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민병삼 지음/선 펴냄
조선시대 화가들은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다. 사대부들은 그림 그리는 일을 천하게 생각했고, 그리더라도 후대에 남기기를 꺼렸다. 표암(豹菴) 강세황은 달랐다. 그는 조선의 전형적인 사대부로 학덕이 높았다. 증조부와 조부가 각각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고, 부친은 37세에 강관(講官)이 되어 숙종에게 주역을 강의했다. 이처럼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강세황은 그림을 천하게 여기는 사대부들의 풍조를 개의치 않았고 예원(藝苑)의 총수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표암의 아버지는 나이 64세에 늦둥이 아들을 얻어 늘 무릎에 올려놓고 글을 가르쳤다. 6세 때 이미 숙종의 국상(國喪)에 어울리는 시를 지었다. 이 시가 바로 '지팡이에 새 한 마리 있으나, 날지도 못하고 또한 울지도 못하네. 몸에 백설 같은 옷을 입었으니, 온 나라가 슬픔을 아는 것 같구나'였다.
학덕 높은 조선 선비이자 예원의 총수였으나 그의 일생은 영화롭지 않았다. 30여 년을 처가살이를 했어야 할 만큼 가난했고, 예순이 넘도록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을 만큼 불우하고 한스러운 세월을 살았다. 맏형이 과거시험 부정으로 처벌받은 데다 역모 혐의까지 받아 집안이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독한 가난과 사회적 불운은 그에게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불운과 가난 속에서도 표암은 치열했다. 생에 대한 열정은 다양한 화풍을 수용하는 '열린 감성'으로 작용했다. 당시까지 유행했던 진경산수화를 거부하고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면서 서양화 기법을 과감히 도입했다. 색채의 농담(濃淡)으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그때까지 따로따로 그리던 사군자도 한 벌로 맞춰 그렸다. 이뿐만 아니라 뛰어난 감식안으로 많은 서화평을 남겨 평론가로서도 독보적인 업적을 달성했다. 단원 김홍도와 같은 제자를 배출한 것은 조선후기 화단에 큰 소득이었다. 이 밖에도 강세황은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예술적 업적 뒤에 불행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두 자식마저 가슴에 묻는 애통함을 겪어야 했다. 말년에 표암은 영조 임금과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61세 때 영조의 배려로 관계에 처음 진출했다.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했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이 책 '표암 강세황'은 소설이다. 표암의 출생(1713년 5월 21일) 3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소설로 '호출'한 것이다. 따라서 소설책에 등장하는 그의 선대가 겪었던 환난의 원인과 과정, 결과는 역사적 연구나 사실과 다소 다를 수 있다. 지은이 민병삼은 '그의 인생을 하나의 소설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도입한 작가적 장치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전기가 충분히 나와 있고, 역사적 연구가 되어 있는 인물을 굳이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 것에 대해 "그들의 예술적 업적을 다시 기리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의 치열했던 예술적 삶을 보여주고, 진정한 예술혼이 무엇인지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강세황의 인생역정보다는 치열했던 예술세계에 무게를 두고 있다. 책에는 표암의 그림과 글인 '현정승집도' '지상편도' '도산도' '송도기행첩' '영통동구' '개성시가' '화담' '송하맹호도' '정선 산수도' 등이 부록처럼 게재돼 있다.
408쪽, 1만5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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