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동양의 자연관

동서양은 자연에 대해 각각 다른 해석과 설명을 한다. 동양에서 자연은 이상적인 존재이자 인간이 닮아가야 할 방향으로 본다. 자연은 '주위에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특히 동양철학에서는 '스스로 그러하다'(自然)라는 자존(自存)의 뜻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천지 만물의 변화과정의 흐름을 설명하는 개념이 된다.

이는 자연이라는 존재 안에 자연을 만든 주재자 스스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을 포함한 자연은 그대로 두어야 하고, '문명과 문화'란 자연을 인간의 손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은 무위(無爲)임으로, 인위(人+爲=僞)란 꾸며서 만드는 것(僞=造作)으로 봤다. 동양의 사유세계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닮아가는 것을 '하나 되므로 지향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자연법칙을 받아들이면, 인간은 불완전성을 보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문화를 발전시켜 자연을 꾸밀수록 더 부자연(不自然)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보는 서양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도교나 불교는 절대 궁극의 존재가 모든 개별 생명체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모두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끝없이 윤회한다고 한다. 도교에서도 도(道)는 모든 것의 내부, 심지어 깨어진 기왓장, 심지어는 똥이나 오줌 속에도 있다고 편재성을 설명한다.

인간의 삶의 기준을 정한 유교도 천인합일(天人合一)적인 생각을 권했다. 유교에서는 자연은 판단능력이 있고, 인간의 행위에 대해 기쁨, 슬픔, 분노 등의 느낌도 있어서, 이를 기준으로 하여 인간과 자연이 교류한다고 했다. 이런 생각은 지중해와는 반대로, 홍수 등의 자연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던 동양의 농경사회 선조들의 생각이었다.

서양인의 사고의 원형은 창세기에서 드러난다. 인간과 자연은 모두 창조자에 의해 생겨났고, 인간은 자연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난 세월 동안 편익을 위해 자연을 인위(僞)로 개조해 왔다. 강을 막아서 저수를 위한 토목공사를 하고, 산을 동강 내고, 신이 만든 짐승이나 물고기들을 함부로 죽여서 시장에 내다 팔아 폭식을 한 후 트림을 내뱉고, 아열대의 물고기가 우리 근해에서 보인다. 닭들은 A4용지 크기에서 살다가 수명 중간에 칼질을 당하여 식탁에 오른다. 말 못하는 짐승들의 고통, 불쌍하지 않은가!

서양에서도 대지의 풍요와 넉넉함을 기원하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이야기가 있다. 가이아의 생명을 인정한다면, 자연 속에도 생명력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자연이 인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체로 생각한다면, 이제 인간은 인류문명의 위기인 현대의 환경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이 신성성(神聖性)을 가지고 있다면 자연을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로 봄으로써, 생명을 존중하는 차원까지로 생각을 높일 수 있다. 그러면 자연은 이용하거나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의 생명과 하나로 연결되는 유기체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친환경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자연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생태계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보는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생각하면서 집을 지었고, 풀이나 나무 한 포기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은 인간 자기들 마음대로 자연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자연에 맞추려는 것이었다. 자연에서 신성함을 읽어낸 동양인들의 마음가짐은 4차 산업혁명의 21세기에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