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6)일제말 암흑기 - 우리말 영화 제작·상영 전면 금지

정부의 일본 영화 개방 조치가 단행된 요즘 영화계 분위기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 56년전인 1942년에 벌어졌다.

일본 제국주의의 칼날을 치켜세운 조선총독부가 순수한 한국 영화 제작 자체를 완전히 말살시킨것. 조선영화주식회사 등 당시 한국인 영화제작사들은 모두 허가가 취소됐고, 우리말 발성영화의상영과 배급이 전면 금지됐다. 한국 영화인들은 관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산하에 예속돼 일제를 찬양하는 군국주의 영화 제작에 강제 동원됐다.

미국영화 등 외화도 '개인주의 사상만 뿌려놓는 독균'이라는 이유로 수입이 완전 금지됐다. 1919년 한국 영화 탄생 이후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어렵게 명맥을 유지한 우리 영화에 조종이 울리는순간이었다.

이전에 많이 제작된 한·일 합작영화는 위축된 한국 영화계를 와해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한 계산아래 추진된 것이었다. 한국 영화에 대한 일제의 제약이 강화되자 시류에 편승하는 한·일 합작군사영화가 늘어난 것.

일본 신흥키네마와 한국 성봉영화사가 제휴한 첫 군사영화 '군용열차'(1938년작)는 일제가 '성전'이라고 일컫는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한국 대륙을 통과한다는 군용열차를 소재로 만든 것. 당시 영화평론가였던 서광제와 일본인 우토오(佑藤武)가 공동 감독, 왕평 박제행 김영식문예봉 등이 출연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현실 도피적인 문예작품들이 붐을 이루기도 했다. 한강을 배경으로뱃사공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 갈등을 예리한 감각으로 묘사한 방한준의 '한강'(1938년작), 부잣집머슴살이의 비극을 감상적으로 그린 윤봉춘의 '도생록'(1938년작) 등 문예작품들이 1941년을 고비로 홍수를 이뤘다.

일제의 어용영화 제작을 거부한 영화인들은 광복의 날만을 기다리며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복지만리'(1941년작)의 각본·감독·주연을 맡아 옥고를 치른 전창근 등 많은 영화인들이 해방이될때까지 영화계를 떠나야했다.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의 민족애를 다룬 '복지만리'는 만주 현지 로케이션을 하는 등 당시 평균영화제작비의 두배나 되는 4만원의 거액을 들여 이금룡 주인규 전옥 등이 한민족의 비참한 생활상을 열연,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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