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한 식민지 정책은 강경해졌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아예 한민족의 존재를 없애려고 했다. 일본은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란 기구를 만들어 한국민의 생활을 통제하고 나선 데 이어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하고 일왕이 있는 곳을 향해 매일 절하도록 했다. 한글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다. 교과과정에서 한글 교육은 사라졌다. 전국의 학교와 면소재지에 신사를 세워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민족말살정책의 정점은 창씨개명이었다. 혈연을 표시하는 성 대신 지연을 표시한 일본식 씨의 사용을 강요한 것이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학생들의 각급학교 입학과 공사 기관의 채용을 금지시키고 공문서 발급도 해주지 않기로 했다. 식량배급에서도 제외하고 우편물 배달도 막았다. 당시 춘원 이광수는 신문 칼럼난을 통해 '어른들이야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입학과 취직 시에 각종 차별대우를 받을 것'이라며 창씨개명을 권했다.
창씨개명은 극심한 반발을 가져왔다. 대대로 내려 온 성을 갈 수 없다며 목을 맨 이도 속출했고 창씨 정책을 비방하거나 항거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자도 많았다. 창씨개명을 하면서 일제의 정책을 비꼰 예도 적지 않았다. 천황폐하의 일본식 발음인 덴노 헤이카와 발음이 비슷한 이름을 가져갔다가 경을 친 예도 있었고 산천초목, 청산유수 등 장난끼가 다분한 이름을 짓기도 했다. 성을 가는 놈은 개자식이라며 견자, 견분으로 창씨한 이도 있었다. 당시 일본 총독 미나미 지로(미나미 가의 둘째아들)의 이름을 본따 미나미 다로(미나미 가의 큰아들)로 개명하려다 거절당한 이도 있었다.
보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등 국내에 남아있던 항일 운동가들은 당연히 창씨개명에 따르지 않았지만 조선인 귀족의 대다수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일제는 확실한 친일파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이 강제가 아니란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핵심 친일파들의 창씨개명은 강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반도 강점 초기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을 위해 조선인의 일본식 이름 작명을 막았던 일제가 말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송두리째 뽑으려고 정책을 바꾼 것이다.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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