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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본 후보 단일화-87년 YS-DJ 단일화 불발 선거 패배

현재 단순 수치상으로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 21의 정몽준 의원 지지율을 합하면 이 후보를 훨씬 능가한다. 또 이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절대 우위를 보이면서도 지지율이 40%대를 밑도는 것도 단일화의 위력이 상당할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같은 대선 구도 자체를 뒤발꿀 정도의 위력을 가진 유력 후보간 단일화 이야기는 15년 전에도 있었다. 그 때는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상황으로 되돌아가 보자.87년 13대 대선 당시 단일화의 대상은 YS DJ였다. 민주화 열기에 편승, 평화적 정권교체의 바람을 업은 두 사람간 단일화 논의였다.

단일화 움직임은 87년 하반기 정가의 화두였고 12월까지 지속됐으나 결국은 도로(徒勞)가 되버렸다. 당시 통일민주당에 함께 있던 두 사람은 DJ의 탈당과 대선출마 선언으로 당은 두조각 나버렸고 다른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재야인사들이 단식농성을 했고 일부 국회의원들이 삭발까지 하며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허사였다. 그럼에도 YS DJ 두 진영의 핵심 측근들은 양보하지 않았다. 선거에서 지더라도 후보를 양보할 수 없다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87년 민주화 주역 가운데 하나였던 대학생들이 선거에 임박해 당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당사를 점거, 농성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으나 결국 단일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리고 각종 여론조사도 단일화 실패는 선거 패배라는 결과가 쏟아졌으나 두 사람은 합치지못했고 결국 선거에서 졌다. 이후 민주화 세력은 영남과 호남출신들로 분열됐다. 그리고 각종 선거에서 지역감정이 이 때부터 극에 달했다.

때문에 YS와 DJ의 단일화 실패의 전철을 15년이 지난 지금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만만찮다. 2강 1중 구도일 때 나오던 정 의원으로의 단일화 이야기와는 차원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단일화 논의가 두 당사자 모두 선거전략상 단일화를 거부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제스처에 그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87년에도 YS DJ 어느 누구도 '단일화는 없다'고 표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동관기자 llddk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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