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3) - 지리산 천왕봉 2

종주시작에 대한 설레이는 마음 때문에 하루종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이번 백두대간종주를 앞두고 나는 등산옷을 장만하기로 결심했다. 강추위 겨울등반에는 옷이라도 좋은 것 입어야한다는 생각이 미쳤다.

토요일은 오전근무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오전 11시를 넘어서자 마자 일찌감치 등산 옷구입을 위해 전문상가가 즐비한 동대문 5가상가로 갔다. 유선배가 소개해준 '성희산악' 가게에 가서 자그마치 60만원어치나 샀다. 계산대에 서 있는 자신도 "미쳤군"하며 놀랐고 아마 마누라도 이 금액을 얘기하면 똑같이 "미쳤군"하는 소리를 할 게 뻔하다. 요즘 쪼달리는 생활비에 비하면 진짜로 미친 수준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을 종주하는데 미친 놈이 되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위안하며 "큰 비용이 아니네요"라는 식의 허풍시늉을 내며 용감하게 신용카드를 끍었다.

사실 나는 한겨울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악산 대청봉을 수없이 등정할 때도 그냥 보통 두꺼운 겨울바지와 셔츠에 파카를 입었을 뿐이었다. 겨울용 방수, 방풍 등산복을 입는 사람을 보면 마냥 부러웠지만 평상시 복장으로도 큰 무리도 없었고 돈도 아까워 해를 많이 넘기면서도 그냥 그냥 다녔다.

이번에는 내 스스로 백두대간산행을 내 인생에 있어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한 탓인지 그 정도 돈은 투자해야 뭔가 불상사없이 무사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의무감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상의셔츠 15만원, 바지 17만원, 잠바 13 만원, 비옷 18만원, 총 4벌에 대충 60만원이 들었다. '아이다'라는 프랑스 제품으로 방수,방풍기능이 뛰어난 모양이었다. 등산옷을 사는 동안 어린애처럼 너무나 기분이 좋았든지 점심 먹는 것도 잊었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 신문사에 입사했을때보다 더 흥분되어 있었다.

백두대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나의 엔돌핀을 마구 쏟게 하는 것인가.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가. 다시한번 곰곰이 생각해봤다. 권력과 돈, 명예보다도 더 인간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이 확실히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라고 규정지었다.

이번에 안 사실은 등산옷을 입을 때는 상의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않아야 하고 만약 면셔츠를 입으면 땀을 빼앗아 오히려 체온을 떨어뜨리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맨살에 상의하나만 걸쳐도 폭신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옷을 홀라당 벗고 이불속에 들어가서 자면 개운한 느낌, 모두다 아시겠죠. 다음날 새벽 지리산등정을 하면서 눈발이 날리고 매서운 바람이 불고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상의 한벌과 방풍 옷 두개만 달랑 입고서도 거뜬히 추위를 피하며 무사히 등산을 마칠 수 있었다. 역시 돈이 최고인가. 비싼게 역시 좋다. 자본주의와 돈, 물신이 위력적인 이유를 알겠다. 하여튼 이날 등산옷 구입작전은 대성공이다.

앞으로 백두대간 종주동안 비바람이 치고 눈보라 휘날리고 혹한이 기승을 부리는등 하늘이 아무리 심술을 부리고 헤코치를 해도 일단 옷은 완전무장상태다.

상가에서 시간을 끄는 통해 고양시 화정동 집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량이 되어 등산짐을 급히 꾸려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에 갔다. 오후 5시 만나기로 한 잠실역 앞에 정확하게 도착했다. 기념가방을 하나씩 받았는데 '한걸음 가기'가 새겨져 있었다. 백두대간을 한걸음씩 이어가기는 뜻인 듯했다. 쬐금 촌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쉬운 표현 같아 부담은 없었다. 포탈 사이트 다음에 '백두대간 한걸음 이어가기' 라는 카페의 우리 공간도 만들었단다. 좋은 사진과 좋은 이야기거리가 넘쳤으면 기대하고 나도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했다.

자 이제 출발이다. 가자 백두대간으로. 너무 흥분된다. 선발대인 우리 6명은 승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경유해서 서울- 대전- 지리산코스를 달렸다. 주말인데도 차들이 별로 없었지만 고속도로끼리 연결되는 구간에서는 심한 정체도 있었다. 전용차선을 생생 달리기도 했다. 시원하게 달리다가도 막히고, 또 막히다가도 다시 잘 달리기를 반복했다.

이를 유선배가 천당과 지옥으로 표현했다. 도로위를 시원하게 달리는 차는 천당에 와있고 꽉 막혀 꼼짝도 못하는 차는 지옥에 와 있는 셈이다. 오늘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한 셈이다. 원래 삶과 죽음, 천당과 지옥의 구분은 무슨 의미일까.

현대에 와서는 교통체증이 얼마나 무의식속에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지. 어느 날인가 평일인데도 도심도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기분좋을 일이 없어 교통원할한 것 가지고 그렇게 되나. 웃기는 시절에 살고 있다. 사이비 종교단체들의 바램처럼 인구의 반이 휴거에 들어갔으면 하는 황당한 생각도 해본다. 말세를 보면서 휴거를 생각하는 게 아니고 교통체증을 보면서 휴거를 생각해봤다. 지금은 2002년, 하지만 몇 년전 21세기 직전에 사이비종교단체들이 휴거소동을 벌였는 지, 길거리에 휴거팻말을 든 사이비 종교인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들은 휴거되어 하늘로 갔는지 지금은 뭐하고 있나.

차안에서 천당과 지옥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나는 큰 스님이나 연륜이 든 수녀님이 하신 말씀을 소개했다. "천당과 지옥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죽으면 천당과 지옥이 우리 눈앞에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살아있는 동안 천국처럼 마음이 편하면 천국이고 지옥처럼 마음이 고통스러우면 지옥"이라고 했다. 백두대간을 가는 이 마음과 이 상태, 지금 나는 천국에 있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 신의 존재와 관련, 신부님이나 목사님 대부분은 사시면서 몇번씩은 "하느님이 과연 계신지"를 고민한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우주 및 지구탄생론이나 진화론등의 현재의 과학교육으로서는 신을 믿는 게 참으로 어려운 게 사실이다. 신을 믿고 있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얘기다. 그러나 나는 건전한 종교를 갖고 있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대단하다고 본다. 종교단체가 없으면 장애인이나 가난한 사람은 누가 돌볼 것인가. 아직 복지사회가 되지 않아서 인지 우리나라는 정부차원의 대책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과거 기자시절 불우시설에 가보면 역시 종교단체들이 챙기고 있었다.

또 종교가 없으면 생명경시풍조가 확산되어 사람죽이는 게 아무런 죄책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륜은 무너지고 사회가 붕괴될 것이 뻔하다. 사람 죽이고 나쁜 짓하면 벌받는다, 착하게 살면 복받는다는 식의 위협과 당근이 없다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 가겠는가. 종교가 은근히 작용하고 있다.

또 현대인의 다수는 다양한 형태의 정신적 외로움과 갈등과 번민,고통속에 헤매이고 있다. 종교가 큰 안식처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종종 곁에서 봤다. 정신과의사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들이 종교를 통해 대규모로 집단치유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생각도 해봤다.

혹시 종교가 없다면 스님이나 목사 수만큼이나 정신과 의사들의 수가 늘어나야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정신과의사는 떼돈을 벌려나.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정신병자의 천국내지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 수도 있다. 종교가 예전에는 '사후의 구원'이 핵심이었다면 현대에 들어와서는 '정신병원'으로 탈바꿈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크게 없지만 종교의 역할에 대한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도 꽤 알려지고 믿는 종교는 인간들에게 선하고 착하게 살것을 권유한다. 때론 지옥 보내겠다고 협박도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기독교), 자비(불교), 세상의 평화를 위해 개인의 수양이 필요하다(유교), 선을 행하는 일에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라(이슬람교), 무서운 것을 평화로운 것으로 갚아야한다(힌두교) 모두 다 구구절절히 옳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실천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출발한 지 5시간이 경과되었다. 오후 10시쯤 산청군 시천면 면소재지인 덕산에 도착했다. 미리 와있던 허정균선배와 합류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가게에 들어가서 술을 곁들여 감자탕, 촌보쌈을 먹으며 저녁을 대신했다. 바로 인근에 조선 중기 이황과 함께 영남학풍을 크게 일으켰던 학자인 남명 조식선생이 지은 산천재가 있다. 조식선생은 권력을 놓고 다투던 시절, 끝까지 벼슬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키운 절개있는 선비라고 한다. 백두대간의 등정에서 만난 첫 역사적 인물치고는 괜찮아 보였다.

남명 조식선생의 시가 산천재 기둥에 걸려있다. 직역하면, "천석이 들어가는 종을 보기를 청하노라 /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안난다 /지리산을 닮기 위해 다투어서(지리산처럼)/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 하늘이 울어도 꿈쩍도 않는 지리산처럼 고관대작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기개가 엿보인다.

시골음식은 밥은 물론 상추하나, 고추하나 언제 먹어도 맛있다. 서울의 최고급 요리보다도 시골 음식이 더 맛있다, 도시에서 먹는 채소와 고기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 같다. 양만 푸짐하고 맛은 전혀 없다. 인간의 입에 꾸역꾸역 마구 집어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은 싱싱한 채소와 육질좋은 고기를 먹는다. 자기들 먹는 것은 농약 안치고 도시사람 먹는 것은 농약마구친 것 보내고 나쁜 X들. 농담. 시골이 좋기 때문에 도시사람들이여 시골로 가자. 그래야 교통문제,환경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시골도 활기를 띠면서 빈곤한 시골도 나아질 것이다.

나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전국의 맛있는 요리를 거의 다 먹어봤고 서울도심의 일류호텔음식도 먹어봤다. 결론은 버킹검. 돼지고기, 쇠고기 육질은 촌이 훨씬 낫다. 회도 어부들이 직접 건져올려 배위에서 쳐먹는 회가 일품이다. 나는 촌사람들이 가난하고 힘든 노동생활을 하고 있지만 먹는 거라도 확실히 도시 사람들보다 우위에 점하지 않았다면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물론 촌은 또 좋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도 있다. 그래서 아직 촌은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며 갈 때마다 또가고 싶은 곳이다.

승합차를 덕산내 공터에 새워놓고 지리산등정 첫 출발지인 유평리 새재마을 바로 밑 대호민박에서 제공한 승합차로 바꿔타서 저녁 11시 20분쯤 도착, 지리산자락 밑에서 일박을 했다. 작은 방에 6명이 겨우 자기몸만 누울 정도로 비좁게 끼여서 새우잠을 자야했다. 주인아줌마는 "방을 몇 개나 해야지 . 이 장사하고 나서 이런 손님들 처음 봤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돈절약. 잠은 오지 않고 해서 나는 옆방에서 일행중 일부와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지리산 겨울밤을 보냈다.

소피보러 잠시 나가보니 칠흑 같은 밤에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진눈깨비 눈이 내렸다. 서울에 있으면 감히 구경도, 상상도 못할 것이다. 산에는 벌써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눈을 부쳤다가 깨어나니 후발대 팀 7명이 새벽 3시 넘어 도착했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새벽 5시 50분 랜턴불을 켜고 어두움을 깨며 일행은 산행을 시작했다. 백두대간의 첫발을 내딛었다.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의 선장인 닐 암스트롱이 달표면에 첫발을 내딛고 난 뒤 지구에 보낸 말이 생각난다. " 저에게는 작은 한걸음이지만 인류에겐 위대한 도약입니다". 나는 나를 아는 분들에게 이런 말을 보내고 싶다. "이제 백두대간을 시작하는 첫발을 내딛었다. 이것은 저의 인생에 있어 위대한 추억이 될 것이다." 약오르지.

백두산에서 반도를 타고 내려온 백두대간이 끝나는 곳 지리산. 1915미터 천왕봉을 정점으로 수많은 능선과 계곡이 3개도 5개군(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경남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에 걸쳐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1백리 주능선이 장관이다. 보통 어머니의 품같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그윽하고 웅장하고 장엄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의 명칭유래로는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바뀐다는 설이 있다. 참으로 내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산행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비장하고 엄숙함 때문인지, 긴장한 탓인지 오랜 시간동안 침묵만이 계속되었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린 눈이 녹으면서 주위의 어둠속에서도 발아래 낙엽과 바위, 돌은 물기를 머금어 반짝반짝 빛났다. 적막과 계곡 물소리, 간혹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가 이 세상을 이루는 전부 같았다. 가는 길에 빨찌산 경남도당 본부초소아지트를 가르키는 안내판도 있었다. 아다시피 지리산은 이념을 둘러싸고 동족간 총부리를 겨누었던 민족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반달곰 보호지역이라는 팻말도 있었다. 원시림지역이라는 뜻도 된다.

계곡물과 바람소리. 매월당 김시습의 시가 떠오른다. '溪 聲 打 出 無 生 話(계성타출무생화) / 松 韻 彈 成 太 古 琴(송운탄성태고금)'. 직역하면 "개울물 소리는 무생(불교에서 無生法忍,무생법인,은 절대의 진리)의 이야기를 쳐내고 / 솔바람은 태고의 거문고를 퉁겨준다. 좋다.

한 시간쯤 가니 갑자기 날이 훤하게 밝아졌다. 거실불을 켜듯이. 천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휑한 겨울산, 마지막 붙은 빠짝마른 잎들만 꼭 잡은 채 바람에 이러저리 벌벌떠는 나무, 저멀리 지리산의 능선자락, 기묘한 바위들을 끼고 흘러 내리는 맑고 깨끗한 청정 계곡, '웅웅'거리며 '지리산 바람' 답게 계곡을 날려버릴 것 같은 매서운 바람, 새재마을은 가을이었지만 지리산속은 벌써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천왕봉 정상까지는 새재 출발부터 5시간 예상되었지만 조개골에서 길을 헤매는 바람에 2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산의 대가'인 등반대장 유선배도 이제 나이가 들어 은퇴할 날이 되었나보다. 가는 도중에 큰 바위밑에서 세찬 바람을 겨우 막으면서 라면을 끓이는데 성공했고 추위에 떨면서도 걸신들린 것처럼 맛나게 먹었다. 산에서 끓여먹는 라면맛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다. 허기를 채운뒤 강행군을 계속했다.

정상이 곧 나타날 것 같은 즐거운 마음을 품으며 신나게 산행을 하다가 먼발치에 어떤 산장이 보였다. 총무께서 "치밭목산장이네" 라며 황당해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2시간 걸린 거리를 돌아서 4시간만에 도착한 것이다. 나중 장터목산장에서 등산객을 만났는데 이분은 대호민박을 새벽 2시쯤 출발한 사람으로 우리 일행처럼 조개골에서 길을 잃었다고 했다. 깜깜한 밤길에 눈보라마저 치는 바람에 길까지 잃어 헤매다가 일행중 2명은 치밭목산장에서 하산하고 자기만 산행을 계속했고 다리도 다쳤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의 고생을 듣고 조개골에서의 방황은 지도자의 능력 부족 보다는 안내표지 부족탓으로 방향을 돌렸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등반대장 다음부터 잘해.

치밭목산장에는 참으로 향기좋은 커피를 팔고 있었다. 많은 등산객들이 난로옆에 모여 몸을 녹이면서 휴식을 취했다. 우리 일행은 다시 정상까지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세시간정도가 더 소요됐다. 나는 설악산 용아능선코스를 14시간에 걸린 적도 있지만 아무리 높은 산의 정상이라도 4시간이상을 넘긴 적은 없었다. 7시간은 나의 체력으로서도 힘이 부쳤다. 정상직전 마지막 2시간은 매우 힘들었다. 작은 봉우리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는 이 코스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게속 이어지면서 땅만 쳐다보고 간 지리한 길이었지만 고사목과 눈꽃, 설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눈꽃이 한폭의 동양화였다. 그림을 감상하는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산을 오르면서 힘들 때는 이를 극복하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다. 얼굴을 숙이고 땅쪽으로 보면서 한계단 한계단 발을 내딛으면서 1백을 센다. 끝나면 또 1백을 센다. 그러면 금방 올라간다. 가장 효과적인 것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내가 있는 자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힘들지만 조금만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책에서 보니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어떤 전문산악인은 "위를 쳐다보지 않고 바로 앞에 놓을 발자국에만 신경을 쓰며 마치 최면을 걸듯이 걸어야한다"고 말했다. 맞나요. 전문산악인들도 힘들 때도 있구만. 아무리 걸어도 다리가 피곤하지 않는 장치나 신약이 개발될 수는 없나. 복제인간까지 나온다는 판에.

힘든 등산을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자기에 맞는 방법을 알아서 선택해야 한다. 도닦는 방법도, 인생을 사는 방식도 사람마다 모두다 다르듯이. 서양쪽에서의 예수님이나 동양쪽에서의 유 불 선을 대표하는 부처님 (空), 노자 장자님 (無)와 공자님 (天), 가는 길이 달라도 모두다 결국은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것 같다. 근래 카톨릭의 수녀님, 불교 조계종의 비구니, 원불교의 정녀분들이 함께 자주 만난다고 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런 것 같다.

정상까지 힘들이지 않고 가는 방법이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가면 된다. 그러면 산행이 아니다. 일전에 중국의 명산중의 명산인 황산의 정상을 올랐다. 물론 케이블카를 타고서. 설악산보다 더 높은 산의 정상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했으니 우리나라 같으면 환경단체들이 환경파괴라며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들과 노약자들도 정상에서 그 아름다운 장관을 볼 수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나는 판단을 유보하겠다. 정상부근의 개발은 자연과 어울리게 잘한 것 같다. 우리나라 같으면 난개발로 엉망이 되었을텐데. 얘기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중국사람들이 산밑에서 정상까지 시멘트길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정신을 과시하는 것인지 역시 만리장성의 후예답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힘들어 이제 다리가 풀린 느낌이다. 터벅터벅 걷는 모습이 처량하게 비쳐지기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 정상에서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걷고 또 걸었다. 이번 등산처럼 정상 가까이 가면서 하산객들에게 "정상까지 몇분 남았냐"고 많이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등산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날이었다.

지리산의 설경을 만끽하면서 써리봉과 중봉을 거쳐 드디어 오후 1시쯤 정상에 올랐다. 눈바람과 눈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는 바람에 우뚝 솟은 정상에서 아름다운 주위경관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정상은 살을 에는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체온이 떨어지면서 가만히 제자리에 서있을 수도 없었다. 손을 호호 불면서 벌벌 떨었다.

등산대장 유선배가 산신령에게 백두대간종주를 사고없이 무사히 이뤄지도록 비는 산신제를 지냈다. 백두대간의 판화그림이 새겨진 큰 천을 뒤 배경으로 삼아 미리 준비한 떡과 술, 각자 배낭에서 내 놓은 과일이나 과자들을 놓고 절을 했다. 너무나 매서운 바람이 불어 준비한 고사문은 읽지도 못하고 유선배가 짧막하게 무사안녕을 비는 말로 대신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 산신령이시여 우리를 무사하게 보살펴주십시오. 호연지기를 피어나게 하소서" .나도 마음속으로 우리일행모두의 무사산행를 기원했고 특히 백두대간 종주의 성공을 기원했다. 또 우리 일행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영원'하면 떠오르는 게 하나 있죠. 한고조는 천하를 평정한 뒤 143명의 공신을 봉하여 열후에 삼고 봉작하는 맹세문에서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도록 나라가 영원히 존재해 이에 후손에까지 미치라"하였죠. 중국특유의 뻥과 풍이 세구만. 무협영화보는 것 같습니다. 욕심 부린다고 그대로 될 것 같으면. 백두대간이 닳도록 우리 일행의 족적은 영원히 남아있으라. 너무 심했나. 나는 겸손한 인간이니까, 마음을 비우고 관악산으로 낮추겠습니다. 관악산도 닳아 없어지려면 수십만년 걸릴지도 모른다고요. 그렇구나. 그러면 불가능하다는 뜻이구만. 태산이 숫돌처럼 닳는게.

'우정'이 나왔으니, '세계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우정'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관중열전'에 나오는 '관포지교'. 훗날 대재상이 된 관중이 친구인 포숙아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죠.

"나는 젊었을 때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는데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가지고 갔으나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하지 않았다.내가 더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적이 있었으나 그는 나를 용렬하다고 하지 않았다. 때로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또 벼슬길에서 물러나곤 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안았다. 내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또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 도망친 적도 있었는데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신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아무튼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던 것이다" 두사람다 보기좋은 우정이네요. 요즘 표현대로 하면 '세기적인 우정'이죠. 포숙아는 마음만 '허허'하고 착하면 되는 인물이네. 아닌가.

우리 일행의 산신제 직전에 같은 자리에서 지리산 천왕봉에서 백두대간종주를 끝내는 어떤 일행의 고사가 있었다. 이들은 북으로부터 남으로 진행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감격해하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언제 저런 짜릿한 순간을 맛볼 것인가.

하산길에 나서면서 겨울눈이 우리를 애먹게 했다. 등산객들이 쌓인 눈을 밟은데다 날씨마저 영하로 떨어져 얼면서 매우 미끄러워졌다. 엉금엉금 기다시피해서 내려왔다. 아이젠이 없어 몇차례나 엉덩방아를 찍었다. 장터목산장에서 요기를 했다. 라면도 끓여먹고 떡도 먹고 배를 불리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산장의 화장실에서는 변기 밑에서도 바람이 위로 불어와 시원하게 볼일을 봤다.

장터목산장에서 본 지리산은 가히 절경, 비경이었다. 온 산과 나무, 천지가 흰 눈으로 뒤덮혀 있었다. 눈이 시릴 정도였다. 우리 일행은 당초 벽소령으로 하산하려고 했지만 조개골에서 길을 헤맨데다 언 눈길에 의해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중산리로 바로 하산했다. 산 중턱까지는 미끄러운 눈길 때문에 한발짝 한발짝 조심해서 내려왔다.

중산리 계곡도 너무 멋있었다. 반쯤 이상 내려와서 뒤를 돌아서 산을 쳐다보니 산윗부분에서는 히말라야산처럼 하얀 눈으로 덮여있고 산중턱 아래부터는 단풍의 물결로 채색되어 있었다. 하산길은 삼홍(三 紅)이었다. 온산이 불게 타서 산홍,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춰서 수홍, 그 몸에 안긴 사람도 붉게 물들어 보이니 인홍. 흰눈과 단풍, 겨울과 가을이 상존했다. 한꺼번에 두계절의 운치를 맛 본 것이다.

단풍하면 내장산의 가을단풍이 최고라고 하네요. 설악산도 쥑이는데. 고은 시인의 '내장산'이란 시 전문, "아우야 내년의 단풍보고 죽어라". 얼마나 내장산 단풍이 아름다웠으면, 그것 못보고 죽으면 통탄스러울 것이란 뜻. 대단한 시구만. 너무 성의없는 시라구요. 하여튼 아이디어가 반짝한 멋진 시라고 생각한다.

'붉을 홍'에 대한 편린. 뭐든지 벌건게 좋다고 하더라구요. 해도 마지막 불꽃을 태울 때 석양으로 벌겋게 타오르다가 사라지죠, 단풍도 가을에 벌겋게 물들 때가 인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죠. 술이 거느하게 들어가 홍조를 띤 얼굴이 순수하고 멋지죠.또 여자도 빨깧게 립스틱을 발랐을 때가 가장 섹시하다나요. 그런데 빨간 사상,좌익은 어떤가, 그것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갈리는 구만. 여자들의 숙명, 월경도 벌건데. 안좋은 것도 많구만. 하여튼 격정과 절정의 상징인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 빼놓을 뻔 했다. 이헌태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겁고 벌건 사랑도 있네. 빨간 하트.

오후 5시 반을 넘자 갑자기 날이 어두어졌다. 순식간이었다. 무주구천동 계곡에서 텐트를 쳤다가 비가 오면서 계곡물이 30분만에 확 불어났을 때가 생각났다. 무서웠다. 랜턴불을 다시 켰다. 그런데 고향 대구에서 온 여대생 2명이 랜턴불도 없이 힘들게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기사도정신을 발휘하며 거의 한시간가량을 자상하게 인도하며 끌고 내려왔다. 처음에는 나를 치한으로 생각했는 지 긴장하다가 오후 6시 반을 넘겨서 마을입구에 도착하자 너무 고마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며 인사를 했다. 나의 안내가 없었다면 그 여자두분은 큰 사고를 당했을 지도 모른다. 산에 와서 좋은 일 하나 했다.

거실에 불이 꺼지듯 삽시간에 깜깜해져 우리 일행의 하산 길도 무척 어려웠다. 나는 제일 먼저 하산해서 우리를 실고 갈 학원버스(청산학원 박영재원장이 지원)를 저 아래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산 입구까지 데리고 왔다. 정류장까지 가는 20분동안 나는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깜깜하고 귀신이 나올 지도 모르는 소름이 끼치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무섭기도 했지만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구 쏟아져내길 것 같은 지리산의 별들을 보는 즐거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옛날 첫 지리산종주때 장터목산장에서 본 하늘과 똑같았서 예전 산행을 함께했던 동무들이 생각났고 그리워진다.

중산리 매표소입구 식당에서 일행은 촌두부, 도토리묵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한잔 걸쳤다. 산채비빔밥은 너무 맛있어 한그릇 뚝딱했다. 너무 많이 먹어 배가 터질 것았지만 기분이 너무 좋아 "다이어트는 무슨 다이어트. 내일부터 굶으면 되지"라고 위안을 삼으며 그냥 다 먹었다.

나는 학원버스로 가지 않고 덕산에서 박현수 선배의 승합차로 옮겨 타고 서울로 올라와 양재역 4거리에 내렸다. 새벽 2시. 하루만에 서울도 영하권의 추운 날씨로 돌변해있었다. 등산옷 덕분에 지리산에서도 못 느낀 추위를 서울에서 느꼈다. 지리산이 몇배가 더 추울텐데. 참으로 이상하다. 서울에 오니 몸도 싫은가 보다. 나의 애용택시인 한강콜을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2시. 아파트 벨을 누르니 마누라가 눈비비면서 "갔다 왔냐"며 무표정하게 말을 건넨다.

나는 웬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산이 좋아서 주말마다 가족을 팽개치고 산으로 떠난다. 자기가 뭐 산악회간부라도 되듯이, 아니면 자연보호봉사활동을 나가는 듯이, 아니면 김삿갓이라도 돼는 것처럼. 그러나 마누라는 아직까지는 산에 가는데 불평 한마디 없다. 고마울 따름이다. 가정을 등한시하는데도 그냥 잘 넘어가준다.

내가 볼 때는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네가지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일명 '이헌태식' 분류방법.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할 것인가.

첫째, 1) 학창시절 공부 잘 하던 사람이 사회 나와서도 성공하는 경우 2) 학창시절 공부 잘 하던 사람이 사회 나와서는 별 볼일 없는 경우 3) 학창시절 공부 못하던 사람이 사회 나와서 성공하는 경우 4) 학창시절 공부 못하던 사람이 사회 나와서도 여전히 별 볼일 없는 경우

둘째, 1) 가정에서는 잘 하는 사람이 회사에서는 잘 나가지 못하는 경우 2) 가정에서 잘하는 사람이 회사에서도 잘 나가는 경우 3) 가정에서는 잘 못하는 사람이 회사에서는 잘 나가는 경우 4) 가정에서는 잘 못하는 사람이 회사에서도 잘 나가지 못하는 경우

셋째, 1) 회사에서 일은 잘하는데 인간성이 나쁜 사람 2) 회사에서 일도 잘하면서도 인간성도 좋은 사람 3) 회사에서 일은 못하면서 인간성만 좋은 사람 4) 회사에서 일도 못하고 인간성도 나쁜 사람

넷째, 1) 재산은 많지만 품위가 없는 사람 2) 재산도 많고 품위도 있는 사람 3) 재산은 없지만 품위가 있는 사람 4) 재산도 없고 품위도 없는 사람

다섯째,1) 가족만 생각하고 이웃이나 사회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 2) 가족도 생각하고 이웃이나 사회도 생각하는 사람 3) 가족은 생각하지 않고 이웃이나 사회만을 생각하는 사람 3) 가족은 물론 이웃이나 사회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

여섯째 1) 결혼하기 전에 순진했다가 결혼 후에도 순진한 사람 2) 결혼하기 전에는 순진했다가 결혼 후에는 바람 피우는 사람 3) 결혼하기 전에 여자관계가 복잡하다가 결혼 후에는 마누라만 보고 사는 사람 4) 결혼하기 전에 여자관계가 복잡하다가 결혼 후에도 여전한 사람.

일곱째, 1) 자기 마누라에게 잘 해주면서 다른 여자들에게도 잘 해주는 사람 2) 자기 마누라에게 잘 해주면서 다른 여자들에게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 3) 자기 마누라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면서 다른 여자에게는 유독 잘 해주는 사람 4) 자기 마누라는 물론 다른 여자들에게도 별로 잘 해주지 않는 사람

이런 식으로 말을 만들면 끝이 없다. 어쨌든 마누라의 잔소리가 없기 때문에 백두대간이 가능하지 않겠느냐 생각하면서 다시한번 고마움과 감사함을 느낀다.

샤워하고 곤한 잠에 빠졌다. 푹잤다. 장장 12시간이라는 무리한 등산을 한 탓인지 갔다온 뒤 3일동안 온몸이 쑤셨다. 일본에 송이를 많이 수출하는 윤상욱 선배덕분에 4일동안 내리 송이요리를 배터지게 먹은 탓인지 원기가 조금 회복되었다.

백두대간 종주의 첫 등산길은 그럭저럭 괜찮은 날씨, 설경과 단풍이 어우러진 풍경, 산속에서 끓여먹는 라면맛, 산채비빔밥과 막걸리, 대만족이었다. 다만 천왕봉에서 지리산10경중의 하나인 천왕봉일출은 물론 정상에서 지리산을 한눈에 보지못한 게 옥의 티였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가진 지리산,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지리산은 우리에게 여운을 남겼다. 벌써 다음 산행이 기대된다.(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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