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20)해방직후의 자유

타력에 의해서 왔던,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왔든, 8.15해방은 3천만 겨레로선 유사 이래의 최대 감격이었다. 만세만 불러도 배가 부른 사람들이었지만 소를 잡고 술을 빚어 한 층 더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에 바빴다. 그동안 엄격히 단속되던 밀도살과 밀주는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조선인들의 당연한 향연식품이자 자연스런 권리행사였다. 대구주변에선 한 동안 푸줏간의 쇠고기 값이 해방 전의 6분의 1 값이었다. 막걸리 한 사발쯤은 어딜 가나 얻어 마시기 어렵지 않았다.

때마침 보리쌀(하곡)이 수확된 지 얼마 안 된 데다, 해방으로 미처 공출을 다 당하지 않은 터라, 농촌의 쌀독에도 여유가 있었다. 또 군수창고에 비축되었다 흘러나온 각종 군수품, 광목, 비누, 설탕 등으로 물가는 전반적으로 폭락해, 주부들의 장바구니사정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떠나는 일인들이 앞 다투어 파는 바람에 집값이며 전답 값도 대폭락했다. 나중엔 값을 쳐주기는커녕 약삭빠르고 간 큰 사람들이 이른바 적산(敵産)집에 문패를 멋대로 달고 제 집 삼아 살아도 당장엔 말리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었다.

의식주만 풍성해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어께가 펴진 것이 우선 커다란 변화였다. 사람들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여유로워져 갔다. 노인들은 '황국신민'으로 사느라 주눅이 들었던 옛날의 그 팔자걸음으로 대로를 활보해도 흉보는 사람이 없었다. 더러 일인들의 집 유리창을 깨거나 삿대질을 해댔다는 소문이 없진 않았지만 대구사람들은 큰 소동 없이 그들을 보내주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산 정리 때문만이 아니라, 패자가 되어 쫓겨 가는 그들의 뒤통수를 칠만큼 옹졸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달성공원의 벚꽃나무가 화풀이 대상으로 베어지는 일도 드물었고, 그 곳의 신사(神社)를 20년 넘게 폭파하지 않았던 곡절의 하나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좌경적인 항일투사들은 맨 먼저 약전골목의 제일예배당 건너편 복양당(復陽堂)한약방에 모였다. 이들은 기미만세사건 직후 '의열단(義烈團)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 집 주인인 월강 김관제(月岡 金觀濟)를 중심으로 '경북건국준비위원회'란 간판을 걸고, 따르는 청년들을 앞세워 '치안대'를 조직했다. 과도기의 치안공백을 틈타 날뛰는 좀도둑과 파렴치범들을 잡는다는 명분이었다. 그러자 달성공원 앞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도 동암 서상일(東庵 徐相日)을 주축으로 우파인사들이 별도의 '경북치안유지회'를 결성하고, 어떤 형태로 건국에 매진할까를 논의하기 바빴다.

편 가르기는 이 때부터 싹을 보였으나, 중앙정치판과는 달리 마주치면 서로 형님, 아우 할 고향 선후배사이들이라, 이맘때만 해도 서로 적대시하는 기색은 없었다. 주로 친한 터수끼리 좌우로 나눠 앉았을 뿐, 어차피 같은 열차를 타고 '건국'이란 목적지 정거장까지 가야할, 동반승객이란 생각에는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내키는 대로 조직에 들 수도, 안 들 수도 있는, 순진무구한 정치자유 시절이자 이념의 혼재, 또는 초 이념의 시절로 불릴만했다. '해방', '자유', '건국' 이란 세 단어만 들여대면 어지간한 오해나 갈등은 녹여졌다.

대구사람들이 사상 유래 없는 사람다운 자유를 누리면서, 잠시나마 밥술과 주육을 배불리 먹고, 희망 또한 한껏 부풀던 이런 시절은 10월 이전까지였다. 정확히 미국 육군 존스대령이 미24군의 선견대 100명을 이끌고 대구에 진주해 오던 9월24일 이전까지의 짧은 기간이었다. 뒤 미쳐 닥칠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 극도의 식량난과 물가고로, 해방에 대해 진한 배신감에 사로잡힐 줄은 누구도 상상도 못했던, 40여 일간의 꿈같이 달콤했던 시절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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