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 노인(老人)의 사전적 의미다. 그러나 정확히 몇 살이라는 언급은 없다. 법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몇 살부터 노인인지 규정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통념상 60세 혹은 노령연금 수혜 연령인 65세 이상의 사람을 노인으로 보아 왔지만 옛말이 돼 버렸다. 요즘 이 나이대로는 노인 축에도 못 든다.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 젊어서다.
제 나이를 잊고 사는 사람이 많다. 젊은이들보다 더 열정적인 삶을 사는 유명인사들은 물론 주위에서 '그 나이로는 안 보이는' 정열적인 사람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이가 사라진 시대가 등장한 셈이다. 나아가 재력과 건강을 갖춘 이들은 이 시대의 진정한 '슈퍼 갑'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나이'가 사라졌어요
한글날인 이달 9일 오후. 대구 동성로의 한 카페. 스무 명 남짓한 손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이다 보니 손님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지만 몇몇 테이블에는 은발 신사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카페 안 할아버지들은 다방보다는 카페가 훨씬 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 건너편 다방골목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젊은이의 거리 동성로로 진출했다. 조황수(71) 씨는 "다방은 담배 냄새가 나고 싫다.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지만 나이 든 사람이랑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랑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친구인 최영한(73) 씨도 "다방 커피보다는 카페 내에서 마시는 차나 커피가 입에 맞다. 무엇보다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비교적 깨끗하고 조용해 이용하기 편하다"고 했다. 카페 주인은 "할아버지들이 딱히 갈 데가 없으니 여기서 친구들과 만나 차 한잔씩 즐겁게 마신다. 하루에 열 분 정도 오신다"고 했다.
SNS 등도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임 약속은 카톡(카카오톡) 등 최신 기술이 동원한다. 최 씨의 경우 이날 급하게 호출당한 케이스. 아침 카톡 단체창에 '오후 2시 ○○카페'라는 공지가 떴다. '늦지 말라'는 친구들의 카톡이 실시간으로 울렸다. 옷매무시를 한껏 가다듬은 후 아내가 사준 컴포트화(기능성 제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들의 단골 패션용품인 모자는 벗어 던졌다. 요즘 대세인 '꽃할배' 못지않은 차림세다.
멋쟁이 꽃할배'꽃할매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젊은 시절 못다 한 취미 활동에 빠지기도 한다. 스포츠댄스 모임이나 밴드 모임을 통해 친구들도 사귀고 삶에 활력을 느끼고 있다. 외모에 대한 관심도 많다. 20대 못지않게 외모와 패션에 공을 들인다. 실버 세대를 겨냥한 화장품이나 미용 제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성형도 늘고 있다. 이영주 요셉성형외과 원장은 "요즘 들어 성형외과를 방문하는 노년층 환자들이 많다. 간단한 성형수술에서부터 주름이나 눈 밑이 불룩한 지방층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 어르신들도 많다"고 했다.
◆카톡부터 봉사활동까지
대구 범어동에 사는 조정수 할머니는 올해 여든 살이다. 그러나 지팡이 대신 스마트폰을 손에 놓지 않고 있다. 올 초 막내며느리가 사준 스마트폰으로 카톡 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요즘 가족이나 친구들과 카톡 하는 낙에 산다. 재미있는 사진이나 좋은 글귀 같은 것들을 올려 서로 공유하곤 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직접 나서서 가족 단체창을 만들었다. 조 할머니는 "카톡을 통해 외국에 사는 자녀들과도 쉽게 연락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손주와 카톡으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했다.
꽃할배'할매들은 옛것만을 고집하며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는다. SNS 사용 등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받아들인다. 또 젊은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한다. 더구나 예전의 노년층보다 건강한 신체, 나아진 경제력이 변화의 동력을 제공한다. 나아가 건강과 재력을 갖춘 이 시대의 진정한 슈퍼 갑으로서 변화를 만들어 간다. 노년층의 SNS 사용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인터넷진흥원에 따르면 2012년 노년층의 SNS 이용률은 27.3%에 달한다. 2010년은 22%, 2011년은 24.6%였다. 카카오톡 관계자는 "노년층의 SNS 사용률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SNS를 통해 사회적인 관계 구축은 노년기에 올 수 있는 우울증과 분노조절기능 장애 등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봉사'취미 활동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어르신도 늘고 있다. 어르신들이 주가 되는 봉사'취미단체도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중구노인상담소 노인상담원, 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단, 노인의 전화 상담봉사원 등이 대표적이다. 대구남구문화원의 '얼쑤신바람청춘합창단'은 노래로 청춘을 되찾고자 하는 어르신들 모임이다. 평균 연령 68세의 어르신 102명은 지난해 5월부터 매주 월요일이 되면 남구문화원에 모여 노래 삼매경에 빠진다. 각종 대회와 행사에 출연해 그간 갈고닦은 노래 솜씨를 뽐내기도 한다.
시니어클럽은 어르신들이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매년 수천 명의 어르신들이 이곳에서 인생 2모작을 시작한다. 시니어클럽은 보건복지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60세 이상 지역 어르신의 일자리 창출을 돕는 기관이다. 올해 대구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니어클럽 어르신은 5천240명. 이 중 70대가 3천여 명으로 가장 많으며 80대는 140여 명이다.
대구시 관계자는 "많은 어르신들이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자아실현을 목표로 일자리나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다. 평생을 자식을 돌보며 살아온 어르신들이 자신만의 삶을 가꾸는 시간을 가지는 셈이다"고 했다.
◆노인복지는 꼴찌 수준
올 들어 국내에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61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2.2%를 넘어섰다. 2025년이면 1천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최근 박근혜정부의 노인기초연금 관련 공약의 후퇴 등 노인정책과 노인문제에 대한 인식은 꽃할배'할매들의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유엔인구기금 등이 조사한 노인복지 지수에선 한국이 91개국 중 67위를 차지했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65위), 우크라이나(66위)보다 낮은 수준이다. 특히 연금과 노년 빈곤율 등을 감안한 소득 분야는 91개국 중 90위로 가장 꼴찌 그룹으로 분류돼 있다.
노인의 빈곤문제가 여전히 사회불안 요소가 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좋은행정연구소 김대현 대표는 "100세 시대가 다가왔다. 그러나 일부 노인들에게는 끔찍한 비극이 되고 있다. 노인 빈곤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도, 개인에게만 떠넘기기도 어려운 수준에 도달했다"고 했다.
다행히 정치권도 제도 마련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해 '노인' 연령기준을 현행 65세에서 70세로 올리고 '점진적인 은퇴제도'를 마련하자는 논의가 시작됐다.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은 지난달 노인 연령기준 상향과 더불어 '70세까지 일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국회에서 시작하자고 주장했다. 현재 노인기준 65세는 1889년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노령연금을 세계 최초로 도입하면서 수급연령을 65세로 책정했던 것에서 비롯됐는데, 100세 시대인 현재에 맞지 않다는 설명이다. 특히 정년 폐지를 위한 노사정 합의는 '인생 2막'의 정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꼽았다. 국회에서 정년 60세 의무화법이 통과됐지만 향후 단계적으로 65세 연장, 정년 폐지에까지 이르는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지역 정치권도 동조하고 있다. 정순천 대구시의원은 "지역 어르신들의 복지가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다. 정부차원의 대응과 별도로 일자리 만들기 등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특별위원회 등을 설립해 이 문제를 심도있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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