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영동의 유럽 미술관 기행] ⑧몽페리에 파브르 미술관 '클로드 비알라의 회고전'

순수 색채+형태 '울림'…비구상 추상미술의 힘

이제 동시대미술의 매체로서 영상이나 설치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순수한 회화나 페인팅 전시는 점점 만날 기회가 줄어든다. 1960~70년대 프랑스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의 일원이었던 클로드 비알라의 회고전이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 지역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했고 젊은 시절 이 곳에서 만난 동료와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Surfaces)라는 미술운동을 전개했던 비알라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는 도시. 이곳 시립미술관에서 노대가에게 전권을 주며 자신의 회고전을 주도케 한 것이다.

남불 님므 출신인 그가 초기 표현주의적인 구상작품에서부터 현재의 추상작품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일대기처럼 보여준 전시였지만 역시 관객들의 눈길은 후반부의 화려한 비구상작품에 쏠렸다. 제목을 붙이지 않는 그의 작품들은 그림 외적인 어떤 동화적인 이야기와도 상상적 연관을 차단해 그야말로 그림의 선과 색채 자체가 야기하는 깊은 울림을 경험하게 한다. 특히 색채로부터 일어나는 반향이 얼마나 현란한 아름다움인지 때로는 반복되는 무늬가 자아내는 격동적인 리듬감에서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칸딘스키는 회화가 대상의 재현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으로 표현될수록 선과 색채가 주는 울림과 감동은 훨씬 크다고 주장했다. 그림이 외부의 자연과 상관없이 그 자체의 움직임과 가치를 지닐 때 더욱 정신적인 상태가 되어 우리의 정취에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다만 외부묘사나 재현을 포기한 추상미술이 정신성과 관계없이 단순한 무늬가 되고 말까 봐 그것을 염려했지만. 어떤 추상작품 앞에서 이것이 단순히 무늬의 수준인지 정신적인 차원으로 심화된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감상자들의 공감에 의해 곧 판단된다. 무늬 같은 형태와 순수한 색채만으로 그린 작품이 어떻게 감동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비알라의 작품은 입증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림은 결국 깊은 사색과 오랜 추구의 결실임을 함께 말해준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네모꼴의 단순한 무늬다. 그것은 마치 관절의 마디 형태 같기도 하고 혹은 강낭콩 또는 팔레트 등으로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달랐다. 대형화면에서는 이 무늬를 스텐실 기법을 활용해 사방 연속으로 전개시키는 데 그의 모든 그림의 기본 형태다. 이 무늬의 비밀은 그 어떤 자연대상과의 상상적 연관을 없애고 오직 그림 자체만을 직관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부가되는 색채 역시 오로지 색이 가진 고유의 의미만을 강화시킨다.

그가 이런 단순한 무늬의 구성을 반복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회화적 표현이 외부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전적으로 우연에 의존하면서 즉흥성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관심을 전적으로 그림 자체의 본질적인 측면에 몰입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손에서 탄생되는 구성은 보는 사람들에게도 무한한 자유와 환희의 울림을 느끼게 한다. 색채의 유희는 더욱 놀랍다. 아무런 서사적 연관도 없지만 순수한 색채가 지닌 고유의 가치로 서로 조합되며 화합하고 대비되면서 다양한 의미를 생성시킨다. 스페인 투우장 내걸린 그의 그림 사진을 보면 장엄한 흥분이 일어난다.

사실 그의 추상그림에는 인간적인 냄새가 깊게 배어 있다. 그의 모든 그림의 재료는 각종 재활용된 천 조각들을 이어붙인 것들이다. 자연히 화폭의 전체 형태는 재료가 어디서 온 것인가에 따라 꼴이 정해진다. 비알라가 1960년대 말부터 활동한 '쉬포르/쉬르파스' 그룹은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가난한 예술운동(아르테 포베라)의 출발과도 시대적으로 겹친다. 양쪽 다 현대미술 속에서 위기에 처한 회화의 매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출해내 감동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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