일부 대중의 도덕불감증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무용계는 1962년 이화여대 무용학과 신설과 국립무용단 창단을 계기로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40~50년대 신무용을 이끌어온 최승희, 김백봉, 김진걸, 임성남씨등은 연구소나 학원을 통한개인교습으로 일가를 이뤘으나 이같은 개인전수 방식으로는 '무용의 대중화'에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었다.

70~80년대엔 국내 현대무용의 대모인 육완순씨를 비롯 그의 제자인 박명숙, 남정호씨등 해외 유학파들이 잇따라 귀국하면서 교육과 이론, 창작활동을 활발히 펼쳐 대학무용단, 특히현대무용이 급성장했다.

30대 젊은 무용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90년대엔 서울발레씨어터, 댄스 시어터온등 무용계의 오래된 병폐인 학연과 지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는 단체들이 늘어나고 있으나 창작의 빈곤, 이론적인 뒷심 부족 등으로 무용인구 저변확대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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