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대간 단절 잇는 노인들

'손자 손녀 교육 길라잡이'

핵가족화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3대(조부모-부모-자녀)가 한지붕 밑에서 사는 가정이 드물어졌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보니 명절이 아니고서는 함께 모일 시간도 없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면서 부모는 직장생활에, 아이들은 학원 등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노인들도 집이나 지키는 뒷방 늙은이로 머물려 하지 않는다.

자연히 대화는 줄어들고, 세대간의 단절은 심해지고 있다.

이에 노인들이 나섰다.

우선은 손자, 손녀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은 '늙은 말은 절대로 길을 잃지 않는다' 는 말처럼 삶의 경륜으로 후손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려 하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놀자.

지난 24일 낮 12시 20분쯤 대구 북구 산격동 대원유치원 비둘기반(만5세) 교실. 아이들의 재잘거림 사이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웃음이 뒤섞여 창문 밖으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마련한 환경교육 수업시간. 그러나 강단에 선 것은 전문 강사가 아닌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어떻게 되죠?" 아이들 앞에선 안두환(67) 할아버지가 질문을 던졌다.

"지구가 아파요", "숨을 못 쉬어요", "경찰아저씨한테 잡혀 가요"라며 아이들은 갖가지 생각을 쏟아냈다.

안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우유팩 하나를 집어들었다.

"다 먹고 난 우유팩은 어떻게 처리하죠?"

아이들은 하나라도 놓칠까 할아버지의 입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안 할아버지는 "아이들이야말로 어른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최고의 학생들"이라며 "낯선 데도 거리낌 없이 먼저 반기는 것은 아이들"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수업은 조금 다르다.

교육을 통해 전문 지식을 쌓지만 수업 시간 내내 딱딱함을 찾아볼 수 없다.

꼭 아이들 눈높이로 대화를 이끌어 낸다.

김보경(63) 할머니는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잘못 길들여진 버릇은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과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잘 알아듣고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가르치려 한다"고 했다.

손자, 손녀의 응석을 받아주는 마음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노인 강사들과 아이들은 금세 친해져 버린다는 것도 노인교육봉사단의 장점.

전소희(66) 할머니는 "어른들이 잊고 지내는 많은 것들을 아이들이 가르쳐 줄 때가 많다"며 "아이들에게 억지로 가르치려고만 하는 어른들의 태도는 잘못돼 있다"고 했다.

◇디지털에 밀려난 아날로그

그러나 1세대와 3세대의 대화가 늘 쉽게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다.

가족들이 흩어져 살면서 대화 기회 자체가 줄었다.

대원유치원에 다니는 280명의 아이들 가운데 3대가 함께 사는 가정은 38명에 불과했다.

윤시자(63) 할머니는 "너나 할 것 없이 바쁘다보니 손자, 손녀 만나기가 쉽지 않다"며 "옛날처럼 함께 살지 않는 가정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조부모-부모-자녀 간 대화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더욱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요즘의 부모들도 자녀를 노인들에게 맡기려 하지 않는 경향이 많아졌다.

우선은 잘못된 습관을 가르치고, 비교육적이라는 것이 겉으로 나타난 이유다.

얼마전 대구역 대합실에서 듣게 된 아주머니들의 대화다.

"며칠 시골 어머님 댁에 아이들을 맡겼더니, 응석만 늘고 학원도 안 가려고 하고 할머니만 찾아요." 한 아주머니의 말에 옆에서 이를 듣던 또 다른 한 아주머니는 "자신의 입에 넣었던 것을 아이에게 주는 것을 보고 아이를 할머니 곁에서 떼어 놓았다"고 했다.

첨단 기기의 출현이 1세대와 3세대의 대화 끈을 놓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기기에 서투른 1세대 노인들은 인터넷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는 3세대의 정보교류 방식을 따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모(64) 할머니는 "할머니 머리맡에 앉아 전래동화를 듣던 아이들이 이제는 비디오나 책으로 동화를 즐긴다"며 "어린 손자녀석이 컴퓨터도 모른다고 핀잔을 줄 때도 있다"고 했다.

대화의 단절은 1세대에 대한 편견을 낳아 대화를 가로막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모(6)군은 "얼굴에 주름도 많고 손도 거칠다"며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상하게 생겼다"고 했다.

가정에서 노인들의 설자리마저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노인에겐 보람을 아이에겐 사랑을

구시대적인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의 경험이 많은 아이일수록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견해다.

박수치거나 쓰다듬어 주는 것이 아이의 감각운동 능력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것.

대원유치원 시태옥 원장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야말로 아이들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최고의 교사들"이라며 "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환경사랑해설사업단에서 활동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목표는 3세대의 교육을 통해 사회를 보다 아름답게 바꿔 가려는 데 있다.

송명순(61) 할머니는 "우리가 아이들 교육에 나서는 것은 아이들이야말로 어른들을 감시하고 잘못을 깨우쳐 주는 교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 환경해설단 노인들은 이런 교육의 효과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곧바로 나타난다고 했다.

안두환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지켜보는 데서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어른은 없을 것"이라며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기르고, 어른들에게는 감시자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우리들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경험으로 최근 노인들의 3세대 교육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노인 일자리 사업에서 출발한 환경문화지킴이, 고궁문화해설가 등 사업에 많은 노인이 전문적 지식과 삶의 경륜을 토해내고 있다.

이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의 초빙 강사로 나서 또 다른 노년의 삶을 3세대 교육을 통해 사회에 되돌려 주고 있다.

최두성기자 ds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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