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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城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홍순민의 한양 읽기:도성』

서울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은 무엇일까. 궁궐? 종묘?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홍순민 교수(명지대 기록정보대학원)는 서울을 감싸고 있는 도성(都城)을 든다.

오늘날 '서울 한양도성'(사적 제10호)이란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도성은 단순한 국방이나 치안을 위한 건축시설만은 아니었다. 임금과 조정 그리고 그 안의 백성들을 지키는 성곽이자, 왕도 한양의 경계이자 표상이었다. 국내 최초 '궁궐 박사'로 불리는 저자는 서울에 남아 있는 오래된 건조물 중에 서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유물로 도성을 주목하고 도성의 역할과 그 역사적 가치를 담담한 문체로 풀어냈다.

◆도성은 국왕과 권위의 표상=흔히 도성을 '한양도성'이라고 부르고 정식 명칭도 '서울 한양도성'이다. 하지만 한양을 도읍으로 삼은 조선의 도성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도성이란 왕이 거처하는 성으로서 여러 성 중에서 으뜸가는 성, 곧 모든 국가 기능이 집중된 수도를 의미한다.

한양도성을 처음 축조할 때 도평의사사에서 '성곽소이엄내외이고방국'(城郭所以嚴內外而固邦國'성곽은 안팎의 경계를 엄격히 하고 나라를 굳건히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오늘날의 '국가'와는 다른 개념으로, 임금과 조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성은 단순히 수도를 두른 성곽이 아닌, 임금과 나라의 권위를 보여주는 표상이었다. 우리에게 도성을 돌아보는 일은 단순히 성벽을 돌아보는 트레킹 개념을 넘어 민족의 자부심과 정신을 들여다보는 순례의 대상인 것이다.

◆도성 곳곳에 수많은 기록'각자들=도성 곳곳에는 300개가 넘는 각자(刻字)가 있다. 주로 도성의 축성, 보수와 관련한 정보를 담고 있는 이 금석문들은 답사객들의 호기심을 넘어 중요한 사료 역할을 한다.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태조대의 각자들은 정상을 기점으로 97개의 천자문 자호(字號)로 나뉘었던 도성의 각 구간을 알려준다. 세종대의 각자들은 해당 구간을 쌓은 군현(郡縣)의 이름이 있어 일종의 '건축실명제'를 했던 증거가 된다. 실제로 성벽이 무너졌을 때, 그 구간을 맡았던 고을의 관원들이 불려와 다시 보수를 한 기록도 남아 있다. 숙종대 이후의 각자는 군현명이 아닌 당시 도성의 수축을 맡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명칭과 담당자의 이름, 공사를 한 일시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조선 초기와는 달라진 도성 관리 체제를 들여다볼 수 있고, 나아가 조선 사회의 변동을 들여다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국가의 문'으로 굳게 세워나가야=보통 왕도가 반드시 갖춰야 할 세 가지 건조물로 종묘'궁궐'도성을 든다. 저자는 특히 도성을 '서울의 제복'이라고 부르고 있다. 임금의 존재를 알리고, 국가의 위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설물이기 때문이다. 도성의 역사는 곧 조선의 역사다. 조선의 건국과 숱한 전란,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도성에 흔적을 남겼다. 도성에서 조선의 부흥부터 수난의 역사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이유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종묘'궁궐' 도성, 이 셋 중 가장 먼저 파괴와 왜곡의 대상이 된 것은 도성이었다. 근대화와 도심의 팽창으로 또는 경제논리에 밀려 국정의 후순위가 되거나 산업화의 뒤안길로 밀려나기도 했다.

저자는 "도성의 문들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기 위한 통로에 그치지 않았다"며 "도성문은 국문(國門), 곧 나라의 문으로 굳게 세워나가자"고 결론을 맺고 있다. 408쪽 2만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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