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공공기관 유치'에 발목잡힌 자치행정

대다수 자치단체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발목이 잡혀 연말 업무 집중기에 일손을 놓고 중앙정부 결정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일부 자치단체들은 공공기관 유치를 전제로 중장기 발전계획을 세운 뒤 이미 부분적인 후속조치에 착수했기 때문에 만약 유치에 차질이 생길 경우 일부 인사들에게 문책까지도 예상되는 등 벌써부터 후유증이 우려되고 있다.

▨실정 = 영천시는 농산물품질관리원, 수의과학검역원, 식물검역소, 종자관리소, 농진청 작물과학원 등 농업관련 기관의 유치를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고, 시민들도 대규모 유치궐기대회를 갖는 등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시청에서는 실무 계장급을 주력으로 공공기관유치기획단이라는 별도의 한시기구까지 조직해 로비·홍보전을 펼치고 출향인사 등 인맥을 총동원, 민관학계가 연계한 로비가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이다.

이인택 영천시 행정지원국장은 "동원 가능한 모든 행정력을 공공기관 유치에 올인한 상태"라며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된다면 그 때는 끝장"이라고 말했다.

뚜렷한 주력업종이 없는 영천으로서는 공공기관 유치에 사활을 건 셈.

칠곡군도 중소기업진흥공단과 기상연구소, 도로공사 등을 지역 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일부 기관의 경우 구미시 등과 유치경합 중인데, 군청 한 관계자는 "백년 뒤를 내다보고 국가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만 다른 시·군에서 뛰는데 우리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타 시·군이 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 활발한 로비전을 펼치고 있다"고 강한 유치의지를 보였다.

토지공사, 에너지경제연구원, 산업연구원, 산업단지공단, 사학진흥재단 등의 유치전에 뛰어든 경산시는 전문업체에 용역을 의뢰하고 관계 공무원들을 5개반으로 조직해 중앙정부와 해당 기관에 연고자를 물색하는 등 논리적·정서적 접촉을 통해 유치 타당성을 알리고 있다.

신언정 경산시 기획감사담당관은 "13개 대학, 130개 대학부설연구소가 있는 경산이 아니면 어디가 적지냐"며 경산시의 적정성을 강조하는 등 모든 자치단체들이 "우리가 최적지"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문제 = 정부는 당초 공공기관 지방이전 결정시기를 지난 8월로 잡았다가 연말로 연기했다.

이 과정에서 자치단체들의 대중앙 로비전과 자치단체간 유치전 및 신경전은 더욱 과열됐다.

대다수 자치단체에서 유인물을 통한 홍보전이나 서명운동, 궐기대회, 유치대회 등을 가졌고 일부에서는 시민단체 회원들의 삭발한 통한 의지천명도 있었다.

또 농업관련 기관유치에 나선 영천시는 전북 익산시와 경합 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경산-포항-구미-경주 등 유치를 목표로 하는 기관이 겹치는 자치단체간 신경전은 협력·공존해야 하는 이들의 사이를 갈라놓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한전, 석유공사, 주택공사, 과학기술원, 해양연구원, 고등과학원 등 굵직한 10개 기관 유치에 나선 포항시의 경우 경산, 구미 등 도내는 물론 부산 등 웬만한 도시지역과는 모두 경합하면서 이들과의 관계가 꼬이고 있다.

포항시 한 관계자는 "유치여건과 이전 타당성 및 해당 기관의 향후 활용성 등 객관적 조건을 따져야지 정치적 결정이나 지역적 배려 등 주관적 사항이 개입해 유치지역이 결정된다면 국민적 납득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며 벌써부터 배수진을 치는 듯한 말을 하기도 했다.

▨예산과 행정력 낭비 = 정부 및 해당기관, 자치단체들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결정해야 할 공공기관 이전지를 마치 경쟁을 통해 결정하려는 듯한 모양새가 되면서 자치단체들의 행정·재정 낭비도 심하다.

영천시를 비롯한 대다수 자치단체들이 고급 홍보물을 만들면서 상당한 예산이 들였다.

청와대와 국회, 중앙부처 및 해당 기관을 오가면서 들인 비용도 만만치 않고 로비전에 뛰어든 민간인들이 쓴 비용도 적은 액수가 아니다.

또 영천처럼 한시기구를 만들거나 일부 행정조직을 공공기관 유치업무만 전담토록 하면서 생긴 행정낭비도 크다.

영천시 한 관계자는 "차라리 새로운 기관을 한 개 만드는 게 더 쉬울 뻔했다"고 로비전의 어려움을 토로했고, 포항시 한 간부는 "이렇게 요란하게 했는데도 안됐을 경우 쏟아질 책임추궁은 어떻게 감당할지 벌써부터 불안하다"고 말했다.

▨행정 공백 = 일부 지역에서는 공공기관 이전지가 결정될 때까지 일부 행정의 공백과 중장기 개발사업의 계획수정 및 변경까지 감수해야 될 처지에 놓였다.

영천시는 수의과학검역원 등의 유치를 전제로 경북대와 수의과대 영천이전을 모색하고 있다.

영천시는 또 대구한의대 측과도 공공기관 이전을 염두에 두고 한방타운 조성 및 웰빙관련 산업진흥책을 공동으로 모색하고 있다.

포항시도 R&D(연구개발) 특구 지정 및 일부 공공기관 지역내 이전을 전제로 영일신항 일대 개발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당 기관의 지역내 유치가 물거품이 될 경우 일부 개발사업의 추진은 백지화 또는 수정이 불가피해지면서 자치단체들이 시민들에게 이미 내건 개발공약이 졸지에 거짓말이 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 상당수 자치단체들이 공공기관 지역유치에 지나치게 열을 올린 데 따른 부작용이 연말쯤에는 표면화될 가능성이 높다.

칠곡 이홍섭·영천 박정출·경산 김진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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