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할 줄 모르는 땅에서 위인은 나지 아니하는 법. 쥐꼬리만한 일을 해놓고,살아생전 동상을 세우는 아니꼬운 작자라면 인간 취급도 하지않았을 민족지사여운형, 동아일보사장 송진우, 국어학자 정열모 등이 1936년 김천고보 교정에서거행된 설립자 최송설당여사의 생전 동상건립에 줄줄이 참가했다.
그만큼 최송설당의 육영사업은 천마디 말로 그 공덕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조선의 행복'이었으며, 이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지사들의 마음 한가운데 우뚝서 있을 정도로 굉장한 일이었다.
초개와 같이 미약한 것은 개인의 영달이요, 하늘땅과 더불어 무궁한 것은 교육사업이라는 것을 전재산 희사로 보여준 최송설당 여사의 동상건립은 북에서는의주(義州)로부터 남으로는 동래·울릉도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 민초들이 마음을 실은 한두푼씩 보탰다.
최송설당의 동상은 한 지방에 있는 김천고보(현 김천중고)에 세워졌지만 그 제막식은 많은 민족지도자를 비롯한 전국의 저명인사들이 참여한 민족의 서사시적 거국행사였다. 일제 압제하에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무력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길이란 인식으로 전재산을 투척하여 일제의 완고한 반대를 어렵게 관철하여 인문계 교육기관인 김천고보를 세웠으니 이를 기려 거물 민족지도자를 포함한 수천명이 참석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거룩한 최송설당이라 찬양하였고, 중앙일보는 한 학교가 그 지방 내지 그 민족의 영고에 중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중략) 이 학교가 발전하여 여러 인재를 낳는다면 그것이 어찌 김천의 영광일뿐이랴, 전조선의 행복일 것이라면서 김천고보 설립을 민족 흥망의 길이라고 기렸다.
학교건립재정이 부족하자 단 하나 남겨두었던 서울 무교동 살림집까지 내놓았던 송설당은 교정을 내려다보는 정걸재에 기거하면서 학생·손님방문을 즐겼다.지금도 학교 뒤편에 자리잡은 연당에 여름이면 수박·참외를 띄어 놓고 찾아오는 손님·학생들에게 내주었으며, 돌아가는 학생들 손에 귀한 카라멜을 꼭꼭 쥐어주었다.
송설당은 1939년 6월16일 오전10시40분. 재단이사를 비롯한 학교 간부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84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비록 전재산을 절에 시주하지는 않았지만 돈독했던 불심과 이 세상에 남긴 크나큰 업적이 있기에 극락왕생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학교장(7일장)으로 엄수된 장례식은 수백으로 헤아려지는 만장과 조화, 3백통의조전, 수만의 인파로 해서 이 지방에서는 전무후무한 규모로 진행됐다. 재학생과 동창생 3백여명이 악대 뒤를 따르고, 만장과 화환을 앞세운 동창생의 운구대뒤에 수천명의 조객이 김천고보 발인 현장에서 장례식장(공설운동장·현 모암초교)까지 끝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이어졌다. 조객은 물론이고 군민들이 총동원되다시피한 인파는 애도를 아끼지않으며 정녕 임의 영생을 축도했다. 묘소는 학생들을 굽어보는 학교 뒷산에 위치해있다.
"치마를 둘러서 여자지 사내 대장부야"란 말을 들은 송설당은 늠름한 기상과 넓은 도량, 맑은 천품과 우렁찬 목소리로 상대방을 압도했지만 언제나 작은 것부터 절약하라고 강조했다. 아랫사람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그날로 내보냈고, 쌀뜨물속에 쌀낟 한톨이 들어있기라도 하면 농부의 수고를 모른다해서 야단을 쳤다.송설당 사후에도 김천고보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발전을 거듭했다. 사립 김천고보는 1942년 10월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에 제2대교장 정열모(국어학자)가연루, 일제에 의해 이 학교가 민족독립사상의 온상지라 낙인찍히고 1943년 4월1일자로 강제 폐지당했다. 재단이사들을 경찰서에 끌려가면서까지 사학폐지에 도장을 찍을 수 없다고 버티었으나 43년 3월31일자로 자진폐지신청 형식으로 폐교돼 버리고, 학교를 잃은 송설당교육재단은 공립 김천중학교의 후원단체로 전락했다.
광복을 맞자 곧 송설학원의 옛모습을 찾자는데 의견이 모아졌으나 6·25전쟁으로 환원운동이 좌절, 53년에야 사립 송설당교육재단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그후김세영씨(현 재단이사장) 등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제2 부흥기를 맞아 오늘에 이른다.
송설당이 기거했던 송정에 사는 후손 최호씨(경북 김천시 부곡동 777)는 "송설당할머니의 양자로 들어갔던 할아버지의 파양은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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