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슈포럼]규칙이 지배하는 사회

공직자 돈 주고 승진 새치기, 줄 서서 기다리는 것 배워야

인간의 삶이란 복잡하기 마련이지만, 최근 한국 사회는 정말 혼돈스럽다. 얼마 전 변양균·신정아 사건, 전직 청와대 비서관과 현직 국세청장의 뇌물수수 사건, 대통령의 평양방문 등으로 국민을 심심찮게 만들더니, 대통령 선거가 임박하자 후보자들 간에 정책 대결은커녕 BBK 사건과 관련한 이전투구의 싸움판으로 정말 국민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여기에다 글로벌 기업 삼성공화국(?)의 비자금, 로비 의혹으로 나라가 온통 북새통이다. 사실 미디어들에게 이러한 사건들은 너무나 좋은 먹잇감이어서 연일 뉴스 시간과 지면을 도배하듯 해버린다.

지난 11월 28일 공무원노조총연맹 위원장의 '공직 사회의 매관매직 풍토'에 대한 언론 인터뷰가 언론매체마다 간단히 취급되기는 하였지만, 다른 큰 사건들에 묻혀 사회적인 이슈화가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공직의 매관매직, 그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근대 시민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국가의 힘이 확대되고, 국가의 정책이 국민의 개인적 삶에까지 세밀하게 미치게 된 현대사회에서 건강한 공무원 집단의 사회적 위치는 다른 어떤 권력집단보다도 중요하다. 이들의 능력과 책임감과 함께 그들의 공정성의 정도는 한 나라의 장래를 결정한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에 의하면, 근대적 관료제도의 핵심은 합리적 법(규칙)에 의한 조직의 운용이라고 보았다. 관료들의 등용과 승진, 사무의 분담 등이 조직 리더의 기분이나 관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법에 의해 수행됨으로써 조직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 근대사회 대부분의 조직들이 관료제를 채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관매직으로 승진의 규칙이 붕괴되어가는 조직이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다. 자신이 맡은 공직을 열심히 수행하고, 자신의 능력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돈으로 승진을 쉽게 할 수 있다면 누가 공직에 충실하겠는가.

민란이 빈발했던 조선조 말 수령과 이서배들의 백성에 대한 수탈과 억압의 뿌리가 매관매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본전을 어디서 건지겠는가, 민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매관매직은 공무원 사회 내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사회의 부패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공정한 경쟁, 규칙에 의한 경쟁은 한국사회가 성숙한 시민사회로 발전하기 위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합리적인 규칙에 의해서 질서를 잡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어디서나 줄 잘 서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래전 내가 영국에 일 년 정도 사는 동안의 경험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줄서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줄 서서 기다리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서 앞의 사람이 아무리 꾸물대며 시간을 끌어도 짜증스러워하지 않고 기다려 준다.

줄서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사회적 규칙이며, 사회 정의이다. 힘 있다고, 돈 있다고, 학벌 좋다고 새치기할 수 없다. 합리적인 규칙에 따른 승자에겐 패자도 불만이 없는 것이다.

나는 한국사회가 과거보다는 훨씬 투명해지고 깨끗해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비록 권력의 상층부에서는 아직 부끄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잘나가는 기업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힘들지만 성실히 자신의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직의 매관매직이라니! 그나마 공직사회 내부에서의 자기고백에 의한 자기 정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우리 사회 일말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윤병철(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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