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푸른 죽나무를 그리며

초여름 햇살이 시리다.

봄빛 감춘 대추나무 푸른 가지는 좁쌀같이 자잘한 꽃을 달아낸다.

시골집 낮은 돌담을 두른 자홍색 장미덩굴도, 울 넘어 장독대를 묻을 듯 우묵이 피어난 청푸른 꽈리풀도 마냥 정겹다.

새 부리 같은 노란 꽃을 지운 감나무는 어느새 청매실 만한 열매를 매달았다.

산촌의 푸른 지붕 위로 붉은 너울 길게 드리운 석양이 쉬어간다.

계절은 푸르러 오히려 골을 깊게만 하는데 그 푸름 속에서도 여태 봄날의 노여움을 풀지 못한 죽나무 여린 가지가 눈에 띈다.

가지 끝에 성근 새잎을 내 단 그 모습이 무성한 여름에 비하니 나목이나 다름없다.

할퀸 자국을 여미고 간신히 돋아난 그 햇순들이 비루먹은 송아지 털끝 같다.

담장 밖 죽나무는 해마다 그렇게도 제 붉은 새순을 앗기면서 여름을 맞는다.

매운 듯 달달한 향내를 지닌 잎과 부드럽고 연한 새순을 가진 가죽나무이기에 겪는 설움이리라. 심산 유곡의 두릅나무도 죽나무와 동병상린의 처지가 되긴 마찬가지다.

양지녘 다순 봄빛에 올된 두릅나무는 풋내 짙은 그 맑은 향을 활짝 뿜어내기도 전에 여린 제 살이 갈기갈기 찢기는 황폐를 이기고 나서야 다시 제철을 맞는다.

사람의 손길이 그토록 매운가 보다.

그냥 놓아 두려하지를 않는다.

사람들은 가만히 두고 보기보다는 만지려 들고 공유하려 하기보다는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정녕 자연의 것이고 모두의 것들이지만 오로지 내 품에 넣고 내 울안으로 옮겨 두어야 비로소 내 것이 된 듯 안심한다.

저만큼 광장에 놓인 것들은 내 것과 거리가 먼 것으로 외면하고 산다.

더욱이 내 것이 아니면 모두 남의 것으로 서둘러 단정해버린다.

내 것이 아니기에 모르는 척 훼손하면서도 천연스럽기만 하다.

산곡의 아름다운 수석들이 사람의 집으로 들어앉은 지 오래고 희귀 식물들은 제 살던 토양에서 씨를 보이지 않는다.

돈이 된다거나 내게 이로움을 준다면 전체를 내다보지 않는 싹쓸이로 수난을 자초한다.

'나' 보다 '우리'라는 말을 즐겨 쓰면서도 정작 내 삶 속에 '우리'가 결핍되어 있음을 안다.

이웃들과 함께 향유할 우리 것을 지니지 못하고 그 공유의 두께마저 점점 얇아 간다.

우리의 상황인식 논리도 공유의 장을 넓히는 데는 참으로 미숙하다.

민과 군, 노와 장, 선과 악, 흑과 백 등 다분히 이분법을 선호한다.

조직의 질서는 항상 노장으로 기율하려 들고 흑백적 이념과 사상만이 명징하다며 박수를 보낸다.

그러면서 회색논리 앞에선 언제나 의심의 눈 꼬리를 거두지 못한다.

이러한 인식의 토양에선 중도적 가치가 자라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쉽사리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노사관계가 그러하고 정부와 시민단체 또한 예외가 아니다.

너무 끝단에 서 있다는 것이다.

중도를 외면해온 우리는 협력과 타협의 기술을 축적해낼 세련됨을 길러내지 못했나 보다.

오로지 내 주장으로 직접 맞서야 문제해결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극과 극이 마주하는 양극간의 첨예한 대립은 또 다른 대립을 낳는다.

그 상황에서는 한 끝단이 다른 끝단으로 이동하려면 완전한 회전만이 있을 뿐이다.

한쪽이 자기를 온전히 접어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별다른 통로가 없다.

그 양단을 이어주는 중도가 두껍게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이동의 통로가 다양해지고 그 중도로 하여금 양단의 요구를 조금씩 걸러내고 조절하면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타협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세계는 이미 나만의 개성과 자율적 가치를 존중하는 창조의 시대를 열었다.

참여의 통로가 되어줄 중도와 공유지대를 일구어내지 않고서는 각기 다른 개성을 쌓아올릴 공동공간이 존재할 수 없다.

봄날의 수난을 이겨낸 죽나무 가지에서 다시 푸른 여름기운이 활착해나감을 바라본다.

죄다 움켜잡으려 든 그 숨가쁨으로부터 한 호흡 길게 할 수 있다면 산과 들녘도 푸르른 이 계절의 찬미를 더할 수가 있을 텐데. 나를 넘어서 우리로 향하는 조화의 지평이 넓어지길 기대해 본다.

김정식〈육군 3사관학교 행정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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