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한영옥 作 '다시 하얗게'

다시 하얗게

한영옥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가르며

기차 지나가는 소리, 영락없이

비 쏟는 소리 같았는데

또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깔고

저벅대는 빗소리, 영락없이

기차 들어오는 소리 같았는데

그 밤기차에서도 당신은

내리지 않으셨고

그 밤비 속에서도 당신은

쏟아지지 않으셨고

뛰쳐나가 우두커니 섰던 창가엔

얼굴 익힌 바람만 쏴하였습니다

다시 하얗게 칠해지곤 하는 날들

맥없이 눈이 부시기도 하고

우물우물 밤이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리움은 모든 의식을 '당신'에게 집중하는 일이다. 일체가 '당신'과 연관된다. '당신'이 '일체'고 '일체'가 '당신'인 것이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도 '저벅대는 빗소리'도 '당신'의 환상을 불러온다. 그러나 '그 밤기차에서도 당신은/ 내리지 않으셨고// 그 밤비 속에서도 당신은/ 쏟아지지 않으셨'다. 현실에서 '당신'은 언제나 멀리 있다. '당신'의 부재(不在)가 '그리움'을 낳고 그 부재의 시간에 비례하여 그리움의 깊이와 두께가 더해진다. '당신' 없는 일상은 '하얗게 칠해지곤 하는 날들'이 되는 것이다. 의미 없이 '우물우물 밤이 넘어가'는 나날이다.

그리움은 순수하기에 세속적 모든 가치를 뛰어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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