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노파들의 유모차

경북 울진의 조그만 매화우체국에 시인이 일한다. 조용한 남태식 시인. 여의도우체국을 버리고 귀향한 그는 이태 전 마흔살에 늦깎이로 시인이 되어 최근 첫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를 펴냈다. 여기에 내 눈시울을 적시는 '유모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끼들은 떠나고/ 유모차만 남았네// 새끼들은 떠나고/ 갑자기 팍삭 늙은 여자들만 남았네// 시골 장날이다 빈 유모차가 일렬종대로 우줄우줄 장을 보러 가고 있다 늙은 여자들의 수다도 함께 줄을 섰다// 새끼들은 떠나고/ 빈 수다만 남았네'일렬종대로 늘어선 유모차와 할머니들의 모습을 더 생동적으로 보여 주려고 일부러 산문처럼 풀어놓았을 3연은 고스란히 이 나라 시골 장터의 새로운 진풍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장터에 데려갈 어린 손주는 물론 없지만 짐 들어줄 아들도 며느리도 딸도 없는 할머니들을 착실히 봉양하는 저 유모차! 국수를 삶아먹고 동전을 판돈으로 '고스톱'을 치기 위해, 밑도 끝도 없는 텅 빈 단지 안의 공명과 같은 수다를 떨기 위해 노인정으로 가는 길에는 듬직한 지팡이가 되어 주는 저 유모차!

어느 옛 선비는 쟁반 위의 맛좋은 홍시를 보아도 품어 가 반길 어버이가 없어서 그를 슬퍼한다고 탄식했지만, 일제와 육이오와 찢어지는 가난의 온갖 풍상을 넘어 5천년 동안이나 대물림 해오던 빈곤과 압제를 거뜬히 극복한 이 땅의 20세기 후반기의 이름 없는 주역들이 바야흐로 삶의 황혼을 맞아 겨우 유모차에나 거동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들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자식들이 노인정에서 즐거운 수다의 밑천만 되어 준다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 늙은 여자들마저 가고 늙은 수다도 사라진다고 하자.

그때는 주인 잃은 유모차만 덩그러니 폐품처럼 남게 되겠지. 그러면 먹물들은 '마침내 한반도 남녘에서 20세기적인 세대가 최후의 막을 내렸다'고 기록하게 되겠지. 그들의 임종을 더러는 빈 유모차 혼자서 지켰다고 시인은 노래하겠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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