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난 한 병원장은 다짜고짜 볼멘소리부터 했다. "직원들 월급이나 제때 줄까 걱정이다. 도대체 병원과 의사는 어쩌라고 이런 식으로 건강보험 체계를 바꾸는 것이냐. 이대로는 도무지 헤쳐나갈 방법이 없다." 예전 같으면 늘 하는 앓는 소리쯤으로 넘겼을 터이다. 그러나 의료계 전반에서 터져 나오는 위기설 속에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었다.
이른바 '빅 5'로 불리는 수도권 초대형 병원들의 적자 소식이 잇따라 나온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가톨릭의료원, 연세의료원, 삼성서울병원 등이 지난해 적자를 기록했다. 그나마 서울아산병원이 흑자를 냈지만 상가 임대와 장례식장 수입 덕분이고, 수술'진료 등의 의료 수익은 제자리였다. 지난해 13개 국립대병원에서 발생한 의료 수익 손실액도 처음으로 1천억 원을 넘었다. 서울대병원 287억 원, 경북대병원 127억 원, 전남대병원 152억 원 등 1천147억 원이었다.
물론 앞선 내용들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이른바 서류상 적자 때문이다. 병원들은 '고유목적사업 준비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떼어 적립해 둔다. 서울 초대형 병원들의 그간 적립금은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이른다. 국립대병원들도 마찬가지로 고유목적사업 준비금을 떼어둔다. 특히 경북대병원의 경우, 칠곡경북대병원에 들여놓은 고가 장비 및 시설에 대한 감가상각비 탓에 어쩔 수 없는 적자를 기록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정황을 감안해도 위기는 사실인 것 같다. 병원들의 수지 악화로 2011년 4.4%에 불과했던 병원 휴'폐업률이 지난해 8.4%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심지어 서울대병원마저 긴축 경영에 돌입한다며 부서별로 10% 경비 절감을 시작할 모양이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 먼저 경기 침체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형편이 어렵다 보니 큰 병이 아니면 병원을 찾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난해 하반기 병원급 의료기관을 찾은 외래환자는 전반기보다 5.3%나 줄었다. 입원 환자도 줄어서 빈 침대가 눈에 띄게 늘었다.
환자 감소는 2011년부터 시작됐다. 그전에는 매년 병원을 찾는 환자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2002년 232만여 명이던 외래 및 입원 환자가 2010년에는 311만여 명이 됐다.
그러나 그때가 정점이었다. 2011년 294만여 명으로 환자 수가 무려 5.4%나 감소했다. 전체 환자 수가 줄어든 것은 처음이었다. 병원들은 놀랐지만 일시적 현상으로 여겼다. 잠시 소강상태일 뿐 다시 환자들이 늘어날 것으로 믿었다.
현실은 달랐다. 아직 지난해 전체 통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병원마다 비상이 걸릴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서울대병원마저 지난해 4분기 외래환자가 급감했고, 올 1분기에도 회복하지 못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외래환자 진료비 총액은 2010년부터 3년째 줄고 있고, 입원비 총액도 2010년 크게 감소한 이후 다시 늘지 않고 있다. 지역 한 대학 병원은 외래환자 진료비 수익이 경영에 타격을 줄 만큼 줄었다.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진료비 지불 체계 개편으로 포괄수가제가 종합병원과 상급 종합병원으로 확대되고, 4대 중증 질환에 대한 보장성 확대와 선택진료비'상급병실료'간병비 등 3대 비급여 제도 개선으로 수지 악화가 더욱 가중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병원마다 뼈를 깎는 지출 감소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다. 인건비가 전체 의료 비용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병원의 지출 구조상 허리띠 졸라매기는 강한 반발을 불러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덩치 키우기식 경쟁을 지상 과제처럼 해왔던 병원들이 과연 불어난 몸집을 줄이기는커녕 유지해 낼지도 의문이다.
병원의 어려움은 의료의 질과도 직결된다. 이미 그런 조짐들이 보이고 있다. 먼저 진료받았던 병원에서 이미 했던 검사를 그대로 반복한다거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술을 권유하는 등의 나쁜 행태가 더욱 늘어날 공산이 크다. 당장 돈 몇 푼 더 내고 덜 내는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 깨지면 남는 것은 파국이다. 부디 이런 걱정이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나라 경제의 장기 침체 국면까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안이하게 생각할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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