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멍게와 소주의 블루스

'바다 속의 꽃' 멍게, 특유의 향과 식감 소주와 찰떡 궁합

어머니는 농담을 진담처럼 잘 하셨다. 나른한 봄날이 슬그머니 여름으로 진입하면 입맛이 떨어지는 건 자연적인 이치다. 쌀 낱이 듬성듬성한 꽁보리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놓을라치면 "야야, 밥맛이 없으면 입맛으로 먹어야제 우째 반찬 타령만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여름이 절정인 요즘 입맛이 없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할 때마다 어머니의 오래된 농담이 생각나 혼자 키득키득 웃곤 한다.

가난했던 유년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듯 끄집어내어 잃어버린 입맛을 되돌려보려 애를 써 보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누적된 세월과 그새 간사스러워진 입맛이 와락와락 먹어치우던 옛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탓이다.

열무김치 국물에 타래 국수를 삶아 먹어볼까,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물냉면을 사 먹을까, 대파 건더기가 푸짐한 개장국을 사 먹을까, 메밀국수를 겨자간장에 말아 먹으면 입맛이 돌아올까. 온갖 묘안을 다 짜내 본다. 그러나 사지선다형 문제지에 꼭 집어 동그라미를 칠 자신감이 나에겐 없다.

섬광 같은 생각, 나는 곧잘 꽉 막혀 있는 의식에 물꼬가 터질 때는 벼락을 맞는 것 같다. 그래, 바로 이거야. 입맛을 돌리는 데는 멍게만 한 것이 없다는데 왜 나는 하루 종일 끙끙 앓으면서 멍게를 기억해 내지 못했을까. 멍게는 내일 아침 어시장에 나가 사 오기로 하고 점심 요기는 찬물에 식은 밥 한 술을 말아 된장에 박아 둔 마늘종으로 때우기로 하자.

멍게는 바다 속의 꽃이다. 우선 붉은 색깔이 그렇고 바위 벼랑에 무리 지어 붙어 있는 멍게 군락의 품새가 장미 화원을 연상시킨다. 갑자기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꽃 사이에 술 한 병, 대작할 친구 없이 홀로 따른다. 술잔 들어 달님을 초대하고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네."

그때 마침 내 생각을 알아채기나 했는지 멍게 한 마리가 날숨을 쉬는 돌기에서 물거품을 푸 하고 내뿜는다. 꽃밭에 홀로 앉아 달과 벗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시성(詩聖)이나 멍게 밭을 유영하며 이백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이나 맛이 가긴 간 모양이다.

멍게와 해삼, 그리고 해파리는 갯것들의 삼총사다. 나는 갯것들 중에서도 멍게를 제일 좋아한다. 그건 특유의 향과 식감 때문이다. 멍게를 칼질할 땐 돌기 부분을 먼저 잘라내야 한다. 끄집어 낸 알맹이를 반으로 잘라 입에 넣고 씹지 않은 상태에서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면 소주와 멍게 맛이 서로 부둥켜안고 블루스를 추듯 빙글빙글 도는 바람에 입안은 바로 무도장이 되어 버린다.

해삼 전복 소라 등을 물회로 만들 땐 국수 썰듯 잘게 썰어야 하지만 횟감은 뭉텅뭉텅 썰어야 제 맛이 난다. 뭉텅 썬 것들을 오른쪽 어금니로 씹으면 금세 왼쪽으로 달아난다. 다시 왼쪽으로 씹어도 그 모양이다. 나는 이것을 '갯것들의 숨바꼭질'이라며 즐기고 있지만 이빨이 튼튼치 못한 이들에겐 권할 것이 못 된다.

멍게를 먹을 때 꼭 지켜야 할 수칙이 한 가지가 있다. 흔히 맨 처음 잘라낸 돌기에 손톱만큼 붙어 있는 살을 발라 먹겠다며 쫄쫄 빨아 먹는 경우가 있다. 그 돌기 속에 기생하고 있는 독충이 깜짝 놀라 물고 늘어지면 입술은 당나발처럼 퉁퉁 붓는다.

멍게로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지만 그건 요리연구가들의 솜씨 자랑일 뿐 별것 아니다. 내 경험을 털어놓으면 날것을 크게 썰어 소주 안주로 먹는 것이 장원, 잘게 썰어 온갖 푸성귀와 함께 깨소금과 참기름을 듬뿍 치고 비빈 멍게 비빔밥은 차상, 자연산 멍게를 잘 손질하여 천일염으로 한 며칠 숙성시킨 멍게 젓갈도 차상급에 버금간다. 멍게의 플라스마로겐이란 성분이 치매 예방에 효과가 크다는데 자주 먹으면 날로 심해지는 건망증에도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다.

몇 년 전인가, 멍게 젓갈을 담그겠다고 큼지막한 플라스틱 통 한 개씩을 들고 울진의 어느 바닷가에 간 적이 있다. 안내를 맡은 스쿠버숍 주인이 배 위에서 여러 대원이 작업한 멍게를 한데 모아 "오늘은 감시가 심해 뭍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한다"며 물속에 던져 버린 적이 있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분하고 안타깝다. 시나 한 편 읽고 분을 삭이자.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중략) 한 잔 술에 미친 척 나도 문득 즉석에서/ 멍기 있나, 멍기-/ 수평선 너머를 향해/ 가슴에 멍이 든 이름 하나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다."(손택수의 시 '방어진 해녀' 중에서)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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