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20)·<끝> 왜 심산을 배워야 하는가

말보다 행동, 대쪽 절개, 검약 절제…뼛속까지 '선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투병 중인 심산의 병상을 찾았다. 정부기록사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투병 중인 심산의 병상을 찾았다. 정부기록사진
성주읍 경산리에 위치한 심산기념관 내부.
성주읍 경산리에 위치한 심산기념관 내부.
지난해 심산 선생 타계 50주년을 맞아 선생의 장례를 전통 유림장으로 재현하는 행사를 열었다.
지난해 심산 선생 타계 50주년을 맞아 선생의 장례를 전통 유림장으로 재현하는 행사를 열었다.
경상북도 기념물 83호로 지정된 심산 선생 생가 전경(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경상북도 기념물 83호로 지정된 심산 선생 생가 전경(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조선은 유교 사회였다. 글을 읽는 양반은 지배계급이자 사회 지도층이었다. 당연히 나랏일은 그들의 몫이었다. 벼슬을 독차지했고 농공상 하층민보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 권리가 높고 많았다. 유교 사회 조선이 망했다. 조선을 탈취한 일본 정부는 조선인 76명에게 합방공로 작위를 수여했다. 작위 수여자는 대부분 양반이자 유학자였다. 일본 정부는 또 돈까지 뿌렸다. 은사금이란 허울 좋은 이름을 붙여 조선 사람으로서 관직에 있던 자, 나이 많은 사람, 효자 열녀 열부 등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자 온 나라 양반들이 얼씨구나 하며 은사금을 받기 바빴다. 나라가 망하자 돈 몇 푼에 눈이 먼 얼빠진 양반들이 넘쳐났다. 지배계급의 정신이 그런 판이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심산상의 마지막 수상자 리영희 교수는 수상식 강연에서 심산과 자신을 이렇게 비교했다. "나로서는 심산 선생의 어디 하나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인간이지만 닮은 것이 있다면 이 사회의 거짓을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리 교수는 덧붙여 "책 몇 권 내고 인세 얻어먹고 유명해지고, 감투 쓰고 하는 이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리 교수는 또 심산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지만 과거의 그를 조명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현실문제에 대해 심산의 사상을 연관시키는 연구와 (사회 전체의) 담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라 곳곳에 기념관이 넘쳐난다. 소설가 시인 화가 음악가에 이르기까지 기념관 하나 없는 고을이 없다. 그러나 리 교수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과연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심산의 발자취를 더듬고 다시 그를 생각하는 까닭은 그의 삶과 정신을 오늘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때문이다.

이희승의 딸깍발이에 나오는 글이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 자기본위로만 약다. 백년대계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일, 코앞의 일에만 아름 아름 하는 고식지계에 현명하다. 염결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에 밝다. 이것은 실상은 현명한 것이 아니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라고나 할까.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을 하여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마지막 선비

선비정신의 요체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불굴의 기개에 있다. 잘못된 일은 시시비비를 가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맞서 싸워야 했다. 먹고 입는 것에는 검약 절제하며 청렴해야 했다. 나랏일에는 사심을 버리고 형극의 길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심산은 나라의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의 대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두 아들을 잃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로 맞서 싸웠다. 혹독한 고문과 매서운 탄압도 심산의 대의를 꺾을 수 없었다. 불의의 돈은 아예 쳐다보지 않았기에 말년 집 한 칸, 땅 뙈기 한 평 없이 살았지만 가난을 복으로 여겼다. 점령자 일본을 거부했기에 망명의 길을 나섰고 투옥된 이후에도 기개를 꺾지 않고 일본법의 변호를 사절했다.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외세를 거부하고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해 온갖 핍박에도 독재자 이승만의 하야를 촉구하는 최대 비판자가 됐다. 시류와 권력에 영합하여 비루하게 사는 대신 굶주릴지언정 형극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산은 선비로서 지켜야 할 덕목을 망설임 없이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산을 마지막 선비라고 불렀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사회적 책임감은 소중한 가치였다. 유교 사회에서 상대적 높은 지위를 가진 선비들은 자신들에게 지워진 사회적 의무도 크다고 여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은 선비들의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었다.

조선 말 60년 세도를 누린 안동 김씨 일문 중 흥선대원군과 가장 앙숙은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였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가 벌어졌을 때 김병기는 여주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양선의 침입에 나라 안이 혼란에 빠지고 피란민들이 쏟아졌다. 김병기는 "우리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 살아왔기에 사직과 함께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 너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식솔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남들은 달아날 때 오히려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대원군은 정적의 기개에 크게 낙심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김병기의 사람됨은 인정했다. 그래서 "자식을 보려면 김병기처럼 웅특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한일합방 이후 전 재산을 팔아 간도를 비롯한 이역만리 타향으로 이주한 독립지사들의 행동도 사회적 의무의 실천이었다. 더 배우고 더 많이 가지고 누린 만큼 사회적 책임도 더 많이 지고자 했다. 그게 선비들의 정신이고 자세였다. 많이 가질수록 의무도 더 많이 지고자 한 선비들의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심산의 대의와 행동은 나라에 대한 책임과 의무였다.

◆대의에는 타협 불의에는 고집불통

심산은 불의에 대해서는 고집불통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불통은 아니었다. 대의에 어긋나는 불의의 일에는 타협하지 않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분열보다 화합을 선택했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익이 경쟁할 때 민족주의자 심산은 좌익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좌익들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기 전만 해도 심산이 훗날 통일정부에서 제 역할을 할 인재로 아낀 좌익 운동가도 적잖다.

유교의 가치를 최상의 가치로 여겼지만 심산은 고루한 사상에 매달리지 않았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실천했다. 선진 진보적 사고를 실천한 아버지처럼 심산도 고루하고 비겁한 유생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성균관대학 설립 후에는 제자들에게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고 행동하고 실천하기를 아끼지 말라면서 학식보다 품행을 먼저 강조했다.

다수의 독립지사들도 그랬지만 심산의 말년은 비참했다. 10여 명의 가족이 살던 집을 팔고 단칸방으로 옮겼을 때 심산은 허름한 여관방을 숙소로 정했다. 주머니는 텅 빈 형편이라 약은 고사하고 끼니를 때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신문은 '먹고살기 힘들어 영양실조에 걸릴 지경으로 천명의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심산의 근황을 소개했다.

심산의 말년 고독과 빈곤은 우리 사회의 야박함을 말해 준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분들에게 사회는 공적 의리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애국지사는 밥을 굶고 악질 매국노는 호의호식하는 역리가 활개치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배우고 본받으며 어떤 길을 걸으려 할 것인가.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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