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칼럼] 정명<正名>, 행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 선생의 '꽃'이라는 시 일부분이다. 존재에 대한 인식의 결과인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은 사주, 관상 등과 함께 사람의 운명을 판가름 짓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돼 왔다.

또 논어에는 공자가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겠느냐'는 제자 자로(子路)의 물음에 "반드시 이름(名)을 바로잡겠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올바른 이름을 짓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사람의 이름도 그렇지만 특히 길이나 건물 이름, 고속도로 나들목 이름, 도시철도 역 이름 등은 주민 일상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 잘 지어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는 현실을 반영하지도 못하고, 특장을 살리지도 못하고, 알아듣기도 어려울뿐더러 '영혼'마저 담고 있지 않은, 무성의하게 지어진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디에 있는지 알기 쉽고, 부르기도 어렵지 않고, 지역적'역사적 특징들을 잘 담고 있는 이름으로 조금만 고민을 해서 지으면 될 텐데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도로명 주소제 실시에 따라 새롭게 들어보는 길 이름들도 정명(正名)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점검해 봐야 한다.

대구광역시는 '공공용물명칭제개정위원회'를 설치해 도로나 건축물 등 공공용 이름을 정하여 왔다. 심사숙고하고 자문도 거쳤다지만 가끔 눈에, 귀에 거슬리는 이름들이 발견된다.

대구 도심을 흐르는 신천의 상류인 달성군 가창에서 신천 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길은 상동교 지점에서 앞산순환도로와 만나게 된다. 신천을 따라 내려온 그 길의 이름이 신천좌안도로다. 지명에 동서남북을 쓰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동서남북 방위는 객관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대구의 대표적인 간선도로인 '신천대로'의 반대편 도로 이름도 '신천동로'로, 방위를 도로 이름에 쓰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개념인 좌와 우를 도로나 지명에 사용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좌우는 뒤돌아서면 정반대로 바뀐다. 좌우가 우좌가 된다.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다. 점 하나 잘못 찍으면 '님이 남이 된다'는 대중가요 노랫말처럼 그 자리에서 뒤돌아서기만 해도 달라지는 개념을 주요 도로명에 버젓이 쓰고 있는 것이다. 자문기구의 심의를 거친 이름이라면 그런 자문위는 있으나마나다. '신천좌안도로'라는 이름은 한마디로 낙제점이다.

20년도 더 지났지만 논란이 숙지지 않고 있는 중앙고속도로 '칠곡나들목'도 재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구시 북구 관음동과 태전동 사이에 있다. 이 지역은 과거 경상북도 칠곡군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칠곡초등학교, 칠곡중학교, 칠곡향교도 이 동네에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금호강 너머 대구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강북지역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문제는 이곳이 칠곡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행정적으로는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칠곡나들목은 칠곡군과 아무 상관이 없다. 칠곡군청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칠곡나들목'을 이용하면 낭패를 본다. 경부고속도로의 '왜관나들목'을 이용해야 한다. 칠곡군청이 위치한 곳은 칠곡군 왜관읍이다. 이런 전후 사정과 역사적 배경을 아는 동네 사람이 아니면 칠곡군청에 가려고 칠곡나들목을 이용하기 십상이다. 칠곡나들목으로 나오면 경상북도 칠곡군이 아니라 인구 25만 명을 품고 있는 대구의 대표적인 부도심 속으로 들어가는 황당한 경우를 당하게 된다. 따라서 칠곡나들목은 강북지역 관문의 이름이 될 수 없다.

차라리 칠곡나들목을 '북대구나들목'으로 바꿔 부르면 어떨까? 고민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관음나들목'으로 바꾸자는 대안은 영 아니다. 너무 무성의해 보인다. 대신 고속도로로는 대구의 관문 역할을 하는 지금의 북대구나들목에 '대구나들목'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 어떨까?

대구광역시 동구 지저동에 위치한 대구~포항고속도로의 '팔공산나들목'은 정명(正名)의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고, 지역의 특성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동 이름을 그대로 딴 '지저나들목'이 안 된 것을 보면 고민과 노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명(正名). 공자는 정치의 시작이라고 했지만 행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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