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신문 가상인터뷰-여진정벌 개선한 윤관

고려 숙종의 전권을 받고 여진 정벌에 나섰으나 패한 후 별무반을 편성, 예종때 2차 정벌에 나서 동북방면 여진족을 섬멸한 윤관. 그는 숙종 때 참패 후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죽어야 한다'는 '춘추대의'의 말에 따라 삶과 죽음을 넘나든 인물이다.

그러나 절치부심으로 군사를 훈련시켜 끝내 여진을 섬멸하고 돌아온 윤관 장군을 만났다.

-그동안 마음 고생이 많았을 줄 압니다.

숙종 때 여진정벌 실패와 이번 여진정벌 성공은 어떤 차이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1차 전쟁의 패인은 보병으로 적의 기병을 상대했다는 것입니다.

기병을 잡는 보병의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진은 워낙 빨랐습니다.

우리 보병은 적군을 말에서 끌어내리기는커녕 접근하는 순간 당하고 말았습니다.

2차 전쟁 때는 기병 중심의 별무반으로 적군을 격퇴했습니다.

-장군의 편제는 지금까지 편제와 조금 다른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먹구구식 편제로는 여진군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군을 신기, 신보, 특과대의 3부로 나누었습니다.

물론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말 탄 신기군입니다.

말이 없는 자와 20세 이상의 정남 중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자도 모두 입대시켜 병력보강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일찍이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숙종 때에 와서야 비로소 큰 신망을 얻은 것 같습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숙종왕께서는 공부하시는 것을 좋아하셔서 늘 책을 가까이 두는 분이었습니다.

감히 대왕에 견줄 수 없지만 저 또한 책 읽기를 취미로 하는 편입니다.

아마 그런 점을 국왕께서 높이 사셨던 모양입니다.

1095년에는 좌사낭중(백관(百官)을 총관하던 정 5 품 벼슬)자격으로 요나라를 방문해 숙종왕의 즉위를 알리기도 했습니다.

1098년에는 동궁 시강학사(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 꾸미는 일을 담당한 정4품 혹은 정5품 관리)로 송나라를 방문했고, 자치통감을 기증 받아 국왕께 올렸습니다.

두 번이나 나라를 대표해 외국을 방문한 것이지요. 사실 1차 여진정벌 실패 후에도 왕께서 저를 믿으시고 오히려 별무반의 책임을 맡기셨으니 영광일 뿐입니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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