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체셔가 날씨 탓인지 부쩍 투정이 심해졌다. 입맛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새로 부어놓은 사료가 마음에 안 드는지 냄새를 맡아보고는 앞발로 쓱 끌어 덮는 시늉을 하고 횡 하니 가버린다. 그러고는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와서 팔을 툭툭 치며 나를 부엌으로 이끌고 가 통조림을 달라고 칭얼거린다. "보챈다고 매번 주진 않을 거야. 지금 먹을 시간 아니잖니"하고 타일러 보지만 녀석의 고집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애써 얼굴을 돌리고 외면하고 있으면 어느새 토라진 얼굴로 구석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한다. 이렇게 토라진 체셔는 내가 통조림을 들고 부르지 않는 이상 이름을 불러도 들은 척 만 척이다.
간신히 저녁시간까지 버틴 후 통조림을 꺼내 들고 이름을 부르면 체셔와 함께 저 멀리서 자고 있던 앨리샤까지 부스스한 얼굴로 조르르 달려온다. 하지만 그릇을 싹 비우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나 아직 기분 상해 있어' 하는 표정으로 체셔는 나를 모른 척해 버린다. 이렇게 고양이의 토라진 얼굴을 보고 있으면 조금 미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작 통조림 하나에 기분 상해서 나를 못 본 체하는 체셔에 속상하고 서운하긴 나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이름을 부르면 바로 대답하는 앨리샤와 달리 평소에도 체셔는 거의 대답하지 않는다. 처음엔 체셔가 자신의 이름을 못 알아듣는 게 아닐까 했었다. 체셔의 이름을 붙여주고 나서야 반려동물의 이름을 지어줄 땐 가급적 알아듣기 쉬운 단순한 이름이 좋다는 이야기를 접했고, '치치'나 '루루' 같은 주위 다른 고양이들의 이름을 보며 내가 이름을 잘못 지었던 게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이름 예쁘게 지었다'는 칭찬을 가끔 듣기도 하는 체셔의 이름은 아주 어릴 적에 봤던 월트 디즈니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왔다. 물론 원작은 루이스 캐럴의 동명소설이지만 내가 먼저 접했던 것은 애니메이션 속 체셔캣이었다. 체셔캣은 정말 인상 깊었다. 앨리스가 원더랜드의 숲을 헤매고 있을 때 나타난 묘하게 웃는 얼굴의 보랏빛 줄무늬 고양이는 정말이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외모였다.
외모만큼이나 묘하게 나타난 체셔캣은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울고 있는 앨리스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주고는 점점 몸이 사라지고 얼굴만 남았다 마지막엔 환하게 웃는 초승달 모양의 입만 남았다가 완전히 사라진다. 사실 애니메이션 속 체셔와 우리 집의 체셔가 닮은 건 둥그런 몸매와 눈 색깔밖에 없다. 하지만 이름을 지으려고 했을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바로 그 신비롭던 '체셔'의 이름이었다.
이런 내 결정으로 인해 주위에선 발음이 어렵다고 '채소'라고 부르기도 하고, '체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두 번째 고양이를 데려오게 된다면 이름을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 이름으로 지을 것이라고 했었는데, 결국 '앨리샤'도 쉬운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이젠 못 알아들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동안 함께하며 알게 된 것이지만 고양이의 이름이 쉽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이름을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못 들은 척'할 뿐이다. 체셔를 보면, 못 들은 척하면서도 귀는 언제나 이름이 불리는 방향으로 쫑긋하곤 한다. 그렇게 모른 척하는 게 티가 나기에 사실 조금은 더 얄밉기도 하다.
토라진 체셔는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내게 다가와 톡톡 팔을 두드린다. 언제 모른 척했느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매로 나를 쳐다보며, '체셔야' 하는 나의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을 비벼댄다. 이름에 대답을 하지 않아도, 가끔 서로에게 토라져도, 체셔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한다. 오랫동안 함께한 지인 사이에선 눈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듯, 체셔와 나 역시 조금씩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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