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호암 이병철 탄생 100년] 호암이 전하는 말

"기업 이익추구는 사회적 의무…확대재생산 통해 발전시켜야"

호암이 대구에서 시작한 삼성은 삼성상회라는 작은 가게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자라났다. 호암은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소유자였고 그의 정열이 오늘의 삼성을 만들어냈다. 호암이 연구개발의 정신을 담은
호암이 대구에서 시작한 삼성은 삼성상회라는 작은 가게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자라났다. 호암은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소유자였고 그의 정열이 오늘의 삼성을 만들어냈다. 호암이 연구개발의 정신을 담은 '무한탐구'(無限探求)라는 휘호를 쓰고 있는 모습.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 제1회 최고경영자과정에서 초청 강연을 하는 호암. 1980년 7월 4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 제1회 최고경영자과정에서 초청 강연을 하는 호암. 1980년 7월 4일.
포춘(Fortune)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호암. 1982년 7월 15일.
포춘(Fortune)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호암. 1982년 7월 15일.
일본 이코노미스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호암. 1985년 10월19일.
일본 이코노미스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호암. 1985년 10월19일.

호암 이병철. 그는 1938년 대구에서 삼성을 시작했습니다. 서문시장에서 10여분만 걸으면 닿는 대구 중구 수동(지금은 인교동)에 세운 삼성상회가 삼성의 모태였습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1910.2.12~1987.11.19)을 맞은 호암은 대구에서 '삼성'이라는 간판을 내건 뒤 사업에 성공,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 기업인으로 올라섰습니다.

삼성의 삼(三)은 큰 것·많은 것·강한 것을, 성(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뜻한다고 호암은 말했습니다. 삼성을 줄여서 얘기하면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의미입니다.

호암이 삼성이란 이름에서 바랐던 것처럼 대구에서 태어난 삼성은 실제로 '크고 강력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암이 삼성의 출발지로 삼았던 '기회의 땅' 대구는 삼성과는 엇갈린 길을 걷고 있습니다. 각종 지표가 나올 때마다 '전국 꼴찌'라는 오명이 붙어다닙니다.

기자는 6편의 시리즈를 이어오는 동안 호암에게 달려가 묻고 싶었습니다. "호암이 삼성의 출발점으로 선택한 땅, 대구가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기자는 호암의 답을 구하기 위해 호암이 남긴 글과 말(호암자전·호암어록)을 살펴봤습니다.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 시리즈의 마지막은 호암과의 '가상 인터뷰'입니다. 기자의 주관은 최대한 배제하고 그가 남긴 글과 말 위주로 그의 답을 옮겨봤습니다.

-대구가 호암의 첫 사업 출발점이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열기 2년 전인 1936년 봄 마산에서 정미소를 시작, 사업에 첫발을 들여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300석지기의 농토가 사업 밑천이었습니다.

마산의 정미업에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운수업도 겸했고 꽤 많은 돈을 벌었죠. 이후 욕심이 생겼습니다. 정미업과 운수업을 통해 번 돈에다 은행대출까지 받아 땅에 투자했고 661만1천여㎡(200만평)에 이르는 농지를 가진 대지주가 됐습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빌린 은행돈이 문제가 됐습니다. 빚이란 것이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전쟁이라는 혼란이 닥치자 대출 회수 압력이 들어왔던 것이죠. 농지 투기에서 저는 큰 실패를 맛봤습니다.

-고향이 경남 의령군이고 마산에서 사업 경험이 있는데 대구로 온 이유는 무엇이죠?

▶마산에서 쓴맛을 본 뒤에 꼼꼼한 분석 없이는 사업의 성공을 이루기 힘들다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2개월간에 걸쳐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각지를 다니며 조사여행을 했습니다. 이 조사여행에서 얻은 결론은 청과물과 건어물, 잡화 등의 무역업이 유망한 사업이라는 것이었죠.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고 향후 소비도 늘어날 품목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를 취급하는 전문 업자 하나 없었습니다.

대구 일대는 청과류가 많았고 포항은 건어물이 쏟아지는 곳이었습니다. 대구는 경부철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기에 적합한 유통 적지였습니다. 요즘 얘기로 하면 물류의 중심이었죠.

더욱이 대구는 당시 인구가 20만명이나 되는 소비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국 최대 규모였던 대구 서문시장 인근이 삼성상회의 입지로 선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성의 출발지가 대구가 된 것입니다.

-대구에서의 추억도 많으시다죠?

▶대구에서 사업을 하던 시절은 그야말로 격변기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물자 부족현상이 심각했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도저히 사업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까지 나타났습니다. 대구에서 10월 폭동이 일어날 만큼 대구는 공산당 세력이 강한 곳이었죠.

힘든 혼란기도 있었지만 당시 대구의 사업가 모임이었던 을유회(乙酉會)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를 비롯한 9명의 을유회 회원들은 매주 만나 사업의 자세나 사회의 장래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사업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생활방식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기회였죠.

1947년 5월 서울로 사업 근거지와 거처를 옮길 때까지 삼성상회 근처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도 제가 살던 집은 삼성상회 부근(지금의 오토바이 골목)에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삼성전자가 삼성그룹의 얼굴이지만 예전엔 제일모직이 삼성의 대표기업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제일모직 출신들이 삼성그룹의 주축 전문경영인이 되기도 했는데요. 제일모직 역시 대구에서 시작했죠?

▶서울로 사업 근거지를 옮겼지만 저와 대구의 인연은 계속됩니다. 1954년 시작한 제일모직은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단일공장으로는 최대 규모였습니다. 창립 당시 무려 23만1천404㎡(7만평)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로 계획됐습니다. 이 엄청난 공장의 입지를 어디로 할까 고심하다 삼성의 출발지인 대구의 침산동을 선택했죠.

모직공장은 온도, 습도, 수질이 중요한 체크 포인트인데 대구는 사계절의 기온차가 유난히 심했습니다. 기후가 이렇다 보니 공장 안의 온도·습도를 맞추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써야 했습니다. 물은 배관을 묻어 수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끌어왔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저는 대구에다 제일모직을 만들고 큰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삼성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기업집단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힘든 일도 많았을 텐데요. 좌절도 있었겠죠?

▶이승만 정부 말기부터 저는 비료사업을 눈여겨봐왔습니다. 농업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비료 제조업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 지원과 일본의 차관을 얻어 세계 최대규모인 연산 33만t 규모의 '한국비료' 건설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요소비료 공정에 쓰이면서 사카린의 원료가 되는 OTSA를 밀수입했다는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정치,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삼성을 살려야 했고 위기를 헤쳐나가야 했습니다. 엄청난 돈을 밀어넣었던 한국비료였지만 "한국비료 공장을 완공한 뒤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혔고 실제 이를 실행했습니다.

한국비료 사건은 파란 많던 저의 생애에서 더할 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었습니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기업이란 말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이겠습니까?

▶기업은 국력입니다. 국력이 큰 나라일수록 대기업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이라고 해도 외국에 비하면 아직 중소기업에 불과합니다. 저는 기업을 건실하게 발전시켜 국부 형성에 이바지하고 나아가 세계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기업이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견실하게 운영되어야 합니다. 적자를 내 국민에게 부담을 준다면 기업가가 사회에 대하여 큰 죄를 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이 이익을 올리는 것은 경영자로서 당연한 사회적 책임이요, 의무이며, 이것이 바로 기업인으로서 애국하는 길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위법한 방도로 떳떳지 못하게 이익을 올리는 것은 나쁘지만 부단한 창의와 기술혁신에 의해 이익을 올려 세금을 내고 또 확대 재생산을 해나가는 것은 적극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구경북 지역 경제가 어렵습니다. 지역 기업인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

▶남이 하기 어려운 사업을 고난끝에 일구어 국제적 수준으로까지 창조해내는 기쁨이야말로 항상 저를 자극하는 생명력의 원천이 되어왔습니다.

특히 기업인들은 투자된 자금에 대해 이익배당금을 찾아가기보다 회사에 유보, 또는 재투자의 방법으로 활용해 항상 회사의 성장발전을 위해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일단 투자된 자본금을 개인의 자본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돈은 회사의, 사회의 재산입니다. 삼성의 모든 회사는 넉넉한 사내유보금 준비를 통해 과감한 재투자를 실천해왔습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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