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호동락] 자식처럼 돌보기

어릴 적 나는 늘 엄마나 아빠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어린 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낯선 곳에 가게 되면 꼭 엄마 아빠가 옆에 있어야 마음이 편안했고 행여나 떨어지게 되면 왠지 불안하고 의기소침해졌다. 독립을 꿈꾸게 된다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항상 부모님의 옆자리는 나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었기에 무섭거나 혹은 걱정이 있거나 해서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슬그머니 큰방에 들어가 엄마 아빠의 옆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곁에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게도 상념들이 사라지고 사르르 잠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부모님 곁은 불면에 아주 특효약이었기에, 긴장감과 떨림을 떨쳐내기 위해서 수능시험 전날 밤에도 부모님 곁에서 함께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나는 그때와는 정반대 상황을 겪고 있다. 집에 돌아간 순간부터 잠을 자고, 눈을 다시 뜨고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설 때까지, 계속해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이 생겼다. 다름 아닌 앨리샤다. 원래 사람 주변에 머무는 걸 좋아하는 아가씨(?)긴 했지만 요즈음은 한층 더 심해진 기분이다. 내가 밥 먹을 땐 식탁의자 아래에, 컴퓨터 할 땐 모니터 뒷자리를 차지하고, 자려고 방으로 향하면 한발 앞장서서 침대 위로 뛰어올라 내 얼굴을 보며 야옹거린다. 그리고 내 손을 베거나 내 팔에 몸을 기대어 함께 잠을 청한다.

사실 이렇게 앨리샤가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엔 까닭이 있다. 바로 최근에 고양이들과 함께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공간에서 앨리샤에게 친숙한 것은 나와 체셔, 자신의 사료 그릇, 화장실 정도뿐이다. 이상하게도 이사 후 체셔와 앨리샤는 서로 하악질을 할 정도로 사이가 멀어졌고, 결국 앨리샤가 기댈 곳은 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사 온 이후로 앨리샤는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듯 나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이런 앨리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자꾸만 엄마 아빠 옆자리에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찾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솔직히 체셔와 나는 사람 관계에 빗대 칭하자면 딱 형제자매나 가까운 친구 정도이다. 7년을 함께 해 왔지만 체셔는 성격 탓인지 쉽사리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지금도 체셔는 내가 들어 올려 안으면 잠시 참다가 곧 버둥거리며 화를 낸다. 함께 잘 때도 근처에서 자긴 하지만 안기거나 내 팔을 베고 자진 않는다. 이렇게 나름대로 일정 선을 그어두고 내가 그 선을 넘어서면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앨리샤는 마치 내가 엄마가 된 기분이 들게 한다. 때론 너무나 연약하고 무방비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자꾸 신경 쓰이고, 눈이 간다. 물론 자기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 어떤 행동을 해도 진심으로 싫어지거나 미워지지 않는다는 것, 속상한 마음도 얼굴을 보고 있자면 풀려버린다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고 아껴서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사주고 싶어지고, 재채기 한 번에도 행여나 아픈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게 되는 내 모습에서 '어쩌면 이게 모성애와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때론 고양이들이 조금만 아파해도 괴로운 내 마음에 나중에 내 자식이 아프면 얼마나 괴로울까 두려우면서 내가 과연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그 미래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우리 집 고양이들 덕에 나의 부모님을 한 번 더 돌아보고 감탄하고, 더욱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한층 더 나아가 모성애와 부성애를 가지고 자식들을 키워낸 수많은 다른 부모님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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