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952년 대구시한의사회 창립 이듬해 경북대구한의사회 결성

1981년 20대 회장단 배출 후 분리

단기 4288년(1955년) 8월 10일 경북대구한의사회 주최로 열린 제1회 학술강연회 모습이다. 대구시한의사회 제공.
단기 4288년(1955년) 8월 10일 경북대구한의사회 주최로 열린 제1회 학술강연회 모습이다. 대구시한의사회 제공.

일제는 1913년 한시적 준의사 제도인 의생령(조선총독부령 제102호)을 발동해 한의사를 의생으로 격하시키고, 2년 이상의 의업 종사자에게 무시험으로 면허를 발부했다. 게다가 약품 순시규칙이나 약초채취규칙을 정해 허가 없이는 약초를 채취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 대구약령시가 중국'일본뿐 아니라 유럽 국가들과의 약재무역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전시총동원법을 들어 약령시 개장을 중단시키고 급기야 의약품 및 위생재료생산배급 통제규칙에 따라 약령시를 폐쇄했다.

일제 강점기 한의학 탄압에 이어 해방 후에도 의료법은 여전히 서양의학 중심이었다. 결국 한의학 종사자들은 제도권 의료에서 소외돼 있었고, 대구에서도 한의사들은 '의생회'라는 단체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1950년 12월 22일 국민의료법시행세칙 중 '현존한 의생은 한의사로 개칭한다'는 부칙이 공포되고, 1952년 1월 15일 한의사국가시험령이 대통령령 제588호로 공포돼 의생이 한의사로 승격됐다.

이를 계기로 종전의 의생과 한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해 한의사 면허를 취득한 대구지역 한의사들이 한데 모여 1952년 5월 7일 대구시한의사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초대 회장에 이호진, 부회장에 반형윤을 선출했다. 창립 당시 회원은 곽수곤, 구자도, 금창수, 김봉근, 김수욱, 김용성, 김재성, 김재환, 반형윤, 신현덕, 이원식, 이춘국, 이호진, 정화식, 최종환, 최해종, 허진 등이었다.

이듬해 1953년 5월 20일 대구시한의사회는 제2회 정기총회를 영천한의원에서 개최하고, 1953년 9월 3일 경북대구한의사회를 결성했다. 대구의 정화식, 이원식, 김용성이 주축이 돼 두 달여간 경북지역 회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한의사회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110번지 있던 이호진의 영천한의원(현 미즈 산부인과 위치) 2층에 사무실을 꾸려 창립총회를 열었고 초대 회장에 이호진, 부회장에 반형윤을 추대했다. 이후 경북대구한의사회는 1981년까지 20대 회장단을 배출했다.

1981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는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대구직할시'로 승격됐다. 이에 따라 경북한의사회에서 대구시한의사회가 분리(창립총회는 1981년 8월 6일)됐으며, 명칭도 대구직할시 한의사회로 바뀌었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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