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美 북장로교 간호선교사 헤드버그 동산기독병원 간호부양성소 설립

학생 없이 1928년 첫 졸업생 1명뿐

동산기독병원에서 한 간호사가 혼자서 식사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연약한 어린이 환자를 돕고 있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제공.
동산기독병원에서 한 간호사가 혼자서 식사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연약한 어린이 환자를 돕고 있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제공.

서울과 평양의 기독교병원들이 간호부 양성에 나서자 동산기독병원도 1924년 5월 5일 간호부양성소를 만들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1923년 12월 미국 북장로교 간호선교사로 한국에 온 클라라 헤드버그(Clara Hedberg).

헤드버그는 당시 수시로 발생했던 콜레라, 장티푸스 등 전염병 환자를 직접 돌봤다. 이런 와중에 간호 인력을 키워내야 한다고 판단한 헤드버그는 당시 병원 내무과장이던 손인식, 서무과장 김덕수의 도움을 받아 간호부양성소를 만들었다. 세균학, 해부학 등의 강의는 한국인 의사가, 간호술과 드레싱준비 등의 과목은 외국인 간호선교사가 맡았다.

초창기 간호부양성소의 학생 모집은 쉽지 않았다.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이나 교육에 대한 이해 부족과 저항감 때문이었다. 1928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영순 한 명뿐이었다. 이후 1933년 졸업생 5명을 배출했을 뿐 나머지 해 졸업생은 1~3명에 그쳤다.

그렇다고 해서 지원자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다. 1930년 신입생 지원자는 27명에 달했고, 이 중 10명만이 견습생으로 뽑혔다고 한다. 당시 1학년 10명, 2학년 3명, 3학년 4명, 졸업생 6명 등 23명의 간호사가 있었다.

간호사들은 좁은 방에서 5명이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기숙사를 신축하는 일이었다. 당시 입원환자를 새로 지은 병동으로 옮기고, 옛 병원 건물을 개조해서 기숙사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31년 3월 간호부양성소 지원자격을 '중등학교 수료 또는 졸업한 자'에서 '고등보통학교 2년 이상 수료한 자'로 강화했음에도 불구,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다. 1930~1931년 졸업생들은 간호사 국가자격시험에 모두 합격했다. 당시 지정 간호교육기관 졸업자는 무시험으로 간호부가 됐지만 당시 동산기독병원 간호부양성소는 지정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당시 지정 간호교육기관 중 국공립은 경성의학전문학교 및 도립의원 간호부양성소였고, 이밖에 몇몇 사립병원도 여기에 포함됐다. 용산철도병원 간호부양성소(1914년 지정),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산파간호부양성소(1924년), 평양연합기독병원 간호부양성과(1931년) 등 10개 기관이 무시험으로 간호부 자격을 받을 수 있는 기관으로 지정됐다.

순조롭던 교육은 1936년 헤드버그 소장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미국으로 일시 귀국함에 따라 중단됐다. 그 해 4월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를 반대하자 쫓아낸 것이다. 결국 간호부양성소 교육은 한동안 중단된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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