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순 우리말

요즈음 나는 모 TV 프로인 '우리말 겨루기'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월요일 저녁 그 시간에는 웬만한 약속은 하지 않거나 뒤로 미루어 버린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드라마를 봐야한다고 하얗게 흘기는 아내의 눈을 애써 외면하면서 TV 앞으로 바싹 다가앉는다.

솔직히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순 우리말을 보면 시골스럽다고, 촌티 난다고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직장에서 퇴직한 후, 글 쓰는 모임에 나가고 나서부터 마음이 달라졌다. 쉽고도 토속적인, 정감이 있는 우리말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린다.

순 우리말, 분칠하지 않은 민얼굴이라고 할까. 그 옛날 고향 집 부엌 아궁이에서 청솔가지 타는 냄새가 난다. 아무튼 한여름 여우비 뒤에 나타나는 파란 하늘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외래어 한 토막 안 들어 간 게 별로 없다. 아파트 이름만 해도 그렇다. 영어로 된 아파트가 많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Well Rich'라고 영어 명찰을 달고 있다. 오죽하면 '나이 많은 시부모가 못 찾아오도록 꼬부랑 글씨로 이름을 새긴 아파트를 구입하고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까.

그러고 보면 'High-Seoul', 'Dynamic-Busan', 'Colorful- Daegu' 등 공공기관 건물 벽에 걸린 현수막에도 영어로 쓴 것이 많다. 하긴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한글사전 겉표지에도 'New 우리말 사전'이라고 영어단어가 떡하니 들어가 있으니 더 할 말은 없다.

물론 글로벌 시대에는 어느 한 지역이나 국가에서만 머무를 수만은 없다. 세계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필요하다. 그래서 간판도, 상품명도 외래어로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전철에서나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그네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건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짱, 존나, 열나, 당근이다' 등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비속어나 은어를 사용하고 있다. 컴퓨터나 인터넷 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안녕을 '안농'이나 '앗농'으로, 단순하고 무식하다를 '단무지'로 줄여서 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우리말이 외래어에 치이고, 은어나 비속어에 눌려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갑자기 TV화면이 웃음꽃, 환호소리로 뒤범벅이 된다. 드디어 우리말 달인이 탄생됐다. 중년부인이 그 주인공이다. 중간 중간에 아슬아슬한 부분도 있었지만 위기를 잘도 넘겼다. 나도 저 프로그램에 한 번 나가봤으면…. 그러나 얕은 실력, 언감생심일뿐이다. 오늘도 생판 처음 들어보는 우리말 몇 마디를 건졌다. '흙주접, 얼러방치다, 초라떼다, 해사하다' 등이다. 이 얼마나 정겨운 말인가?

김 성 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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