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양동안의 새論새評]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민주주의다

합동통신 기자. 경기대 조교수. 저서
합동통신 기자. 경기대 조교수. 저서 '우익은 죽었는가?' '벼랑 끝에 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아테네 군비 확대 다수결로 부결

마케도니아 침공 손 못 쓰고 항복

獨, 히틀러 나치당 사상 자유 관용

대중 선동으로 민주주의 전복돼

세계 정치사를 보면 민주주의 체제가 민주주의를 잘 실천한 탓에 와해된 사례를 적잖이 발견하게 된다.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인류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를 실천했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아테네가 쇠퇴기에 접어든 기원전 300년대 중반 아테네 북방의 후진국 마케도니아가 군사 강국으로 부상했다. 아테네의 정치가 데모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가 머지않아 아테네를 침공할 것이므로 그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자고 주장하며, 과다 비축된 복지 기금을 군사력 강화에 전용할 것을 제안했다. 평화와 복지를 선호하던 아테네 시민들은 민회에서 다수결로 데모스테네스의 제안을 부결시켰다. 아테네는 군사비가 부족하여 군사력을 제대로 강화하지 못했다. 아테네 시민들이 군사비로 전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지켜낸 복지 기금 속에는 시민들의 연극 관람 지원금도 있었다.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가 아테네를 침공했을 때, 아테네는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 해보고 항복했다.

#2 1930년대 중반 나치 독일이 군사력을 강화하며 주변 국가들에 대한 침공 의지를 나타내고 있을 때 인접한 민주국가 네덜란드에서는 나치 독일에 대한 대응 방법을 놓고 국론이 분열되었다. 한쪽은 군비를 증강하고 민주국가들과 동맹을 체결하여 대응하자고 주장했다. 다른 쪽은 무력으로는 평화를 실현할 수 없으므로 군비를 증강하는 대신 국제평화운동을 적극 전개하고 동맹 체결 대신 중립을 선언하여 독일의 침공을 피하자고 주장했다. 후자가 다수의 지지를 받아 국책으로 채택되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을 때 네덜란드는 중립을 천명했고 독일은 네덜란드의 중립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은 이듬해 5월 중립 존중 약속을 깔아뭉개고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네덜란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손들고 항복하는 것뿐이었다.

#3 1917년 2월 혁명 직후 러시아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람들은 입헌민주주의 세력이었다. 임시정부는 임시정부 타도를 천명한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을 비롯한 해외 망명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귀국을 지원하고 볼셰비키의 임정 전복 활동에 유화적으로 대응했다. 심지어 레닌을 중형으로 처벌하고 볼셰비키를 궤멸시킬 수 있는 레닌의 반역죄(적국 독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전쟁 반대 운동을 전개한 죄) 증거까지 포착해 놓고도 그에 대한 수사를 뭉그적거렸다. 그 통에 레닌은 국외로 도주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임정의 관용을 이용하여 쿠데타 준비를 진행했다. 1917년 10월 24일 볼셰비키가 쿠데타(10월 혁명)를 일으켰을 때 임정 지도자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전광석화처럼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임정 지도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4 1923년 11월 독일의 나치당은 바이에른주 정부 전복을 위한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실패했고 지도자 히틀러는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우익 성향의 바이에른주 법원은 히틀러에게 금고 5년의 가벼운 형벌을 선고했고, 그마저도 선고 후 9개월 만에 보석으로 석방시켜 주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강령을 내걸고 활동했으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 체제는 사상의 자유 보장 원칙에 따라 나치당을 관용했다. 그 관용을 이용하여 나치당은 대중의 현실 불만에 편승하는 선동 수법으로 당세를 급속하게 확장, 1932년 7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침내 제1당이 되었다. 히틀러는 1933년 총리에 임명되었고, 1934년에는 독재권을 가진 총통이 되어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앞의 두 사례는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을 잘 준수한 탓에 민주주의가 망한 예이고, 뒤의 두 사례는 민주주의의 사상 자유 보장 원칙을 잘 준수한 탓에 민주주의가 망한 예이다. 민주주의가 이처럼 민주주의로 인해 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필자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로 인해 망하는 것을 피하려면 민주주의의 자기부정(自己否定) 속성을 적절히 보완하는 장치를 갖추면서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