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나면 어디에서 살까? 자식들은 이미 품을 떠났고 부부 둘이서 답답한 도시 생활을 계속하기는 싫다. 그렇지만 가려고 해도 선뜻 내키는 곳이 없다. 시골 생활은 불편해 보이고 요양시설은 왠지 꺼림칙하다. 걸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은퇴자를 위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도시가 없을까?
일본 홋카이도의 다테(伊達)시는 은퇴자 유치에 성공한 도시의 전형이다. 흔히 말하는 'J턴'(대도시에 살다가 고향과 비슷한 중소도시로 돌아가는 현상)의 모범 도시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이 도시는 눈이 적게 오고 온화한 날씨를 갖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 전국의 은퇴자들이 '제2의 삶'을 위해 찾아오지는 않는다. 이 도시는 은퇴자를 위해 어떤 배려를 하고 있으며 어떤 정책을 펼치기에 '성공한 도시'라는 명성을 얻게 됐을까?
◆노령자에 초점을 맞춘 도시
다테시는 한적하고 자그마한 도시였다. JR역사 주변에는 음식점만 몇 개 있고 큰 건물도 없다. 일본의 소도시는 대개 역사 부근에 시가지가 형성돼 있는데 이곳에는 시청이 역사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도시 구경도 할 겸 시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금세 무더위에 지쳐 도보로 가기로 한 결정을 후회했지만 한적한 도로에는 지나가는 택시조차 보이지 않았다.
땀을 뿌리며 나지막한 건물과 좁은 도로 사이로 15분쯤 걸어가니 시청 건물이 보였다. 주변에 제법 큼직한 건물이 여럿 눈에 띄는 점에 미뤄 이 일대가 중심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시청 주변에는 병원과 상점, 은행, 도서관, 문화센터 등이 한꺼번에 몰려 있는 듯 했다. 4차로 도로는 널찍해 보였고 인도와 간판이 잘 정비돼 깨끗했다. 마치 신시가지와 같은 느낌을 줬다.
취재진을 마중 나온 시청 직원 안도(安藤·41) 씨에게 물어보니 "신시가지가 아니라 예전부터 있던 도심을 계획적으로 정비한 것"이라며 "다테의 자랑인 '컴팩트(Compact·집적) 시가지'"라고 소개했다. 고령자들의 편의를 위해 주택, 행정기관, 문화·쇼핑시설을 도심 한곳에 집적해 놓았다는 것이다. 다른 도시들이 행정기관을 큼직하게 지어 교외로 옮길때 다테시는 거꾸로 도심에 모으는 역발상을 했다고 한다.
반경 2㎞ 이내에 모든 도시 기능이 집중되도록 도시계획을 해놓고 보니 노령자들에게는 더없이 편리한 곳이 됐다. 노인들이 도심을 도보나 자전거로 쉽고, 편하게 오갈 수 있기에 만족도가 아주 높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 정도 정책적 배려와 마인드는 있어야 은퇴자들이 스스로 찾아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감한 발상과 서비스 정신
다테시는 은퇴자 유치에 성공한 도시인 만큼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아주 높다. 시 인구의 29.3%(일본 전체 23%)가 고령자이니 주민 3명 중 한명꼴이다. 그런 만큼 대낮에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 상당수가 노인들이다. 노인들을 위한 행정서비스가 다양하고 폭넓다. 다테시는 2002년부터 민관(民官)협동위원회를 구성해 '웰시 랜드 프로젝트'(Wealthy Land Project)를 진행해왔다.
복지 서비스가 많지만 그 중 노인들이 모여 함께 사는 안심(安心)하우스(house)사업과 은퇴자를 위한 전원주택 사업이 눈길을 끌었다. 안심하우스는 고령자가 안심하고 쾌적하게 살 수 있도록 시설과 환경을 갖춰놓은 민간아파트다.(소박스 참조) 노인들이 이 곳에서 병원과 쇼핑센터, 문화센터를 쉽게 오갈 수 있도록 도심에 자리잡고 있다. 관리인 시노미야 마사코(四宮昌子·50) 씨는 "입주자들은 건강과 식사 문제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쓴다"며 "건강 문제는 상주하는 건강상담사의 도움을 언제든 받을 수 있고 식사는 앙케이트를 통해 계속 개선하면서 개별 건강에 따라 식사를 제공한다"고 했다.
북쪽 교외에서 벌이고 있는 전원주택 사업도 인기가 있는 편이라고 한다. 현재 일본의 주택사업은 지가 하락으로 몰락 직전의 상황이지만 이 곳에는 주택 구입 신청이 그런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다테시가 소유한 토지 4만5천㎡를 민간 회사에 싼 값에 매각했고 그 회사가 개발·분양을 맡는 형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2008년부터 53개 전원주택을 분양했는데 42개가 팔렸으며 현재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주택회사 관계자는 "쉽게 다 팔릴 줄 알았는데 2년전 리먼쇼크 이후 은퇴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고 있어 미분양 물량이 일부 남아있다"고 했다.
◆기업·대학 유치는 과감히 포기했다.
다테시도 처음부터 이랬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예전에는 홋카이도의 다른 지자체처럼 기업과 공공기관, 대학을 유치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심지어 군부대(자위대)라도 괜찮으니 이전해오길 간절히 바란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큰 이득도 없는 시골 구석에 기업·기관이 옮겨올 리 만무했다.
2000년대 들어 다테시는 헛된 꿈을 버리기로 하고 기업·기관 유치를 포기했다. 대신 주민, 특히 고령자들이 살기 편한 도시를 만드는 게 낫다고 보고 도심을 과감하게 정비하고 각종 정책을 개발했다. 명분보다는 실속을 추구하는 정책의 대변환이었다. 2004년부터 다테시의 정책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이주 상담만 1년간 500건이 넘어섰고 은퇴자들이 하나 둘씩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홋카이도의 다른 도시들은 인구가 줄고 있지만, 다테시는 2000년대 초반 5년간 1천200명의 은퇴자를 유치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기도 했다. 현재는 예년과 비슷한 인구(올 4월 현재 3만6천927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버블경제 붕괴 이후 일본의 모든 주택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 곳만은 오히려 상승하는 기현상을 나타냈다.
다테시 기획과장 사토 유키노부(佐藤之宣·54) 씨는 "천혜의 자연환경에다 정책적인 측면을 결합시켰기에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며 "일본의 각 지자체에서 성공 사례를 배우기 위해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했다. 다른 지자체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자신들의 특성에 맞춰 지역발전 전략을 수립한 것이 성공 요인인 셈이다.
다테시는 고령자 복지, 은퇴자 유치에 초점을 맞춰 도시의 현재와 미래를 설계해 성공한 케이스다. 경북 북부지역에도 고령자와 은퇴자가 살기 좋은 곳이 숱하게 있다. 그렇지만 경북지역 지자체들은 정책 면에서 다른 곳과 차별적이지 않고, 공장·기관 유치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분위기다. '소외됐다'니 '지정학적으로 불리하다'느니 하는 이들의 하소연은 어찌보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다테시처럼 자신만의 장점을 앞세워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취할 것은 적극적으로 취해야 미래가 보이지 않겠는가.
홋카이도 다테에서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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